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명소 탐방기 4
*탐방일자:2009. 7. 11일(토)
*탐방지 :경기도파주시적성면 두지나루 임진강
*동행 :나홀로
임진강은 한강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별개의 강이 아닙니다.
중량천이나 안양천이 한강으로 바로 흘러들어가는 한강의 제1지류이듯이 오두산 앞에서 한강에 합류되는 임진강도 한강의 제1지류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마식령에서 발원한 임진강이 끝나는 곳은 서해바다가 아니고 제 고향 파주의 오두산 앞이며, 한강이 이곳에서 임진강의 물을 받아 서해로 흘러갑니다. 중량천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임진강이 한강의 지류임을 안 것은 2년 전 이형석님이 발로 쓴 “한국의 강”을 읽고 나서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오두산의 통일전망대에 올라 광활한 강을 사진 찍으면서도 이곳은 한강과 합수되는 곳이지 임진강이 끝나는 지점으로는 한 번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강”에서 한강의 제1지류임을 최종확인하고 마치 임진강을 한강에 도둑맞은 것처럼 분하고 서운해 한 것은 이제껏 이 강을 파주 땅 최고의 어엿한 강으로만 여겼지 한강에 덧붙여진 물줄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해방 전 황포돛배가 한강의 마포와 임진강의 고랑포를 바다를 거치지 않고 오갈 수 있었던 것도 임진강과 한강이 별개의 강이 아니었기에 가능했지, 두 강 모두 독자적으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별개의 강이었다면 바다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오두산 일대를 한강과 임진강의 두 강물이 교차하는 곳이다 하여 교하(交河)로 불러왔습니다. 파주 땅 교하(交河)를 풍수지리학의 대가 최창조 박사께서 향후 통일을 대비해 최적의 행정수도 후보지로 꼽은 것도 교하지역이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 되는 길지로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이곳에 헤이리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최고의 예술도시를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헤이리마을을 배후지로 갖고 있는 오두산의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얼마간 머물다 가고 싶은 명소를 꽤 여러 곳 만납니다. 세종 때의 명정승인 황희정승이 노년에 내려와 쉬었던 반구정, 실향민들이 차례를 올리는 망향단이 자리한 임진각, 임진왜란 때 평양으로 몽진 중인 선조임금이 임진강을 도하할 수 있도록 불을 밝히고자 불태웠다는 율곡 이이 선생이 자주 찾았던 화석정, 1960년대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로 알려진 장마루, 해방되기 전에만 해도 꽤나 번화한 나룻터였던 고랑포, 그리고 황포돛배를 띄우는 두지 나루 등이 있습니다. 이 명소들은 모두 마식령에서 2백Km 훨씬 넘게 쉼 없이 내달려온 임진강이 잠시 숨을 돌리며 한 줄로 꿰어놓은 구슬들입니다.
이번에 탐방한 파주명소는 두지 나루의 임진강입니다.
제가 이번에 두지 나루를 찾은 것은 이곳에서 고랑포 가까이까지 오가는 황포돛배를 타고 임진강과 그 강변을 두루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파주 땅의 임진강은 휴전선 가까이로 흐르고 있어 서울의 한강처럼 어디서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강이 아닙니다. 아마도 외지 관광객이 임진강 강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여기 두지 나루일 것입니다. 제가 벌써부터 이곳에 와 임진강 한 가운데로 들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강가에서 강을 내려다보는 것과 강 한 가운데서 강가를 내다보는 것은 그 맛과 멋이 같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어서입니다. 그러기에 서울의 한강과 일본 동경의 수미타강 및 프랑스 파리의 세에느강 등 웬만한 강 위에 모두들 빼놓지 않고 유람선을 띄우는 것입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확연하게 다른 점은 바로 서울의 한강은 강 밖에서 내려다보는 흐르는 강물만 아름다운 데 비해 파주의 임진강은 강 한가운데서 내다보는 강변 풍광도 참으로 볼만 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배를 타고 강 밖을 내다보면 한강에서는 시멘트 계단과 아파트 건물들만 보이지만, 임진강은 그 강변이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채 자연그대로 남아 있는 덕분입니다.
지난 토요일 파평산을 먼저 오른 후 법원리에서 버스를 타고 적성으로 갔습니다.
