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명소 탐방기
*탐방일자:2010. 4. 12일(월)
*탐방지 :경기 여주 신륵사/목아박물관/명성황후 생가
*동행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현운재 하보경회장님등 25명
여주 쌀이 진상미로 올려질 만큼 미질이 뛰어난 것은 한강 덕분입니다. 강원도 태백산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이 서해바다를 향하여 숨 가쁘게 내달리며 실어 나른 자갈, 모래와 진흙 등이 여주에 이르러 한강의 강변에 조금씩 쌓여 충적평야(沖積平野)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평야에서 생산되는 여주 쌀의 밥맛이 일품인 것은 토질이 좋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일조시간이 길며 일교차가 커 낟알이 잘 영글어서라 합니다.
여주를 옥토를 만들었고 또 만들고 있는 한강에 충분히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이 강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입니다. 무릇 산은 강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산이고 이 강에 지속적으로 물을 대는 젖줄이 바로 산입니다. 서로 다른 강물들이 섞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가름하는 것 또한 산이기에 산은 강의 아버지라 부를 만합니다. 아버지들이 한 집안의 울타리역할을 맡아 하듯이 강줄기 둘레에 울타리를 쳐 강물의 흐름을 잡아주고 다른 강물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을 산줄기가 맡아 하고 있습니다. 한강을 “ㄷ"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동쪽의 백두대간과 북쪽의 한북정맥, 그리고 남쪽의 한남정맥과 한남금북정맥이 한강에 물을 대고 있는 어머니이며, 또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과 금강이 서로 섞이지 않고 바다까지 이끌어주는 아버지인 것입니다.
여담입니다만 관악산에서 북한산까지 물을 건너지 않고 가려면 약1,100Km를 걸어야 합니다. 관악산을 출발해 청계산을 거쳐 안성의 칠장산까지 한남정맥의 마루금을 밟은 후 한남금북정맥을 타고 동쪽으로 내닫으면 백두대간의 속리산을 만납니다. 속리산에서 왼쪽으로 꺾어 태백산, 설악산과 금강산 등 백두대간을 밟으며 북진하다가 북한 땅 분수령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진행하면 북한산의 백운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두 배가 넘는 길이의 산줄기들이 약 500Km 길이의 한강에 물을 대고 있기에 한강이 여기 여주 땅에 평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3백km 가량 남은 북한 땅 산줄기를 마저 밟아 한강의 울타리산줄기 종주를 마친 후 한강의 강줄기를 따라 걸어보는 것이 제 꿈인데 이 꿈이 실현된다면 언제고 한강변의 신륵사를 다시 찾을 것입니다.
제가 여주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68년의 일입니다. 그 때 처음 들른 신륵사를 이번에 또 찾게 된 것은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의 스터디그룹인 현운재(賢雲齋)에서 여주 명소 몇 곳으로 봄나들이를 나선 덕분입니다. 지난 달 국어국문과에 입학한 제가 정 붙이고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곳이 한문학습 동아리인 현운재이기에 만사 제쳐놓고 따라 나섰습니다. 저의 봄나들이는 동숭동 캠퍼스에서 시작됐습니다. 매주 화요일 오후면 현운재 모임에 참석하느라 여러 번 다녀간 캠퍼스의 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고 나자 우중충한 구닥다리 건물들도 교정을 환히 밝힌 목련꽃처럼 훤해 보였습니다. 학교 앞에서 버스에 올라 여주신륵사에 이르는 동안 임동숙부회장님의 사회로 각자 자기소개를 한 후 터널을 주제로 한 연상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터널하면 천성산의 터널을 목숨 걸고 반대한 지율스님을 떠올렸는데 선배 분들은 터널을 자궁, 시공의 단축 및 상처에 비유해 역시 국문학도다 했습니다.
1)신륵사
한강변에 자리한 신륵사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천년고찰입니다. 34년 전 광주중학교에 근무할 때 열애 중인 집사람과 데이트를 나선 곳이 여기 신륵사였습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신륵사에서 내려다 본 한강변 풍경이 참으로 고즈넉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4대강 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그 때보다 훨씬 어수선했습니다.
