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고 24회 가을 여행기
*여행일자:2010. 9. 14일(화)-15일(수)
*여행지 :경북 경주및 포항일원
-제1일(9.14일):서울-포항 포스코-호미곶-포스텍캠퍼스
-제2일(9.15일):경주 양동마을-연꽃단지-불국사-석굴암-대릉원-서울
*동행 :경동고24회 동문110명
처서가 지나서도 비를 뿌리며 지분대는 여름을 태풍 곤파스와 말로가 이 땅에서 확실하게 내몰아 논 뜰에 내려앉은 가을이 비로소 제 색깔을 냈습니다. 경동고교 24회 동문들과 모처럼 함께 떠난 가을여행이 순조로웠던 것은 여름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낸 가을 날씨가 한몫을 한데다 회장단의 세심한 배려가 더해진 덕분입니다.
옛 성 밖 뫼 뿌리에 우뚝 선 경동 교정을 같이 다닌 물리적 시간은 3년에 불과하지만 가슴 속 깊숙이 면면히 이어온 인연의 세월은 반세기가 거의 다 되갑니다.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동문들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오래 묻어두었던 옛 추억이 모락모락 되살아나는 것은 꿈 많던 10대 후반의 소중한 3년을 한 교정에서 함께 보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한 것들에 세월을 덧입히면 추억이 되고 집단의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면 역사가 됩니다. 백로를 하루 앞두고 경북 남동권의 중심도시인 포항과 경주를 찾아 함께 나선 것도 추억 만들기의 일환이라면 소중한 추억거리들을 기록으로 남겨 역사에 넘겨주는 것은 누구라도 해야 할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이어서 가을여행을 실무적으로 챙겨온 김주홍 부회장께 그런 기록을 저도 일부 맡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이번 여행이 단순히 즐거움만 추구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회장단이 굳이 멀고 구석진 포항과 경주를 탐방지로 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졸업한 경동고의 명성에 걸맞도록 즐거움에 보람을 추가하고자 회장단이 숙고를 거듭한 끝에 포항과 경주로 정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 했기에 이번 가을여행이 즐겁고 보람있었다고 자신 있게 고하는 바입니다.
잠실운동장 역에서 버스 4대에 분승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이번 여행에 참여한 동문은 동반한 46명의 경동여고생들을 포함해 모두 110명이라 합니다. 멀리 LA에서 건너 온 임길성동문, 울진에서 달려와 만찬에 참석하고 그 밤으로 돌아간 이종규 동문, 마지막날 고래고기를 사들고 경주의 점심자리에 합류한 울산의 최인환동문이 함께 했음을 기록해 둡니다.
1.9월14일(화):서울-포항 포스코-호미곶-포스텍도서관-국제관
이번 여행을 위해 여행용 손가방과 운동화를 대용할 릿지화를 새로 장만했습니다. 마치 초등학교를 다닐 때 소풍 길에 나선 것처럼 들떠 정해진 시간보다 15분 빠른 7시30분에 잠실운동장에 도착했습니다. 꽤 많은 동문들이 먼저 와 기다리는 것을 보고 이번 여행으로 들 뜬 사람이 저 혼자가 아니다 했습니다. 오전 8시 조금 넘어 운동장을 출발한 버스는 여주 휴게소를 들러 대기 중인 6명의 동문들을 태웠습니다. 들뜬 마음에 전날 잠을 설쳐서인지 대부분의 동문들이 눈을 붙여 버스 안에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선산휴게소에서 점심을 사든 후 포항으로 직행했습니다. 형산강을 건너 포스코 역사관을 방문하는 것으로 여행 일정이 시작됐습니다.
1)포스코
첫 번째 탐방지는 제철로 대한민국에 보국한 포스코입니다. 이 회사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역사관, 홍보관과 공장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1968년 설립된 포스코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보고 들었으며 철광석과 코크스 그리고 석회석을 주원료로 하여 현대산업의 쌀인 철을 만드는 생산현장도 둘러보았습니다.
