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24.박경리 문학공원/토지문화관을 다녀와서

시인마뇽 2010. 7. 23. 01:33

                                       박경리문학공원/토지문화관을 다녀와서

 

                             *탐방일자:2010. 7. 21일(수)

                             *탐방지   :강원 원주시 소재 박경리문학공원 및 박경리토지문화관

                             *동행      :방송통신대 국문학과 현운재 회원

 

 

 

   1998년과 2003년 여름 백두산을 오르는 길에 두 번 다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만주의 용정 일대를 둘러보았고 지난 2월 경남통영의 박경리공원을 다녀온데 이어 어제는 강원도 원주의 박경리문학공원과 박경리토지문화관을 탐방했습니다. 이제 박경리 선생을 만나 뵙고자 더 찾아보아야 할 곳으로 경남하동의 평사리 일대만 남아 있습니다. 통영의 미륵산에 자리 잡은 박경리공원은 선생님이 묻히신 곳이고, 원주시 단구동의 박경리문학공원은 선생께서 원주로 이사와 사셨던 곳을 문학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며, 연세대 원주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박경리토지문화관은 2008년5월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하실 때까지 마지막으로 기거하신 곳이어서 어디라도 선생의 생전 모습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워낙 일반대중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던 분이라서 선생께서 살아계실 때 설사 제가 지금처럼 국문학도였다고 하더라도 선생을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나 이때나 제가 선생을 뵐 수 있는 길은 선생의 작품을 읽어보거나 선생의 체취가 묻어나는 몇 곳을 탐방하는 외에 달리 없기에 이번에 방송대국문과 동아리모임인 현운재 회원들과 함께 박경리문학공원과 박경리토지문화관을 탐방한 것은 선생의 작품 한두 편을 더 읽은 것 이상으로 의미 있다 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선생을 만나뵌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경기도 파주의 한 고등학교에 화학교사로 부임하고 나서 비로소 호주머니에 여유가 생겨 그해 10월에 창간된 문학사상을 구독하기 시작했는데, 이 잡지에 실린 “토지” 2부의 첫 회를 읽어본 것이 선생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앞서 현대문학에 연재된 1부를 보지 못하고 바로 2부를 보아서인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해 그 후 이 잡지에 연재된 토지를 읽는 둥 마는 둥하고 지나쳤습니다. 그즈음 문학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저를 문학세계로 끌어들인 분은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광장”으로 당시 지식인들에 회자된 최인훈 선생이나 “소문의 벽”으로 저를 매료시킨 이청준 선생의 작품들을 즐겨 찾아서 읽던 때여서 자연 작품을 통한 박경리 선생과의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1978년 학교에서 일반회사로 직장을 옮긴 후 그 알량한 문학에의 관심도 이어지지 못해, 1980년대에 제가 읽은 수많은 책들은 거의다가 경영서적이었습니다. 당시는 국내 큰 그룹사였던 한 회사에서 대리와 과장직을 맡아 죽어라고 일을 해야 했던 때여서 한가로이 문학작품과 씨름할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되찾은 문학에의 관심은 조정래 선생의 작품에 경도되어 “태백산맥”, “아리랑”과 “한강”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나마 틈틈이 짬을 내 곁눈질을 한 것도 박경리 선생의 작품이 아니고 "당신들의 천국" 등 이청준 선생의 작품들이 주였습니다.

 

 

  제가 선생을 다시 만난 것은 1997년 선생의 대표작인 “토지”를 읽으면서였습니다. 제가 두 번 읽은 염상섭의 삼대나 최인훈의 광장 모두 그 분량이 낱권을 넘지 못했으나, 대하소설로 유일하게 재독한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5부 21권으로 구성되어 그 분량이 무려 원고지 4만매에 이른다 합니다. 토지를 두 번 다 읽은 후 또 다시 선생을 잊고 지내다가 2008년5월 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고 나서 그동안 제쳐놓았던 다른 작품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행기 “만리장성의 나라”, 수필집 “생명에의 아픔”, 그리고 소설 “시장과 전장”, “김약국의 딸들”과 “가을에 온 여인”이 그간 읽은 것들로, 이렇게 해서라도 돌아가신 선생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저 나름대로 애써왔습니다.