불 꺼진 가마를 지나 신륵사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을 끈 것은 고려시대의 전탑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신륵사다층전탑이었습니다. 벽돌로 쌓아 만든 탑이 전탑이고 탑의 층수를 셀 때는 기단과 꼭대기 지붕을 빼놓아야 한다는 것을 동행하신 오태권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이 탑이 6층의 전탑임을 알았습니다. 강가로 더 바짝 내서 쌓은 3층 석탑은 전탑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아 앙증맞아 보였습니다. 옆 자리 정자로 옮겨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소설가 유주현님이 그의 소설 "임진강은 흐른다"에서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라고 말씀한 뜻을 되씹어보았습니다.
전탑 바로 위에 세워진 신륵사 대장각기비는 목은 이색선생이 대장각을 인쇄하고 도은 이숭인 선생이 비문을 지었다 합니다. 민망하게도 고려조에서 내놓으라하는 두 문인들의 정성이 깃들은 기비의 비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어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곧 바로 이 절의 뒷산인 봉미산을 올랐습니다. 진달래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는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선 꼭대기에 표고가 80.50m임을 알려주는 삼각점이 박혀 있었습니다. 이토록 나지막한 이 산이 봉황의 이름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은 풍광이 빼어난 한강을 조망하고자 봉황이 이산에 날아들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선생님께 여쭤 본 즉 이 산이 동쪽에 위치해 그리 불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강 길로 되 내려가 다시 신륵사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신륵사 터는 천년 고찰치고는 너무 좁게 느껴졌습니다. 대웅전 대신 들어앉은 극락대전이 가림 막을 씌우고 보수공사 중이어서 더욱 답답했습니다. 절 마당에 뿌리 내린 참나무는 600년을 넘겼어도 끄떡없는데 중창된 지 3백년을 갓 넘은 극락보전은 벌써 보수 공사를 하는 것을 보고 짧은 인생에 비해 예술이 아무리 길다 해도 자연의 영원함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관음전과 명부전 및 범종각을 둘러 본 후 경내를 빠져 나왔습니다. 나옹혜사가 이 절에서 열반해 유명해졌다는 신륵사 탐방을 마치고 인근 옥천 식당으로 옮겨 맛있게 점심을 들었습니다.
2)목아박물관
박물관이란 역사, 민속, 산업, 과학, 예술 등에 관한 자료를 널리 수집, 보관하고 전시하여 사회 교육과 학술 연구에 도움이 되게 만든 시설을 이른다고 사전에 실려 있습니다. 필요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보관 전시하는 일이 어느 한 개인이 맡아 하기에는 너무 힘든 것이어서 박물관을 세워 운영하는 분들을 보면 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1989년 우리나라 전통 목조각 및 불교미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여기 여주에다 전문사립박물관인 목아박물관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분은 목아 박찬수님으로 중요무형문화제 제 108호의 목조각장으로 지정된 분이기도 합니다.
맞이문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하얀 색의 석존미륵삼존불입상 3개가 보였고 오른 쪽으로 예수님 상이 보였습니다. 박물관 한 가운데 자리한 석탑을 사진 찍은 후 전시실로 들어갔습니다. “향기로움”이 “맑고”, “아름답고”, “밝고”에서 발현되는 듯 “향기로움”의 현판을 전시실 맨 앞 출입구 위에 붙여 놓았고 나머지 “맑고”, “아름답고”, “밝고”의 현판은 그 뒤 문 위에 배치해 놓았습니다. 3층의 불교목조각실로 올라가 여러 유형의 불상을 보았는데 불교를 보호하는 수호신의 하나로 12야차대장으로도 불리는 십이지신 들의 모습을 그로테스크하게 새겨 넣은 십이지신상이 색달라 보였습니다. 아래층 불교 유물실에서 엄청 큰 염주와 범종각에 비치하는 사물을 꼼꼼히 살펴본 후 1층 전시실로 내려가 성학십도 팔폭병풍을 보았습니다.
전시실에서 밖으로 나와 앞쪽의 공원을 휘 둘러본 후 맞이문 밖으로 나가 박물관 탐방을 마쳤습니다. 종교적 갈등을 야기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박찬수 님에 존경의 마음이 더해진 것은 다행히도 국민들 사이에는 종교 간의 갈등이 그리 심각하지 않지만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성직자들이 현실참여가 좀 지나친 것 같아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할 만큼 능력 있는 전문가들이 곳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려면 세속의 일을 맡아 해오는 전문가들이 속세의 현실문제를 풀어가는 데 스님들이나 목사님이나 신부님만 못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는 문을 닫고 중세시대나 삼국시대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안문제에 반대냐 찬성이냐 관계없이 세속의 일은 성직자들이 그만 나서고 전문가들에 맡겨야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어서 감히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3)명성황후 생가
목아박물관에 이어 찾아간 영릉은 문이 열려 있지 않아 그 다음 탐방지인 명성황후 생가로 옮겼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아무런 권력도 없이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살아간 민치록의 여식 민자영을 왕비로 맞아들인 데는 지긋지긋한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 것인데 그러기에는 간택된 규수가 너무 영특했습니다.
