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18. 낙동강변 서원탐방기 2 (도산서원)

시인마뇽 2009. 9. 24. 20:38

                                               도산서원

 

                                 *탐방일자:2009. 8. 30일(일)

                                 *탐방지   :경북안동시 소재 도산서원

                                 *동행      :경동고24회 동기25명 

 

 

   달포 전에 저는 안동의 도산서원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한 번도 찾아보지 못한 서원을 올 들어 세 곳씩이나 탐방한 것은 이 땅에 유학의 등불을 밝힌 조선의 선현들을 만나 뵙고 싶어서였습니다. 안동의 병산서원에서 서애 유성룡선생을 뵈었고, 율곡 이이선생은 파주의 자운서원으로 찾아가 뵈었습니다만, 이 두 분에 가르침을 주신 퇴계 이황선생은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을 한 곳도 가보지 못해 가까이서 뵙지 못했습니다. 때마침 경동고교 24회동기산악회에서 매분기 한산씩 오르는 명산100산의 산행지로 도산서원과 가까운 봉화의 청계산을 선정해 동기들과 같이 이 산을 올랐다가 귀가 길에 이 서원을 들러 뒤늦게나마 인사를 올렸습니다.


  도산서원이 자리한 안동이 오늘날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처하고 나선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안동은 예부터 양반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을로 불려왔습니다. 조선조 영조 때의 실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영남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와 유생을 배출한 곳이 바로 안동이었습니다. 중종 때의 문신이자 시조시인인 농암 이현보 선생이 안동분이었고, 조선조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선생을 비롯해 선생의 문하생인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 등 빼어난 학자들 모두가 안동이 배출한 유학자들입니다. 퇴계이황선생께서는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완결지으셨고, 뒤이어 여기 안동 출신 문하생들은 물론 호남의 기대승이나 경기의 김취려 같은 다른 지역 문하생들도 각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선생의 성리학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그 결실로 여기 선생의 고향인 안동이 조선 성리학의 본산으로 자리 잡았고 공자와 맹자의 고향에 견주어 이 땅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안동을 정신문화의 수도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일조한 또 하나는 안동양반들의 투철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과 그 실천입니다. 조선조 19대 임금인 숙종 이후에는 관직다운 관직을 가져본 적이 없는 안동 양반들이 1894년 갑오경장에 대응하여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갑오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같은 해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이사벨라 비숍여사가 당시의 양반들을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비난한 것에 비추어본다면 여기 안동양반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이 어느 정도 투철했고 이를 얼마나 열심히 실천해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안동이 일제 침략과 식민지지배에 맞서 싸운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어느 지역보다 가장 많이 배출했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안동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들이 전국 시군 평균 80여명의 3배에 해당하는 257명에 달했다 합니다. 


  청량산에서 하산해 35번 국도를 타고 안동을 향해 남쪽으로 가다가 분천리(?)에서 935번 지방도로 들어섰습니다. 분천리삼거리에서 북서쪽으로 진행해 오른 쪽 아래로 낙동강이 흐르는 도선서원 입구주차장에 다다랐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옛날부터 어느 누구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었을 하마비(下馬碑)를 지나 산허리를 에도는 넓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과 비슷한 점은 바로 아래 산 밑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것이었고 다른 것은 병산서원은 강 건너로 해발366m의 병산이 가로막혀 있는데 여기 도산서원은 강 건너로 넓은 벌이 펼쳐진 점이었습니다. 하마비에서 10분도 채 못 걸어 도착한 도산서원 바깥마당에서 하늘을 향해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허리가 구부러져 받침목을 줄기에 대어 땅으로 내려앉지 못하도록 한 거목을 보았습니다. 이 거목을 카메라에 옮겨 담으면서 제가 느낀 것은 저 고목과 이 서원이 감내했을 세월의 엄청난 무게였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선조7년 1574년에 도산 남쪽 기슭에 지은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바로 뒤 도산에서 뻗어난 산줄기가 이 서원을 좌우로 감싸고 있고 바로 앞으로 낙동강이 안동호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제가 언뜻 보아도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지형에다 뒤쪽에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임이 쉽게 감지됐습니다. 이에다 어느 곳이고 휑하니 드러나 보이지 않고 아늑한 분위기가 절로 우러나오는 마치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금계포란(金鷄抱亂)의 지형이어서 풍수지리를 엄청 따지는 분들도 이만한 적지를 만나보기 힘들겠다 싶었습니다.