포항의 현대사는 포스코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포스코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동해안의 후미진 포구로 머물렀을 포항의 오늘을 예측한 한시를 조선조 풍수지리학자인 이성지가 썼다하여 이야기되나 봅니다. 포스코 공장의 굴뚝을 대나무에 비유한 것이 조금은 견강부회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시가 주는 일면의 가치가 독자들에 상상력을 부여하는 일이기에 그리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철기문명은 포스코가 꽃피웠습니다.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에 따르면 한반도의 예맥족이 동이족으로부터 철기문화를 받아들인 것이 기원전 1000년경이라 하니 이땅에서 철이 사용된 지도 얼추 3천년이 됩니다만, 포스코가 설립되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철이 대장간에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나룻배를 만드는 솜씨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조선을 만들 수 없듯이 여러 개의 대장간을 하나로 합친다고 저절로 제철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20세기가 가기 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회장이라는 걸출한 두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나라 제철산업은 아직도 대장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 포스코를 둘러보고 두 지도자의 상상력이 포항의 역사를 바꿨고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공장을 견학하는 중 시뻘건 슬라브가 KTX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포스코인들의 비전에 대한 열정이 저처럼 뜨겁고 또 비전을 이루기 위해 일을 추진하는 속도가 저토록 빠를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작년 한 해 이 회사의 사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우리의 회장 이동희 동문이 한 없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역사관과 홍보관에 이어 생산현장을 견학하면서 이 땅에 포스코가 있어 대한민국은 쉼 없이 발전을 거듭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2)호미곶
포스코를 둘러보고 다음으로 찾은 곳은 호미곶 마을입니다.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며 구룡포를 지나 한반도 최동단에 자리한 호미곶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일찍이 고산자 김정호 선생께서 일곱 번이나 이곳을 방문해 호미곶이 해가 제일 먼저 뜨는 한반도 최동단의 땅끝 마을임을 확인했다 합니다. 장대한 해맞이의 명소로 알려진 호미곶에 도착해 장엄한 해넘이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일망무제의 시원스런 바다를 바라다보자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한반도의 지형이 호랑이를 닮았느냐 아니면 토끼를 닮았느냐 판가름하는데 결정적 정보를 제공하는 지명이 바로 호미곶(虎尾串)입니다. 일본제국이 주장한대로 토끼를 닮았다면 이곳의 지명이 호랑이꼬리를 뜻하는 호미곶(虎尾串)이 아니고 토미곶(兎尾串)으로 전해져야 맞습니다. 일본제국은 이곳에 쇠말뚝을 박고 토끼꼬리로 비하해 불렀지만 16세기 조선 명종 때 풍수지리학자인 격암 남사고 선생께서 우리나라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곳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 곳이 바로 호미곶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호랑이의 기상을 빼어 닮은 우리나라가 1945년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세계 10 몇 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입니다.
호미곶이 저희들에 던져준 화두는 상생입니다. 서로 죽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상생이 중요합니다.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고 현지주민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살고 바다와 육지가 공존하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고자 이곳에 커다란 “상생의 손”을 바다에 세워 놓고 이 아름다운 상생이 천년 넘게 지속될 수 있도록 “새천년기념관”을 세웠을 것입니다.
경동24회 동창들의 상생을 약속하는 기념사진을 찍은 후 포스텍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3)포스텍 및 국제관 만찬
포스코가 자랑하는 포스텍(POSTECH)은 포항공대로도 잘 알려진 대학교입니다. 2010 더 타임스 세계대학 평가에서 국내대학 최고로 28위에 랭크된 포스텍은 포스코의 보물이자 이 나라의 자랑입니다. 포스텍을 세계명문대학으로 끌어올린 데는 포스텍의 명품 도서관의 역할이 컸을 것입니다. 이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서야 국제관에서 만찬을 시작할 수 있었으니 이날 하루 일정은 44년 전의 수학여행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1968년에 포스코가 창립될 때 우리의 회장 이동희 동문은 저희들과 함께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이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시작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동희동문의 졸업과 포스코의 창립은 모두 새로운 시작입니다. 몇 년 후 이동희동문은 포스코에 입사해 열심히 일했고 작년 한 해 사장직을 성공리에 수행해 포스코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다는 회장의 인사말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세상에 악연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꽤 많은 데 이보다 아름다운 인연이 또 있을까 싶었고 이런 인연이 이 나라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자 고맙기도 해서였습니다.
