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2)
*산행일자:2006. 11. 20일
*소재지 :제주도
*산높이 :1,950미터
*산행코스:성판악-사라샘터-진달래대피소-한라산정상
-용진각대피소-탐라계곡대피소-관음사주차장
*산행시간:8시43분-16시21분(7시간38분)
우리나라 헌법이 자랑스러운 것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했다는 점입니다. 실효적지배가 미치지 않는다고 언제고 헌법을 개정할 때 북한 땅을 제외할 것을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통일원장관이었던 모 정치인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리했다가는 백두대간의 60% 가까이가 우리 영토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4월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한 대간 길 종주산행을 백두산의 장군봉까지 이어가지 못하고 강원도의 진부령에서 멈춘 것만으로도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인데, 아예 다른 나라 땅으로 만들어 놓고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은 이 나라 등뼈 한 가운데를 분질러 놓고 말겠다는 심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반 반도가 아닌 한반도로 규정한 현행 헌법에 또 고마워하는 점은 우리의 영토를 그 부속도서로 넓혔다는 것입니다. 35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나라도 국력만 키운다면 거꾸로 일본 열도를 한반도의 부속도서로 삼아볼 수 도 있지 않겠느냐는 야심 찬 생각을 해 볼 수 있기에 말입니다. 부속도서 중 가장 큰 섬인 제주도가 우리의 영토임에 분명하기에, 그제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라도를 탐방할 수 있었고, 어제 남한 땅 최고봉인 한라산에 올라 북녘을 바라보며 한반도 최고봉인 백두산 등정을 꿈꿀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가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입니다.
우리의 역사서가 아니어서 믿음이 덜 가기는 하지만 일본서기에 따르면 3세기 중엽 왜왕이 탐라국으로 보이는 침미다례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초고왕에 주었고, 백제에서는 이에 보답하고자 지금도 일본에서 더 할 수 없이 귀중한 보배로 여기는 칠지도를 왜왕에 보냈다고 합니다.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 울릉도를 정벌하기 250여 년 전의 일로 이 때부터 제주도는 우리의 영토였던 것입니다. 그 후 제주도가 한반도와 애환을 같이 하며 우리 땅으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만에 하나 우리 땅에 제주도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먼 바다를 다스리는 지혜를 배우지 못해 아시아대륙의 변두리국가로 쳐져 오늘처럼 찬란한 해양국가로 자리 잡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 최남단의 마라도를 찾아 일망무제의 태평양을 바라보며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우리의 영토로 삼은 대한민국 헌법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고교동창 이 규성 교수의 도움으로 3년 만에 나선 이틀 간의 제주도 나들이가 한껏 편했습니다. 카드사에서 한 장 받은 무료 왕복 티켓을 제게 할애해주었고 콘도까지 주선한데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그의 대학제자들이 여러모로 도움을 주어 모처럼 편안하게 몇 곳을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첫째 날(11월19일)은 마라도를 탐방했습니다.
제주시내 한 성당을 찾아 주일미사를 올리는 것으로 첫 나들이를 시작했습니다.
오전 11시에 시작되는 미사에 참여해 주님의 은총에 감사했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정읍의 모슬포에 도착했습니다. 제주도 토속음식인 칼치국으로 점심을 든 후 다시 택시로 송악산 승선장으로 가 오후 2시 반에 출발하는 마라도행 유람선에 오르자 망망대해의 태평양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렸고 파도가 꽤 높게 일어 크지 않은 유람선이 앞뒤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가파도를 들르지 않고 직행하는 유람선이 마라도에 가까이 접근하자 섬모양이 마치 길쭉한 함대 같이 보였습니다.
오후 3시10분 마라도에 상륙했습니다.
2003년 백두산의 천지연을 에워싸고 있는 중국령의 서파능선을 종주하며 느꼈던 감흥이 마라도에서 되살아 난 것은 한 끄트머리에 서서 남은 한 끝을 애절하게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똑 같아서였습니다. 중국 땅 백운봉에서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을 바라보며 저 봉우리에서 시작되는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의 천왕봉까지 걸어가고 마지막으로 한라산에 오르는 꿈의 산행을 그려보았듯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라도 섬을 걸으며 백두산 등정을 머릿속에 그렸습니다.
1시간 20분여 부지런히 걸어 마라도를 시계반대 방향으로 한바퀴 돌았습니다.