  도산서원의 기본구조는 여느 서원과 다르지 않았고 서원이 자리 잡은 터도 결코 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선생의 제자인 서애 유성룡을 배향하는 병산서원보다 훨씬 갑갑했던 것은 병산서원에는 없는 서당과 유물전시관이 더 들어선 데다 병산서원의 만루대에 비할 만한 시원스런 누각이 없어서였습니다. 이 좋은 곳에 터를 잡고도 이토록 비좁게 조선조 최고의 성현이신 선생을 모시는 것이 암만해도 죄를 짓고 있다 싶어 탐방 내내 죄송했습니다.  도산서원은 크게 서당과 이를 어우르는 서원으로 나뉩니다. 후학을 가르치신 도산서당은 선생께서 손수 설계하시어 1560년에 완공한 도산서당과 기숙사 농운정사 및 부속건물인 하고직사 건물들이 있고, 제자 정사성이 입학할 때 그의 부친이 지어 기부한 역락재가 서쪽 맨 아래 붙어 있습니다. 농운정사는 설계는 선생께서 직접 하셨지만 짓는 것은 인근 용수사의 법연스님이 맡아 하셨다가 일년만에 입적해 같은 절의 정일 스님이 이어받아 마무리했다하니 당시 시골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 어떠했는 가가 어느 정도  가늠되었습니다. 도산서당 앞마당에는 동남쪽으로 정우당(淨友塘)이라 불리는 정방형의 연못도 있습니다. 지금의 지방사립대학에 해당하는 서원에 비해 서당은 한참 어린 학생들이 공부하는 초급교육기관인데 성리학의 대가이신 선생께서 손수 이 학생들을 가르치신 것만 보아도 선생의 교육입국에 대한 믿음이 어떠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서원의 중심 건물은 몇 년 후에 지어진 도산서원입니다. 서당과 서원을 가르는 문은 진도문이며 서책을 보관하는 동명광실과 서명광실 두 건물이 이 문 양 옆으로 붙어 있습니다. 서원의 중심건물은 강학의 장소로 쓰인 전교당입니다. 운동장으로 쓰기에는 엄청 좁았을 앞마당 양 옆으로 기숙사로 쓰인 서재 홍의재와 동재 박약재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누각으로 만들어진 서명광실이 전망대로 쓰였다 하나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비할 바가 못되어 이 서원이 더욱 더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서원의 출판소인 장판각은 전교당에서 서쪽 담 너머에 있고 이 서원의 관리건물인 상고직사는 동쪽 담 너머 있습니다. 서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당은 상덕사로 전교당 뒤 삼문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습니다. 상덕사에는 퇴계 선생의 위폐와 선생의 학문을 가장 잘 이어받았다는 월천 조목 문하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제수를 차리고 보관하는 전사청은 전교당 왼쪽에 있으며 그 사이에 담장이 쳐 있습니다. 서당과 서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건물은 상고직사 아래에 지어진 옥진각으로 1970년에 완공된 유물전시관입니다. 주마간산 격으로 서원 탐방을 마치고 바깥마당으로 나오자 돌우물 몽천(蒙泉)이 보였습니다. 어리석고 몽매한 심성을 밝게 깨우친다는 이 샘물이 교훈적인 것은 한방울의 샘물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선생의 제자들도 끊임없이 노력하여 뜻을 이루라는 의미가 이 몽천(蒙泉)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건물들만 둘러보았을 뿐 정작 선생께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 서원탐방을 끝내고도 영 개운치 못했습니다. 제가 도산서원을 탐방했을 때 선생께서는 앞에다 성리학이라는 병풍을 치시고 그 뒤에 정좌하고 계셨기에 성리학을 배우지 못한 제가 병풍을 거둬내고 인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성리학이란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집대성한 유학의 한 파로 이기설과 심성론에 입각하여 격물치지를 중시하는 실천도덕과 인격과 학문성취를 역설했으며, 조선조의 통치이념이 되었고 퇴계 이황 선생에 이르러 조선의 성리학으로 체계화 되었다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제 한문 실력으로는 퇴계 선생의 저서를 직접 읽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번역서를 읽는 것도 철학지식이 뒷받침되지 않아 매우 힘에 버겁습니다. 궁리 끝에 작가 최인호 님이 지은 소설 “유림” 정도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 공자와 퇴계 그리고 율곡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실은 몇 권을 사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 읽었던 이이화님의 “한국사 이야기”,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에서 펴낸 “안동양반의 그 겉과 속” ,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과 한형조님이 쓴 "조선유학의 거장들", 정옥자님의 "우리 선비"와 이재열님의  “담장 속의 과학”도 관련 부분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더 이상 도산서원 탐방기 작성을 미룰 수 없어 이상 몇 권의 책들과 도산서원 홈페이지에 실린 자료들을 참고로 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제 글에 일일이 인용부호를 표하거나 출전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이상의 자료들을 제 입맛에 맞게 변형시켰기 때문으로 혹시 내용상의 잘못이 있다면 전적으로 제가 책임질 수밖에 없어 두렵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저는 용기를 내어 성리학의 병풍을 걷어내고 퇴계선생께 넙죽 절부터 올렸습니다.