뷔페식 만찬이 어느 정도 끝날 즈음 비로소 여흥 프로그램이 시작됐습니다. 입담 좋은 7반 장용진군의 사회로 반대항 노래시합이 진행됐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압권은 멀리 로스앤젤러스에서 날아온 임길성 군의 독창이었습니다. 보청기의 도움을 받고 있는 임동문은 반주의 도움이 무용하다며 완벽한 의미에서 홀로 노래를 열창해 뜨거운 감동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경동여고 동문들의 노래솜씨는 춤 솜씨가 뒷받침되어 더욱 빛났습니다. 여흥은 조금 아쉽고 미진할 때 끝내야 뒷맛이 좋게 남습니다. 이리 끝낼 수는 없다는 동문들은 모두다 회장이 한 턱 내는 통나무집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를 들어 알코올 결핍증을 해소했습니다. 포스텍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이 저희들을 반겨 자리가 더욱 빛난 마지막 여흥도 시간을 비껴가지는 못해 자정이 조금 못되어 마쳐야 했습니다. 부부동반 동문들은 국제관으로 그리고 저 같은 독신들은 교수아파트로 나뉘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2.9월15일(수):포스텍국제관-경주 양동마을-연꽃군락지-불국사-석굴암-대릉원-서울
국제관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경주일원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천년고도 경주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64년 가을 시골중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그 때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기 바빠 뭐하나 제대로 본 것이 없고 하나 생각나는 것은 다보탑과 석가탑이 들어앉은 불국사가 엄청 큰 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가 그 당시 장안, 바그다드 및 이스탐불과 더불어 세계 4대도시의 하나였다는 이야기를 한 교수로부터 듣고 나서 과연 그랬을까 의문을 품어왔는데 이번 여행이 이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경주는 신라의 천년고도답게 볼 것도 많고 적을 것도 적지 않아 대부분의 기록은 손쉬운 카메라에 맡겼습니다. 이번 여행은 따로 공부한 것이 없어 신라와의 대화가 많이 서툴고 부족할 것입니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대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번 여행은 다음 번 경주나들이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자 준비 없이 참여한 이번 여행이 절대로 무용한 것이 아니며 동참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경주 양동마을
둘 째 날 첫 번째 방문지는 올 들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입니다. 양동마을보다 먼저 지정된 문화유산은 하회마을 등 9개소에 이릅니다. 6년마다 레포트를 제출해 기간연장 여부를 심사받는 유네스코 문화재는 국내에 모두 10개소인데 그 중 자연문화유산으로는 등록된 것은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유일합니다.
10번째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여러모로 하회마을과 대비됩니다. 하회마을이 서애 유성룡을 배출한 풍산유씨의 집성촌이라면 여기 양동마을은 회제 이언적의 여강이씨와 우제 손중돈의 월성손씨 두 명가가 키운 반촌입니다. 하회마을이 낙동강 강변에 자리한 평지의 둥그런 형태의 마을이라면 양동마을은 그리 높지 않은 설창산 중턱에 자리한 길쭉한 모양의 마을입니다.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여왕께서는 하회마을을 방문하셨고 이보다 7년 앞서 찰스황태자가 양동마을을 방문했다 하니 바깥세상에 알려진 것은 양동마을이 먼저일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외국손님을 모시고 이곳을 다녀간 이규성 동문의 안내로 이곳 저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첫 번째 들른 관가정은 우재(愚齋) 손중돈(孫仲墩, 1463-1529)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으로 3칸짜리 대청마루가 시원해 보였습니다. 관가정에서 태기천(?) 너머로 건너다보이는 너른 논 뜰이 이곳 반촌의 양반들을 먹여 살렸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향단(香壇)으로 중종임금께서 경상도 관찰사로 있는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 병환 중인 모친을 모시고 살라고 지어준 집이라 합니다. 겉보기로는 향단이 관가정보다 더 커 보여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출입이 금지되어 그냥 돌아섰습니다. 큰 길로 내려가 안쪽으로 한참동안 들어가 손씨 종택인 서백당(書百堂)을 다녀왔습니다. 후원이 꽤 넓어 보이는 서백당은 일자(一字)형의 대문채 안에 “ㅁ"자형의 안채가 있다는데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종가로서 격식을 제대로 갖춘 큰 가옥으로 사랑마당의 향나무는 도 기념품으로 지정된 고목입니다. 섬진강 산줄기환주기를 내용으로 출간할 제 책에 넣을 인물사진을 찍느라 애쓴 이규성 동문에 고마워하면서 양동마을을 떠났습니다.