오토바이를 개조한 관광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섬 초입에서 차도를 따라 얼마고 걸어 “자장면~시키신 분” 음식점 바로 뒤의 가파초교 마라분교에 도착해 아담한 학교정경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1961년에 고향 땅 파주에서 조그마한 분교를 졸업한 저로서는 학생수가 적다는 이유로 폐교의 위기에 몰린 시골 분교들을 지켜보기가 안타까웠는데 이 학교는 최남단의 상징성 때문에 폐교는 되지 않을 것 같아 안심됐습니다. 기암절벽의 시꺼먼 바위 끝에서 낚시에 여념이 없는 낚시꾼들을 보자 그들에는 이 섬 만한 천국이 어디 있을까 싶었습니다.
서구풍의 산뜻한 쵸코렛 박물관을 지나 대한민국 최남단비가 세워진 땅 끝에 서자 일망무제의 태평양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 했습니다. 3년 전 백두산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장백임해를 보고 만주벌이 우리 땅이어야 했었는데 하며 아쉬워했는데 이번에는 끝이 없는 저 바다가 우리의 주 활동무대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최남단비를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나자 잠시 뿌렸던 굵은 빗발이 약해져 걷기를 계속했습니다. 천신이 지신을 만나기 위해 내려오는 길목으로 전해지는 장군바위를 카메라에 담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십 수평은 됨직한 이 섬 언저리에 자생하는 선인장 군락지를 만나 이 또한 카메라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 작은 섬에 교회와 불사 그리고 성당이 모두 보였습니다.
기원정사 입구에 스님 한분이 앉아 계셨는데, 천주교기도소는 문이 잠겨 전시용으로 지었다는 오해받을까 걱정됐습니다. 1883년에 발을 들인 주민들과 더불어 등대도 이 섬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1915년에 이 섬에 설치된 후 오랜 세월 빛으로 바다 길을 밝혀 왔을 뿐만 아니라 천신이 이 섬에 강림하는 길목인 장군바위도 비추어 왔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현세의 종교가 모두 모여 여기 주민들에 가르침을 준다 해도 아직 천신의 역할이 끝나지 않은 것은 외형적인 성장을 �는 현세의 종교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줄지 않아서입니다. 전시 중인 전 세계 꼬마등대와 더불어 저의 눈을 끈 것은 태양열을 모으는 등대의 집열판이었습니다. 고유가의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태양에너지를 얻는데 가장 큰 문제는 각종 공해로 집열판이 쉽게 더러워져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라 하는데 청정지역인 마라도는 그런 걱정을 아니 해도 되는 최적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가시자 한라산 정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상을 정점으로 동서로 내뻗은 능선이 깔끔하면서도 부드럽게 보여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그럴 듯한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섬에서 육지의 상록수 숲을 대신하는 것이 조금 전에 지난 초록색의 선인장 밭이라면 만추의 낙엽을 연상시키는 누런 억새밭은 벌써 가을이 끝나 감을 알려주었습니다. 자라덕 선착장으로 돌아와 시꺼먼 바위의 가파른 절벽과 절벽 아래 동굴을 눈여겨 본 후 저녁 4시 반에 송악산으로 떠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주 시내에서 이교수의 제자인 김 두범 님이 저녁으로 낸 뚝배기국이 곁들인 고등어구이와 더불어 별미였습니다. 특히 오분작 맛이 배어 난 국물이 컬컬하고도 시원해 바닥까지 그릇을 모두 비웠습니다. 식사 후 그 분 차를 타고 한화리조트로 옮겨 하루 일정을 마쳤습니다.
*둘째 날(11월20일)은 한라산을 올랐습니다.
아침8시 조금 지나 프론트에서 체크아웃을 했습니다.
콘도회원권으로 하룻밤을 묵는 데 드는 관리비가 시내의 웬만한 여관비를 뺨칠 정도로 생각보다 비싸 기분이 상했는데 우려했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갠데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아침 공기가 삽상해 상했던 기분이 풀렸습니다.
8시43분 해발 750미터의 성판악을 출발했습니다.