생가 옆에 세워진 명성황후 기념관을 먼저 들렀습니다.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외교력의 소유자로 찬양한 전시물을 보고 그렇다면 조선이 망한 것이 백성들이 우매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냐고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고종임금도 정치를 잘 했고 명성황후도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정치를 했다면 왜 조선이 망했겠습니까? 망국이라는 치욕적인 결과에 대해 우선적으로 당대 최고 정치가들에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합니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명성황후를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정치인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아무리 기념관이라 해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기념관을 대충 둘러보고나서 그 옆 생가로 이동했습니다. 똬리 집 모양의 본채와 조금 떨어진 초라한 별채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곳이라 합니다. 제 눈에는 이 정도면 큰 집이다 싶었는데 선생님께서 이 집은 양반이 살기에는 아주 작은 집으로 별당이 세 칸 밖에 안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지적이 맞는 것을 안 것은 민가 마을 건너 감고당을 둘러보고 나서였습니다. 감고당은 숙종임금의 왕비이신 인현왕후가 머물던 사저로 명성황후께서도 간택 전에 머물렀다 합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겨 그대로 중건했다 하니 그 구조와 규모는 그대로여서 역사적 가치는 남아 있습니다. 감고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 대문 양쪽으로 지은 일자 모양의 행랑채를 보았습니다. 길쌈을 매고 새끼를 고는 작업장이 같이 갖춰진 행랑채에는 노비들이 묵었을 것입니다. 행랑채 앞으로 마당이 있고 오른 쪽으로 손님을 모시는 “ㄴ"자 모양의 사랑채가 들어앉았습니다. 왼쪽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일자 모양의 중채를 만나게 됩니다. 그 왼쪽으로 “ㄷ" 형태의 안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감고당을 통해 조선조 건물양식을 공부한 것만으로도 현운재와 함께한 나들이가 충분히 보람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명성황후의 공과에 관계없이 그분께 무릎 꿇고 사죄드릴 일이 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께서 일본인에 무참히 시해되었습니다. 이 때 일본군을 적극 도운 사람이 저와 종씨인 우범선입니다. 저는 우범선이 무슨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왕비를 살해하는 데 일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국모를 시해하는 데 적극 참여한 우범선의 소행은 불충을 넘어선 반역이자 패륜이기에 역사적으로 규탄 받아 마땅합니다. 우 씨는 본관이 단양뿐인 단성단본이어서 우범선이 저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일본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우리나라 육종학을 꽃 피운 우장춘박사입니다. 그나마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귀가 길 버스 안은 친목의 현장이었습니다. 새내기들이 같이 한 첫 나들이였기에 함께 노래를 부르고 얼굴을 튼 것은 앞으로 스스럼없이 지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강이 일군 여주 명소들을 두루 탐방할 수 있도록 주선한 현운재 모임의 하보경 회장님과 임동숙 부회장님의 노고가 고마웠습니다. 틈틈이 저의 무지를 바로 잡아주신 오태권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 말씀 올립니다. 함께 나들이를 다녀온 선배 분들과 동기생들에도 고맙고 즐거웠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세월은 인생세간에서 셈한 시간이기에 세월의 흐름을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기 이전까지 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 생각대로 계산한다면 세월이 흘러간 최대치는 350만년을 넘지 못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강 물이 여주를 관통하며 셈한 세월이 천년을 훨씬 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강이 천년 단위로 세월을 셈한 횟수가 수 백 번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리 오랜 세월 동안 한강이 일궈놓은 여주의 명소를 찾아 한강물을 배경으로 현운재 회원들 모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저희들이 셈한 세월은 단 몇 분에 불과합니다. 순간의 시간을 영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현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곳이 바로 현운재이기에 저희들이 함께 한 짧은 시간은 저 한강물에 모두 실어 보낸다 해도 현운재 봄나들이는 한강이 셈해온 세월만큼 오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탐방사진>
1.한국방송통신대
2.신륵사
3.목아박물관
4.왕릉 영릉
5.명성황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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