2)연꽃 군락지
양동마을 떠나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첨성대에서 멀지 않은 연꽃 군락지입니다. 도로변에 넓게 자리 잡은 연꽃 군락지를 둘러보는 동문부인들의 여심은 연꽃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마음과 부처님의 자비로움에 감읍하는 마음이 더해졌을 것입니다. 연꽃의 아름다움은 그 자태보다도 그 꽃이 피어난 환경에 있습니다. 진흙탕을 마다 않고 뿌리를 내려 넓은 잎으로 더러운 물을 가린 후 꽃 한 대에 딱 한 송이의 소담한 꽃을 피우는 연꽃은 서양의 장미꽃처럼 열정적이지는 않지만 부처님의 미소를 빼어 닮은 듯 온화하고 고귀해보여 많은 여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꽃입니다.
사전답사 차 이곳을 다녀온 김주홍 부회장은 그때보다 꽃이 못하다 했는데 제 눈에는 과분할 정도로 탐스럽고 화사해 보였습니다. 천년고도 경주의 향취가 여기 연꽃과 더불어 세월을 뛰어넘어 오래 오래 전파될 것이기에 별반 아쉬워하지 않고 불국사로 이동했습니다.
3)불국사
경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를 하나 꼽으라면 불국사가 으뜸일 것입니다. 석굴암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 절은 오랜 역사는 물론 건축물의 조형미가 뛰어나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가람이어서 저 또한 1964년에 이 절을 처음 찾은 이래 세 번을 더 찾아온 것입니다.
불국사 앞 백운교와 청운교가 이 절 마당까지 물이 차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건축과 교수인 이규성 동문은 모든 다리가 물위에 놓인 것이 아니고 맨 땅위에 설치하는 오버 브리지도 있다는 제 설명에 수긍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대웅전 앞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유난히 커 보인 것은 대웅전이 엄청 작아 보여 더했을 것입니다. 그간 이절보다 훨씬 큰 절들을 많이 보아서인지 여기 대웅전은 정말 작아보였고 그 안에 모신 부처님은 더욱 작아보여 오히려 대찰의 부처님보다 훨씬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절의 창건 시기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불국사사적”은 신라의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바 이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그 다음은 법흥왕 때 지은 것으로 나와 있는 “불국사고금창기”의 기록이고, 마지막 기록은 삼국유사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경덕왕 때 현세의 부모님을 위해 김대성이 착공해 사후 완공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을 따르든 천년을 훌쩍 넘기에 독립된 지 3백년도 안된 나라사람들이 이절을 보고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국사 자랑만으로도 몇 페이지가 필요하기에 이만 약하고 석굴암으로 향했습니다.
4)석굴암
해발745m의 토함산 정상 가까이에 불국사 석굴암이 착공된 것은 경덕왕 10년인 751년이고 완공된 것은 혜공왕 10년인 774년이라 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한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전세의 부모를 위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석굴암인 석불사라 합니다. 석굴암 건축에 무려 24년이 걸려 착공한 김대성이 마치지 못하고 그 다음 왕에 이르러서야 완공됐습니다. 이토록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은 화강암을 깎아 정교한 석불을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서였을 것입니다.
