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맥구간:옥산동고개-성수산-서구이치
*산행일자:2008. 7. 31일(목)
*소재지 :전북진안/장수
*산높이 :성수산1,059m, 시루봉1,110m, 삿갓봉1,114m
*산행코스:사옥마을-옥산동고개-성수산-신광치-시루봉
-삿갓봉-오계치-1070봉-서구이치
*산행시간:9시50분-19시42분(9시간52분)
*동행 :나홀로
우리나라 도시의 아파트들은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철거하고 다시 짓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지은 지가 오래된 서울 시내 아파트들이 더 이상 손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헐고 다시 짓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부를 늘릴 목적으로 재건축을 하는 것이기에 붕괴위험이 다분한 아파트의 재건축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고 서울시장을 성토하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결사투쟁을 외치면서도 그 위험하다는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는 주민들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해 쓸 만 한 집을 헐어내고 다시 짓는 것이라면 그 새로 짓는 집이 어떠하든 “즐거운 곳에서 날 오라 하여도 내 편히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스위트 홈(sweet home)과는 별반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정붙이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가격으로 표시되는교환가치가 아니고 만족으로 나타나는 사용가치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작은 집에 살거나 시골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불만족해 행복감을 전혀 느낄 수 없어야하는데 실제는 그 반대 경우가 더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면서 자기만족지수인 사용가치에는 눈감으면서 매사를 교환가치만 좇아다닌다면 자기 삶에 만족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교환가치를 좇는다는 것은 상한선이 없는 무한 욕망을 쫓는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금남호남정맥 종주 길에 슬레이트 지붕의 한 폐옥을 보았습니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어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시골의 폐옥을 바라보다가 어쩌면 우리네 삶의 여정도 저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폐옥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도시의 집들은 사서 헐어버리더라도 땅은 남는 것이기에 땅 보고 사겠다는 사람들이 있어 교환가치가 남는데 산골 벽촌의 슬레이트 지붕 집이라면 사겠다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어 폐옥으로 남게 되고 당연 교환가치도 사라집니다. 아무리 누추해도 누구라도 살고 있으면 사용가치는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해 교환가치조차 사라진 폐옥을 바라보다가 제 삶이 이와 같아서는 안 될 텐데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어 한창 때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 교환가치를 한껏 높였던 사람들이 나이 들어 일터에서 물러나면 그들의 교환가치는 사라지고 오직 사람됨이 어떠한가를 가늠하는 내재적 가치만 남게 됩니다. 멀쩡했던 집도 사람들이 떠나면 폐옥이 되듯이 잘나가던 이들도 사람들이 모두 곁을 떠나버리면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다음 병들고 늙어 더 이상 교환가치가 남아 있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친구와 자식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와 시간을 같이하는 가는 전적으로 그동안 그가 함양해온 내재적 가치에 달려 있기에 더 늙기 전에 잠시 자기 삶을 성찰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침5시30분 강남을 출발하는 전주행 첫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첫 차 치고는 빈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휴가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분명합니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옮겨 25분을 기다렸다가 9시30분에 사옥리가는 군내버스에 올랐습니다. 시골 길을 달려 회차 지점인 사옥리에 다다르기까지 약 20분 동안 브랜드가치에 관심이 깊은 버스기사분이 사옥리의 내력을 들려주었습니다. 익산군과 이리시를 통합할 때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익산시로 통합시의 명칭을 정했듯이, 몇 해 전 사인리와 옥산리를 통합할 때 침을 잘 놓기로 호남 땅 전역에 이름난 노인 한 분이 사셨던 사인리로 통합마을의 이름을 정했어야 했는데, 옥산리주민들의 반대로 사옥리로 정했다며 이 바람에 이 지역의 브랜드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이 분이 들려준 이야기였습니다.
오전9시50분 버스에서 하차해 사옥리 마을을 출발했습니다.