 

 

 

1)박경리 문학공원

 

 

 

   저희 현운재 회원들과 함께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원주시 단구동에 조성된 박경리문학공원이었습니다. 오전 10시가 훨씬 넘어 방송대 서울캠퍼스를 출발한 버스가 얼마 후 올라선 영동고속도로는 수많은 피서차들로 꽉 찼습니다. 원주까지 거리는 짧았지만 버스운행은 많이 더뎌 13시가 거의 다 되어 문학공원 앞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선 곳이 소설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마당이었음을 안 것은 한참 후 안내책자를 보고나서였습니다. 앞마당 연못에 다소곳이 피어있는 꽃송이가 수련이라고 제게 알려준 우리의 진사 선녀님이 작심하고 카메라를 들이댔으니 이제부터 저 수련은 한 여름에 공원의 연못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시공을 뛰어넘어 현운재 카페와 이런 저런 블로그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피어날 것입니다. 2층의 관리사무소 빌딩은 닫혀 있어 그 왼쪽의 박경리선생이 사셨던 옛집 앞마당으로 옮겼습니다. 삼천여평의 문학공원 안에 터잡은 2층의 양옥집은 1980년 서울에서 이사와 토지문화관으로 옮겨가시기까지 18년간 거처하시며 토지의 제4부와 5부를 집필하신 곳이어서 이 공원을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합니다. 7백여 평의 대지에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직접 길러 드신 선생께서 이 집에 계실 때에는 거암 몇 개가 놓여 있는 홍이동산은 조성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홍이동산에서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아 지난 곳이 용두레벌로 만주 땅의 용두레우물과 간도의 벌판에서 연유한 이름이라 합니다.

 

  기념관에서 아주 짧은 영상물을 관람한 후 옛집 안으로 들어가 최석홍님의 재담 섞인 해설을 들었습니다. 선생께서 원주로 이주하신 사연과 저항시인 김지하를 만나 사위로 맞아들이기까지의 이야기는 물론 오로지 토지 집필에만 전념하시느라 취재차 찾아온 기자들을 따돌린 기지가 번뜩이는 일화들도 같이 들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테레사라는 세례명을 갖고 계신 천주교신자라는 사실을 이번 탐방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알뜰살뜰 지독할 정도로 검소하게 사셨고 또 엄청 많은 책들을 읽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한 최석홍 님은 김지하 시인과 원주에서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 분이어서 짧은 시간에 알차게 해설을 마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책을 천히 여기는 것은 애비를 천히 여기는 것과 같다는 “책천자 부천자(冊賤者 父賤者)”라는 한 마디로 해설을 마무리한 이분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벌써 국문학과를 졸업하신 김오녀선배님이 낸 점심을 맛있게 든 후 충주 쪽으로 조금 이동해 원주시흥업면 매지리에 위치한 박경리 토지문화관으로 향했습니다.

 

 

 

2)박경리토지문화관

 

 

 