저희들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겠다고 나선 이 교수의 또 다른 제자 오 용화 님이 한화리조트로 차를 몰고 와 이번 산행의 들머리인 성판악까지 편안하게 이동했습니다.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시간에 한라산을 오르는 산객들이 꽤 많았습니다. 은하수를 끌어당길 정도로 높은 산이라 하여 한라라는 이름을 얻은 이 산이 정작 끌어당긴 것은 은하수가 아니고 육지의 관광객들이었나 봅니다. 백록담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넓게 나있고 길 양쪽으로는 줄을 쳐 놓아 사람들의 출입을 막아 숲 속에서 까치들이 마음 놓고 뛰놀고 있었습니다. 원래 이 섬에는 까마귀만 살고 있었는데 아시아나 항공이 개통된 후 육지에서 까치를 들여와 방목을 했다는데 요즈음은 이 까치가 번식하여 까마귀들을 산 위로 밀어냈다 합니다.
9시32분 해발 1,000미터 지점을 지났습니다.
10여분 전에 눈에 띄기 시작한 산죽들이 활엽수 밑에서 온 산을 뒤덮어 이채로웠습니다. 활엽수림이 끝나고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삼엽수 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침엽수림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만 독성이 강한 이 나무를 다른 수종으로 교체하고자 베어내고 있어 삼나무 숲길은 4-5분 내에 끝났습니다. 삼엽수림이 끝나자 잠시 사라졌던 활엽수 숲이 다시 시작되었고 산죽들도 나무 아래 땅을 또 다시 덮어갔습니다. 해발 1,000미터 대에 이르자 까치 떼들에 밀린 까마귀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0시12분 사라약수터에서 잠시 쉬면서 목을 축였습니다.
해발1,000미터 지점을 지나 사라약수터로 이어지는 오름길은 대부분이 나무판때기로 현무암의 돌길을 덮어씌워 낸 깔끔한 길이어서 걷기에 편했습니다. 이 길을 혼자 오르는 수녀님이 제게 먼저 인사를 건네 와 죄송했습니다. 사라약수터에서 7-8분을 걸어올라 해발1,200미터 대에 자리한 문이 잠긴 사라대피소를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내 탐방로 왼쪽으로 난 좁은 길로 들어서 사라오름으로 향했습니다.
10시42분 해발1,325미터의 사라오름에 올라섰습니다.
지름이 100미터는 훨씬 넘어 보이는 동그란 분화구가 당장 운동장으로 써먹어도 딱 좋을 만큼 평평한데다 깔끔하고 예쁘장해 보였습니다. 산 속에 폭 들어앉아 외지인들이 찾아가기에는 좀처럼 쉽지 않을 분화구에서 사라오름까지는 제주도에 사시면서 틈나는 대로 혼자서 오름을 찾아 오른다는 한 아주머니와 동행했습니다. 이분의 자세한 설명으로 그동안 생소했던 오름에 더욱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제주도에는 기생화산이 만든 오름이 총 368개 있고 그중 9개의 오름이 분화구에 물이 있다 합니다. 백록담이 물을 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분화구로 이 밖에도 사라오름과 물차오름 그리고 물영아리오름 등의 분화구에 물이 있다 했습니다. 동쪽 아래로 해발1,215미터의 성널오름이, 서쪽 위로 한라산 정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사라오름에서 직벽을 이루고 있는 남동사면을 내려다보자 별천지에 와있는 듯 했습니다. 남동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햇빛을 반사해 은빛처럼 반짝거렸으며 온 산을 뒤덮은 누런색의 산죽 밭이 마치 넓디넓은 황금색의 잔디밭과 같아 뛰어가서 뒹굴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었습니다.
11시 정각 사라오름을 떠났습니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분화구를 지나 다시 탐방로로 돌아온 시각이 11시18분이었으니 사라오름을 다녀오는데 대략 1시간은 걸린 셈입니다. 진달래밭대피소로 오르는 탐방로는 경사가 점점 급해졌습니다만 12시 안에 대피소에 닿아야 정상을 오를 수 있어 쉬지 않고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얼마고 오르자 활엽수림은 끝나고 침엽수인 구상나무 숲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만 산죽들은 여전히 구상나무 아래 땅을 덮고 있었습니다.
11시55분 진달래밭대피소를 통과했습니다.
오 용화님은 먼저 내려가 일을 본 다음 날머리인 관음사 주차장에 시간 맞춰 차를 대겠다고 해 이 교수와 단 둘이서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10분을 오른 후 빈터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들으며 18분을 쉬었습니다. 정상을 올랐다가 하산하는 연세 드신 분들의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그분들의 얼굴에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엿보고서 등산의 기쁨은 단순한 쾌락이 아닌 고통을 이겨낸 후에만 얻을 수 있는 환희임을 확인했습니다.
