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8)
*산행일자:2014. 10. 29일(수)
*산높이 :지리산 반야봉1,732m
*소재지 :전남구례/전북남원
*산행코스:성삼재-노고단대피소-피아골갈림길-반야봉
-피아골갈림길-피아골대피소-직전마을정류장
*산행시간:4시45분-15시30분(10시간45분)
*동행 :나홀로
지리산의 주봉은 해발1,915m의 천왕봉입니다. 동쪽에 치우쳐 있는 천왕봉에서 서쪽의 노고단까지의 주능선은 그 거리가 무려 25Km나 됩니다. 지리산이 서쪽에 분소를 차린다면 그쪽 소장은 단연 해발1,732m의 반야봉이 맡아야 할 것입니다. 반야봉은 노고단보다 표고가 400m이상 높은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이며, 또 반야봉에 머문 반야(般若)가 노고단에 단(壇)이 세워진 노고(老姑)할미의 남편이었습니다. 그간 지리산을 열아홉 번이나 올랐으면서도 이런 반야봉을 7년 전 딱 한번밖에 오르지 못한 것은 주능선에서 1Km가량 비껴 자리해서인데 이번에는 아예 천왕봉을 가지 않고 반야봉만을 목적지로 삼아 올라갔습니다.
이번에 처음 가본 곳도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단풍이 좋기로는 피아골이 최고라는 애기를 숱하게 들었는데도 늑장을 부리다가 이번에는 큰 맘 먹고 피아골을 하산코스로 잡아버렸습니다. 피아골에 숨어 활동한 빨치산을 소탕할 때 그들이 죽어 흘린 피가 피아골 계곡을 붉게 물들였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피아골은 민족분단의 비애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서글픈 곳입니다. 그 때 빨치산을 성공적으로 토벌한 것이 정말 다행인 것은 당시 로는 남한 보다 훨씬 잘 살았으나 그 후 백만 명이 넘는 주민들을 굶겨 죽인 공산당의 통치를 받지 않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새벽4시45분 성삼재를 출발했습니다. 전날 밤11시15분 수원역을 지나는 호남선열차에 몸을 실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순천시의 구례구역에서 버스로 바꿔 타 구례군의 구례버스터미널로 옮겼습니다. 김밥3줄을 사가지고 다시 오른 버스가 밤을 뚫고 내달려 저를 내려놓은 곳이 성삼재입니다. 10월 하순 성삼재의 새벽은 바람이 세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엄청 추우리라 생각하고 대비를 해왔는데 의외로 바람 한 점 없고 전혀 냉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날씨가 푸근해 산행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대피소까지 중간에 지름길인 샛길로 가지 않고 큰 길로만 걸은 것은 도시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이 저를 반겨 고마워서였습니다.
5시50분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해 아침을 들었습니다. 주중이어서인지 대피소가 비교적 한산해 김밥을 여유롭게 들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일어나 노고단안부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르자 동녘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일출을 기다리느라 10분여 머물렀는데 그새 어둠이 가셔 반야봉으로 가는 길이 훤했습니다. 노고단을 왼쪽으로 에돌아 헬기장에 이르자 서남쪽 멀리로 산골짜기를 메운 운무가 참으로 볼만했습니다. 지리산 종주를 목표로 첫날은 벽소령까지 가겠다는 3인조 여성 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돼지목을 지나기까지는 해오름의 잔영과 옅어지는 운무로 얼마간 황홀감에 빠져들었습니다. 해오름이 장관인 것은 그 황홀함이 오래 가지 않고 이내 사라져 그러할 것입니다.
7시40분 피아골갈림길을 지났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의 피아골 길로 들어서지 않고 직진한 것은 이번 산행의 목적지가 반야봉이어서 그랬습니다. 임걸령을 지나서부터 계속되는 오름 길은 반야봉에서 끝났는데 삼도봉 길이 갈리는 노루목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했지만 노루목에서부터 가파른 비알길이어서 오름 길이 숨 가빴습니다. 피아골갈림길 출발 50분 후 도착한 노루목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십 분여 편히 쉬었습니다. 4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지리산이 반가워 여기저기 눈길을 주며 구상나무 등 지리산 식구들에 인사를 하느라 1Km 거리의 반야봉에 오르는데 50분 가까이 걸렸습니다.
9시38분 해발1,732m의 반야봉에 올라섰습니다. 바위 길을 지나고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반야봉에 이르자 동쪽으로 천왕봉이 멀리 보였고 서쪽으로 노고단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이 세봉우리는 모두 노고단에 단을 세워 기린다는 노고(老姑)할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리산의 산신할머니인 노고(老姑)는 천신의 딸로 반야(般若)와 결혼해 딸 여덟을 낳고 천왕봉에서 잘 살았다 합니다. 남편 반야(般若)가 깨우침을 더 많이 얻기 위해 반야봉(般若峰)으로 떠납니다. 부인 노고는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의 옷을 만들며 반야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반야봉에서 수도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부인 노고는 이 옷을 불태운 후 죽고 맙니다. 반야봉에 가까운 봉우리에 단(壇)을 세워 노고(老姑)할미를 기렸다하여 이 봉우리를 노고단(老姑壇)이라 부른다는 것이 노고단과 관련된 한 전설의 요체입니다.
반야가 깨우침을 얻은 후 떠난 곳이 서방정토라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곳까지는 아마도 반야봉에서 띄운 반야용선을 타고 갔을 것입니다. 반야용선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아니고 물위를 떠다니는 배입니다. 이 배가 반야봉을 출발한 것은 구름이 골짜기를 가득 메워 구름바다를 이루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떠난 반야가 반야봉으로 다시 와서 살지 않은 것은 이 봉우리 꼭대기에 ‘般若峰’이라는 묘비가 세워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죽어서야 반야봉 가까이 노고단으로 자리를 옮긴 노고할미가 서방정토로 떠나버린 반야를 기다렸을 것이 틀림없고 보면 임금의 친제를 신라로 송환하기 위해 왜로 떠난 신라의 충신 박제상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어버린 그의 부인 이야기가 이 노고할미 전설의 신라판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11시20분 피아골갈림길로 되돌아와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햇살이 생각보다 따가워 7년 만에 다시 오른 반야봉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하산했습니다. 노루목을 거쳐 내려선 임걸령에서 샘물을 떠 마시며 잠시 쉬었습니다. 43년 전 지리산을 종주할 때 이곳에서 점심을 지어먹은 적이 있었는데 떼거리로 모여든 왕파리를 밥그릇에서 떼어놓고자 조금 떨어진 곳에 찌개를 덜어 놓아 유인했던 일이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주변 환경이 깨끗해 더 이상 왕파리가 끼지 않는 임걸령에서 얼마 걷지 않아 피아골갈림길로 되돌아갔습니다. 본격적으로 피아골 탐방로로 들어서기 전에 점심을 먹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조금 이른 시간에 갈림길 둔덕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안내판을 보고서야 임걸령 주위의 숲이 서울대의 연구림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호남정맥 종주 차 오르내린 광양의 백운산 일대에도 서울대의 연구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 나서서 연구해야 할 만큼 숲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은 가 봅니다. 기실 인류는 숲과 더불어 진화를 거듭해왔습니다.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가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수렵하는 것으로 숲과 인연을 맺은 이래 숲은 침엽수림에서 수종이 다양한 활엽수림으로 진화해왔고 인류는 여러 단계를 거쳐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했습니다. 애당초 숲은 인류의 생활공간이었습니다. 농업의 발달로 생활공간에서 경제공간으로 바뀌었다가 연료문제가 해결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자 요즈음은 숲이 단순히 경제공간으로 머무르지 않고 문화공간으로 진화되어 간다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13시5분 피아골대피소에 도착해 20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시간 반을 조금 못 걸어 대피소에 도착하기까지 내내 된비알 길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고도가 높아서인지 벌써 제 철이 지난 듯 단풍잎이 칙칙하거나 말라가기 시작해 그다지 볼품 있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작년 이맘때는 피아골의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다 하여, 당연히 올해도 그러려니 하고 피아골을 하산코스로 잡았는데 그렇지 못해 많이 아쉬웠습니다. 피아골대피소를 거의 다 가서 7-8년 연하인 순천분과 동행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해마다 가을이면 단풍을 보러 여기 피아골을 찾아온다는 이분이 들려준 이야기 중 하나는 피아골이 빨치산들이 암약했던 곳으로 그들을 지휘했던 인물이 남로당의 간부 이현상이라 했습니다. 당시 빨치산 지도자들은 북한의 김일성과 달리 백성들을 위해 애쓴 순수파들이라 평한 부분은 제 생각과 달랐습니다.
15시30분 직전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피아골의 진면목은 대피소에서 직전마을로 내려가는 4Km 거리의 하산 길에서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단풍은 기대 이하였지만 피아골 그 자체는 일품인 것이, 계곡이 깊고 물이 맑아 중간 중간에 만난 소(沼)들은 말 그대로 명경지수였습니다. 평일인데도 이 계곡을 보러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아 여러 곳에서 길이 붐볐습니다. 하산 길에 남매폭포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났지만, 삼흥소는 잠시 머무르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피아골 계곡에 물을 대는 작은 계곡(溪谷)이 여러 있어 빨치산이 은둔하기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계곡가로 내려가 얼마간 푹 쉬다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지만 시간이 넉넉지 못해 그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직전마을 초입의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뱀사골에서 하루 비박을 하고 피아골로 내려왔다는 안성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으로부터 피아골의 단풍이 뱀사골보다 더 낫다는 애기를 듣고 나자 처음 와보는 피아골이라 저의 기대가 너무 커서였지 실제 단풍은 그만하면 됐다 싶기도 했습니다. 진정 피아골의 단풍 보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번처럼 반야봉을 들러오는 긴 코스를 택해 지친 몸으로 피아골을 지날 것이 아니라 직전마을에서 피아골대피소까지만 왕복해 계곡에 발도 담그면서 느긋하게 이 계곡의 정감어린 풍경을 완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불교가 우리 산신령을 포용한데는 대부분의 절이 산에 자리해 가능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천주교의 자생적발상지인 천진암은 산 속에 있었지만 그 후의 성당은 모두 산에서 내려와 도시에 세워졌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에는 대부분 어질어진다는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내려도 세속의 폭력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포용력도 어질어야 생기는 법이라면 절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산에 자리한 것이 우리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줄이는데 기여한바 컸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반야와 노고할미의 만남은 불교와 토속신앙의 만남을 상징한다 하겠습니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전래된 불교가 천주교처럼 수많은 순교자를 내지 않고 우리나라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데는 불교의 포용력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마고할미의 별칭인 노고할미는 주로 무속신앙에서 받들어지는 신선할머니입니다. 불교에서 절마다 삼신각을 짓고 삼신할머니를 같이 모셔 민중을 끌어들인 것을 천주교가 진작 배웠더라면 희생자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뒤늦게나마 천주교에서 우리 고유의 제례를 수용해 불필요한 마찰을 없애고 중흥의 길에 들어선 것은 정말 다행입니다. 천주교 신자인 제가 산행할 때 노고할미를 자주 떠올리는 것도 같은 뜻에서입니다.
<산행사진>
피곤하실텐데 이번에는 지리산으로 향하셨군요.
저는 반야봉을 한번도 오른적이 없고 대간한다고 임궐령으로 지나간게 전부입니다.
반야낙조라하던가요? 저물어가는 ,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반야에서 보고싶네요,
감기기가 있다 하시더니 몸은 좋아지셨구요?
늘 몸성히 간수 잘 하며 다니세요~~~', 'true', 'cmt'); return false;" h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E93j&articleno=11770285&categoryId=486754®dt=20141104224050&totalcnt=5#">신고
피곤하실텐데 이번에는 지리산으로 향하셨군요.
저는 반야봉을 한번도 오른적이 없고 대간한다고 임궐령으로 지나간게 전부입니다.
반야낙조라하던가요? 저물어가는 ,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풍경을 반야에서 보고싶네요,
감기기가 있다 하시더니 몸은 좋아지셨구요?
늘 몸성히 간수 잘 하며 다니세요~~~
- 류산(遊山)
- 2014.11.09 20:05
- 답글 | 차단 | 삭제 |
지리산 사방이 다 훤하니 잘 보이시죠^^
직전단풍 산행 하셨군요.
상세한 산행기와 사진으로 마치 제가
피아골을 다시 거닌 듯한 느낌입니다.
불무장등의장쾌한 능선을 우로 두고 내려서는
피아골.. 잘구경 합니다, 시인님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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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방이 다 훤하니 잘 보이시죠^^
직전단풍 산행 하셨군요.
상세한 산행기와 사진으로 마치 제가
피아골을 다시 거닌 듯한 느낌입니다.
불무장등의장쾌한 능선을 우로 두고 내려서는
피아골.. 잘구경 합니다, 시인님 덕분에..
몇 년만에 나선 지리산 나들이는 반야봉을 거쳐 피아골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날씨가 쾌청하고 따뜻해 산행하기 딱 좋았습니다. 여전히 열심히 산행하시고 계시지요? ㅇ나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지리산(7)
*산행일자:2010. 5. 3-4일(월-화)
*소재지 :전남구례/전북남원/경남함양 및 하동
*산높이 :지리산1,915m
*산행코스:성삼재-노고단-벽소령-세석-천왕봉-중산리
-5월3일: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토끼봉-연하천-벽소령
-5월4일:벽소령-칠선봉-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
*산행시간:총24시간7분
-5월3일:4시45분-16시10분(11시간25분)
-5월4일:6시38분-19시20분(12시간42분)
*동행 :박유성 처남부부/홍성덕 동서
봄이 실종된 곳은 빼앗긴 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지리산의 주능선 어디에서도 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실종된 봄을 찾아내라고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더욱 답답했습니다. 여름이 시작된다는 입하를 이틀 앞둔 지리산의 주능선에서 제가 만나본 것은 진달래나 철쭉꽃이 아니고 녹아 내려 산길을 질펀하게 적시는 잔설이었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라는 셀리의 서풍부(西風賦, Ode to the west wind)가 올해처럼 무색한 해가 언제 있었던 가 싶을 정도로 3-4월 내내 기온이 떨어져 이 산하가 봄에 곁을 줄 수 없었습니다. 이틀 간 지리산을 종주하며 만나본 꽃은 3월이면 피는 양지꽃과 현호색 그리고 4월에 피는 얼레지가 전부였습니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작가인 레이첼 루이스 카슨(Rachel Louise Carson)은 그의 시 “꽃”에서 “대지는 꽃을 통해서 웃는다”고 했습니다. “대지는 꽃을 통해서 웃는다”가 전문(全文)인 이 시를 두고 시(詩)보다는 경구(警句)에 가깝다고 제가 생각하는 것은 이 시의 저자가 바로 1962년에 “침묵의 봄”을 써내 유기염소계농약인 DDT나 BHC가 환경에 미치는 폐해를 고발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농약에 오염된 된 대지는 꽃을 피울 수 없는 죽어 있는 땅이어서 더 이상 웃을 수 없음을 명징하게 표현한 경구가 바로 이 시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번 종주산행을 하면서 대지가 웃는 것은 꽃을 통해서만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꽃이 거의 없는 지리산을 미소 짓게 한 것은 바로 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이었습니다. 동이 트자 먼저 아침을 연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에 지리산이 구름을 걷어내며 웃었습니다. 지리산의 웃음소리를 제게 전한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지리산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의해 증폭되어 제 귀에 전해졌고 다른 새들에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새들도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른 아침 지리산의 웃음소리가 산상의 화음이 되어 골짜기로 울려 퍼지게 한 것은 꽃이 아니고 새들이었습니다.
1)5월3일(월):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토끼봉-연하천-벽소령
모처럼 처가 식구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집사람과 결혼한 후 33년이 다되도록 처가 식구들과는 한 번도 같이 오르지 못한 지리산을 지난 2월 구정모임 때 큰 처남이 발의하고 제가 길 안내를 하는 것으로 뜻을 모아 이번에 처음으로 함께 오르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처남과 동서들이 다 참여한다고 해 9-10명은 족히 되는 대부대가 될 것 같았고 조금만 무리해도 중도에 탈락할 만한 몇 사람도 끼어있어 산행속도를 최대한 줄이고자 대피소에서 2박하고 사흘 간 종주하는 것으로 일정을 최대한 늘려 잡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유로 큰처남 부부와 막내동서 등 4명으로 인원이 줄어들어 부랴부랴 연하천과 장터목대피소의 숙박예약을 취소하고 벽소령대피소에서 1박하는 것으로 사흘일정을 이틀로 줄여 종주 길에 올랐습니다.