  오부산 기슭에 자리한 박경리토지문화관은 단구동의 문학공원과는 달리 현대식으로 지어놓은 대형 문화관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숙박시설로 지어진 3층의 뒤채 건물이 이 건물과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문화관 좌 우에 창작집필 전용 건물이 자리했고 단구동에서 옮겨와 돌아가실 때까지 머무셨던 사가는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문화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한편으로 대 회의실이 열려 있고 그 반대편으로 선생의 유품들을 진열해놓은 전시실이 자리한 중앙의 복도에 서서 직원분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난 2월 박경리공원을 다녀오고 나서 어째서 선생의 유해를 28년간 머무신 원주에다 모시지 않고 향리인 통영으로 옮겼는지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28세 때 떠난 통영은 물론 “토지”의 산실인 하동의 평사리를 한 번도 찾지 않은 선생께서 2007년 고향인 통영을을 찾았을 때 그곳에서 묻히시고 싶다는 뜻을 따님께 내비친 바 있어 통영으로 유해를 모셨다는 직원분의 설명을 듣고 고향을 생각하는 수구초심만은 선생도 뭇사람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았습니다. 전시실에 진열된 여러 유품들 중에서 제 눈을 끈 것은 "SINGER"재봉틀과 진주 촉석루에서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같이 찍은 흑백사진이었습니다. 선생보다 8년 앞서 태어나신 제 어머니께서도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느라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신 날이 부지기수였는데 모친께서 쓰신 재봉틀은 “SINGER" 이 아니고 ”IDEAL"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에 찍은 이 사진이 제 눈길을 끈 것은 선생의 앳된 모습이 아니고 그 아래 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이 사진을 찍고 있는 여학생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는 모습들로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낙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진을 찍고 있는 여학생들 또래의 처자도 보였는데 이들에게서 여학생들에 대한 시샘도 같이 읽었습니다.

 

  선생의 근검함과 손 솜씨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전시실을 나와 사가로 옮겼습니다. 얼핏 보아도 50개는 훨씬 넘을 장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생전에 토지문화관에 머무르며 창작활동을 하는 여러 분야의 작가들에 내주고자 저 많은 장을 담그신 선생의 후덕함에 감탄했습니다. 선생은 오부산 중턱에 내버려진 화전에서 돌을 다 주워내고 두릅나무를 심으셨고 문화관 입구의 밭에다 유기농법으로 농작물을 손수 재배하셨다 합니다. 이는 선생께서 당신의 생명사랑을 단순히 소설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고 몸소 실천으로 옮기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가와 문화관 앞의 옥수수 밭이 없었다면 중심 건물이 현대식으로 지어져  토지문화를 맛보기 쉽지 않겠다 싶은 박경리토지문화관의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탐방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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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토지”를 빼놓고 선생의 문학을 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토지를 주제로 한 박사논문이 20편이 넘고 석사논문은 헤일 수 없이 많다고 한 박경리문학공원의 최석홍님의 해설도 “토지”가 선생의 대표작임을 말해준 것에 다름 아닙니다.

 