트랙터가 지날 만한 넓은 길을 따라 옥산동고개로 오르는 중 을씨년스러운 폐옥을 지났습니다. 마을출발 9분 후인 9시58분에 마루금이 지나는 옥산동고개에 다다라 오른 쪽 임도로 들어섰습니다. 임도 따라 묘지 2곳을 지나자 넓은 길이 끝나고 숲 속 오솔 길이 시작됐습니다. 산허리에 난 오름 길은 능선삼거리에 올라서기까지 계속 가팔랐습니다. 고도 550m 대의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계속 올라 산행시작 40분 만에 헬기장에 다다랐습니다. 삼각점이 세워진 해발고도 709.8m의 헬기장에서 고도계를 보정한 후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모처럼 하늘에서 조개구름을 보자 몇 주 째 계속되는 주말오보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기상청이 생각났습니다. 기상청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국지성호우이기에 한 여름의 산악기상예보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올라가 앉으면 엄청 푹신할 것 같은 조개구름이 어느 한 순간 시꺼먼 먹구름으로 변한다 싶다가 이내 천둥번개로 온 산이 요동치고 억수같이 퍼붓는 비로 모든 길이 수로로 바뀌는 등 산상의 평화를 한 순간에 깨뜨리는 국지성호우가 기상청을 골탕 먹이는 일이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것 같습니다.
11시40분 890봉에 올랐습니다.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완만한 길을 따라 얼마간 진행하다가 가파른 길로 올라선 770m대의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가 표지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명의 삼각봉에 올랐습니다. 섭씨30도를 넘는다는 기상청의 예보대로 날씨는 후덥지근했지만 그늘진 능선 길에서는 아직은 지열이 느껴지지 않아 참을 만 했습니다. 고도 770m대의 봉우리를 두 개 더 넘어 조금 내려갔다가 바위 길을 올라 890봉에 도착했습니다. 12분간 쉬면서 복숭아를 꺼내 든 후 왼쪽으로 내려가 키를 넘는 산죽사이로 난 길을 따라 10분 가까이 걸었습니다. 다시 가파른 비알 길을 따라 990m대의 공터가 좁은 무명봉으로 오르는 중 운모를 만났습니다. 빛나는 모든 것이 금은 아니라는 서양격언은 운모를 보더라도 맞는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고기비늘 같은 얇은 박막이 몇 겹 겹쳐진 운모는 햇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 쉽게 몸을 드러내지만, 7개 정맥을 종주하며 한북정맥의 복주산 구간과 금남호남정맥의 이곳에서만 만나본 정도여서 그리 흔한 광물은 아닌 듯합니다.
13시 정각 해발1,059m의 성수산을 올랐습니다.
990m대의 무명봉에서 조금씩 고도를 낮추어 900m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 쪽으로 휘돌며 올라가 헬기장을 지났는데 어느새 훌쩍 커버린 노랑꽃의 마타리와 소담스런 원추리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깨진 독 조각 몇 개가 눈에 띄는 헬기장에서 10분을 더 걸어 삼각점과 표지봉이 서있는 성수산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멈춰 뭉게구름과 조개구름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목덜미를 내리쬐는 여름태양이 만만하지 않아 3-4분을 더 걸어 내려가 그늘진 곳에다 자리 잡고 점심을 들었습니다. 성수산에서 15분 남짓 걸어 풀숲이 우거진 개활지로 들어섰습니다. 멀리서는 반듯한 초원처럼 보이는 개활지에서 쨍쨍 내리쬐는 땡볕을 피하지 못하고 키를 넘는 풀 숲길을 하나하나 헤치고 지나면서 정맥종주 최대의 적은 개활지의 잡목풀숲길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중간에 헬기장을 만났고 넓은 풀밭에 잔뜩 들어선 쑥부쟁이가 원추리와 마타리 등을 불러내어 산상의 화원을 만들지 않았다면 더욱 괴로웠을 이 길을 지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개활지를 지나 올라선 910봉에서 참나무를 솎아내 듯 베어낸 간벌지를 지나 7-8분을 내려가자 또 다시 개활지가 나타나 났습니다. 고통스러운 풀숲 길을 지나 해발 750m대의 신광치에 내려선 시각은 14시28분으로 예상보다 10분이 더 걸렸습니다. 큰 길을 건너 고랭지채소밭 한 가운데 쉼터로 오르는 중 아주 작은 도랑을 건넌 것은 제가 내려선 큰 길이 신광치 고개마루에서 약간 왼쪽으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감자밭을 가로지나 시꺼먼 비닐하우스 옆의 큰 나무 그늘아래 설치해 놓은 쉼터의 평상에 앉아 10분 넘게 편안히 쉬었습니다.