전날 밤 11시20분에 수원역을 출발하는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실고 지리산 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이번 산행으로 18번째 지리산을 오르는 제가 다 가슴이 벅찬데 난생 처음으로 지리산을, 그것도 장장25Km의 주능선을 밟는 종주 길에 오르는 세 사람의 심경은 설렘과 두려움이 반반씩이겠다 싶었습니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나자 35년 전 처녀 총각 때 집사람과 함께 지리산을 오른 일이 새록새록 기억났습니다. 7월 땡볕 더위에 중산리를 출발해 천왕봉을 오른 후 제석단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백무동으로 하산한 그 때도 제가 산행대장을 맡았는데 큰 처제와 집사람 친구 분이 같이 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 산행이 처가식구들과는 두 번째 산행인 셈인데 그 때 그 팀원 중 이번에는 저만 지리산을 찾아 오르는 것입니다. 3시30분이 조금 못되어 구례구역에 도착해 성삼재 행 시내버스에 올랐습니다. 구례버스터미널과 화엄사입구를 들른 다음 꼬불꼬불한 길을 올라 성삼재에 도착했습니다.
새벽4시45분 성삼재를 출발했습니다.
생각보다 새벽공기가 차지 않았고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았습니다. 동행한 세 사람 모두 지리산 종주를 거뜬히 해낼 만큼 산행을 많이 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꼭 오르고 말겠다는 의지만은 누구 못지않았고, 날씨도 속 썩일 것 같지 않아 이번 종주산행이 내내 순조로우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처남과 동서가 앞장서고 제가 후미를 맡아 처남 댁이 너무 처지지 않도록 보조를 맞췄습니다. 산행시작 50분이 조금 지나 도착한 노고단 대피소에서 준비해간 떡으로 아침을 드는 사이 날이 훤하게 밝았습니다. 지리산의 주능선이 시작되는 노고단 고개 마루에 안개가 잔뜩 끼어 오른 쪽 위 노고단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노고단을 왼쪽으로 에돌아 동쪽이 탁 트인 흙길의 능선을 걸으면서 기대했던 해오름을 보지 못했습니다. 8시 조금 넘어 임걸령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른 후 구름 뒤로 몸을 숨긴 반야봉을 오른 쪽으로 우회해 삼도봉으로 향했습니다.
9시14분 삼도봉에 다다랐습니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이 삼도봉으로 다른 한 분에 부탁해 처음으로 네 명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엷어진 구름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면서 살짝 보여준 지리산 골짜기의 아침 풍경이 고즈넉했습니다. 화개재로 내려가는 계단 길이 길고 가팔라 처남댁이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왼쪽 아래로 뱀사골 길이 갈리는 화개재에서 토기봉으로 오르는 길 또한 마냥 길어 한 번에 오르지 못하고 중간에 쉬었습니다. 토끼봉에 오르자 봉우리를 에워싼 구름들이 모두 사라져 반야봉과 중봉의 두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꽃이라고는 양지꽃과 얼레지 및 현호색 등이 전부였고 나뭇가지에서 아직도 새잎이 돋아나지 않은데다 듬성듬성 잔설이 보이는 등 산 밑에서 한창인 봄이 아직도 주능선까지는 치고 오르지 못했음을 보고 지리산은 역시 고산이다 했습니다. 연하천을 2.0Km 가까이 남겨놓은 지점에서 점심을 들면서 20분 넘게 푹 쉬어 원기를 회복한 후 12시45분에 오후산행을 이어갔습니다.
13시19분 연하천에 도착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너덜길을 걸어 명선봉 왼쪽 아래 능선으로 올라선 후 완만한 계단 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지난 1월 이 산을 종주할 때보다 대략 2시간가량 늦게 도착한 연하천에서 푹 쉰 것은 대원들의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 같아서였습니다. 대피소는 작지만 샘물 하나는 일품인 연하천에서 3.6Km를 더 가야 숙박예정지인 벽소령에 다다를 수 있어 이미 많이 지친 몸들로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음정마을로 탈출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강행군 했습니다. 연하천에서 음정갈림길까지 초반 몇 백 미터는 길이 평평하고 주로 흙길이어서 보너스로 받은 길처럼 편안했습니다. 갈림길에서 시야가 탁 트이는 봉우리에 오른 다음부터는 다시 돌 가닥 길로 오르내림이 만만치 않은 데다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지쳐서 주저앉는다면 큰일이다 했는데 의지로 잘 버텨주어 형제봉을 탈 없이 지났습니다.
16시10분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해 첫날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형제봉에서 1.5Km 떨어진 벽소령 가는 길이 1시간 10분이 걸렸을 만큼 길고 멀게 느껴졌습니다. 중간에 두 거암 사이를 지나는 바람의 통로에서 숨을 고르며 시원한 바람을 맞았기에 덜 지루했을 대원들의 몸이 모두 지쳐 마음의 행로 또한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벽소령에 도착한 대원들이 식탁용 벤치에 등을 눕힌 후 한 동안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서울 근교 산들을 4-5시간 오른 것이 고작인 이들에 12시간 가까이 걸린 이번 산행이 무리임에 틀림없다 했습니다.
날짜를 바투 잡아 벽소령대피소를 예약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는데 대피소 직원으로부터 남은 자리가 없으니 해 지기 전에 음정으로 내려가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찔했습니다. 평일이어서 빈자리가 있을 것으로 예단한 제 잘못 때문에 저 지친 몸들을 이끌고 6Km를 걸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자 그리한다면 지리산종주는 여기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싶어 체면불구하고 몇 번이고 간청했습니다. 제 집요한 부탁에 못 이긴 대피소 직원이 정 자리가 안 나면 마루 바닥에서라도 잘 수 있게 해 줄 테니 기다려보라고 해 비로소 안심하고 저녁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삼겹살과 반주가 곁들인 저녁식사는 혼자 와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성찬이었습니다. 단백질이 듬뿍 들어있는 고기를 충분히 먹어두어야 만만찮은 다음 날 산행을 대비할 수 있을 것 같아 양껏 들고 나서 저녁9시 소등 전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2)5월4일(화):벽소령-칠선봉-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
해발1,300m 대의 벽소령에서 맞은 새벽공기는 청량했습니다. 반달이 중천에 걸린 새벽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여 역시 산은 다르다 했는데 어느새 서쪽 하늘의 샛별만 남겨놓고 모두 사라졌습니다. 여명이 아침에 자리물림을 마치자 능선만 보였던 산들이 속살을 내보였고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습니다. 전투식 비빔밥으로 아침을 때운 후 서둘러 산행에 나섰는데도 출발이 예정보다 한참 늦었습니다.
아침6시38분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왼쪽으로 갈리는 음정 길을 막아 놓은 삼거리에 이르기까지 길이 넓고 평탄해 걷기에 편했습니다. 삼거리에서 선비샘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가파르게 오르다가 덕평봉을 오른 쪽으로 에도는 중 오른 쪽 아래 자리한 벽소령대피소가 보여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대피소에서 묵는 동안 가장 힘든 것은 너무 일찍 소등을 해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많이 피곤했던지 이내 잠이 들었는데 옆자리의 처남이 애를 먹었을 정도로 코를 심하게 골았다 합니다. 수통에다 물을 가득 채운 후 선비샘을 출발한 저희들이 걸음이 느려 매번 다른 팀에 길을 비켜 줘야했는데 이번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직장 팀을 추월했습니다. 쉬지 않고 40분 가까이 걸어 오르자 지난 1월 쉬어갔던 칠선봉이 나타났습니다.
8시24분 칠선봉에 이르렀습니다. 전망이 빼어난 칠선봉에 올라서자 동쪽 멀리로 천왕봉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칠선봉에서 영신봉까지는 오르내림이 심하고 가파른 계단 길을 걸어 올라야 해 힘이 많이 들지만, 암봉이 빚어낸 절경과 아래로 보이는 깊숙한 계곡에서 느껴지는 안온함 덕분에 그래도 걸을만한 구간입니다. 철계단을 올라 높게 솟은 암봉을 비껴가자 빨치산대장 이현상이 붙잡혔다는 대성골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는 반야봉을 비껴가 노고단까지 이어져 마치 파노라마를 보는 듯했습니다. 남으로 낙남정맥이 갈리는 영신봉 아래 이정표를 지나자 넓은 평원에 자리한 세석대피소가 전모를 내보였습니다.
10시4분 세석대피소 갈림길을 지났습니다. 영신봉과 토끼봉 사이에 자리한 깊숙한 안부에서 왼쪽으로는 한신계곡 길이 갈리고 오른 쪽 바로 아래 세석대피소가 자리하고 있는 세석평원이 넓게 펼쳐졌습니다. 대피소 갈림길에서 가깝게 보이는 촛대봉이 보기보다 멀었습니다. 자연 늪지대를 지나 지난번에 지나쳤던 오른 쪽의 촛대봉을 올랐습니다. 안내판에 실린 전설에 따르면 촛대봉이라는 이름은 연진이라는 여인이 이 봉우리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의 산신령께 죄의 용서를 빌다가 그대로 굳어진데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이 여인이 지은 죄란 곰의 말을 듣고 자식을 낳고자 신비의 물인 음양수 샘물을 퍼 마셨다는 것인데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토록 세석의 돌밭에서 철쭉을 가꾸게 한 산신령이 너무 잔인해 보였습니다. 다른 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구상나무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그중 상당수가 죽어 있는 고사목이어서 이산의 칙칙함이 더해 보였습니다. 연하봉을 지나 장터목에 이르자 많이들 지친 듯 했습니다.
12시32분 북적대는 장터목에 도착했습니다. 벽소령을 호기롭게 출발한 일행들이 라면을 끓여먹느라 1시간 넘게 푹 쉬었는데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전날보다 피로가 더 빨리 찾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13시58분에 장터목을 출발한 일행들이 무거운 다리를 떼어 놓느라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고사목지대를 지나 제석봉에 올랐다가 다시 안부로 내려섰습니다. 5월에 나타나 8월에 자취를 감춘다는 몹쓸 파리들이 자꾸 덤벼들어 마지막 산 오름이 짜증스러웠습니다. 통천문을 지나서도 암릉 길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몇 번 가다 쉬다하며 고도를 높여갔습니다. 칠성동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암릉 길을 지나 천왕봉에 이르자 먼저 오른 처남과 동서가 정상석 옆에 자리 잡아 쉬고 있었습니다.
15시33분 해발1,915m의 천왕봉에 올라섰습니다. 정상석 이면에 “韓國人의 氣像이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적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여기 지리산이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 육지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번은 꼭 오르고 싶은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오른 세 사람들의 감회가 어떠할 까는 불문가지의 일이어서 기뻐하는 모습을 그냥 지켜만 보았습니다. 박무만 끼지 않았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덕유산과 가야산이 보이지 않아 대충 그 방향으로 겨냥해 셔터만 눌렀습니다. 넷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15시47분에 천왕봉을 떴습니다. 이제껏 맡아온 후미를 처남에 넘겨주고 법계사로 앞장서 내달린 것은 1975년 여름 집사람과 함께 오른 길을 저 혼자 내려가면서 그 때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남강의 발원지인 샘터에서 석간수를 떠 마신 후 개선문을 지나 법계사 일주문에 이르자 지리산 종주산행도 이제 끝나간다 싶어 아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16시48분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후미를 기다리는 동안 총총 걸음으로 제 주위를 맴도는 이름 모르는 새들과 교유했습니다. 저 새들도 여기 지리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기에 비록 통성명을 하지는 못했지만 제가 다시 이 산을 찾아 여기에 오면 다시 인사를 건네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대피소에서 중산리탐방소로 내려가는 길은 천왕봉에서 법계사로 내려가는 길에 비해 훨씬 경사가 완만했습니다. 장터목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계곡에서 몸을 씻은 후 더 내려가 해발800m 대로 들어서자 비로소 파릇파릇한 나뭇잎이 보이기 시작해 주능선에서 실종된 봄을 여기서 다시 찾은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19시20분 중산리탐방센터 앞에서 지리산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산길에서 빠져나와 아스팔트길로 들어선 후 4-5분을 더 걸어 내려가 중산리 탐방센터에 이르자 부산에 사는 막내처남부부가 미리와 저희들을 반겼습니다. 막내처남이 끌고 온 차에 모두 탈 수가 없어 그 차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큰처남 내외가 타기로 하고 동서와 함께 그 아래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진주로 나갔습니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하차해 먼저와 기다리는 처남들과 함께 인근 음식점으로 옮겨 막내처남이 낸 저녁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심야버스 안에서 큰 처남이 미리 낸 회비를 막무가내로 되돌려줘 이번 종산행은 두 처남 덕분에 몸만 가지고 다녀온 셈이 되었습니다.
처가식구들 중 제가 항상 고마워하는 사람은 큰 처남입니다. 저한테 잘 해서도 그렇지만 그보다 큰 누나인 집사람에게 극진히 대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누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처남이 고마웠고 오누이간의 애틋한 정이 부러웠습니다. 집사람이 암에 걸려 고생할 때 회사일로 바쁜 저를 대신해 똑같이 회사를 다니면서도 가깝다는 이유로 어렵게 짬을 내어 집사람을 차에 태워 병원을 같이 가곤 했습니다. 큰 처남이 지리산을 한 번 종주하고 싶다고 해 두 말 않고 기꺼이 길안내를 맡은 것인데 이렇게 무사히 끝내고 나자 가슴이 뿌듯했습니다. 처남과 처남댁, 그리고 동서 모두 초행이어서 적지 아니 힘들었을 텐데 끝까지 잘 참아 지리산종주산행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모두들 수고했습니다.
<산행사진>
1)5월3일(월):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토끼봉-연하천-벽소령
2)5월4일(화):벽소령-선비샘-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
- 시인마뇽
- 2010.05.07 16:45
- 아이젠을 차지 않아서인지 이번에는 힘든 줄 전혀 몰랐습니다. 같이 한 일행들이 12시간 산행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능선에 봄이 찾아오지 않아 칙칙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해오름
*2010.05.10 23:4
*처남, 동서와 이렇게 산행을 하는
시인마뇽님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화목한 가정 이끄시길 바랍니다.
제가 다니는 산악회에서 무박코스로
이 구간을 하루만에
종주한다는데 무리한 일정 같습니다.
- 시인마뇽
- 2010.05.11 06:21
- 60대인 제가 50대의 처남과 동서를 이끌고 다녀왔습니다. 지리산 종주가 그들의 삶에 겸허함과 자신감을 같이 심어주었을 것이라 믿기에 기꺼이 길 안내에 나섰습니다. 2004년 여름 저도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하루에 뛰었는데 다른사람들보다 걸음이 느려 16시간이 걸렸으며 천왕봉에서 하산할 때는 무릎이 아파 고생좀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안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지리산(6)
*산행일자:2010. 1. 29일(금)-30일(토)
*소재지 :경남산청/함양, 전남구례, 전북남원
*산높이 :천왕봉1,915m
*산행코스:성삼재-노고단-벽소령-천왕봉-중산리탐방쎈터
-1월29일(금):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연하천-벽소령
-1월30일(토):벽소령-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탐방쎈터
*산행시간:총22시간38분
-1월29일(금):4시25분-15시 4분(10시간34분
-1월30일(토):5시45분-17시49분(12시간 4분)
*동행 :경동고동문4명(24기김주홍, 이규성, 우명길, 29기정병기)
하얀 눈이 능선을 덮은 지리산을 종주하면서 생(生)과 사(死)의 극명한 차이를 보았습니다.