13시10분 해발 1,950미터의 한라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해발1,800미터의 나무계단 길에 올라서자 구상나무 숲이 끝났고 작달막한 관목이 땅을 기고 있었고 땅바닥은 산죽 대신에 잔디가 덮고 있었습니다. 동쪽 아래로는 얼마 전에 다녀온 사라오름의 남동쪽 사면과 분화구가 보였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 왼쪽 아래로 화산암의 너덜지대가 보이는 곳을 지나 한라산 정상에 오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순간의 감격을 이어가고자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새는 산 밑에서 놀고 있는 까치가 아니고 저희들과 같이 올라 백록담 상공을 날고 있는 까마귀가 분명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밤새 내린 비가 눈으로 변해 하얗게 쌓여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산되었지만 덕분에 하늘이 쾌청해 십 수분을 머무르며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백두산을 마음 속으로 그리며 정상에서 물러났습니다.
13시22분 관음사 코스로 접어들었습니다.
산 나무와 죽은 나무가 함께 서 있는 구상나무 숲 사이로 난 목판 길과 폐타이어 길을 따라 용진각대피소로 내려가면서 백록담을 에워싸고 있는 절애의 북벽을 바라보면서 한라산이야 말로 천의 얼굴을 가졌다 싶었습니다. 바다 가까이의 산록에 펼쳐진 광활한 억새밭에서 제주도의 넉넉함을 보았다면 깎아지른 북벽을 보고 어떤 적들로부터도 제주도를 지켜내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읽었습니다. 해발1,800미터대로 내려서자 산 죽 밭이 다시 시작됐습니다. 한라산이 소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식물 종의 다양함 때문인데 이렇게 산죽들이 온 산을 뒤덮어서야 다른 식물들이 제대로 살아남을까 걱정됐습니다.
14시5분 용진각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1969년 여름 고교동창들과 함께 관음사 코스로 한라산을 오르다가 이곳 대피소에서 점심을 해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관음사를 출발해 나무가 거의 없는 날등의 개미등을 오르느라 엄청 땀을 많이 흘려 여기 대피소에 다다랐을 때는 많이 지쳤습니다. 짐을 풀고 좀 쉰 후 점심을 해먹고 나서야 피로가 풀려 오후 늦게 한라산 정상을 오른 후 백록담으로 내려가 물가에서 텐트를 쳤습니다. 그동안 한라산의 생태계도 일부가 변하여 개미등에도 숲이 들어섰고 백록담의 그 많던 물이 고갈되어 그 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용진각대피소도 이제는 무인대피소로 변해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습니다. 계곡을 건너 개미등으로 올라서기까지 잠시 힘이 들었을 뿐 이어지는 하산 길이 편안했고 적송 숲을 지날 때는 아늑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15시25분 무인대피소인 탐라계곡대피소 앞 평상에 앉아 잠시 쉬었습니다.
십 수분전에 해발 1,000미터 지점을 지나자 참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정상 부근의 땅을 기는 관목에 이은 구상나무, 그리고 적송 숲을 지나 활엽수림에 들어서 높이에 따라 주 수종이 바뀌는 것을 보고 역시 한라산이다 했습니다. 탐라계곡을 건너 3-4분의 오름 길 중간에 아주머니 한 분이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이 오름길이 이번 산행에서 마지막 오름길이었고 이어지는 하산 길은 완만한 내림 길이어서 속도를 냈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계곡을 건넌 것은 모두 아홉 번이었는데 오름 길에 3번, 하산 길에 6번을 건넜습니다. 오름길에 건넌 계곡은 그냥 수로로 불러도 될 만큼 작고 좁았으나 하산 길의 탐라계곡은 꽤 넓고 깊숙해 한 여름 폭우를 만나면 건너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16시 정각에 건넌 4번째 계곡부터는 새까만 물이 고여 있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관음사에 가까워지자 이름을 모르는 넓은 잎의 상록수가 눈에 띄었습니다.
16시21분 관음사 주차장에 도착해 7시간 반 남짓한 한라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한라산 정상을 4번이나 오르면서 천 미터가 넘는 높은 곳의 오름을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산 속에 숨어 있던 동그란 분화구가 눈 안에 들어왔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제주도 최고의 걸작품은 단연 오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 용화 님의 차로 제주시내로 들어가 한 음식점을 들렀습니다.