15시55분 해발1,110m의 시루봉에 다다랐습니다.
평상에서 일어나 배추밭 사이로 난 정맥 길을 다시 이어가기 시작한 것은 14시45분이었습니다. 해발고도 700-800m대의 산자락을 일구어 만든 고랭지 채소밭에는 배추, 무우, 감자와 고추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어르신들께서 제 고향 파주에서 재배한 이것들과 참외를 인근 기지촌에 내다팔아 저를 대학에 보내셨을 만큼 1960-70년대에는 채소재배가 수지맞는 농사였는데 여기 고랭지채소재배도 그때처럼 돈벌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채소밭을 지나 다시 풀밭으로 들어섰지만 성수산에서 산광치로 내려갈 때처럼 풀숲도 우거지지 않았고 거리도 짧아 다행이었습니다.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했는데 해발 900m대의 봉우리를 넘자마자 빗줄기가 굵어져 얼마 못가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1,000m가 넘는 암봉을 또 하나 넘어 가파르게 올라선 능선삼거리에서 10분을 쉬었습니다. 시루봉은 왼쪽으로 10여m 떨어진 헬기장으로 이렇다 할 표지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6시5분에 헬기장을 지나 홍두괘치로 내려서는 길이 비교적 완만하고 비도 그쳐 속도를 냈습니다. 오른 쪽으로 백운계곡 길이 갈리는 홍두괘치에 내려선 시각이 16시31분으로 시루봉 출발 25분이 걸렸습니다.
17시35분 해발1,114m의 삿갓봉에 올라섰습니다.
홍두괘치에서 1080봉의 암봉에 오르기까지 50분 동안이 힘들었습니다. 930봉을 두 번 넘고도 높이가 1,000m를 훨씬 넘는 봉우리 2개를 더 넘어 1080봉에 올라섰습니다. 희멀건 비위 2개가 들어앉은 1080봉에 올라서자 남쪽 멀리로 팔공산이 보였고 이제껏 소나기를 내리고 남은 안개구름이 동쪽 아래 산자락에 걸려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했습니다. 반갑게도 한 동안 잊고 지냈던 꼬막껍질을 1080봉에서 다시 만나 호남정맥을 발을 들이며 맺어온 꼬막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갔습니다. 건너 편 삿갓봉은 1080봉에서 한참동안 내려갔다가 가파른 비알 길을 따라 다시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이번 산행 최고봉입니다. 1080봉을 출발해 삿갓봉에 오르기까지 내내 어디서 종주산행을 마칠 것인가로 고심했습니다. 성수산에서 산광치를 거쳐 시루봉에 올라서기까지 개활지의 풀숲 길을 지나느라 예상보다 50분가량 늦어져 서구이치까지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해 오계재에서 와룡산자연휴양림으로 하산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퍼붓던 비도 그치고 운행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애당초 계획한대로 서구이치까지 진출해도 그리 늦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나뭇가지에 표지판이 걸려있는 삿갓봉에 오르자 팔공산이 더욱 가깝게 보여 쉬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일단 서구이치까지 진출하기로 하고 바로 오계치 길로 내려섰습니다.