이산에서 만나본 주목나무 한 그루는 자연수명인 천년을 다 채우기에 아직은 너무 어려 보이는 생생한
나무였고 그 옆에 자리 한 또 한 그루의 주목나무는 수피가 다 벗겨지고 줄기만 남은 고사목(枯死木)
이었습니다. 두 나무가 태어난 시간적 거리는 몇 세기를 가늠할 만큼 까마득하겠지만 공간적 거리는
기껏해야 2-3m를 넘지 않아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대비됨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이 산 능선에 덩그러니 서있는 이 두 나무들이 서로 못 본채 하고 등을 돌리고 살기에는 같이 셈해야
할 세월이 너무 길어 이들이 한 곳에서 살아가려면 미우나 고우나 말을 트고 지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
입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점차 생명이 다해감이 두렵고 죽은 나무는 혹시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 이들 두 나무들은 삶과 죽음을 화제 삼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질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지리산의 고사목을 볼 때마다 저들은 무슨 한이 남아 있어 등을 땅에 눕히지 못하고
똑바로 곧추 서있을까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두 나무들을 보고 고사목이 눕지 못하는 것은 한이 남아서
가 아니고 살아 있는 나무들에 들려줄 이야기가 새로 생겼기 때문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고사목이 살아있는 나무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생명체로 대우받을 수 있지만 죽고 나면 쓰임새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물건
취급을 받는 다는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란 지고지선하다는 것도 같이 말
입니다. 고사목이 눕지 못하는 것은 설사 죽은 목숨이지만 물건 취급을 받기 싫어서라는데 생각이 미
치자 재작년에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능동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물질로 가득 찼습니다. 피
동적인 것은 물질의 속성이요 능동적인 것은 생명의 속성입니다.” 고개를 높이 들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한 그 능동적인 동작하나만으로도 저 고사목은 스스로가 생명체로 대접받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저리도 처절하게 눕기를 거부한 고사목들이 세월에 허리를 꺾인 채 장터목에
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들 고사목들이 다시
죽은 것입니다. 제가 이 고사목들을 처음 만난 것이 1970년 봄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키가 훤칠했던 고
사목들이 40년이 지나 땅위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이세상에 세월을 이길 장사가 없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되새겼습니다. 그렇기는 해도 세월에 맞서 생명을 능동적으로 이어가는
종주산행을 멈출 뜻은 아예 없기에 내년겨울에도 고산종주에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1월29일(금):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연하천-벽소령
전날 밤 11시20분 수원역에서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재작년 2월 초 덕유산을 종주했던 고교동문들이 다시 모여 지리산 종주에 나선 것입니다. 그해 가을
용화산에서 허리를 다쳐 작년 겨울에는 설산종주를 못했지만 그간 저 나름대로 착실히 몸을 만들어 이
번에 이틀간의 지리산 종주 길에 오를 정도로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 번 다친 허리의 통증이 옛날처럼
완전히 기시기를 기다린다면 그새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때는 기력이 떨어져 못 오를 수도 있겠다 싶
어 이번에 마음 다져먹고 집을 나섰지만 내심 걱정도 됐습니다. 밤을 도와 내달린 기차가 구례구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3시27분으로, 3월까지는 성삼재로 가는 새벽버스가 운행을 멈췄다고 해 다른 두
명이 먼저 탄 콜 밴에 3만원을 내기로 하고 일행3명과 함께 차에 올라 성삼재로 향했습니다.
새벽4시25분 성삼재를 출발했습니다.
구례구역을 출발할 때 열렸다고 한 탐방쎈타의 문이 닫혀 있어 한 데서 산행채비하면서 손님을 빨리
태우고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만간 들통 날 거짓말을 한 기사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노고단
으로 올라가는 넓은 시멘트 길이 완전히 빙판져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각사각 나는 아이젠 소리가
밤의 고요를 깼습니다. 50분 만에 도착한 노고단 대피소에서 김주홍동문이 준비한 간식으로 아침을
때운 후 5시58분 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겨울철 야간산행이 특별히 어려운 것은 마개로 얼굴을 가리
고 숨을 쉬면 안경에 김이 서려 아예 안경을 벗고 산행해야 하는 데 이 경우 초기 얼마간은 착지점이
잘 안보여 발을 앞으로내딛기가 어려워 자연 걸음이 느려지는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휘몰
아치는 노고단 고개서 잠시 숨을 고른후 노고단을 왼쪽으로 에돌며 임걸령으로 내달았습니다. 피아골
갈림길을 지나 임걸령에 도착하기까지 고도차가 별로 없고 바닥의 눈이 다져져 생각보다 속도가 붙었
습니다. 내복을 두이나 껴입고 안에 우모복을 입어 서인지 지난 10월 이 길을 지날 때 보다 별반 더 춥
지 않았습니다.
8시37분 삼도봉에 올라섰습니다.
노고단봉우리를 에돈 후 아침7시 경 동녘하늘이 붉어졌지만 해가 뜨기까지는 한참동안 기다려야 해
일단 가는 데 까지 가다가 일출사진을 찍기로 하고 계속 전진했습니다. 7시25분에 임걸령으로 내려서
자 사방이 완전히 밝아져 헤드랜턴을 끄고 진행하다가 7시40분경에 다다른 능선에서 시뻘겋게 달아오
른 태양의 가슴 벅찬 떠오름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8시11분 반야봉을 오르는 길이 왼쪽으로 갈
리는 노루목에 다다라 반야봉을 다녀가자는 이규성동문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대로 진행해 그 36분 후
하얀 눈이 암봉을 덮은 삼도봉에 올라섰습니다. 삼도봉에서 조금 비껴 양지바르고 바람 가린 곳을 찾
아 과일을 꺼내들며 10여분 쉰 후 데크계단을 따라 화개재로 내려갔습니다. 9시20분에 연하천대피소
를 4.2Km 남겨 놓은 화개재를 지나면서 떠올린 한 분은 저와 동년배인 해남태생의 여류시인 고정희님
이었습니다. 지리산을 끔찍이도 사랑해 “지리산의 봄”이라는 시를 남긴 님은 44살의 젊은 나이에 왼쪽
아래 뱀사골에서 실족사를 당했는데, 대간시인 이성부님은 이를 두고 그의 시집"지리산"에서 "아름다
운 물이 올곧은 처녀시인을 앗아가다니"하며 탄식했습니다.
11시39분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해 점심을 들었습니다.
화개재에서 토기봉으로 오른 길은 그리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오름 새가 계속되어 지루하고 힘들었습
니다. 40분 넘게 걸어 올라선 토기봉에서 뒤돌아본 반야봉은 골바람을 타고 올라온 구름에 가려 잘 보
이지 않았지만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보았던 의젓한 자태는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
다. 덕유산보다 300m가량 더 높은 지리산이 적설량은 2년전의 덕유산보다 훨씬 못해 토끼봉을 오를
때까지 고산특유의 눈 언덕을 지 못했는데 토기봉에서 명선봉으로 옮기면서 조그마한 규모의 눈 언덕
을 만나 사진 찍어 왔습니다. 하늘을향해 치솟은 나무들 사이로 길이 난 너덜 길을 걸어 오르는 정병
기동문의 뒷모습이 유난히 지쳐 보이는 것은 남들보다 짐이 많아서도 그랬겠지만 그보다는 준족의 이
규성동문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명선봉을 왼쪽으로 우회해 바로 저 아래가 연하천
인 데크계단에 이르자 이제 힘든 코스는 끝났다 싶어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길 위의 눈이
잘 다져져 예상했던 것보다 1시간 정도는 빨리 도착해 내친 김에 세석까지 내달려볼 까 하다가 과유불
급일 것 같아 욕심을 접었습니다. 연하천대피소에서 짐을 풀고 떡라면을 끓여 들며 1시간 넘게 푹 쉰
후 12시50분에 출발했습니다.
15시5분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해 첫날 종주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연하천을 출발해 왼쪽으로 음정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조금 더 올라가자 지난 10월 저 혼자서
점심을 들었던 삼각봉이 나타났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눈 쌓인 이 겨울에 지리산을 혼자 종주하시는
저보다 몇 년 연상이신 한 분을 뵈어 인사를 드렸는데 이분이 바로 한국의 산하 사이트에 산행사진을
올리시는 방랑자님인 줄은 집에 돌아와 알았습니다. 벽소령대피소를 1.5Km 남겨 놓은 지점에 자리 잡
은 거암을 지나 몇 번이나 오르내린 후 커다란 두 바위가 양쪽으로 서 있는 바람의 통로를 지나면서 에
어컨바람보다 더 시원했던 2004년 여름의 청량한 바람이 생각났습니다. 연하천에서 1시간 반이 걸린
다는 벽소령에 도착한 시각은 그보다 45분이 더 걸린 15시5분으로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한 낮
이어서 이만 산행을 접기가 아쉬웠습니다.
저녁상을 성찬으로 차린 주역은 김주홍동문과 집에서 꼼꼼히 식재료를 챙겨준 그의 부인이었습니다.
부인이 쌓아준 삼겹살은 동행한 네 명이 양껏 먹고 고맙게도 삼도봉에서 자진해서 저희들을 사진 찍어
준 옆자리의 한 분에 나누어 주고도 남아 김치찌개에 넣었을 만큼 충분했습니다. 해가 넘어가자 밤을
재촉한 것은 저녁 8시에 소등하는 대피소였습니다. 밤차를 타고 내려와 10시간 넘게 산행한 것이 최고
의 수면제여서 소등을 하기 전에 잠이 들었습니다. 보름을 하루 넘긴 둥근 달이 유달리 환히 비추는 밖
은 대피소 안의 이른 시간 소등으로 더 밝았을 텐데 일찍 잠자리에 들어 별들의 향연을 지켜보지 못했
습니다.
*1월30일(토):벽소령-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탐방쎈타
새벽4시경 대피소 2층의 침상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습니다.
취사실로 내려가 아침을 해 먹었는데도 5시를 조금 밖에 넘지 않았고 서녘 하늘 위에 걸려 있는 둥근
달이 여전히 온 산을 환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아직 산행을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어서 대피소 1층
의 대기실로 들어가 반시간 가까이 쉬었더니 몸이 나른해진 느낌이었습니다. 대기실에 걸려있는 안내
판에 현재 기온이 영하7도이고 최저기온 또한 영하7도로 나와 있어 추위걱정은 접어도 될 것 같아 한
걱정 놓았습니다.
아침5시56분 벽소령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평평한 길의 낙석위험지대를 지나 덕평봉을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이 봉을 오른쪽으로 우회해 선비샘
에 이르자 동녘하늘이 불그스레해 일출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벽소령을 출발할 때 서녘
하늘에 떠 있던 둥근 달은 그새 붉은 색조로 바뀌면서 서쪽으로 더 기울어져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것 같
았습니다. 한 하늘아래 태양이 동쪽에서 일출을 준비하고 있고 서쪽에서는 밤새 이 땅을 밝힌 달이 땅
끝 아래로 침잠하는 것을지켜보노라니 자연에서 자리물림은 저토록 순조로운데 어찌해서 인간세계의
자리물림은 권력투쟁으로변질되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비샘에서 페트병에다 물을 채운
후 부지런히 칠선봉으로 내달린 것은 일출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는데 해가 이미 능선 위로 조금 올라
선 직후에 도착해 사진 찍기가 전날만은 못했습니다. 칠선봉에서 바라다 본 낙남정맥 줄기는 지난 10
월 영신봉에서 삼신봉까지 한 번 밟은 길이어서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영신봉을 받쳐주는 동사면의 곧
추선 암벽이 빼어나 보이지만 철계단 오름길이 가팔라 무릎에 무리가 갈까 걱정도 됐습니다.
9시34분 세석대피소 갈림길을 지났습니다.
칠선봉에서 바라다본 천왕봉의 날카로운 얼굴표정이 산행을 진행해 거리를 좁힐수록 다정다감해 보였
습니다.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영신봉을 지나 세석으로 내려서면서 한 때 빨치산의 아지트였다는 평전
이 참으로 아늑하게 느껴졌습니다. 한신계곡으로 길이 갈리는 안부사거리에서 직진해 촛대봉으로 오
르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정도로 힘은 들었지만 냉랭한 겨울바람이 정신이 바짝 들게 했습니다. 촛대
봉이 전혀 촛대를 닮지 않았다는 친구들의 지적은 이 봉우리에 얽힌 애틋한 전설을 몰라서 하는 말이
기에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지난 가을 낙남정맥을 종주할 때 음양수를 지나면서 종주기에 남긴 전설을
아래와 같이 옮겨 놓습니다.
“아득한 옛날 지리산에 제일 먼저 들어와 대성계곡에 자리 잡고 행복한 나날을 보낸 호야와 연진 부
부는 안타깝게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 합니다. 곰으로부터 음양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연진 여인은 곧장 달려와 샘물을 퍼마셨는데 호랑이가 이 사실을 산신령께 고해
바쳤습니다. 대노한 산신령은 음양수의 신비를 발설한 곰을 가두고 연진에게는 평생토록 세석의 돌밭
에서 철쭉을 가꾸게 했습니다. 촛대봉은 연진이 이봉우리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천왕봉의 산신령께 죄
의 용서를 빌다가 그대로 굳어진 암봉이라 합니다. 연진 여인을 돕는 선한 일은 곰이 하고 산신령께 밀
고하는 악역을 호랑이가 맡은 이 애틋한 전설은 그 프레임을 단군신화에서 따온 것 같아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11시45분 장터목에 도착해 대피소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촛대봉에서 한참동안 쉬면서 보다 가까워진 천왕봉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안부로 내려섰는데 길이
조금 미끄러웠습니다. 대체로 세석까지는 쌓인 눈이 굳게 다져져 걷기에 아주 편했는데 세석을 지난
후로는 눈이 덜 뭉쳐진 채 가루로 남아 있기도 해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촛대봉에서 2.7Km 떨어진
장터목에 이르기까지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먼발치의 정령치와 더 멀리 자리한 머리가 하얀
덕유산을 조망했습니다. 삼신봉을 지나 연하봉을 조금 못 미친 곳에 이르자 깊은 산의 능선에서 볼 수
있는 고산성 침엽수인 가문비나무가 가슴에 명찰을 달고 통성명을 해왔고, 삼신봉 아래 넓은 공터에서
는 두 그루의 주목나무가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일깨워주었습니다. 목 좋은 안부에 자리한 장터목은 문
자 그대로 장터를 방불할 정도로 북적댔습니다.혹한을 무릅쓰고 이 높은 산을 찾아 오른 산객들이 이
리도 많은 것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지리산의 가슴이 어머니만큼 넓고 따뜻해서일 것입니다. 전투식으
로 점심식사를 마친 후 12시27분에 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13시32분 해발1,915m의 천왕봉에 올라섰습니다.
하늘을 향해 곧추선 고사목은 모두 키가 작았고 키가 큰 고사목들은 대개가 땅바닥에 누워 있어 장터
목의 고사목들이 옛날 같지 못했습니다. 죽은 나무들은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 생각이 짧았
던 것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금언을 빼고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자명함을 잊고
있었기에 하는 말입니다. 두 번 죽어 땅에 몸을 눕힌 고사목들을 뒤로 하고 산 오름을 계속해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암봉의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순서를 기다려야 정상석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로 정상이 붐벼 오래 있지 못하고 하산하는 저를 불러 세운 것은 작은
새 한 마리였습니다. 이 새도 가문비나무처럼 명찰을 달았더라면 이름을 불러줬을 텐데 하면서 잠시나
마 한자리에 머물러 사진모델이 되어준 것만도 감지덕지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봉인 한라산에
오르면 정상을 배회하는 까마귀를 쉽게 볼 수 있지만, 참새보다 조금 더 큰 저새가 저리 작은 몸집으로
무슨 힘이 있어 이 높은 곳까지 날아 올라왔는지 신기하고 궁금했습니다. 이 새 또한 지리산의 넓은 가
슴에 안기고 싶어 이 높은 봉우리를 날아 올라왔을 것입니다.
15시14분 법계사를 둘러보았습니다.
해떨어지기 전에 산행을 마치고자 천왕봉에서 가장 짧은 중산리 코스로 하산했습니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가파른 계단 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느라 정상에서 1.8km 거리의 법계사까지 무려
1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겨울 내내 내린 하얀 눈이 얼고 녹기를 반복해 생성된 약수터 암벽의 고드름
을 보고 눈이 고드름으로 변화해 늘려놓은 수명이 저 고드름의 길이에 비례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
니다. 이틀에 걸쳐 추위를 무릅쓰고 해낸 지리산 종주산행이 개선문을 지날 때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
져 이 길을 하산코스로 정하기를 참 잘했다 싶었습니다. 법계사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는 적멸
보궁임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안내판에 해발1,450m의 고도에 위치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
에 자리한 가람이라 적혀 있지만 설악산의 봉정암과 어떠한지 확인해보아야겠습니다. 일주문으로 법
계사를 빠져나와 로타리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하산을 계속 했습니다.