 

 

  퇴계 이황선생은 연산군 7년인 1501년에 지금의 안동인 예안의 토계(兎溪)에서 진보이씨 가문의 아버지 이식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셨습니다. 서울대 교수였던 정옥자님은  그녀의 저서인 "우리 선비"에서 1570년 70세로 영면하실 때까지 선생의 일생을 태어나서 33세까지의 성장기(成長期), 34세부터 49세까지의 관직에 있던 사환기(仕宦期)와 그 후 20년간의 강의와 학문에 전념한 강학기(講學期)로 구분했습니다. 저도 이분의 구분을 따라 선생의 생애와 학문적 업적을 추적해서 병풍 뒤에 정좌하신 선생의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선생의 성장기에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친 분은 그의 모친으로 정직하게 살 것을 강조하셨다 합니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윈 선생에게 글을 가르친 분은 숙부이신 송재공 이우였습니다. 논어를 배우기 시작한 12살 때 선생은 송재공께 “리(理)”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조용히 생각해보라며 답을 해주지 않았다 합니다. 며칠을 궁리 끝에 “아직 잘 모르겠사오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시(是)를 리(理)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하고 말씀 올리자 “너의 학문은 리(理)로써 문리를 얻은 것이다”하며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논어집주에서 리(理)를 만나 며칠을 궁리 끝에 문리를 얻었으니 선생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초견성(初見性)을 한 것입니다. 23세에 성균관에 입학한 선생은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간 것은 34세 때의 일입니다. 선생은 21세에 어머니의 성화로 김해 허씨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습니다만 6년 만에 부인이 병사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3년 후 선생이 재혼한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선생이 마음속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던 연산군 때 최고의 문인이었던 권주의 집안이 갑자사화를 맞아 쑥대밭이 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그의 아들 권질이 집을 되찾아 한양생활을 다시 시작했으나, 기묘사화를 맞아 선생의 고향인 예안으로 귀양 왔습니다. 몇 번의 사화를 겪는 동안 미쳐버린 과년한 딸을 거둬달라는 권질의 부탁을 받고 선생은 고심 끝에 이 여인과 재혼을 했는데 그 때 나이가 30세였습니다. 권씨 부인과 재혼을 한 사연이 의롭기는 하지만 선생은 이 결혼으로 16년 동안 참으로 힘들게 사셔야 했습니다.


  선생의 사환기(仕宦期)는 34세인 1534년에 시작됐습니다.