19시42분 해발850m의 서구이치 고개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삿갓봉에서 빤히 내려다보이는 오계치안부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삿갓봉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옮겨 아래로 내려가다 가파른 바위 길을 로프를 잡고 내려섰습니다. 마음만 급했지 내림 길의 경사가 가팔라 생각만큼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30분 만에 왼쪽 와룡자연휴양림 길과 오른 쪽 백운면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 오계치에 내려서자마자 풀밭에 벌렁 누워 엉덩이 흙을 풀에 부벼 털어낸 후 바로 일어섰습니다. 서쪽하늘이 불그스레하게 변하기 시작했지만 그 색상이 너무 옅어 낙조의 장엄함을 느낄 수는 없었습니다. 장수군 당국에서 오계치부터 길섶의 풀들을 베어내고 폭 2m가량의 넓은 길을 내 고마웠습니다. 왼쪽 아래로 와룡자연휴양림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서 몇 분을 더 걸어 1070봉에 올라선 시각이 18시56분으로 시루봉 출발 2시간50분 만에 처음으로 쉬면서 스타킹을 벗어 물기를 짜냈습니다. 오계치에서 서구이치까지는 3년 전에 반대방향으로 한 번 지난 길이고 길도 널찍하게 잘 나있는데다 시원한 골바람도 간간히 불어와 최대로 산행속도를 높였습니다. 남쪽으로 내달리다 몇 분 안 지나 로프 길을 올라서 바로 위 나무의자에 앉아 숨을 돌린 후 산악마라톤을 하듯이 들입다 내달렸습니다. 숲속을 지날 때는 야행성동물인 멧돼지가 행동개시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지만 하늘이 열린 길은 아직은 어둡지 않아 서구이치를 넘는 꼬불꼬불한 742번 도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고라니 한 마리가 거친 제 숨소리에 놀랐는지 저를 보자마자 능선 아래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습니다. 밀려오는 어둠에 쫓겨 한가하게 고라니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상황은 아니었지만 잠시 멈춰 서서 사진모델이 되어준다면 얼마든지 고마워할 텐데 아쉬워하면서도 속도를 줄이지는 않았습니다. 1070봉에서 1시간 걸리는 완만한 능선 길을 40분 만에 끝내고 눈에 익은 서구이치 터널 앞으로 내려서서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장수택시를 부르고자 휴대폰을 켰으나 터지지 않아 난감했습니다.
무진장 3개 군지역이 무진장 촌이라지만 아스팔트 포장도로 고개 마루가 난청지역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당혹감은 더 했습니다. 택시가 올라오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숨 좀 돌리자 했는데 택시를 부를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고개마루에서 꾸물댈 여유가 없었습니다. 차도를 따라 왼쪽 아래 장수방향으로 내려가며 수시로 휴대폰을 체크했으나 여전히 안테나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는 약이 다 달아 막상 필요할 때 못 걸을 것 같아 휴대폰을 꺼버리고 부지런히 내려갔습니다. 땅거미가 지고 사방이 캄캄해지자 발걸음이 더 빨라졌습니다. 20분 가까이 내려가다 지나가는 차를 잡아 사정을 설명하고 동승을 요청하자 흔쾌히 태워주어 장수시내 초입 삼거리까지 편하게 내려갔습니다. 이차를 만나지 못했다면 꼬박 8Km를 걸어 내려왔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제게 자리를 내준 젊은 내외분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10분 여 걸어 장수터미널에 도착, 저녁8시35분 전주 행 막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산본 집으로 돌아가기는 너무 늦은 것 같아 전주의 한 찜질방에서 하루를 묵었습니다. 다시 장수로 가 서구이치-팔공산-밀목치 구간을 종주하고자 했으나 소낙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몇 시간을 걸었더니 사타구니가 쓸려 쓰라린 것이 낫지를 않아 종주산행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 전주역으로 나가 아침7시23분 기차에 올랐습니다. 8시 정각에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로 바꿔 타 군산을 거쳐 천안역에 도착해 40년 만에 처음으로 장항-천안 전 구간을 지나본 덕분에 금강하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올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습니다.
그 집이 어떤 집이든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를 모두 갖고 있다면 존재의 집인 언어도 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기 나라 언어의 제반 가치를 높이는 것은 그 나라 국민들이 할 일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설가와 시인들의 역할이 가장 클 것입니다. 제가 옥산동-서구이치 구간을 종주하는 날 우리 말과 글을 갈고 닦는데 남달리 애쓰신 소설가 이청준 선생께서 타계하셨습니다. 저는 1972년 선생의 단편소설 “조율사”를 처음 접한 후 선생의 작품들에 매료되어 꽤 여러 권을 읽었습니다. 1974년 신동아에 연재된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나서 소록도를 꼭 찾아보겠다고 별러오다가 작년 여름 호남정맥 종주 차 짬을 내어 소록도를 들렀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나환자 한 분이 기쁜 얼굴로 손가락이 없어진 두 몽당손으로 성가집 책갈피를 넘기는 것을 보고 “우리들의 천국”이 바로 이 곳임을 느꼈습니다. 선생께서 70세로 영면하시기까지 오로지 글쓰기에 전력해온 덕에 우리 말글이 풍성해졌고 그래서 우리 “존재의 집”의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고 생각하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경박한 네티즌들이나 정치꾼들이 우리 말과 글을 황폐화시켜 폐옥으로 만드는 것을 육필로 막아준 선생께 감사기도를 올립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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