17시50분 중산리 탐방쎈터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가파른 계단 길이 법계사에서 끝난다는 제 기억이 틀려 가파른 돌계단 길이 계속됐습니다. 아이젠을
벗고 조심해 내려가느라 시간이 더 걸렸지만 중산리에서 진주 가는 버스가 1시간에 1대 꼴로 있어 크
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가다 쉬기를 반복해 다다른 망운암이 완만한 길을 열어주고 한 겨울에는 수량
이 바짝 줄어들어 다른 산에서라면 들을 수 없는 계곡물소리가 엄청 크게 나 자연 발걸음이 경쾌해졌
습니다. 앞서 내려가 벌써 산행을 마치고 후미를 기다리고 있을 이규성동문에는 미안한 일이지만 길이
좋아졌다고 속도를 높이지 않은 것은 마지막 한 걸음까지 조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산길을 벗어나
포장도로로 내려서자 먼저 내려가 이규성 동문과 함께 저희 둘을 기다리는 정병기 동문이 위치 확인
전화를 해왔고 얼마 후 탐방쎈터에 다가서는 저희들에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도록 연출한 후
산행종료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내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고 가까운 음식점에 들러 소주와 맥주 몇
배를 돌리며 지리산 종주를 자축했습니다.
저녁6시50분 버스로 진주로 나가 저녁식사를 한 후 세 친구는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다음날 통영으
로 서 명산100산의 한 산인 미륵산을 오르고자 가까운 찜질방으로 옮겼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이 제게 의미가 컸던 것은 허리를 크게 다친 후 처음 해낸 동계 종주산행이어서였습니
다.집 떠날 때만 해도 과연 허리가 견뎌낼 까 걱정이 컸는데 막상 산길로 들어서자 그런 걱정은 저도
모르게 사라지고 바람과 추위 그리고 설경과 눈 속에서 겨울을 내는 이산의 뭇 생명체들과 함께 이틀
을보자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마하니 가슴 넓은 지리산이 당신 품에 안기고자 이렇게 달려온 저를
두고 어찌하랴 싶기도 했습니다. 설질이 좋아 눈길도 걸을 만 했고 기온도 영하 10도를 넘지 않은 것
같아 충분히 견딜 만 했습니다. 아침 한 때 골바람이 능선을 치고 올라 바람이 포효하는 소리를 들은
것을 빼고는 이렇다 할 강풍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내년 겨울에 다시 올라오라는 지리산의
제스츄어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마웠습니다. 내년 겨울에 이런 종주산행을 다시 하게 된다면 산행대
장 일을 후배동문에 넘겨 줄 뜻입니다. 이리해야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순조로운 자리물림을 내보여준
지리산으로부터 한 가지 배워가고 배운 바를 행하는 것이 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동행한 동문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산행사진>
1)제1일(1월29일):성삼재-노고단-임걸령-삼도봉-연하천-벽소령
2)제2일(1월30일): 벽소령-세석-장터목-천왕봉-법계사-중산리탐방센터
*댓글
- 2010.02.02 20:06
- 행여 지리산에 드셨습니다....
소백에는 상고대가 만발 이었습니다...
그것도 저도 친구들과 함께 한 즐거운 산행 길 이었습니다...... ㅎ
- 시인마뇽
- 2010.02.03 08:08
- 칼바람은 소백이 지리보다 더 센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길도 좋고 덜 추워
고생을 덜 햇습니다. 소백산 산행은 어더했는지요?
안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 해오름
- 2010.02.05 11:43
- 종주산행에 필요한 장비는 어느 정도일지요?
- 시인마뇽
- 2010.02.05 22:33
- 대피소에서 일박해서 야영장비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토요일이 아니면 대피소 예약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근교고산을 갈때 장비에 취사도구만
추가했고 식단을 미리 짜 가고 넷이 거의 똑같이 나누어 짐을 최소로 했기에 1박2일의 짐이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습니다.
*댓글
- 서중원
- 2010.02.03 15:3
- 수고들하셨네 3년전 종주때 아쉬웠던 것이 많아 꼭 다시 하려했는데 같이 못해 유감일세.
금년 하반기에 한번 기회를 주겠나..
자네 건강이 완전회복된 것이 우선 반갑네.
- 시인마뇽
- 2010.02.03 20:15
- 그때 비를 맞고 산행하느라 제대로 못보았지. 이번에는 천왕봉에서 노고단이 다 보일정도로
하늘이 꺠끗했네. 주홍이가 복이 많은 사나인가 보네. 빨리 발이 나야지. 그러면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산이라네. 지리산이 어디 가겠는가? 몸만 나으면 다시 가야지. 여러모로 고맙네.
- 아사비
- 2010.02.03 18:50
- 그래도 한번에 너무 무리한신거 아니신지요?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 시인마뇽
- 2010.02.03 20:16
- 집 떠날 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만, 산에 오르면 씻은 듯이 안아프니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내려오면 다시 아픈데 말입니다.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무심거사
- 2010.02.05 07:31
- 겨울 지리산을 다녀 왔다니 부럽네. 나도 언제 한번 동행할 수 있으면 줗겠네.
아직도 건강하고 또 좋은 친구가 있으니 그러한 여행이 가능하겠지. 아무튼 큰 일 해냈네.
꾸~벅.
- 시인마뇽
- 2010.02.05 22:25
- 몇 년은 더 할 수 있으니 언제 한 번 시간내보게나.
날씨가 한 부주 해주어 별반 고생되지 않았네.
- 해오름
- 2010.02.05 11:42
- 산행기 잘 보았습니다. 지리산 종주 꿈의 발걸음입니다. 언제쯤 님의 발자국을 따라 걸을수 있을까요.
언제나 즐거운 산행이어가시길 바랍니다
- 시인마뇽
- 2010.02.05 22:27
- 지리산 종주가 이번이 일곱번째입니다만 동계종주는 처음이어서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날씨가 좋아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리산(5)
*산행일자:2009. 9. 26일(토)
*소재지 :전북남원/경남함양 및 하동
*산높이 :토끼봉1534m, 명선봉1586m,
*산행코스:음정마을-연하천-명선봉-토끼봉-화개재-뱀사골
-지리산탐방안내센타-반야교주차장
*산행시간:10시50분-18시24분(7시간34분)
*동행 :송백산악회 회원
몇 년 전 백두대간을 함께 종주한 송백산악회의 대간종주 팀에 끼어 지리산의 뱀사골을 다녀왔습니다. 음정에서 연하천으로 바로 가 토끼봉을 올랐다가 화개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반선까지 이어지는 뱀사골로 내려갔습니다. 뱀사골은 2003년 겨울 회사직원들과 함께 반선교를 출발해 2/3쯤 올랐다가 시간이 없어 내려간 적이 있어 결국 이 계곡의 명소들을 들러보는데 6년이 걸린 셈입니다. 뱀사골은 명선봉과 반야봉사이의 원시림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그 길이가 장장 9Km에 달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죽은 곳이 바로 이 뱀사골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계곡의 이름난 소(沼)나 담(潭)들은 모두 이무기를 수장한 수중 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과 이무기는 모두 전설에만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뱀의 몸통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 뿔이 나고 네 발에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는 용은 고대 중국인이 상상한 신령한 짐승입니다. 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긴다는 용은 제왕에 비유될 정도로 극진히 대접받는 상서로운 존재이기에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할 확률은 아주 낮은 것이 당연합니다. 입신출세의 어려운 관문을 뜻하는 등용문은 잉어가 중국 황허강 상류의 급류를 이룬 용문에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등용문을 통과하지 못해 용이 되려다 실패해 물속에서 산다는 전설상의 구렁이가 바로 이무기입니다. 이 관문을 무난히 통과해 입신양명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보통사람들 모두가 매일 밤 용꿈을 꾸며 하늘로 승천하다 주저앉는 이무기인 셈입니다. 뱀사골은 등용문을 통과한 높은 분들이 다녀가는 계곡이 아니고 통과에 실패해 이무기로 남아 있는 저희 같은 민초들이 배낭 메고 드나드는 곳이다 싶어지자 이 계곡에 수장된 이무기들에 올릴 진혼곡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 대신 이 계곡에서 이무기들과 벗하며 그들에 진혼곡을 지어 올렸을 시인 한분이 있습니다. 저와 같은 해에 해남에서 태어나 "초혼제"와 "지리산의 봄"을 지어낸 시인 고정희님이 44살에 잠든 곳이 이 계곡으로, 대간시인 이성부님은 그의 시집"지리산"에서 "아름다운 물이 올곧은 처녀시인을 앗아가다니"하며 탄식했습니다.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정희님, 당신도 이 시대의 이무기입니다. 이무기들에는 더할 수 없는 명당자리인 지리산의 뱀사골에서 오래 오래 평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아침10시50분 음정마을을 출발했습니다.
지난 가을 바위에서 떨어져 허리수술을 받은 몸 상태로 이 산악회의 대간 종주 팀에 끼었다가는 종주코스도 다 못 뛰면서 공연히 민폐만 끼칠 것 같아 이번에는 뱀사골만 다녀가기로 마음 다져먹고 서울을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음정에서 벽소령을 거치지 않고 바로 연하천으로 올라가는 단축코스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한 번 이 코스로 뛰어보겠다는 욕심이 동했고 그래서 저도 음정에서 하차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내달려 초반 10분 가까이는 선두와 행렬을 같이 하다가 시멘트 길에서 오른 쪽 산길로 들어가 치받이 길을 오르면서 조금 씩 뒤로 쳐졌습니다. 산행시작 15분 만에 다시 비포장 차도로 들어서 벽소령을 향해 남진했습니다. 그늘과 땡볕을 번갈아 바꿔가며 오르는 넓은 길은 여름이 가을에 자리를 물려주는 길이어서 한낮의 기온이 섭씨26도까지 올라간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그리 덥지 않았습니다. 음정출발 1시간 만에 4.1 Km를 걸어 연하천 행 지름길이 갈리는 "벽소령 4.3Km"의 표지판 앞에 다다랐습니다.
11시54분 갈림길에서 연하천으로 질러가는 오른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갈림길에서 남원의 전북과 함양의 경남이 도계를 이루는 능선까지 50분간 걸어 오른 너덜 길이 이번 산행에서 가장 숨을 헐떡여야 한 깔딱 길이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지난 가을 사고로 바위만 보면 덜컥 겁부터 나 엄청 조심해 올랐습니다. 오랜 가을 가뭄이 너덜 바위의 습기를 없애주어 생각만큼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중간 중간 긴 너덜 길을 짧게 이어받은 산죽 길을 걷는 동안은 안심하고 노란 색의 해맑은 단풍에 눈인사를 건넸습니다. 중간에 샘물을 떠 마신 후 삼각봉에서 북쪽의 삼정산으로 뻗어나가는 도계 능선에 올라선 시각이 12시43분이었습니다. 삼각봉에서 삼정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이곳 능선삼거리까지만 탐방로여서 오른쪽의 삼정산행 길은 아예 막아놓았습니다. 이번 산행 중 처음으로 이 삼거리에서 짐을 내려놓고 10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13시36분 연하천에 도착했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왼쪽 삼각봉으로 이어지는 도계 능선 길은 완만한 오름 길이어서 걷기에 편했습니다. 삼각봉 분기점을 얼마 앞두고 평평한 곳에 자리 잡아 일행들과 함께 점심을 들었습니다. 땀이 식자 등 뒤가 써늘해져 얼마 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얼마간 걷다가 삼각봉 바로 아래 삼거리에서 대간 길로 발을 들였습니다. 오른 쪽 아래에 자리한 연하천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간 길답게 넓고 분명했습니다. 대간 길에 들어서면 마치 고향을 찾아온 것처럼 마음이 푸군해지는 것은 이미 한 번 밟았던 길인데다 정맥이나 지맥보다 길이 넓게 잘 나있어서입니다. 두해 전만 해도 우중충했던 연하천산장이 그새 산뜻하게 단장되어 연하천 전체가 깔끔해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곧바로 화개재로 향했습니다.
14시49분 해발 1534m의 토끼봉에 올랐습니다.
나무계단 위에 떨어진 낙엽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노라 연하천에서 명선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번에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한 더위에 그늘을 만들어줄 때는 나뭇잎들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그리 몸에 좋다며 잘도 쉬어가던 산객들이 일단 가지에서 떨어져 땅바닥을 나뒹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구 짓밟으며 거지발싸개 취급을 하는 것은 배은망덕이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해온 낙엽들에 “시몬 너는 낙엽 밟는 소리가 좋으냐?”하고 시 구절을 읊어대며 염장을 지를 수는 없었습니다. 대간종주라는 숙명적인 짐을 벗어버린 지 3년이 넘었기에 대간 길에 들어서도 이제는 살살 호비작거리며 걸으면서 뭇 생명체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습니다. 화개재로 이어지는 대간 길에 발을 들이며 가슴 벅찼던 것은 이번 산행으로 수술경과가 안 좋아 영영 대간 길을 밟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을 깔끔하게 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명선봉을 오른쪽으로 비껴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에 투구꽃과 용담, 그리고 이름 모르는 노란 꽃을 사진 찍었습니다. 옆에서 이 꽃들을 내려다보는 키가 훤칠한 잣나무의 의연한 모습도 함께 카메라에 옮겨 담아 왔습니다. 토끼봉에 오르자 힘들게 종주한 호남정맥의 최고봉인 백운산이 정남쪽으로 흐릿하게 보여 엄청 반가웠고 바로 아래 헬기장에서 식사 중인 한 젊은이가 배를 까주어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대간 종주가 가슴 뿌듯한 것은 이처럼 반가움과 고마움이 종주 길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15시30분 화개재에서 오른 쪽 아래로 내려가 뱀사골로 향했습니다.
토끼봉에서 화개재로 내려서는 길에 이 길을 오르는 산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삼도봉과 반야봉이 가깝게 보이는 화개재는 꽤 넓은 안부로 전망데크도 설치되어 있어 쉬어 가기 딱 좋은 곳입니다. 저 아래 화개장터가 이곳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싶은 것은 옛날에는 여기 고개 마루에 경상도의 소금과 해산물을 전라도의 삼베와 산나물과 서로 맞바꾸는 장터가 섰다기에 하는 말입니다. 이 고개를 올라와 물물교환을 끝낸 양쪽의 민초들이 탁주 한배 나누지 않고 그냥 떠났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고 보면 화개재는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쉼터임에 틀림없습니다. 화개재에서 한 숨 돌린 후 오른쪽으로 내려서자 경사가 급한 나무계단길이 무인 탐방센타까지 이어졌습니다. 돌 가닥 길을 얼마간 내려가 만난 첫 번 째 다리 위에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수량이 늘어나 어엿한 계곡으로 바뀌었습니다.