제자 분이 낸 제주도의 토속음식인 도새기몸국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유명정치인과 연예인들이 기꺼이 방명록을 남길 정도로 몸국의 구수하고 찐득한 맛이 독특하고 뛰어났습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음식 또한 만국 공용어입니다. 새로운 음식을 처음 들 때는 상당히 긴장도 되지만 맛만 있다면 금방 익숙해지는 것이 음식입니다. 한류의 상품이 노래나 춤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음식으로 확산시키는데 제주도의 뚝배기와 몸국이 분명 한 몫 단단히 할 것을 기대하면서 음식점을 나섰습니다.
김포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제주도 나들이가 뜻 깊었던 것은 우리나라 최남단의 마라도를 다녀왔고 아무나 쉽게 오를 수 없는 사라오름을 올라서만은 아니었습니다. 40년을 이어온 친구의 우정이 너무도 고마워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이 고마워서도 그러했습니다. 이교수와 두 제자 분들에 고맙고 또 고맙다는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산행사진>
한라산(1)
*산행일자: 2003년10월21일
*소재지 : 제주도
*산높이 : 1,950미터
*산행코스: 성판악-진달래산장-한라산 정상-관음사
*산행시간: 7시-17시45분(10시간 45분)
*동행 :서울대AFB산악회 회원
10월 25일 한반도 최남단의 한라산(1,950미터)을 올랐습니다.
제우스신이 먹구름을 몰고 지리산으로 나들이를 떠난 듯 한라산의 날씨는 쾌청했습니다.
10월 상달답게 말끔한 날씨에 기온 또한 산에 오르기에 알맞아 쾌적한 산행을 즐겼습니다.
10월 24일은 바다낚시와 산행준비로 하루를 보냈읍니다.
낮 시간에는 김 인경, 김 영철 양 사장님이 표선 앞 바다에서 낚은 고기와 선장이 내놓은 황도미로 회를 쳐 배를 불렸습니다. 한라산 산행준비로 김미숙, 박 정 여성 사장 분들께서 김밥을 손수 지었고, 간식으로 인절미를 준비하였습니다. 골프 팀의 최 박문 사장님이 김밥 마는 것을 거들어 주셨고, 김 영철 사장님이 재빨리 설거지를 끝내어 새벽1시에 잠자리에 들 수 있었읍니다.
10월 25일 새벽 5시에 기상, 부지런히 아침식사를 들고 6시 9분 숙소를 출발하였습니다.
정확히 7시에 산행기점인 성판악을 출발, 9.7Km의 여정에 올랐읍니다. 김 인경, 김 영철, 김 미숙 사장님이 선두에 섰고 박 정 사장님과 제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성판악에서 사라 대피소까지는 코스가 완만하여 그래도 걸을만한 산행이었습니다. 낮은 키의 산죽이 등산로 양옆으로 산개해 있었고, 드물게나마 자작나무도 눈에 띄었습니다. 백화목으로도 불리우는 자작나무는 바이칼호주변에 자생하는 한 대림의 수종이나, 한반도 북단에 위치한 백두산의 임해를 이루고 있는 주수종이며, 남단의 경주에서도 신라의 김알지 왕이 계림에서 백화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할 정도로 우리 민족과 친근한 나무입니다. 그래도 한라산에서 대표적인 수종은 구상나무입니다. 해발 1,400미터대의 고지대에 자생하는 상록교목으로 그 높이가 15미터나 되며 나무 전체에서 향기를 발하는 독특한 나무입니다. 숲 속을 걷노라면 그 수종이 무엇이든 숲에서 발산하는 피턴치드 덕분에 빠져버린 기운이 새록새록 되살아 납니다.
사라 대피소를 조금 못 미쳐 먼저 오른 3분이 우리를 박수로 맞아 주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진달래대피소까지 박 정 대원의 말 벗으로 김 영철 사장님이 나섰습니다.
10시30분 진달래대피소에 도착, 대피소매장에서 산 컵 라면과 준비해간 김밥 및 인절미로 요기를 했습니다. 이곳 대피소는 해발 1500미터 지점으로 이름 그대로 진달래 나무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습니다. 태양과 보다 가까워졌음을 감지한 여성대원들은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 피부보호에 나섰으며, 남성 대원중에는 김영철 사장님만이 김 미숙 사장의 도움으로 선크림으로 얼굴을 도배하였읍니다.
정상까지 남은 거리는 2.3KM.
