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4.순천명소 탐방기2(낙안읍성 민속마을/주암 고인돌공원 )

시인마뇽 2007. 7. 2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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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방일자:2007. 7. 23일

                                *탐방지   :전남순천소재 낙안읍성 민속마을/주암 고인돌 공원 

                                *동행      :나홀로

 


  생각지 않은 시간을 덤으로 얻고 나서 어떻게 쓸까 잠시 고심했습니다.

호남정맥 8구간 종주를 마치고 저녁 8시가 조금 넘어 순천터미널에 도착하자 서울 가는 차편이 끊어져 당황했습니다. 기다렸다가 심야버스나 밤차를 타고 올라갈 까 아니면 하룻밤 더 찜질방에서 묵고 이참에 지난 3월 스쳐보았던 송광사를 자세히 둘러본 후 선암사로 넘어가볼까 궁리하다가 대찰의 고요한 아침풍경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해 하루를 더 묵고 송광사를 둘러보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꺼내 입고자 했으나 이틀 연속 호남정맥을 종주하느라 등산복과 양말에서 모두 비와 땀에 쪄든 냄새가 진동해 다시 비닐주머니로 싸서 배낭 속에 쳐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4-5시간 산길을 걸어야 하는 송광사-선암사 행을 포기하고 반바지와 티셔츠만 입고 나다닐 수 있는 평지길 명소로 행선지를 바꾸기로 하고 적당한 곳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내 떠오른 명소가 시내버스로 4-5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낙원읍성민속마을이었습니다.


I. 고인돌공원

  순천역 버스정류장에서 올라 탄 63번 시내버스의 종점이 고인돌공원이었습니다. 

민속마을에서 내리지 않고 내친 김에 종점까지 가서 고인돌공원을 먼저 둘러보았습니다. 순천역에서 한 시간 정도 걸려 고인돌공원 앞에 도착한 시각이 아침7시35분이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일러 잠겨 있는 자바 문을 가볍게 뛰어넘자 개소리가 요란했습니다. 매표소에는 직원이 나와 있어 입장료700원을 내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선사시대의 문화유산과 같이한 시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 광주시와 여천 및 광양공업지구에 전력 및 용수를 공급하고 섬진강하류의 홍수방지를 위해 주암댐을 건설했는데 이 댐공사로 수몰된 인근지역의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유적들을 옮겨 한 곳에 전시해 놓은 선사유적공원이 바로 주암면에 자리한 이 공원이어서 엄청난 쾌속으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고인돌이란 “지상이나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의 일종”으로 팜플렛에 안내되어 있습니다.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의 탁자식고인돌, 남방식의 기반식고인돌 그리고 무덤방 위에 바로 덮개돌을 올려놓은 개석식고인돌로 나누어집니다. 전시된  고인돌 중 탁자식 고인돌은 모형이었고 실물의 대부분은 개석식고인돌이었습니다. 어떤 모양의 고인돌이든 그 커다란 덮개돌을 어떻게 운반해와 올려놓았는가가 가장 궁금했는데 이 궁금증은 전시관에 전시된 고인돌축조과정모형을 보고 어느 정도 풀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줄로 끌고 밑에다 나무를 대어 덮개돌이 땅에 직접 닿지 않도록 해 마찰을 최소로 한 모형을 보고 몇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우선 당시의 우리 조상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보통 깊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커다란 돌을 그토록 힘들게 운반할 일이 있겠나싶어서였습니다. 두 번째로 고인돌을 세운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며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했다는 생각입니다. 덮개돌 운반을 지휘하는 지도자와 돌을 운반하는 많은 사람들과는 명령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큰 돌이 그냥 큰 돌이 아니고 그 때의 의사소통이 깃들어 있는 문화유적인 것입니다.


  유물전시관의 각종유물들은 다른 곳에서라면 그저 그런 돌들로 보일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뗀석기의 유물들은 수집과 채취로 먹이를 구했던 구석기시대에는 더 할 수 없이 훌륭한 무기이자 연장으로 곧선사람의 호모에렉투스가 손을 확장한 진화의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간석기시대의 유물과 청동기시대의 유물들도 같이 진열된 전시관을 둘러본 후 야외공원에 전시된 고인돌과 움집을 가까이서 관찰했습니다. 무덤방 고인돌과 원시적 주거형태인 움집을 보고 살 집은 간단히 질 수 있었지만 죽은 이들의 무덤은 힘을 합치지 않았다면 만들지 못했을 것이기에 이 때는 이미 인류가 마지막단계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하고 난 훨씬 뒤의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원시인류에서 호모하빌리스, 호모에렉투스, 호모사피엔스를 차례로 거쳐 5만 년 전 쯤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되기까지 몇 백만 년 동안 아주 더디게 진화해온 인류가 더 이상 진화할 무엇이 남아 있다고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변화를 추구하는가 싶어 혹시나 인류가 지구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같이 들었습니다.


  고고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없어 공원에 전시된 유물들을 둘러보는데 4-50분밖에 안 걸렸습니다. 쉼 막에서 반시간 가까이 쉬면서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떠 올렸습니다. 집 가까이의 들에 나가 땅을 파서 토굴을 만들기도 했고 숲 속에 들어가 아카시아나무들을 베어내고 간이 움막을 세워 놀던 생각이 났습니다. 더 커서 산을 오르며 임시 막사로 텐트를 치곤했던 것도 제 몸속에는 선사시대의 주거문화가 원류로서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싶었습니다.