적성에서 두지 나루로 가는 길은 감악산에서 발원한 설마천과 나란히 북서쪽으로 나있는데 그리로 가는 버스가 아예 없어 4천원을 주고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4시20분경 나루터에 도착해 8천원 하는 성인 승선권 1장을 산 후 황포돛배에 오르기까지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으면서 반시간 가량 기다렸습니다. 강남의 적성과 강북의 연천을 이어주는 동쪽 가까이의 장남교 아래로 도도하게 흐르는 임진강의 수위는 장남교 한 가운데 교각에 마크된 8m 눈금에서 2m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물이 흐르는지 알지 못해 이 수위가 어느 정도 높은 것인지 짐작되지 않았으나 그 맑던 강물이 탁류로 변한 것으로 보아 전날 비가 적지 아니 내린 것은 분명합니다.
저녁5시가 다되어 가다리던 황포돛배가 북서방향의 고랑포 쪽으로 출발했습니다.
황포돛배는 범선이어서 쌍고동 대신 정태춘의 노래 “떠나가는 배”를 들려준다는 선장의 멘트는 한낱 재치일 뿐, 기실 이배는 돛대로 가는 범선이 아니고 볼보 엔진을 장착한 동력선입니다. 그래도 풍향에 맞춰 저절로 돌아가도록 세팅된 황포돛대가 이 배를 움직이는 동력의 50% 가량을 맡고 있다 하니 이 배를 황포돛배로 부른다 해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몰아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 반쯤만 돛단배인 황포돛배에 오른 승객들의 반쯤은 강릉에서 오신 노인 분들이었습니다. 여름 철 최고의 피서지로 각광받는 동해안을 놔두고 강릉에서 관광버스로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힘드셨을 이 분들 중 할머니와 할아버지 몇 분들은 아직도 기운이 넘쳐흐르시는지 선장이 틀어주는 흘러간 옛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흥겨워 하셨습니다.
강 한가운데로 들어간 황포돛배는 소리 없이 강물을 가르며 고랑포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겉보기에는 물 흐름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웬만한 수영실력으로는 이강을 가로 질러 헤엄쳐 건너지 못할 정도로 강물 속으로는 유속이 엄청 빠른 데, 또한 수심도 14m나 된다고 젊은 선장이 설명했습니다. 고랑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심이 얕아져 다 가서는 40cm 밖에 안 되는 곳도 있다며 바로 그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고랑포 못 미쳐서 회항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내친김에 장마루를 거쳐 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 가고 싶다만 고랑포의 여울목이 길을 가로 막아 뱃길을 낼 수 없다 합니다. 남북이 통일되어 임진강에 평화가 찾아온다면 준설을 해서라도 오두산까지 뱃길을 내도 좋겠다 싶은 것은 임진강은 한강과는 달리 우리 장병들이 그 강변을 잘 지켜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생태교육장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거북이 형상을 한 거북바위의 안내를 마친 선장이 가장 열을 내며 설명한 것은 임진강에 면해서 곧추 서있는 적벽이었습니다. 암벽이 붉은 색깔을 띤다하여 임진적벽으로 명명된 이강 남쪽의 장좌리적벽과 그 보다 규모가 조금 작은 강 북쪽의 원당리적벽이 그것들인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책갈피를 펴놓은 것처럼 수평으로 차곡차곡 쌓인 암괴들이 하층기단을 이루고 , 그 위로 주상절리를 연상케 하는 암벽들이 똑바로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수평의 하층기단 곳곳에 생성된 자연 굴들로 신비감이 더해졌는데, 6.25 때는 현지 주민들이 난을 피해 이 동굴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 발각되어 떼죽음을 당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조 최고의 화백 중의 한 분인 겸재 정선 선생께서 임진적벽을 수묵화로 그려 낸 것만 보아도 여기 적벽이 범상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고랑포가 가까워지자 경순왕 묘역이 먼발치로 보였습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임진강변 몇 곳에 족적을 남긴 것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개성에 나라를 세운 고려태조 왕건에 나라를 바치고 고려태조의 따님과 결혼해 살아서인데 도라산(都羅山) 역의 도라(都羅)도 경순왕이 도라산에 올라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그린 데서 연유했다 합니다. 고랑포를 저 앞에 두고 황포돛배는 회항해 두지 나루로 향했습니다. 제게는 고랑포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철로에 깔린 자갈입니다. 제가 어려서 듣기로는 철로의 자갈들은 거의다가 고랑포에서 주워다 깐 것이라 했습니다. 고랑포 자갈은 매끄럽고 동글동글해 호주머니에 넣고 갖고 놀기에 딱 좋았습니다. 