탐방센터에서 반선탐방안내소까지 이어지는 뱀사골은 와운골의 물을 받아 수량이 넉넉했습니다. 아무리 계곡이 아름다워도 물이 마르면 헛 것인데 뱀사골은 낙차 큰 폭포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소(昭)들이 꽤 여러 개 만날 정도로 물이 많이 흘렀습니다. 여러 소들도 각기 나름대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어 그 형상에 어울리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에 걸 맞는 전설도 같이 전해졌습니다. 소가 깊지 않은데도 유난히 물이 파란 간장소는 지나던 보부상이 소금가마를 지고 이 못에 빠졌기 때문이라 하고, 곧추선 두 바위 사이로 깊숙이 물이 흘러 협곡이 연상되는 제승대는 스님이 불자를 위하여 소원을 빌며 제를 올린 곳으로 꽤나 영험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용이 승천하려다 떨어져 남긴 긴 자국을 이어보면 그 형상이 영락없이 용의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탁용소도 볼만 했습니다. 이 소들에 못 지 않는 것은 막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활엽수와 잘 다듬어진 길 그리고 다리입니다. 계곡과 나란한 방향으로 설치한 목재다리 길은 마치 긴 회랑 같았고 돌로 축대를 쌓은 산길은 돌담길처럼 아늑했으며 이들 모두가 노랑 단풍을 어우르며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여기 뱀사골의 명성이 마냥 부풀린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18시24분 반야교주차장에서 하루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둠이 삼켜버린 차창 밖으로 올들어 처음 만나본 노랑 단풍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되자 제 머리에 떠오른 것은 어둠이 감춰놓은 단풍의 실체적 아름다움이 아니고 단풍이 드는 나뭇잎과 모체인 나무와의 냉혹한 관계였습니다. 이 산의 나무들은 잎을 노랗게 물들이며 어느새 겨울채비에 들어갔습니다. 기온이 떨어지면 줄기는 더 이상 물을 끌어올릴 수 없고 그리되면 나뭇잎들은 엽록소가 사라져 광합성을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포도당을 만들지 못하는 나뭇잎들이 줄기에서 떨어져나가야 여름 내내 비축한 영양의 손실이 적어져 나무들이 무난히 한 겨울을 버텨낼 수 있습니다. 단풍이 든다는 것은 겉으로는 화사해 보일지 몰라도 실은 나무가 가지에서 잎들을 떨어내기 위해 준비한 무자비한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푸르렀던 나뭇잎이 화사한 단풍으로 변하고 끝내 줄기에서 떨어져 낙엽 지면서 나뭇잎의 일생이 끝납니다. 이처럼 자연의 로고스는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데 산에 올라 사랑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가슴은 여전히 따뜻한 것이, 그렇지 않다면 시인 박재삼님께서 “산에서”와 같은 주옥같은 시를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에서
그 곡절 많은 사랑은
기쁘던가 아프던가
젊어 한창때
그냥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기쁨이어든
여름날 헐떡이는 녹음에 묻혀들고
연중들어 간장이 저려 오는 아픔이어든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들거라.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속에
아른히 어린 우리 한 평생
그가 다스리는 시냇물도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시려오느니
사랑을 기쁘다고만 할 것이냐,
아니면 아프다고만 할 것이냐...
이 가을이 다 가기전에 다시 지리산을 찾아 "진실로 산이 겪는 사철 속에 아른히 어린" 제 삶을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시려오는 계곡물로 얼굴을 닦으며 아홉 해 전에 떠나버린 그녀와의 사랑이 기쁨이었는지 아픔이었는지도 확인해볼 뜻입니다. 아마도 사랑은 여름날 헐떡이던 녹음에 묻혀들 기쁨이자 가을날 울음빛 단풍에 젖어들 아픔일 것입니다. 그것이 용이 되지 못한 우리네 이무기들의 사랑일 것입니다. 시인 고정희님의 목숨을 앗아간 뱀사골도 시인이 노래한 사랑만은 지금도 소중히 보듬고 있을 것입니다.
<산행사진>
- 松琳 통나무
- 2009.09.28 10:30
정말 산을 잘 오르는 분이지요....
- 시인마뇽
- 2009.09.29 07:37
사고로 중단한 섬진강산줄기환주를 이어갈 수 잇을까 타진 차 다녀왔는데 아직은 좀 무리인 듯 싶습니다. 우선 장시간 버스를 탄다는 것이 허리에 부담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올들어 첫 단풍을 보앗습니다. 피아골도 한 번 다녀올 생각입니다.
- 히말라야
- 2009.09.28 16:32
백두산 산행 함께 했던 임순만 입니다...
우연히 선배님의 블로그를 방문하니
여전히 건강하게 산에 드시는 모습을 뵙습니다...
- 시인마뇽
- 2009.09.29 07:34
아직도 히말라야는 친정드나들듯이 다니시는지요? 부럽습니다.
저는 그동안 대간과 정맥에 눈이 떠 2004년부터 산줄기종주에 애쓰고 있습니다.
잊지 않고 이렇게 소식주셔서 반갑고 고맙습니다. 항상 안산, 즐산하시기 바랍니다.
- 히말라야
- 2009.09.30 17:
모두 걸으시려면 제법 시간 좀 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모쪼록 안산에 신경쓰셔서 즐산 하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한가위가 되시기를.....
- 히말라야
- 2009.10.01 12:49
- 계백
- 2009.09.29 15:56
“더도말고 덜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풍요로운 한가위 뜻 깊고 보람찬 추석을 맞이하여 행복하고 기분 좋은 명절이 되기를 기원하며 아울러 늘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블로그에서 생각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씀으로 명절인사 드립니다.
- 시인마뇽
- 2009.09.29 23:51
추석 때 귀향하시는 지요? 저는 파주가 고향이라서 당일 다녀 옵니다. 님께서도 즐거운 추석 보내시기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성원
- 2009.10.09 10:12
노랑여우님 산행기에 시인마뇽님이 오셨다는 애기가 나와서 반가웠습니다,
길고긴 백소령구간을 올라가쎴다는 소식에 이젠 예전처럼 완쾌하셨구나하고
안심도 되고요 옛날에 조계산다닐때처럼 같이 산행도 하고 싶고요
이젠 조금남은 정맥 마저 마치셔야지요 항상안산 즐산하시고요
토요일말고 일요날도 좀나오셔요 오랫만에 한번뵙게요
- 시인마뇽
- 2009.10.11 13:21
꼭 1년만에 다시 나섰습니다. 이번 주 쉬면서 계속할 수 있는 몸이 되는 지 점검해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요산행도 기회 닿으면 물론 참석할 뜻입니다. 다시금 고맙습니다.
지리산 (4)
*산행일자:2007. 10. 25-26일
*소재지 :경남산청/함양, 전남구례, 전북남원
*산높이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산행코스:중산리탐방쎈터-천왕봉-연하천-반야봉-노고단-화엄사
-10.25일:중산리탐방쎈터-법계사-천왕봉-장터목-세석-벽소령-연하천
-10.26일:연하천-삼도봉-반야봉-임걸령-노고단-코재-화엄사
*산행시간:총25시간40분
-10.25일:03시30분-17시55분(14시25분)
-10.26일:05시10분-16시25분(11시15분)
*동행 :경동고 24기서중원, 이규성, 우명길, 29기정병기
주봉인 천왕봉에서 서쪽 끝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25Km의 주능선을 빼놓지 않고 밟는 지리산 종주를 벌써부터 꿈꾸어온 몇몇 친구들 덕분에 적황색 단풍이 절정에 이른 만산홍엽의 지리산을 처음으로 만나 보았습니다. 1970년 5월에 첫발을 들인 후 총 열한 번의 산행 중 만추인 10월에 산에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거대한 피아골이 아침햇살의 도움을 받아 골짜기를 가득 메운 운무를 밀어내고 제 모습을 드러내자 붉게 물든 단풍이 저토록 요염하고 화사해 눈이 부셔 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동서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장대한 주능선과 이 능선에서 가지 친 산줄기들이 만들어 놓은 길고도 깊숙한 계곡을 이 산에 올라 내려다보노라면 과연 지리산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데 이번산행에서는 이에 더하여 여름 내내 푸르렀던 여러 수종의 나뭇잎들이 온몸을 불태우며 펼치는 마지막 미의 제전을 지켜볼 수 있어서 감탄을 뛰어넘어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뭇사람들이 가을이면 단풍나들이를 나서는 것은 단풍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닙니다.
아름답기로야 아무려면 꽃을 당해낼 수 있을까 만은 해마다 거르지 않고 가을 산을 즐겨 찾는 것은 단풍이 나무들이 벌이는 마지막 미의 제전이기 때문입니다. 봄이 되면 새잎을 내어 싱그러운 신록을 내보여주고 여름이면 꽃을 피워 산상의 화원을 만들어 갑니다. 가을이면 열매를 맺어 결실의 향연을 벌이는 등 산속의 나무들은 어느 한철도 가만히 자기 자리만을 지키며 세월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나무들의 축제 중 단풍제전이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단풍의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처절함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봄부터 여름 내내 온산을 푸르게 만든 나뭇잎의 엽록소 색소가 가을이 오면 붉은 색의 안토시아닌이나 노란 색의 캐로틴 등의 색소로 바뀌어 단풍이 듭니다. 단풍이 들면 나뭇가지는 떨켜를 만들어 얼마 후 단풍잎들을 떨쳐냅니다. 푸르렀던 나뭇잎들은 이렇게 낙엽이 되어 일생을 마감하기에 임종을 얼마 앞둔 단풍의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처절한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단풍을 떨쳐내는 이유를 살펴보면 처절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껴집니다. 엽록소를 잃어버린 단풍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하지 못해 포도당이라는 자양분을 만들지 못하는데 나뭇가지에 그대로 붙어 있으면 겨울 내내 숨을 쉬노라 그동안 축적해놓은 포도당을 써먹을 것이 분명하기에 그것이 아까워 내친다는 것입니다. 나무인들 잎들이 미워서 떨쳐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고서는 나무들이 굶어죽게 되고 그리되면 새 봄에 잎들을 소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매몰차게 떨어낸다 하니 나무들도 생명을 지켜내 종을 보존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서 생명은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지리산이 이토록 소중한 수많은 생명들을 보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산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10월25일 :중산리탐방지원센터-천왕봉-연하천
새벽3시30분 중산리탐방지원센터를 출발했습니다.
전날 밤 10시10분 강남고속터미널을 출발해 새벽 2시경에 진주에 도착했습니다. 택시로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으로 옮겨 해장국을 사들은 후 4만원에 예약한 택시를 불러내 중산리로 향했습니다. 1시간 가까이 달려 3시 20분경에 중산리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해 짐을 챙겨 꾸린 후 공원 직원의 양해를 얻어 정해진 시간보다 50분을 당겨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아스팔트길을 7-8분을 걷다가 왼쪽으로 나있는 산길로 들어서 법계사에 다다르기까지 캄캄한 밤을 뚫으며 돌 가닥 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4시16분 장터목 갈림길 바로 아래 칼바위 아지트 표지목 앞에서 왼쪽으로 꺾지 않고 직진해 잠시 길을 잘 못 든 것을 빼 놓고는 6시를 한참 지나 헤드랜턴을 끌 때까지 아무 탈 없이 제 길을 잘 찾아 올랐습니다. 아지트 표지목으로 되돌아와 철제구름다리를 건너고 돌계단과 목제계단 길을 걸어올라 지원센터 출발 2시간40분 후인 아침6시10분에 법계사에 다다랐습니다. 한 지도에 탐방지원센터에서 천왕봉까지 2시간40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어 날씨만 좋다면 천왕봉에서 해오름을 볼 수 있겠다고 기대를 했는데 생각보다 산행이 더뎌 법계사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다 까먹었습니다.
아침8시10분 해발1,915m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섰습니다.
중산리탐방지원센타에서 5.4Km 떨어진 천왕봉을 오르는데 4시간 40분이 걸려 지도상의 2시간40분 보다 무려 2시간이 더 걸렸는데 아무래도 급경사를 고려않은 지도의 시간표기가 잘못된 것 같았습니다. 법계사 앞 샘터에서 목을 축인 후 된비알 길을 오르느라 숨이 찼습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린 날씨여서 6시 반이 지나서야 헤드랜턴을 꺼도 좋을 만큼 산속이 밝아왔습니다. 동쪽으로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붉은 띠가 해오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해가 잠시 얼굴을 내민 순간에는 서쪽 사면을 걷고 있어서 앞서 오른 두 친구들이 오름 길에서 찍은 일출사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10월의 지리산이 일출을 대신해 준비해 놓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어 장터목 쪽으로 보이는 골짜기가 온통 울긋불긋했습니다. 다른 산에서는 만나보지 못한 개선문에서 힘들게 오른 한 후배에 사진을 찍어 준 후 가파른 길을 반시간 가량 더 올라가 7시50분에 남강발원지에 도착했는데 앞서 두 번을 생각 없이 지나서인지 두 곳 모두 생소했습니다. 철제계단과 목제계단을 차례로 걸어올라 거대한 바위들 밭에 뿌리를 내린 구상나무들을 바라보며 암갈색의 암벽과 초록색의 구상나무들이 빚어낸 앙상블이 서로 색대비가 분명하면서도 배척하지 않아 더할 수 없이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짐을 지어주고자 정상에서 40-50m를 되내려온 먼저 오른 한 친구에 마음속 깊이 감사한 것은 표고차가 1,400m가 다 되는 된비알 길을 오르고도 힘이 남아돌아서가 아니고 끝까지 함께 종주하겠다는 동료애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8시25분 천왕봉을 출발해 백두대간 길에 발을 들였습니다.
천왕봉에 올라서자 한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빗줄기가 드세져 서둘러 비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이제껏 여섯 번을 오르면서 천왕봉에서 비를 맞기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비가 온다고 그리 서운해 할 일은 아니었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일기예보와 달리 큰비가 내려 조금은 걱정되었습니다. 남사면의 개선문은 따로 올랐지만 북사면의 통천문은 함께 내려갔기에 비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서는 동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제석봉에서 장터목으로 내려서는 길을 지날 때마다 좌우에 포진한 고사목들을 보고 저 나무들은 죽어서도 무슨 한이 남아 있어 저토록 몸을 곧추세우고 장승처럼 서 있는 것일까 안타까워했는데 이번에는 안개 속에 몸을 숨겨버려 제대로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습니다. 천왕봉 출발 1시간 후에 내려선 장터목 대피소는 지난 5월 들렀을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별반 없어 잠시 쉬면서 간식을 하기에 좋았습니다.
11시36분 세석대피소에 도착해 점심을 들었습니다.
지난 5월 한번 걸은 길이라 길은 눈에 익었지만 주변의 환경은 너무 달라 보였습니다. 하늘이 깨끗했던 5월에는 얼레지 꽃 등 봄꽃들이 생명의 소생을 전해주었는데 이번에는 비바람이 불고 단풍들이 낙엽이 되어 길바닥에 나뒹굴어 마치 생명의 종식을 보여주는 듯해 자못 쓸쓸했습니다. 연하봉과 삼신봉을 지나 다다른 안부를 지나며 바람이 세다 했는데 남쪽 비탈에 비스듬히 몸을 눕힌 억새들을 보고 이 안부가 바람의 길목임을 알았습니다. 시인 김수영님이 노래한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들로부터 살아가는 지혜를 배웠는지 다른 곳에서라면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을 억새도 바짝 엎드려 바람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촛대봉을 지나 펼쳐지는 세석평전이 엄청 넓을 것이라 기대했던 한 후배가 생각보다 너무 좁다고 실망한데는 안개가 잔뜩 끼어 세석평전의 전부를 볼 수 없어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일단 버너를 꺼내 불을 지피면 최소한 1시간은 잡아먹기에 준비해간 김밥과 떡, 밥으로 점심을 들었습니다. 대피소에서 스친 한 분이 제가 잘 아는 여인네와 꼭 닮아 잠시 불러 세워 고향을 물었는데 다른 사람이어서 새삼 제가 무엇에 홀린 것이 아닌가 하며 실소했습니다. 보온통의 따끈한 커피로 몸을 데운 후 12시 정각에 세석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15시15분 벽소령 대피소에 다다랐습니다.
세석대피소를 출발해 처음으로 들른 곳이 낙남지맥이 갈리는 영신봉이었습니다. 탐방로 가드라인 줄을 넘어 4-5분을 올라가 영신봉에 올랐지만, 장장220Km를 동쪽으로 뻗어가는 낙남정맥의 출발점이 이렇게 초라해서야 되겠는가 싶어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중산리탐방지원센터에서 천왕봉까지는 후배와 같이 올랐는데 여기서부터 연하천까지는 지리산종주산행이 처음인 한 동기가 끝까지 같이 했습니다. 세석대피소 출발 1시간이 조금 지나 칠선봉에 다다르자 하늘이 구름을 걷어내 남쪽 아래 계곡 사진을 몇 커트 찍었습니다. 14시9분에 도착한 덕평봉 바로 아래 선비샘은 그 주변이 3년 전에 지날 때는 정리공사가 한창이어서 어수선했는데 이번에는 깔끔히 꾸며져 있어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선비샘에서 40분을 더 걸어 다다른 구벽소령에서 벽소령대피소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 구간이 길은 평탄하고 좋았지만 낙석위험지대여서 지나가기가 움칫했습니다. 산행시작 12시간이 지나도록 김밥 몇 줄과 떡 몇 조각을 먹은 것이 전부라 허기가 느껴졌습니다. 삶은 겨란 세 개로 요기를 한 후 15시21분에 벽소령을 출발해 하룻밤을 묵을 연하천으로 향했습니다.