이 해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선생은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 생활을 했습니다. 선생의 관직생활은 대사성직을 사퇴한 43세 때부터 사퇴와 임명이 반복됐는데 을사사화 이후 부정부패와 난정 속에서 사직만이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생각했으며 또 하나 을사사화로 형님이 매를 맞고 귀양살이를 떠나다가 세상을 떠나는 참극을 지켜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1537년 모친상을 당하고 1546년에는 두 번째 부인 권씨와 사별한 선생은 그 이듬해 마지못해 홍문관 응교로 제수되어 상경합니다만 외직을 자청하여 1548년 단양군수로 부임했습니다. 선생은 딱 9개월간 단양군수로 일하고 풍기군수로 전보됩니다만 이 짧은 기간 중에 선생은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합니다. 단양팔경을 손수 지정한 선생이 30세 연하의 관기 두향을 만나 나눈 사랑은 선생의 고매한 인격에 전혀 손상이 안가면서 지극히 인간적이며 절제된 플라토닉 러브였습니다. 9개월간의 열애를 끝내고 풍기군수로 전보된 선생은 다시는 두향을 만나보지 않았지만 그녀가 보낸 매화를 극진히 위하며 매형(梅兄)이라 불렀다합니다. 관기에서 면속되어 도담삼봉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선대에 집을 짓고 혼자서 살아간 두향은 헤어진 지 22년 만에 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고 예안으로 달려가 먼발치서 선생의 황천 행을 지켜본 후 단양으로 돌아와 강선대에서 남한강에 몸을 던져 4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합니다. 두 부인과 사별한 선생께서 관기 두향과 이토록 애절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휴머니즘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선생께서 단양군수로 부임한지 한 달 만에 둘째 아들 채가 21세의 나이로 급사했다는 비보를 받았습니다. 아들 채는 생후 한달만에 어머니인 허씨부인이 죽어 유모의 손에서 자란데다 정혼을 해놓고도 혼례를 올리지 못해 숫총각으로 세상을  떠났기에 선생의 슬픔은 더했습니다. 어느날 밤 혼례도 치르지 못한 남편을 여윈 며느리가 베개에다 남편의 옷을 입혀놓고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주며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선생은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내며 새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선생의 휴머니즘이 이러했기에 두향과의 플라토닉 러브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선생의 관직생활은 1549년 신병으로 귀향함으로써 마감됩니다만 율곡 이이선생처럼 적극적으로 나사서 경세를 펼친 것이 아니어서인지 괄목할 만한 업적은 별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학문과 강의에 전념한 강학기는 50세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계상서당에서 도산서당으로 이사와 70세에 운명하시기까지 선생은 성리학 완결이라는 학문적 성취와 후학양성의 두 가지 과업을  성공리에 해내셨습니다.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주론적 이기론(理氣論)에 있다 합니다.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으로서의 기(氣)와 그 작용원리로서의 이(理)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 이기론(理氣論)이라 합니다. 선생은 이와 기가 같은 비중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취하셨고 또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견지하시어 송나라 주희의 이기론(理氣論)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탐색하는 심성론(心性論)이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전개된 것은 이기론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으로 선생께서는 인간의 착한 본성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단은 이(理)의 작용으로 발현되고 보통의 감정상태인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哀), 오(惡), 욕(慾)의 칠정은 기(氣)의 작용으로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또 선생께서는 사단(四端)의 인(仁)에 근거한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 근거한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 근거한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 근거한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람을 착한 행동으로 이끈다며 이(理)의 작용을 중시하셨습니다.

 

  선생의 이기론은 26년 연하인 고봉 기대승과의 서면공방으로 더욱 발전했습니다.

고봉은 사단이 칠정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것임에 주목하여 둘을 서로 대비할 필요가 없고 설사 사단과 칠정이 개념상 분별된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동실이명(同實異名)이라며 이기일원론을 주장하고 사단은 리발(理發)이고 칠정은 기발(氣發)이라는 퇴계선생의 이기이원론을 부정했습니다. 선생은 고봉과 사칠논변의 서간을 빼고도  13년 동안 100 여 통의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고봉의 마지막 편지를 받고서 12일 만에 작고하셨습니다.


  

  선생의 학문적 인연은 35년 연하인 율곡 이이와도 맺어졌습니다.

1558년 율곡이이는 성주에서 목사로 재직한 장인을 만나 뵙고 귀경길에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뵈었습니다. 이무렵 퇴계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토계의 동북쪽 초당골에 계상서당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을 맞았다 합니다. 이 서당에서 사흘간 머무는 동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그 후 12년간 서로 편지를 나눈 것으로 보아 공자와 노자의 만남과는 전혀 달랐다는 생각입니다. 노자는 자기를 찾아온 공자에게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 잘난 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라고 일갈했다지만 퇴계 선생은 제자인 월천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곡 이이를 만나보고 후생가외를 느꼈다고 했으며 훗날 한때 불교에 입문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율곡 이이에게 “그대는 제때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窮鄕)에 들었던 일을 슬퍼하지 말아주오”하고 시를 지어 보내 위로도 했습니다. 이러한 순연도 학문적으로 같은 길을 가도록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율곡이이는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는 우주의 체(體)요 기는 우주의 용(用)이라고 주장하며 퇴계선생이 주장한 이와 기가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데 이론을 제기했습니다.

 

 

  선생과 같이 영남학파이면서 다른 길을 걸은 분은 남명 조식선생이었습니다. 