대피소안내로는 1시간 반이면 충분히 정상에 오를 수 있다하나 우리 팀으로는 2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되어 11시 20분 서둘러 진달래대피소를 출발하였습니다. 마지막 깔딱 고개는 해발 1700미터지점에 설치된 나무계단 오름길 입니다. 간헐적으로 얼굴을 스치는 안개가 차갑게 느껴졌고,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시원스러웠읍니다.
박 정사장님은 정상에 올라야 사업이 잘 될 것이라는 강한 믿음으로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쉬다 오르다를 반복하며 고도를 높여가, 13시 30분 성판악을 출발한지 6시간 반 만에 정상에 섰습니다. 30여분 먼저 오른 선두그룹의 김 인경사장님이 200여 미터를 내려와 동행을 해주어 마지막 오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니 백록담이 눈 안에 들어 왔습니다. 물이 말라버린 백록담을 차라리 제우스신이 먹구름으로 가렸다면 저리도 초라하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기념사진을 찍고, 13시45분 정상을 출발하여 관음사코스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8.7KM의 관음사 코스는 성판악 코스에 비하여 거리는 짧으나 경사가 급하여 우리 팀이 오르기에는 벅찰 것 같아 하산 길로 택했습니다. 용진각 대피소까지의 하산 길은 경사가 제 법 심했으며 백록담 뒷 봉우리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기암괴석이 한라산도 고산중의 하나임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14시 45분 용진각 대피소에 도착한 일행들은 이곳에서 중식을 들고 15시 5분 용진각을 떠나 탐라 대피소로 향했습니다. .
18시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놓칠까봐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한라산은 물을 담아낼 수 없기에, 높고 깊은 탐라계곡은 물이 바짝 마른 건천이었습니다. 얼마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코스가 계속되어 마냥 편안한 하산 길은 아니었습니다.
16시10분 용진각대피소를 출발한 후 첫 쉼터에서 김 인경 사장님이 박 정 사장님과 구두를 바꿔 신었습니다. 등산화의 진가가 확인되는 순간이였습니다. 마치 가속기를 단 듯 박 정 사장님은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질주하여 추월 박이라는 칭송을 받아내며, 16시 35분 탐라대피소를 지나 관음사로 내다랐읍니다. 관음사에서 정상까지에는 난대림에서 온대림과 한대림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식물 군이 분포되어 있읍니다만 이를 관상할 수 없어 아쉬웠읍니다. 목적지인 관음사주차장까지 3.6KM남아 1시간이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추월 박의 가속엔진이 정상 가동된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만약에 대비 뒷 비행기로 조정하고자 저는 먼저 휴대폰이 터지는 관음사까지 뛰었습니다.
17시 20분 관음사주차장에 도착, 여행사직원에 상황을 알리고 17시 50분까지 남어지 대원들이 미 도착시 뒷 비행기로 부탁하고 대원들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전대원이 17시 43분에 도착, 대기중인 관광버스에 승차, 공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18시5분 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마치고 여유있게 탑승하였습니다. 탐라 대피소이후의 시간운영은 결과적으로 절묘했습니다. 구두바꿔신기의 전략이 주효하여 제시간에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AFH 산악회가 결성된 지 1년 만에, 5명의 대원이 10시간 40분 동안 18.3KM를 걸어 국내 최고봉인 1,950미터의 한라산을 성공리에 등정하였음을 보고 드립니다. 처음 산행에 참여한 박 정, 김 인경사장님, 언제고 듬직한 김 영철사장님, 산악회 안살림을 도맡은 김 미숙사장님, 그리고 제가 한 팀이 되어 한라산을 올랐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라는 좌우명에 충실한 산행이었기에 5명 전원이 함께 정상에 섰습니다. 오른 이의 환희는 못 오른 이의 한계를 확인한 절망과 공존할 수 없기에 한 명의 낙오자 없이 함께 오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산행경험이 많지 않은 박 정사장님의 등정은 한라산산행을 더욱 뜻 있게 해준 쾌거였음을 증언하며 10월 산행보고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한라산(1)
*산행일자:2003. 10. 21일
*산행코스:성판악-진달래산장-한라산-용진각-관음사
*동행 :서울대AFB 산악회회원
'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 > 명산100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6.태백산 산행기(1-4) (0) | 2007.01.02 |
---|---|
5.계방산 산행기(1-2) (0) | 2007.01.02 |
4.덕유산 산행기(1-5) (0) | 2007.01.02 |
3.설악산 산행기(1-5) (0) | 2007.01.02 |
2.지리산 산행기(1-8) (0) | 2006.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