17시55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 첫날산행을 접었습니다.
거의 1시간을 계속 걸어 형제봉으로 오르는 중 두 개의 거암 사이로 난 좁은 고개를 말없이 오르는 친구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얼마 후면 고행의 동안거를 떠날 선승을 떠 올렸습니다. 산 오름은 형제봉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중간에 쉬면서 사과 한 개를 까먹었는데도 좀처럼 원기가 되살아나지 않아 올 들어 가장 힘든 산행을 했습니다. 음정으로 갈리는 삼거리에서 길을 잘 못 들까 걱정된 데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날이 흐려 금방이라도 어둠이 몰려올 것 같아 일찌감치 헤드랜턴을 켰습니다. 음정갈림길을 지나 주목을 보호하고자 쳐놓은 펜스가 나타나자 비로소 연하천에 다 왔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됐습니다.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 오랜만에 버너를 피워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젊어서 즐겨 해먹은 카레라이스와 짜장밥이 저녁 메뉴였는데 솜씨 있게 저녁밥을 지어낸 후배의 노고와 시장함이 카레라이스를 별미로 만들어 한 톨도 남김없이 모두 먹어 그릇을 깨끗이 비었었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지만 억수같이 퍼붓는 비로 꼼짝없이 대피소 안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태풍이 뿌리는 비가 아니라면 저토록 죽어라고 퍼붓는 비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일 아침은 쾌청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대피소에서 일찌감치 소등을 해 저녁 8시가 조금 지나 잠자리에 들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잠이 들어 4시간 가까이 숙면을 했습니다.
@10월26일:연하천대피소-반야봉-노고단-코재-화엄사
새벽 4시에 눈을 뜨자마자 밖으로 나가 하늘을 먼저 올려다 본 것은 예정대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는 가 궁금해서였습니다. 밤12시에 잠을 깼을 때만 해도 쉬지 않고 퍼붓는 장대비가 한 여름의 집중호우를 방불해 큰 걱정을 했는데 새벽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쾌청했고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워낙 변화무쌍한 산 날씨여서 몇 시간 후 어찌 변할 줄 알 수 없지만 이런 날씨라면 예정대로 일찍 시작해 화엄사로 하산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서 모두들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쇠고기 비빔밥의 비닐 팩을 열고 따끈한 물을 부은 후 양념고추장을 넣어 비벼 비빔밥을 만든 다음, 뜨거운 물로 데운 된장수프를 함께 들자 맛도 훌륭하고 요리도 간편해 앞으로 비상식으로 애용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새벽 5시10분 연하천대피소를 예정보다 20분 먼저 출발했습니다.
그만큼 야간산행시간이 길어져 현저히 조도가 떨어진 헤드랜턴이 도중이 약이 다 달아 어둠이 가시기 전에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 가 걱정되기도 했지만, 새벽 공기가 삽상하고 나무계단 길이 숨 가쁜 오름 길이어서 부질없는 걱정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계단 길이 끝나자 명선봉을 오른쪽으로 에도는 우회길이 사람 다닌 흔적이 뚜렷하게 남지 않은 돌 가닥 길이어서 자칫 잘못해 엉뚱한 길로 들어설 까 엄청 신경이 쓰였습니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둥근 달을 잡아보고자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한참을 기다려 몇 번이고 사진을 찍는 친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후다닥 셔터를 눌러대는 제가 작품사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았습니다. 뱀사골로 올라와 천왕봉을 오른 다음 중산리로 하산한다는 한 젊은이와 인사를 나누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6시 반이 다 되어 능선 길에서 잠시 쉬며 새아침에 밀려 도망치듯 내달리는 어둠을 환송했는데도 산자락에서 밤을 새운 운무가 골바람을 타고 능선으로 올라와 온 사위가 자욱한 안개로 희뿌옇게 변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고 토끼봉을 넘어 화개재로 내려서는 데는 더러더러 평탄한 흙길도 있어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침7시40분 화개재를 지났습니다.
토끼봉과 삼도봉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이 높은 고개 마루가 옛날에는 경상도의 소금과 해산물을 전라도의 삼베와 산나물과 서로 맞바꾸던 장터였다니 힘들게 이 고개를 올라와 물물교환을 끝낸 양쪽의 민초들이 탁주 한배 나누지 않고 그냥 떠났을 리는 만무하고 보면 오늘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오히려 찻길이 뚫린 후 일부 정치인들의 부추김으로 생긴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뱀사골 계곡길이 갈리는 화개재를 떠나 얼마 후 올라선 오름 길은 나무계단이 끝없이 이어져 깊고도 깊다는 여의나루 전철역보다 몇 배는 계단이 더 많은 것 같았습니다. 20분 가까이 올라 마지막 계단에서 내려서서 이 계단의 길이가 장장 240m라는 안내판을 보고 아마도 방금 올라온 이 길이 남한에서 가장 길고 가파른 계단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내 삼도봉에 다다라 먼저 와 기다리는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9시21분 해발1,732m의 반야봉을 올랐습니다.
삼도봉에서 십 수분을 걸어 반야봉에 오르는 갈림길을 만난 것이 8시31분으로 반야봉을 오르는데 무려 50분이 걸렸습니다. 가파른 길을 올라 도착한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웬만큼 오르자 대간 길의 마루금이 지날법한 봉우리 바로 아래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평탄한 흙길이 보여 거의 다 올라왔나 보다 하고 좋아했는데 본격적인 오름길은 흙길이 끝나는 데서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철제계단 길과 암릉 길을 숨 가쁘게 오르며 “한국의 산하”사이트에서 반야봉을 지리산의 한 봉우리가 아니고 독립된 산으로 소개한 이유를 알만했습니다. 그동안 지리산 종주 차 5번을 밑으로 지났으면서도 시간에 쫓기고 힘이 들어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반야봉을 이번에는 아예 산행코스에 넣어 버렸기에 6번째 종주에서나마 처음으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대간 길 마루금에서 북쪽으로 얼마고 떨어진 반야봉은 남원 땅 지리산을 자세히 조망할 수 있는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지인데 안개가 시야를 가려 안타깝기 그지없었습니다. 동행한 한 친구가 올 봄 이 봉우리에 올라 상상속의 바다로 띄운 반야용선이 지금쯤은 피안의 극락세계에 도달했는지 그 후 소식을 궁금해 하면서 반야봉을 출발해 종주 길과 만나는 노루목에 10시15분에 내려섰으니 반야봉을 오르내리는데 1시간 45분이 걸린 셈이어서 제 예상보다 40-50분은 늦어졌지만 1시간 걸린다는 노루목-임걸령 구간을 35분 만에 마쳐 얼마고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10시50분 임걸령에 도착했습니다.
오른 쪽 바로 아래 샘터가 있고 넓은 안부에 데크를 만들어 조망하기 좋은 임걸령은 한 여름이라도 넘나드는 골바람이 시원해 쉬어가기 적당한 곳인데 골짜기를 가렸던 운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햇빛이 쨍쨍 내리 쬐어 단풍으로 불타는 피아골을 온전하게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피아골의 단풍은 멀리서 보아도 과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피아골의 단풍이 저토록 처절하도록 아름다울 진데 비가 내리고 안개가 껴 끝내 진면목을 보지 못한 칠선계곡, 한신계곡과 뱀사골의 단풍도 이에 못지않겠다고 생각하자 하루만 산행을 늦출 것을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임걸령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이 이제껏 걸어온 다른 길보다 생소하게 느껴진 것은 1972년 여름을 마지막으로 낮 시간에 이 길을 걸었고 그 후로는 무박산행으로 으로 종주 차 밤 시간에만 걸어서였나 봅니다.
12시25분 노고단 고개 마루에 도착해 장장25Km의 주능선 종주를 마쳤습니다.
임걸령에서 반시간 남짓 걸어 올라선 헬기장에서 다시 한 봉우리를 에돌며 너덜 길을 지나는 동안 과중한 짐이 왼쪽 어깨를 계속 눌러 통증이 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임걸령 출발 1시간 만에 길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얼마고 쉬었습니다. 1970년대 저 혼자서 이 산을 종주할 때 보다는 짐이 훨씬 가벼운데 이를 못 이기고 절절 매는 것은 그동안 산에서 야영을 하며 며칠이고 산행하는 빡센 산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나이 들어 짐을 지는 것은 그 때만 못하더라도 산행속도는 조금 빨라진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됐습니다. 쾌청한 하늘이 열어준 임걸령-노고단의 산줄기가 참으로 웅장해 보였습니다. 동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장대한 산줄기와 그 끝의 천왕봉을 함께 바라볼 수 있겠다는 야무진 꿈은 돌탑이 쌓인 노고단에 이르자 다시 안개가 끼어 이루지 못했지만 이미 여러 번을 종주한 터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습니다. 모처럼 개방된 노고단을 다녀올 욕심은 굴뚝같았지만 반야봉을 오르며 잡아먹은 시간을 보충하고자 곧바로 대피소로 내려가 떡라면을 끓여 먹었습니다.
13시45분 노고단 대피소를 출발했습니다.
코재에서 얼마고 내려서자 계곡에서 몸을 닦을 시간을 확보하려고 일행들은 쏜살같이 뛰어 내려갔습니다. 노고단과 화엄사의 중간지점인 국수등까지 무릎을 보호하고자 아주 천천히 내려갔는데도 대피소 출발 1시간 밖에 걸리지 않아 화엄사에 16시 반까지 충분히 도착할 것 같아 짐을 내려놓고 10분을 쉬었습니다. 국수등에서 화엄사입구까지는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아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고자 올라온 친구를 샘터 조금 못 미쳐서 만나 함께 화엄사 입구까지 내려갔습니다. 계곡으로 내려가 흙 범벅이 된 바지 밑단을 흐르는 물로 씻어 낸 후 약 2Km 떨어진 화엄사로 내려갔습니다. 대나무 숲길과 돌 길 등 화엄사 계곡 왼편에 산책로로 조성된 이 길을 걸으며 틈나는 대로 유유적적 이 길을 걸으며 불심을 돈독히 할 스님들을 부러워했습니다. 화엄사에 가까워질수록 계곡이 넓어지고 커다란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계곡물은 급류가 되어 큰 소리를 내기에 웬만큼 득도를 하지 않고서는 점점 거칠어지는 물소리를 듣고서 마음의 격동을 피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16시25분 노고단에서 7Km를 걸어 내려가 화엄사에 도착했습니다.
중산리 탐방지원센타를 출발해 이틀에 걸쳐 약 26시간 동안 전장 약 38km의 산길을 걸어 지리산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개인적인 욕심은 반야봉등정과 화엄사탐방이었는데 서두른 덕에 모두 다 이루었습니다. 백제 성왕 때 연기조사가 서력544년에 창건한 화엄사는 화엄경에서 절 이름을 따 왔다는데 현존하는 건물로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인 각황전등 국보 4점과 조형성이 뛰어난 5층석탑이 서있는 웅장한 대웅전 등 보물이 4점이나 있어 화엄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고 국가적 자산으로 자리매김 했다는 생각입니다. 저녁 햇살이 앞마당을 비치는 대웅전의 웅장함과 단청의 화사함만큼이나 가까이에 자리한 각황전의 색 바랜 수수함도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다만 눈에 거슬린 것은 특정신문을 구독하지 않겠다는 종무소 앞 플래카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또 다른 건물에 걸린 “자비의 길” 플래카드였습니다.
18시20분 구례구역에서 용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화엄사에서 택시로 구례구역으로 나가 인근 음식점에서 종주자축 술잔을 나누었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날씨를 빼고는 모두가 계획대로 진행되어 크게 고생하지 않고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오랜만에 무거운 짐을 지어 어깨가 아팠던 점은 앞으로도 그 정도의 짐은 지어야 하기에 어떻게든 극복해야할 과제라는 생각입니다. 얼마 안 있어 나무로부터 내침을 당해 땅바닥에 나뒹굴 피아골의 단풍이 겪을 아픔에 비하면 어깨가 아픈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나무든 사람이든 살아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만큼 고통도 뒤따르기에 감수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산행사진>
@10월25일:중산리-천왕봉-세석-연하천
@10월26일:연하천-반야봉-노고단-화엄사---구례구역
지리산 (3)
*산행일자:2007. 5. 13일
*소재지 :경남함양/진주
*산높이 :1915m
*산행코스:백무동버스터미널-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장터목
-세석평전-한신계곡-백무동버스터미널
*소요시간:3시50분-16시50분(13시간)
*동행 :경동고 24기 동문 9명
(이규성, 서중원, 김남진 부부, 장광종, 이명재, 김주홍, 백인목, 우명길)
연록의 나뭇잎들이 생기를 띠고 있는 신록의 초여름이 산자락에 자리 잡아 산등성으로 세를 키워가고 있고, 새빨간 진달래꽃이 붉게 물들인 능선 길에는 봄이 딱 버티고 서 있는데 장터목의 물을 얼리는 철 지난 겨울이 아직도 두 다리를 완전히 빼지 않아 5월의 지리산에서 벌어지는 3계절의 자리다툼이 볼만했습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과 같이 고도가 높은 산에서 초여름에 드물게 일어나는 이러한 진풍경은 매 100미터 오를 때 마다 0.6도씩 기온이 하강해 생기는 자연 현상으로 고도가 낮은 산자락에는 초여름이, 높은 능선 가까이에는 봄이, 비가 그친 뒤 새벽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얼음이 어는 정상 부근에는 겨울이 자리잡고 있기에 요즈음 지리산을 오르면 세 계절을 두루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고교동문들과 함께 오른 어제의 지리산도 그러했습니다.
밤을 뚫고 2.6Km를 걸어 참샘에 다다르자 비로소 모습을 내보인 지리산의 아침풍경은 신록의 푸르름이 산자락을 지배하는 초여름이 분명했습니다. 산철쭉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능선 길로 올라서 고도를 높여가자 바람이 매서워졌고 해발1,653미터의 장터목에 이르러서는 길가의 움푹 파진 곳에 고인 물이 완전히 얼 정도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여름장갑을 낀 손가락 끝이 얼어오는 듯 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만난 서릿발이 겨울을 놓아주지 않아 이 산에 봄을 불러들인 진달래꽃이 엄청 힘들어했습니다. 또 다른 봄꽃인 얼레지 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주 전에 오른 국망봉의 얼레지꽃은 홀랑 치마를 뒤집어 보이며 반갑게 초여름을 맞았는데 어제 오른 지리산의 얼레지꽃은 찬바람에 치마가 뒤집힐 까 꽉 붙잡고 서서 지리산의 봄을 지켜냈습니다. 세 계절의 자리다툼이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대통령자리를 놓고 벌이는 속세의 대선판도보다는 훨씬 질서 있고 여유롭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예비 전에 갓 들어선 대선 판에서 한 때의 동지들에 다시는 안 볼 듯이 막말을 해대는 것을 보고 얼마 후면 새롭게 들어서는 여름에 자리를 양보하고 깨끗이 물러서는 겨울과 봄의 깔끔한 처신을 속세의 선거 판에서 찾는다는 것이 연목구어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새벽3시50분 백무동 버스터미널을 출발했습니다.
비로 하루를 늦추어 동서울터미널을 밤 12시에 출발한 버스에 올라 3시40분을 조금 넘어 백무동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습니다. 매표소자리를 지나 왼쪽으로 들어서자 구름다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어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1970년 처음 지리산을 올랐을 때 백무동의 마지막 초가집을 지나 계곡을 건넜던 그 지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저희들 9명 외에도 하동바위를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이 코스를 타는 사람들이 몇 팀 더 있어 번쩍이는 헤드랜턴의 불빛이 요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잠을 깨기는 이른 시각에 홀딱 벗고 잠자리에 들어가 숙면을 취했다가 산객들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눈을 뜬 검은등까마귀가 불빛에 놀라 “홀딱벗고”, “홀딱벗고”를 계속해 읊었습니다. 높다란 바위가 우뚝 선 하동바위에 다다르자 물이 흐르는 계곡이 끝나가고,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아침5시31분 참샘에서 잠시 쉬면서 어둠이 물러선 새아침을 맞았습니다.