불국사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1995년의 일이니 창건된 지 1221년 만에 맞는 경사였습니다. 석굴암의 예술성과 화강암을 깎아 만든 장인들의 예술에 대한 열정이 석굴암이 세계문화재로 지정된 데 많이 반영됐을 것입니다. 건축, 수리, 기하학과 종교 및 예술이 총 망라되어 빚어낸 석굴암이기에 1962년에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고 그 33년 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재로 등록된 것입니다.
이러한 석굴암은 본래 앞이 개방되어 한 가운데 좌정한 석가여래께서 동해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았습니다. 제가 1964년에 찾아올 때만 해도 그러했는데 이번에 와보니 앞이 가로 막히고 석불이 모셔진 공간도 밀폐되어 부처님께서 많이 갑갑해하실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일제 강점 초기 밀반출하려던 일본인의 기도를 좌절시켜 제 자리를 지켰음에도 후손인 저희들이 결로현상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부처님 앞을 가로 막고 방에 가둬두어야 한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혹시라도 밀페된 공간에 자리한 석불에 손상이 갈까 염려해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나오고 나자 김대성 재상과 석굴암 역사에 동원된 장인들에 고개를 들 수 없어 서둘러 하산했습니다.
5)대릉원
대릉원은 천마총으로 널리 알려진 경주 황남리 고분군을 이릅니다. 신라의 미추왕릉, 내물왕릉 등이 이 고분군에 포함되어 있으며, 18대 실성왕에서 22대 지증왕에 이르는 다섯 왕들의 무덤들도 이 고분군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합니다.
볼록한 경주의 고분들을 보노라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젓 가슴에 묻혀 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합니다. 고분 안에서 발굴된 금관들을 보노라면 신라인들의 정교한 세공기술에 감탄하기는 해도 둥그런 봉분을 보는 것만큼 아늑하거나 편안하지 못합니다. 왕들의 값나가는 순장 품과 더불어 같이 묻혔을 노예들이 생각나 고분의 역사를 마냥 너그럽게 볼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라의 지증왕이 노예의 순장을 금한 것이 502년의 일이니 신라초기의 무덤인 여기 고분들에는 틀림없이 노예들도 같이 묻혔을 것입니다.
여기 고분군들도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으니 조선왕릉보다 10년 빨리 등록된 셈입니다. 조선왕릉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지만 신라의 고분은 고분 안에 묻힌 순장품들이 빛을 본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마총 안에서 해설사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순장문화에 긍정적이지 못한 제게는 그리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천마총에서 나와 다른 묘들의 잔디를 다듬는 아주머니들을 보았습니다. 신라의 왕들이 죽어서도 후손들의 일자리를 만든 점은 가감 없이 그만큼 고마워할 뿐입니다.
3.가을여행을 마치며
대릉원 탐방을 마지막으로 공식프로그램을 끝내고 버스에 올라 상경했습니다. 회장단에서 준비한 선물이 푸짐해 배낭 대신 작은 여행 가방을 사가지고 온 것이 후회됐습니다. 짧지 않은 이틀이 꿈같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요리조리 핑계 대며 동창회 행사에 불참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번에도 김주홍 부회장의 강권이 없었다면 다른 때처럼 스리슬쩍 빠졌을 터인데 어쨌든 참여해 가을여행을 감동적으로 마치고 나자 새삼 고마웠습니다. 이번 여행에 처음 나온 저를 환대해준 모든 동문들에 감사드립니다. 꼼꼼히 준비하고 챙겨준 회장단에 감사를 표합니다. 이래서 국적은 바꿔도 학적은 바꿀 수 없나 봅니다.
필력이 달려 졸고를 매듭짓는데 힘이 많이 들었습니다. 글이 장황해 송구스럽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글이나마 기쁜 마음으로 올립니다.
<탐방사진>
1.9월14일(화)
1)포스코
2)호미곶
3)포스텍
2.9월15일(수)
1)포스텍
2)경주 양동마을
3)연꽃군락지
4)불국사
5)석굴암
5)대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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