그 고랑포가 그저 임진강 어디쯤에 있나보다 했는데 이렇게 먼발치서나마 그 실제 모습을 보고나자 이곳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고랑포가 그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자갈이 아니고 나루터였음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마포나루에서 황포돛배로 물건들을 실고 여기 고랑포까지 오는데 대략 15시간이 걸렸고, 이렇게 실어온 귀중한 물건들은 개성으로 옮겨졌다 합니다. 화신백화점이 들어서고 가옥이 230채가 된 때도 있었다하니, 고랑포를 죽인 것은 임진강의 물 흐름이 만든 여울이 아니고 남북분단이 틀림없습니다. 작금의 정세를 보면 치열한 좌우분열로 우리나라에서 죽어나갈 또 하나의 고랑포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두지나루로 돌아오는 길에 고랑포 쪽을 향해 가는 황포돛배가 바람도 안부는 데 저희 배 옆을 쏜 살같이 지나가 황포돛배가 범선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선장이 마지막으로 들려준 일화는 노아의 방주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철원이나 북한 쪽에서 집중호우가 내리면 여기 두지 나루는 강물이 범람하기 일쑤인데 어느 해 여름에 밤새도록 쏟아진 장대비로 불어난 강물이 장남교를 먹어 삼켜 버렸다 합니다. 두지나루에 정박해온 황포돛배를 그냥 둔다면 불어난 물에 배가 가라앉을 것이 분명해 그 옆 산위에 매어두었는데 물이 빠지는 것에 맞추어 매어둔 밧줄을 살살 풀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배가 산위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어 나중에 이 배를 강물로 끌어내려야 해 엄청 고생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배 선장이 밤새도록 한잠도 못자고 밧줄을 풀어준 일이 있다고 관광오신 목사님들에 이야기했더니 그 분들이 이 배에 노아의 방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합니다.
마지막 서비스로 선장이 틀어준 노래는 국민가수 이미자의 “황포돛대”였습니다.
“마지막 석양빛을 기폭에 걸고 흘러가는 저 배”의 순항을 돕고자 “해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며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마음도 구슬퍼”진다 했으니 이 황포돛배는 규모가 꽤 커 바다를 나다니는 범선인 듯합니다. 이미자 님이 진작에 강위에 띄운 작은 황포돛배를 타보았더라면 그님의 이 노래가 더욱 구성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싶었습니다. 두지나루로 되돌아온 것은 석양빛을 기폭에 걸만한 시각인 저녁6시 조금 못되어서였습니다. 날씨만 좋았더라면 노래 속의 운치를 한껏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리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임진강에서 황포돛배를 탄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서울의 한강을 오르내리는 호화로운 유람선보다는 임진강의 조촐한 돛단 배에서 들어보는 이미자의 “황포돛대”가 훨씬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임진강도 다른 강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은 오지의 산과는 달라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강은 진정한 강이라 할 수 없습니다. 4대문명의 발상지가 산이 아니고 모두 강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임진강이 이제껏 강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은 바로 민통선 지역 안에 있어서였습니다. 파주시에서 4년 전에 두지나루에 황포돛배를 띄운 것은 임진강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으로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이제껏 임진강은 장병들이 지키고 있어 보통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는 무서운 강이었습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어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해되지만,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임진강을 국민들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강도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어느 만큼은 사람들이 돌봐 주어야 제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유주현 선생의 말씀대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라는 생각도 듭니다. 서해바다를 향해 한가지로 흐르면서 임진강이 셈했을 세월은 천년을 수 만 번 반복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임진적벽도 그 셈을 거들었을 것입니다. 여기 임진강이 사람들이 이 강에서 쫓겨나 이 강 유역에 쌓아온 문명을 방치한 햇수를 셈해본 즉 아직은 몇 십 년에 불과하다 합니다. 더 늦기전에 남북통일이 되어 한시 빨리 임진강이 온전하게 저희들 품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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