하동바위 오른 쪽 옆의 구름다리를 건너 산위로 내달음치는 어둠을 쫓아 나섰으나 샘터가 있는 참샘에 이르자 새아침에 자리를 물려준 어둠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환해진 계단 길을 걸어 능선의 고개 마루에 올라 잠시 쉬는 동안 군소리 한마디 없이 새아침에 자리를 물려준 어둠이 고맙게 느껴진 것은 어둠의 깨끗한 자리물림이 그렇지 못한 속세의 사람들에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고개 마루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해발 1,312m의 소지봉을 지났습니다. 동녘의 산 능선을 밝히며 해오름을 준비하는 새아침에 검은등까마귀의 비상소리를 듣고 놀란 산새들이 눈 부비고 일어나 일시에 합창을 해대어 지리산의 새아침이 활기차 보였습니다. 찬바람을 쐬어야 피어나는 얼레지 꽃이 여기저기서 보였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치마폭을 내리고 다소곳이 서있었고, 연분홍 철쭉꽃들도 이제 막 봉우리를 터뜨려 두 꽃 모두 청초하기는 해도 화사한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6시50분 하동바위에 버금가는 망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소지봉에서 산죽 길로 들어서 편안한 발걸음이 계속되다가 얼마 후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었습니다. 1455m 지점에서 잠시 쉰 후 맨 후미에 서서 운행시간을 점검해보자 지도에 적혀있는 시간과 거의 일치해 안심했습니다. 고개 마루인 해발 1460미터의 망바위에 오르자 건너 편 계곡에서 불어올라오는 골바람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커다란 장송사이로 보이는 지리산 주능선이 너무도 아름다워 두 친구를 앞에 세워놓고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한참 더 바위 길을 걸어올라 너럭바위에 이르자 한 무리의 산객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남쪽 가까이에 보이는 장터목은 얼음이 얼고 바람이 세게 불어 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음을 일러주었습니다. 제석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장터목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야영지였던 제석단의 공터와 샘물이 보이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7시41분 백무동 출발 4시간이 다 되어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대피소 도착 얼마 전 길가의 움푹 파진 곳에 얼음이 얼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곳의 냉기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대피소 안은 추위를 피해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어 바람이 불지 않는 바깥 곳을 찾아 김밥을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식사시간을 길게 잡은 것은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백무동으로 내려와 잠시도 마음 놓고 쉬지를 못 한 채 4시간 가까이 강행군을 하느라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습니다. 장터목을 지배한 냉기는 빠르게 세를 확보한 햇빛에 밀려나 1.7Km 남은 천왕봉을 오르는 데는 그다지 춥지 않았습니다. 장터목에서 제석봉에 이르는 드넓은 터에 자리한 훤칠했던 고사목들은 어느새 많이 사라졌고 키가 작은 고사목들만 남아 있어 장터목을 유명하게 만든 고사목군의 명성이 오래 못갈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무슨 한이 남아 있어 눕지 못하고 곧추 서있는 키가 작은 고사목들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천왕봉으로 향했습니다.
9시30분 해발1915m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섰습니다.
고사목 군락지인 제석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통천문을 지나서 길바닥 흙을 뚫고 일어선 서릿발을 보면서 한 주 전에 입하를 맞은 초여름이 이 능선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는 얼마고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념사진을 함께 찍은 후 친구들은 정상주를 마시며 지리산 등정을 자축했습니다. 바다 건너 한라산을 오르지 않은 몇 몇 친구들에는 이 산이 지금껏 오른 산중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에 지리산 등정에서 느낀 가슴 뿌듯한 자부심은 산 밑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성취감이 아니겠는가 싶어 약간의 술이 곁들인 자축연을 말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삼각점을 확인하지 못해 씁쓰레 하는 저의 눈을 끈 것은 불그스레한 기가 완연한 정상의 바위였습니다. 적철광이 분명한 이 바위가 지구의 내핵 속에 녹아있는 철들이 화산활동 시에 밖으로 분출해 식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바위는 지구가 이 세상 사람들에 가장 내밀했던 내핵의 속을 뒤집어 보여주고자 끌어 올린 것으로 46억 년 전에 만들어진 지구가 몇 백만 년 밖에 살지 않은 사람들에 보내는 공존의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적철광이 정상을 붉게 했다면 능선 길을 붉게 물들인 나무와 꽃도 있었으니 바로 붉은 가지의 시닥나무와 새빨간 진달래꽃이 그들이었습니다.
10시48분 다시 장터목으로 돌아왔습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으로 내려서며 비로소 친구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본격적으로 담기 시작했습니다. 목수가 저 살려고 집을 짓지 않듯이 제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은 제 얼굴을 찍자고 하는 일이 아니기에 좀처럼 제 사진을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이번 지리산 산행에서는 저도 꽤 여러 번 일행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천왕봉에서 조금 내려서서 오른 쪽으로 갈리는 칠성계곡은 입산금지가 해제되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장터목에 다다라 3분을 쉰 후 눈앞에 우뚝 솟은 해발1730미터의 연하봉으로 향했습니다. 바람과의 한판 승부에서 깨끗이 승리한 태양이 연하봉 오르는 길을 고루고루 비춰주어 길가의 얼레지 꽃이 치맛자락을 들춰보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한껏 고조된 진달래꽃들이 여기저기 활짝 피어 연하봉의 시꺼먼 암봉이 밝게 보였습니다.
12시52분 세석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4-5분을 걸어 다다른 평지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 3.4km의 능선 길이 생각만큼 편하지 않았습니다. 멀리서보면 육산의 능선 길이어서 편하겠다 싶었는데 막상 걸어보니 암봉도 지나고 돌가닥 길을 오르내려야 해 2시간이 다 걸렸습니다. 공룡능선과 같은 암릉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폭신한 흙길이랄 수 도 없는 어정쩡한 길을 걸어 촛대봉에 이르자 넓은 평원의 세석평전이 바로 아래로 펼쳐졌습니다. 장터목의 고사목이 하나 둘 사라지는 동안 세석평전에서는 구상나무가 되살아나 푸르름이 더해졌습니다. 습지대에 피어난 노랑꽃의 동의나물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세석으로 내려섰습니다. 세석갈림길에서 대피소를 들러보지 않고 바로 고개를 넘어 평평한 곳에다 짐을 풀고 차려온 음식들로 점심상을 차렸습니다. 장장19Km를 걸어 한반도 남단의 제2고봉인 지리산을 오르겠다고 집을 나서는 남편들의 기개를 높이 산 부인들이 정성들여 챙겨준 음식들이기에 양도 충분했고 맛도 끝내줬습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잠시 눈을 붙여 되 삭임을 해도 좋을 만큼 포만감에 젖은 채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13시24분 점심을 끝내고 까까비탈의 내림 길로 들어섰습니다.
반주로 얼큰한 친구들이 엄청 조심했을 까까비탈의 내림 길은 첫 번째 폭포를 만나기까지 40분이나 계속되어 비를 피해 하루 늦추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촛대봉에서 저희 일행들을 사진 찍어준 한 아가씨가 발목을 곱 질렀는지 힘들어해 가지고 간 물파스를 뿌리도록 했습니다. 월간 산 잡지의 부록으로 발행된 지도에는 세석에서 백무동 터미널까지 4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와 있어 이대로라면 버스에 오르기까지 여유시간이 반시간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자칫 막차를 놓칠 까 걱정되었습니다. 저희 팀의 걸음걸이가 이 지도의 운행시간과 거의 일치했지만 퍼지고 앉아 먹는데 3시간의 예비시간을 거의 다 까먹은 터라 서둘러 하산해야 했습니다. 백무동을 3.7Km 앞둔 한신폭포의 표지목을 지나면서도 폭포를 찾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15시42분 오층폭포 아래 바위에다 짐을 내려놓고 12시간 가까이 고생한 두 발을 물에 담가 탁족을 즐겼습니다. 조선조 시대라면 탁족 계를 만들어 경비를 추렴해 놀러왔을 것으로 보이는 깊은 계곡에서 삼십년 넘게 알고 지내온 고교동문들과 함께한 탁족은 1915m의 지리산 정상을 밟은 이번산행에서 최고로 행복한 세레머니였습니다. 능선 길만을 밟는 종주산행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탁족의 시원함이 하루 종일 걸어온 두 발의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해주기에 탁족은 여름산행에서 빼놓아서는 안 되는 필수과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탁족만으로는 부족해 옷을 모두 벗고 온 몸을 씻는 알탕을 즐기는 분들도 많이 있는가 하면, 한 밤에 발가벗고 30분을 걸어 자연으로부터 양기를 보충한다는 대간 꾼도 있습니다. 저도 혼자서 아무도 없는 정맥 길을 종주할 때면 팬티를 무릎 아래로 내려 사타구니를 시원하게 하곤 했습니다.
16시50분 백무동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13시간의 긴 산행을 마쳤습니다.
오층폭포가 계곡에서 탁족을 즐긴 후 저 혼자 일어나 백무동을 향해 40분여 내달렸습니다. 가내소폭포에서 백무동까지 흐르는 계곡이 폭이 넓고 수량이 풍부한데다 풍광도 빼어나 만사를 제쳐놓고 쉬어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을 가로질러 걸어놓은 구름다리를 건너며 쉼 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얼마고 바라보노라니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올랐습니다. 상류에서 발원하여 여기 하류에 닿기까지 숱하게 많은 돌에 부딪혔고 급전직하해 소를 만든 폭포도 여러 곳 지나며 곤두박질했을 물줄기가 하나도 아파하지 않고 계속해 내달음질 치는 것은 드넓은 바다로 달려가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마치 제가 어려서 비좁은 시골에서 빠져나가 사람들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 익명의 서울로 유학나온 바와 같은 이치입니다. 버스터미널에서 마지막버스인 18시발 동서울행 버스표를 끊은 후 백무동을 둘러보았습니다. 1970년 마천에서 2시간 여 걸어와 마지막 초가집에서 쉬어가곤 했는데 이제 음식점과 민박집이 들어서 옛날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7-8분 후에 도착한 동문들과 저녁을 함께 든 후 지리산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3계절이 자리 다툼하는 지리산에서 공존의 철학을 배워간다면 더 큰 수확이 없을 것입니다.
공존의 철학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데서 비롯됩니다. 동료들의 산행을 서로 보살펴주며 무탈하게 산행을 마친 동문들에 감사인사 전합니다. 산행 내내 좋은 날씨로 한 부주한 제우스신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모두의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여 하루 종일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반갑게 저희들을 맞은 지리산은 감사의 도를 뛰어 넘어 경외하고 있음도 말씀드립니다.
<산행사진>
지리산 (2)
*산행일자:2004년 8월1일
*소재지 :전북남원,구례/경남산청,진주
*산높이 :1,915미터
*산행코스:성삼재-연하천-장터목-천왕봉-중산리
*산행시간:2시40분-18시10분(16시간20분)
*동행 :산울림산악회
어제는 백두대간에 첫 발을 들인 감격스런 하루였습니다.
성삼재를 출발하여 벽소령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중산리로 하산, 백두대간의 첫 구간인 천왕봉-벽소령-노고단 코스를 역방향으로 약 25 키로를 걸어 종주를 마쳤습니다. 1972년 세 번째 지리산 종주를 마친 후 척추디스크수술을 받고나서 더 이상의 종주산행을 엄두도 내지 못했었는데 어제 32년 만에 4번째 지리산 종주산행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지난 6월 이틀간 산행을 예정으로 네 번째 종주에 도전했으나 때 마침 지나가는 태풍 권에 들어간 지리산에 폭우가 쏟아져 연하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음정으로 퇴각해 아쉬움이 컸었지만, 조금만 훈련하여 몸을 다진다면 하루에도 종주를 해 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읽었기에 한북정맥을 종주하며 나름대로 준비해왔습니다.
1970년 6월 저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주 능선을 밟겠다고 혼자서 지리산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경남 마천에서 시작하여 천왕봉을 오른 후 장장 45키로가 된다는 능선 길을 걸어 노고단에 이르러 구례 화엄사로 하산하는 지리산 종주 길은 산에서 2박을 해야 했기에 짐 무게가 적지 않아 산행길이 더뎠고, 벽소령에서 길을 잃어 군사도로변에서 비박을 하기도 했습니다.(당시의 자료에는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거리가 45 키로이며 마천-천왕봉-노고단-화엄사의 종주코스는 전장 75키로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만난 지리산은 제게는 그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로웠습니다.
제석당은 그 샘물이 한 여름에도 오싹함을 느끼게 한 시원한 생명수였기에 그곳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지리산 상단에서 그 산자락들에 호령하는 암벽의 천왕봉은 바위만큼이나 단단하고 단호해 보였고, 천왕봉에서 내려다본 산자락은 운무에 가려 진면목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혹시 그 속에 제우스신을 숨겨 놓지 아니 했겠나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장터목의 고사목은 무슨 한이 남아 있어 죽어서도 눕지 못하는 것일까 안타까웠으며, 지리산이 세석에 넓은 평전을 숨겨둔 참 뜻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어느 선비의 소원대로 살아 생전 자손들로부터 받지 못한 절을 산을 오르내리는 산 꾼들로부터 받을 수 있도록 선비샘 의 샘터 바로 위에 산소를 모시도록 허용한 지리산에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꼈기에, 벽소령을 지키는 우리 군인들을 이 지리산이 지켜주겠지 하고 안심했습니다. 등산객에 샘물과 넓은 공터를 제공해온 최적의 캠프사이트인 연하천에서 헤어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지리산의 밤 친구임에 틀림없고, 종주 길의 마지막에 자리 잡은 노고단에 펼쳐진 지리산의 낮 친구인 야생화들에 종주를 무사히 끝냈음을 일러 주었습니다.
지리산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근엄하면서도 모든 것을 어우르는 자리 높은 산이고, 인자하면서도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는 속이 깊은 산이며, 몸을 맡겨 살아가는 뭇 생명들을 산자락으로 받아들이는 가슴 넓은 산이 지리산의 참 모습임을 배웠습니다. 그리도 높고 깊고 넓은 지리산을 어찌 한번의 종주로 끝낼 수 있겠는가 싶어 연이어 두 해 여름을 지리산 종주로 더 보냈습니다.
어제는 산울림산악회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제 밤 서울의 서초동을 출발하여 밤을 가르며 달린 버스가 어제 새벽 2시 20분에 해발 1,350미터의 성삼재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이 활짝 열려 도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별들과 꽉 찬 보름달이 빛을 발해 어둠을 뚫고 길을 밝혀주었고, 싸늘한 밤공기가 복중의 더위를 다스려 야간 산행을 하기에 최적의 새벽이었습니다. 2시 25분 성삼재를 출발하여 선두그룹을 이루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30분 후에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3시8분 노고단 고개에 올라서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25.5키로의 마루 금을 밟으며 임걸령으로 내 달렸습니다. 지난 6월에는 출발부터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느라 속도를 낼 수 없었는데 어제는 달랐습니다. 우선 선두그룹이 빠른 산행을 주도했고 날씨가 한 부주하여 성삼재를 출발한지 1시간 35분만인 4시에 임걸령에 다다라, 6월의 산행보다 1시간20분을 당겼습니다.
4시 28분 반야봉에 오르는 노루목에서 2시간 남짓한 산행을 잠시 멈추고 숨을 돌렸습니다. 삼도봉을 지나 잘 다듬어진 제법 긴 나무계단을 내려서서 뱀사골 대피소로 갈라지는 화개재에 도착한 5시 11분에도 지리산은 아직 밤이었습니다. 노고단에서 6.3키로를 뛰어 다다른 화개재에서 그 세배를 더 뛰어 25.5키로의 주 능선이 끝나는 천왕봉에 오를 때의 환희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토끼봉으로 내달렸습니다.
5시 25분 헤드랜턴을 끄고 아침을 맞았습니다.