“토지”를 결실하기까지 선생께서 낳고 기른 소설들도 적지 않습니다. “토지” 이전에 발표된 소설 “전장과 시장” 및 “김약국의 딸들 ”등을 읽고 나서 이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어떤 식으로든 “토지”를 통해 새롭게 환생한 것이 아닌가 싶었고, 이래서 “토지”가 선생의 전 작품을 아우르는 대표작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소설 “토지”는 시대적으로는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있고, 공간적으로는 하동의 평사리와 만주의 간도를 주 무대로 해 진주, 부산, 서울 및 일본과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다양한 지역을 카버하고 있습니다. 소설 “토지”가 정말 놀라운 것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여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권영민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소설 '토지'는 가족이라는 혈연단위와 그 확대를 역사적인 시대의 교체와 맞물리도록 고안함으로써, 조선말기 이후의 한국사회의 근대화라는 격변기를 살아가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의 창조에 성공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70년대에 중고교에서 5년 가까이 봉직하면서 제가 한 해 동안 가르친 총 학생 수가 대략 400명 선이었는데, 이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해 엄청 미안해했던 저로서는 600여명 각각에 고유한 이름, 성격 및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과연 가능한 일인가 상상되지 않았습니다. 또 이 소설을 구성하는데 동원된 단어들은 무려 3만6천개 정도로 소설 “토지”가 국내 최다의 단어가 실린 작품이며 그 다음이 3만개의 단어가 쓰인 조정래 선생의 소설 “태백산맥”이라고 한 교수님으로부터 강의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선생이야 말로 살아 움직이는 국어사전임에 틀림없습니다. “토지”의 집필 기간이 만25년이고 이 책의 분량이 원고지4만매 정도에 달한다는 것도 앞으로도 우리 국문학사에서 좀처럼 깨어지지 않을 진기록임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비평가들이 소설 “토지”를 현대 한국문단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뽑는 것은 이러한 진기록 때문이 아니고 이 소설이 독자들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감동의 근저에 우리 조상들의 모진 삶속에 어린 한과, 운명적으로 그 모진 삶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며 한(恨)을 승화시킨 긍정적인 생명관이 숨어 있어서라는 생각입니다. 청소년들의 우상인 유명연예인들이 자기가 처한 힘든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요즈음 세태에서 선생의 청소년용 "토지”는 이 시대의 어떠한 경전이나 철학서보다 이들이 긍정적인 생명관을 갖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노벨문학상은 사후에는  수여되지 않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상수상자로 선생을 기대할 수는 없게되었습니다. 미국의 펄 S. 벅 여사는 1938년 그녀의 소설 “대지(The Good Earth)”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 번 읽은 것이어서 메뚜기 떼가 밭을 습격해 애써 지은 농사를 다 망치게 한 내용 외에는 이렇다하게 기억나는 내용이 없습니다만, 선생의 “토지”가 펄 S. 벅 여사의 “대지”에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제 좁은 생각입니다. 여사의 "대지“가 중국농민의 애환을 그린 것이라면 선생의 토지는 나라를 잃어가고 끝내 잃어버린 우리 한민족의 모진 삶을 그린 것으로, 서양인의 눈으로 그려낸 동양인의 삶이 서양의 독자들에 감동을 불러일으켰다면, 동양인인 선생께서 우리 한민족의 삶을 진지하게 그려낸 ”토지“가 제대로 번역되어 서양의 문학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다면 저는 ”토지“를 읽는 서양의 독자들도 "대지" 못지 않게 깊은 감명을 받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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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리토지문화관을 나와 원주경찰서 인근의 나전칠기전시장을 들렀습니다.

정성스런 손길이 가야 예술이 완성되는 것은 나전칠기나 소설쓰기나 매한가지다 싶었습니다. 서울의 동숭동으로 돌아와 한 호프집을 들러 맥주를 마시며 박경리선생과의 즐거운 만남을 마무리했습니다.

 

 

 

  이번 탐방을 주선한 하보경팀장님, 원주에서 안내를 맡아주신 오태권 선생님, 맛있는 점심을 내신 김오녀선배님과 거금을 쾌척해 서울로 돌아와 알콜 결핍증을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김경숙선배님, 오며 가며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회원들에 즐거움을 안겨준 임동숙 부팀장님, 파주가 낳은 우리의 영원한 진사로 인절미를 돌린 박선녀선배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건배제창을 맡아주신 여한구 선배님, 스튜어디스를 뺨치는 서비스를 제공하신 미녀 3총사님들, 숨겨두었던 속을 까뒤집어 내보이느라 고민들을 많이 했을 “자기자랑”프로그램 참가회원님들, 끝내 마이크 잡기를 거부한 1학년 새내기 몇 님들의 현운재회원님들과 팀장께서 초대하신 두 분등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하에 계신 박경리선생께서도 무더운 더위에 당신을 뵙고자 문학공원과 토지문화관을 찾은 우리 현운재 회원들께 고마워하는 뜻을 전해줄 것을 제게 말씀 주셔서 이렇게 부기합니다. ,

 

 

 

 

 

                                                         <탐방사진>

 

 

                                                   1)서울 동숭동에서 

 

 

 

 

 

 

2)박경리문학공원에서

 

 

 

 

 

 

 

 

 

 

 

 

 

 

 

 

 

 

 

 

 

 

 

 

 

 

 

 

 

 

 

 

 

 

 

 

 

 

 

 

 

 

 

 

 

 

 

 

 

 

 

 

 

 

 

 

 

 

 

 

 

3)박경리 토지문화관에서

 

 

 

 

 

 

 

 

 

 

 

 

 

 

 

 

 

 

 

 

 

 

 

 

 

 

 

 

 

4)서울로 돌아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