II. 낙안읍성 민속마을

  아침9시에 고인돌공원을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1993년 여름 모회사 영업부장으로 일 할 때 광주영업소 직원들과 함께 민물매운탕을 먹으러 왔던 곳이 바로 고인돌 공원 인근임이 비로소 생각났습니다. 30분을 달려 아침에 지났던 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하차했습니다. 입장료 2천원을 내고 성안으로 들어서자 조선조중기의 한 읍내 거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성곽 1,410m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관아와 9동의 중요민소자료 등 민가와 한국 전래의 토속적인 민속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고, 세시풍속과 통과의례등 전통생활문화를 지켜온 주민들이 직접 살고 있는 민속마을”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 오른 백이산과 금전산, 오봉산과 재석산이 빙 둘러 싼 분지여서 아늑한 느낌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성문을 지나 민속가옥 몇 채를 둘러본 후 대표적인 관아인 동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고을현감이 죄인을 심문하는 현장을 재현해 놓은 동헌은 그렇지 않아도 초가집의 민속가옥에 비해 엄청 큰 규모의 건물이어서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더욱 위압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동헌 왼쪽에 붙어 있는 현감 관사를 둘러보자 며칠이고 묵어가고 싶은 욕심이 일었습니다. 기본적인 구조는 어렸을 때 살았던 시골 옛집과 거의 같았으나 규모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옛날로 돌아가 저런 큰 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아보고 싶은 속물적 욕심이 일은 것은 그 때의 삶은 생활이 아닌 생존차원의 것이어서 한번 풍족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들른 향토미술관 및 자료전시관은 또다시 저를 어린 시절의 시골로 안내했습니다.

조선조 시대의 유물이라 해도 어렸을 때 시골에서 웬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아온 터라 그리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1960년대부터 약 4-50년간 우리나라가 급격하게 변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 변화는 바로 한강의 기적이 일군 산업혁명입니다. 이러한 혁명적변화가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고향에서 농사를 지며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갈 것입니다. 제 시골 촌가들이 이 읍성의 민속가옥과 비슷해 굳이 여기까지 멀리 찾아올 일도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유물이 과거의 삶의 흔적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는 역할도 함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유명한 사학자가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고 했나봅니다. 


  1.4Km의 성곽을 올라 한바퀴 빙 둘러 보았습니다.

관아와 민가, 그리고 밭떼기들이 붙어 있는 읍안은 사람들이 상주하는 마을이었습니다. 관아와 민가를 묶어 빙 둘러 성곽을 쌓은 것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기 때문으로 임경업장군이 인조4년(1626년) 이곳 낙안 군수로 부임해 토성을 지금의 석성으로 바꾸어 쌓았다합니다. 대부분의 민가들이 주민들이 살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서 볼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이 살지 않는 신갈의 민속촌보다는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성곽에서 내려와 부지런히 민가들을 들러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즐겨 따 먹었던 목화도 반가웠고 토담 길도 정감 있어 보였습니다. 집을 지키는 할머니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씀들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이곳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떠나 사는 자식들이 이 다음에 이곳에 내려와 살지는 저 할머니들도 궁금해 하실 것입니다.


  읍내를 대충 둘러보고 보리밥을 사들었습니다.

곁들인 반찬들이 집에 싸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깔스럽고 풍성했습니다. 파를 다듬느라 바쁘게 움직이는 주인할머니의 손놀림을 보고 18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채소갈이로 저를 대학까지 보낸 어머니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습니다. 심지어 큰 며느리와 대판 싸울 때도 입으로는 연신 며느리를 나무라면서도 손으로는 계속해 채소를 다듬었습니다. 그렇게 다듬은 채소를 단을 묶어 이튿날 새벽 인근 기지촌인 용주골에 내다 팔곤 했는데 그때 저도 지게로 채소 단을 저 나르곤 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올렸더니 주인할머니께서 지금은 그리 며느리를 나무랐다가는 거의 다 짐을 싼다며 옛날 이야기라고 씁쓰레했습니다. 


  주마간산 격으로 시간 반 쯤 돌아본 후 순천행 버스를 탔습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둘러보며 무엇을 배웠기보다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데 멈추어 아쉽기는 했지만 모처럼 과거의 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III. 시간여행을 마치고

  구석기시대의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가 조선조로 돌아온 이번의 시간여행은 유홍준님의 문화유산답사에 비할 바가 전혀 못 됩니다. 별안간 결정한 일이어서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설사 시간을 갖고서 탐방지를 미리 결정했다 하더라도 저는 그분의 답사기를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제 나이가 벌써 집에서 부르는 나이로 육십이기에 남의 눈이 아닌 제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번 시간여행을 마치고 나서 터득한 것은 구석기시대이든 조선조 시대이든 또 지금의 시대이든 우리 인류의 삶은 언제고 진지했고 그래서 그 흔적들도 어디서 많이 보아온 듯이 정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며 가능한 한 짬을 내어 인근 유적지를 들러보겠다는 욕심이 일은 것도 이번 시간여행에서 얻은 작은 수확입니다.     



 I.주암 고인돌 공원사진 

 

 

 

 

 

 

 

 

II.낙안읍성 민속마을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