경상좌도 예안현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난 1501년에 경상우도 삼가현에서 남명 조식도 태어났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서신은 서로 교환해 우의를 다졌다합니다. 기묘사화로 숙부가 희생되고 부친이 좌천된 것을 보고 남명조식은 일찌감치 관직을 포기하고 재야에 남기로 결심하고 과거공부가 아닌 유학의 본질을 파고들었습니다. 주역의 곤궤에 나오는 경(敬)과 의(義)를 학문과 처신의 지표로 삼은 남명 조식은 이기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퇴계 이황이 그러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을 매우 불만스러워 했다 합니다. 퇴계 이황이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고 사림의 입지를 다져놓았다면 남명 조식은 재야사림으로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했지만 두 분 모두 사회정의 구현의 이상을 교육에 걸고 새시대를 준비한 것은 같았습니다. 남명 조식은 퇴계이황보다 두해를 더 살아 157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들 사후 동인의 영남학파는 퇴계이황을 따르는 남인과 남명 조식을 따르는 북인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선생은 1570년에 돌아가시어 건지산에 묻히셨습니다.

선생의 빼어난 학문적 업적은 저서와 사후 명성으로도  충분히 확인됐다는 생각입니다.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사단칠정분리기서"와 "자성록"등의 명저를 남기신 선생의 명성은 인접국인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근세 일본 유학의 3대 유종(儒宗)의 한 분인 야마자키는 33세 때 퇴계선생의 "자성록"을 읽고 발분하여 일본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고 일본 실학파의 태두인 오오츠카도 선생의 "자성록"과 "주자서절요"를 읽고 퇴계선생을 존경하고 사숙했으며 또 중국의 근대사상가인 양계초는 퇴게선생을 공부자(孔夫子)와 같은 칭호인 이부자(李夫子)로 표현했다 합니다.

 

  퇴계 이황선생과 또 이분과 인연을 맺었던 남명 조식, 고봉 기대승과 율곡 이이 모두 16세기 말엽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이분들이 타계한지 사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7년동안 조일전쟁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겪었고 이 국난극복은  제자들 몫으로 넘겨졌습니다.  여러 제자들이 서로 서로 손잡고 힘을 보태어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곧이어 열리는 조선의 17세기는 희망의 한 세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영남학파의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고 율곡을 추종하는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들 거의다가  자기네 붕당들의 권력확보를 위해 죽기 살기로 이전투구를 벌였을 뿐 진정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지식을 활용하고 애쓴 이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조선이 조청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국난을 맞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성리학의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해주었을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수년간 논쟁을 벌인 사칠논변의 고담준론이 두번의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국난극복에 그리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이 논쟁의 한계는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두분 논쟁의 한계는  학문에 머물렀을 뿐 경세로 이어지지 못한데 있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단순히 유학자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여러 개혁을 시도한 율곡 이이의 경세가로서의 면모에 후한 점수를 주고자 합니다. 저희들이 몸담고 있는 오늘도 분명 태평성대는 아닙니다.  어쩌면 난세일 수 있는 오늘 날 퇴계 이황과 같은 대학자 못지 않게 율곡 이이와 같은 경세가를 만나보고 싶은데 여의도에도 세종로에도 나라를 위해 자기 지식을 펼쳐보겠다는 율곡 이이와 같은 진정한 경세가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워 하고있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 산을 아끼시고 즐겨 오르신 선생의 산행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어 사족으로 몇 글자 덧 붙입니다. 현암사에서 펴낸 "퇴계선집"에 따르면 선생께서 경북 봉화의 청량산에서 우거했던 송암 권호문에 다음과 같이 그의 요산요수론(樂山樂水論)은 펼치셨다 합니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한다는 성인의 말씀은 산이 인(仁)이 되고 물이 지(智)라고 한 말이 아니고 다만 인자(仁者)는 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물을 좋아 하는 것이며, 이 인지(仁智)의 이치는 사람들이 형상을 통하여 근본을 구해서 모범의 극치를 삼게 하려는 것이지 산과 물에서 인과 지를 구하게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과 지를 이루고자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단순히 산과 물을 보고서는 인과 지의 낙을 구할 수 없다는 선생의 말씀은 산에 몇 번 오르면 저절로 인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해온 저같은  산객들에는 더할 수 없는 요긴한 가르침입니다. 

 

 어렵사리나마 퇴계 이황선생을 만나 뵙고 큰절도 올렸으니, 이제 그만 탐방기를 맺고자 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