해발 1,533미터의 토끼봉에서 20분 남짓 더 나아가 작은 고개에서 두 번째 쉼을 가지며 사과를 까먹었는데, 아직 제 철이 아니어서인지 제 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7시3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지난 6월보다 2시간가량 이른 시간에 대피소에 도착하여 페트병에 식수를 갈아 채우고 세 조각의 떡을 들어 영양을 보충한 후 카메라를 꺼내들고 주위의 야생화들을 근접촬영을 했는데, 집에 돌아가 도감을 찾아 그 이름을 확인할 생각입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야생화의 청초함이 사라지지 않겠지만, 사람도 제 이름을 불러주면 쉽게 친해지듯이 야생화도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주면 고마워 할 것 같기에 부지런히 도감을 찾아봅니다. 아직도 천왕봉까지 15키로가 남아 있어 갈 길이 요원하기에 서둘러 벽소령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주목 군락지를 보호하고자 쳐 놓은 울타리를 따라 얼마고 걸으니 지난번 탈출로였던 음정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이 길이 바로 종주산행의 성공과 실패를 갈라놓은 갈림길이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실패해 음정 길로 내려섰지만 어제는 성공의 길인 천왕봉 길로 올라섰습니다.
8시 10분 형제봉의 기암을 배경으로 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바위로야 설악산을 당해낼 산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지리산도 워낙 넓은 산이라 흙으로 빚은 육봉으로만 채울 수 없었기에 곳곳에다 여러 형상들의 바위들을 세워 놓은 것 같았습니다. 벽소령에 다다르기까지 바위사이를 지나는 몇 군데의 작은 고개를 넘었는데 고개 너머 산 밑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이 하도 시원하여 이 바람을 서울에 옮겨 놓으면 에어컨 사업이 요절날 것이라는 어느 분의 익살이 조금도 과장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8시 47분 3.6키로의 거리를 한 숨에 내달려 도착한 벽소령에서 7-8분간 숨을 골랐습니다. 천왕봉까지 11.5키로밖에 남지 않아 반은 넘게 온 셈이니 이제는 오기로라도 천왕봉에 오르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선비샘으로 출발했습니다. 자전거를 걸머메고 천왕봉에 오르겠다는 젊은이들은 남아 있는 10키로가 문제될 게 없다며 산 오름을 계속했습니다. 몇 몇 곳의 낙석 요주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흙 길을 걸어 발바닥도 편안했습니다. 낙석은 길을 내느라 깎아 낸 절개지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문명의 부산물로만 여겨온 낙석이 이 오지에서도 발생하는 것을 보고 자연의 힘이 대단함을 배웠습니다.
9시 47분 도착한 선비샘에서 물 순서를 기다리는 두 젊은이들에 선비샘에 얽혀 있는 효에 관한 비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효는 인간의 근본임에도 지키기가 그리 쉽지 않기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데 많이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고 그래서 제 얘기를 경청한 두 젊은이들이 고마웠습니다. 천왕봉을 7.2키로 남겨 둔 해발 1,558미터의 칠선봉을 지나 11시 정각에 선비샘에서 출발하여 오르내림이 심한 산길을 1시간가량 걷느라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자 배낭을 풀고 떡과 빵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날이 흐리고 간헐적으로 비가 뿌려서인지 그 동안 새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영신봉을 못 미쳐서 어제 처음으로 새 우는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다면 야생화보다 더욱 고마워 할 생물이 새일 터인데 몸을 숨긴 새들을 그 소리만으로 이름을 알아 낼 길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11시 47분 세석평전에서 후미를 기다려온 산울림산악회의 가이드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이 미리 알려준 대로 11시를 넘겨 늦게 도착했으니 하산했으면 하기에 저는 진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겠으니 기다리지 말라며 천왕봉에 오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자 양해를 해주어 바로 장터목으로 내달렸습니다. 5.1 키로밖에 안 남은 지척에서 천왕봉을 두고 포기하는 것 보다는 좀 불편하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차라리 산악회버스 승차를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고집을 부려 미안했습니다.
12시 11분 해발 1,703미터의 촛대봉에서 지리산의 소리를 들으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잠시 얼굴을 내보인 해님의 배려에 답하고자 이름 모를 새들이 짖어댔고, 이를 시샘하는 바람이 구름을 몰고 와 해를 가리곤 했습니다. 촛대봉에서 내려다 본 세석평전은 역시 넓었습니다. 그 넓은 평원을 관목들이 꽉 채웠고, 꾸준히 훼손 지를 복원해온 노력으로 되살아난 구상나무가 숲을 뚫고 삐죽이 서 있어 눈을 끌었습니다. 촛대봉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늪지대의 풀들은 냇가에서 쉽게 만난 것들이어서 반가웠습니다.
13시 15분 해발 1,730미터의 연하봉에서 가족과 함께 지리산을 찾은 한 아버지와 잠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어릴 적에 강제로 산에 끌고 가서인지 커서는 산과 담을 쌓고 있는 다 큰자식들과 함께 산에 오를 수 없는 제게는 그 분이 부러웠습니다.
13시 40분 장터목에서 페트병에 식수를 가득 채우고 이번 산행의 목적지인 천왕봉으로 출발했습니다. 해발 1,808미터의 제석봉에서 내려다 본 고사목 들이 여태껏 그 자리를 지켜왔기에 산을 찾은 이들은 그 사람들이 아니고 매섭게 몰아 쳐온 비바람도 그때의 비바람이 아니지만 산만은 그 산임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15시10분 해발 1,950미터의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서 노고단-천왕봉의 대간 길 첫 구간 종주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하늘에로 이른다는 통천문을 지나 천왕봉에 올라 표지 석 옆에 세워 놓은 배낭을 카메라에 담고 나니, 1975년에 같이 올랐던 먼저 간 집사람이 제일 먼저 생각났습니다. 슬픔을 같이 나눌 사람만큼이나 기쁨을 전해줄 , 그래서 같이 기뻐할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제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저를 만나 산을 처음 오르게 된 그녀가 저와 처음 오른 산이 바로 이 지리산이었기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15시 16분 산악회대장 분에 천왕봉등정을 알려주고 먼저 출발하라 했는데 버스가 대기 중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요청에 서둘러 중산리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29년 전에는 그녀와 함께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이번에는 그 길로 하산하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만, 오랜 시간을 돌각 길을 걸어서인지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하산 속도는 느려져 2 키로를 걸어 내려와 법계사에 도착하는데 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도 중산리까지 3.4 키로가 남아 있어 저녁 5시까지 내려가 대기 중인 버스를 타기는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시 정각에 전화를 해온 산행대장에 저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하라고 말하고 나서 하산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마침 정상을 함께 오른 고마운 분이 맨소래담을 발라주어 그 진통효과로 중산리까지 해지기 전에 내려 올 수 있었습니다.
18시 20분 중산리에 도착, 16시간의 길고 긴 종주산행을 전부 마쳤습니다.
택시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산행대장 분이 버스의 선반에 올려놓은 갈아입을 저의 옷 보따리를 찾아 맡겨둔 기사식당을 들렀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32년만의 종주를 자축했습니다. 저녁을 들고 진주로 이동해 밤 11시 출발하는 심야고속버스에 몸을 실어 오늘 새벽 3시에 과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랜 시간 고통을 잘도 참아준 두 다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 잠시 쉴 수 있도록 저를 붙잡은 곳곳의 야생화들도 고마웠습니다. 귀경 길의 버스 안에서도 제가 무사히 하산했는가를 물어온 산행대장의 배려 또한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고마워해야 할 것은 어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항상 그 자리를 지키며 저를 반겨 준 지리산입니다. 저는 지리산이 이래저래 해서 좋다는 표현을 즐기지 않습니다. 지리산이 그 자리에 있어, 그래서 제가 원할 때 찾아가 곁에 있을 수 있기에 좋아합니다.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것만큼 어렵게 잡은 고기도 크게 보임을 어제 성공한 지리산 종주에서 터득했음을 기록하며 첫 번째 지리산종주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지리산 (1)
*산행일자:2004. 6. 19일
*산행코스:성삼재-노고단-임걸령-연하천-음정
*동행 :월산악회
지리산(1)
*산행일자: 2004년 6월19 일
*소재지 : 전남 구례/경남 산청
*산높이 : 1,915미
*산행코스: 성삼재-노고단-연하천-음정
*산행시간: 3시40분-12시10분(9시간20분)
*동행 :월산악회
놓친 고기가 커 보이는 것은 거의 다 이루어 졌다고 믿었던 것이 어느 한 순간에 바로 눈앞에서 무위로 돌아갔을 때 느껴지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어제 지리산 종주산행이 그러했습니다. 하늘을 뚫고 내리 꽂는 장대비로 32년만에 시도한 종주의 꿈을 접고, 연하천에서 하산할 때의 그 아쉬움은 다 잡은 대어를 놓친 강태공들에 비유한 다고 풀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제도 하루 종일 간헐적으로 비가 내렸습니다..
기상대에서도 19-20일에 계속해서 큰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를 내놓았기에 회사직원들도 다음기회로 미룰 것을 권했습니다만, 다음 주 일요일에 서울대 AFB 산악회의 지리산 등정이 예정되어 있어 사전 답사를 겸하여 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그제 밤 10시 사당역에서 월산악회의 버스를 올라탔습니다..
많은 분들이 1무1박3일의 지리산 종주 산행에 참가해 뒤늦게 신청한 제게는 맨 뒷자리인 43번의 좌석이 배정될 만큼 버스에 빈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사당역을 출발한 버스가 대전 - 통영간의 고속도로를 달려 어제 새벽 1시 30분 함양휴게소에서 정차, 이곳에서 아침식사로 순두부찌게 한 그릇을 사 들었습니다.
새벽 3시 40분 성삼재에서 하차한 저희들은 비옷을 꺼내 입고 지리산 종주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리산에 처음 오른 것은 대학3학년 때인 1970년이었습니다. 그 해 3월 바위를 타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주말이면 선배들을 쫓아 바위를 하느라고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6월 들어 큰맘먹고 저 혼자 서울을 떠나 지리산 종주 길에 나섰습니다. 경남 함양의 마천에서 시작하여 백무동을 거쳐 천왕봉을 오른 후 능선을 따라 노고단까지 내달려 화엄사로 하산, 종주 산행을 마무리 짓기 까지 산 속에서 이틀 밤을 야영을 하며 보냈는데 , 지금도 구름사이로 숨바꼭질하는 별들과 더불어 지리산 자락들을 가득 채운 운무가 아침햇살에 밀려 산마루로 올라오는 신비스러운 광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래서 지리산 종주에 두 해 여름을 더 보냈습니다. 1973년 디스크에 걸려 척추 수술을 받고 나서는 지리산 종주를 엄두도내지 못하고 이제까지 가슴에만 안고 살아 왔는데, 마침 월 산악회에서 이틀간 산행으로 성삼재-노고단-천왕봉-대원사 코스를 뛰어 완전히 종주를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기에 큰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무릅쓰고 참가신청을 했습니다. 그 동안 하루에 15시간을 뛰어 종주를 마치는 무박의 산행프로그램은 제게는 너무 벅찬 듯 싶어 주저해왔는데 이틀에 걸친 종주라면 한 번 해볼만하다는 자신이 서 지리산 종주산행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4시 30분 밤을 뚫으며 빗속을 걸어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들머리를 제대로 찾아 쉼 없이 노고단으로 올랐습니다만, 밤이 그 자락을 거둬들이기에는 아직도 이른 시간이라 넓은 평원을 보지 못한 채 임걸령으로 내달렸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어느 전직 대통령의 1970년대의 외침처럼, 여명은 드센 빗줄기를 헤집고 어김없이 찾아왔으며, 그 덕분에 아침 5시 12분 자연의 밝기만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고자 플래쉬를 껐습니다.
두 곳의 헬기 장과 피아골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나 5시 54분 임걸령에 도착했습니다.
주위가 자연탐방코스로 잘 정돈되어 옛날의 소박함은 찾아 볼 수 없지만 물 맛은 이를 데 없이 시원해 좋았습니다. 1971년 여름 두 번째 종주 때 이곳에서 점심을 해 먹었는데 하도 많은 왕파리들이 덤벼들어 약간 떨어진 곳에 따로 상을 차려 주어 그들을 분산시켰던 일이 생생하게 생각났습니다. 비가 멈추지 않아 시야는 트이지 않았지만 아쉬운 대로 주위의 풍경을 몇 커트 찍어 사진으로 남긴 후 15 분 여 휴식을 취했습니다.
깊숙한 폐부를 씻어 낸 시원한 냉수로 성삼재에서 여기까지 2 시간 여 달려오느라 소진된 원기를 되찾고, 6시 10분 삼도봉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 6시 44분에 반야봉을 지났습니다. 이번으로 네 번째 지나면서도 꼭대기는 오르지 않고 트래퍼스만 하여 반야봉에 미안했는데 일행 중 선두의 몇 분들은 해발 1,732 미터의 반야봉을 올랐다 합니다.
아침 7시 10분 삼도봉에서 두 번째 쉼을 가졌습니다.
해발 1,550 미터의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어떤 다른 산들의 삼도봉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데, 삼도의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은 민주지산의 그 것보다 훨씬 초라했습니다. 네 번에 걸친 종주 산행 중 이번처럼 비구름에 시야가 막힌 적은 없었기에, 카메라에 담을 만한 정경들이 모두 가려져 언제 다시 와서 담을 까하고 애를 태우기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잘 다듬어진 나무계단을 밟고 한참을 걸어, 해발 1,315미터의 화개재에 내려섰습니다. 잠시선 채로 숨을 고른 후 토끼봉을 향하여 계속해 걸어 올라갔습니다. 숲에 가려서인지 한북정맥에서 쉽게 보았던 야생화들이 눈에 띄지 않아 서운했습니다.
8시 20분 해발 1,510미터의 토끼봉에 섰습니다.
준비해 온 오렌지로 영양을 보충한 후 연하천으로 내달렸습니다. 산장과 대피소가 별로 없던 1970년대에는 화엄사에서 출발하면 연하천에서 야영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 곳에서 점심을 들고 약 9 키로를 더 뛰어 세석의 산장에서 머무를 예정이어서 산행을 서둘러야했습니다. 빗줄기는 멈출 기세가 아닌 듯 더욱 세차졌고, 습기 찬 안경을 벗어 들고 맨 눈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했으며, 산행을 시작한 지 5시간이 넘어서자 배낭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9시50분 연하천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산악회의 가이드 한 분이 집중호우로 공원에서 하산을 명령해왔다며, 지리산 종주계획을 포기하고 음정으로 하산할 계획임을 말해주었습니다. 준비해간 떡으로 요기를 하고, 젊은 두 분의 호의로 맥주 반 캔을 마시고 나자 기운이 되살아 나 그냥 내려가기가 아쉬웠지만, 안전 상 하산해야 한다는 데야 달리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기에 종주의 꿈을 이곳 연하천에서 접었습니다.
10시 43분 연하천을 출발하여 하산 길로 들어섰습니다.
일산에 사신다는 어느 분과 함께 하산하면서 32년만에 종주를 해 보겠다는 모처럼의 시도가 무위로 끝나는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천재지변이니 어찌하겠느냐고 체념을 해보지만,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산행을 강행한 산악회에 얘기 좀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동안 쏟아진 비로 하산 길이 질펀하고 미끄러워 스틱의 도움이 없었다면 큰 고생을 했겠구나 싶었습니다.
12시 20분 음정을 4.2 키로 남겨둔 해발 870 미터대의 임간도로에 내려섰습니다.
이제부터 아무리 큰 비가 내린다 해도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발걸음이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12시 50분경 배낭을 내려놓고 페트병의 물을 쏟아 버리고 오렌지를 까먹고 나자 배낭의 무게가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하산 길의 길섶에 자리한 달맞이꽃의 꽃송이가 여느 달맞이꽃보다 훨씬 커 보였습니다. 산중의 달이 도시의 달보다 세속의 먼지에 찌들지 않아 보다 크고 둥글게 보여, 그를 맞는 달맞이꽃도 탐스럽게 자란 듯 싶습니다.
13시 40분 경남 함양의 음정 주차장에 도착, 9시간 동안의 긴 산행을 마쳤습니다.
1970년 지리산을 처음 올랐을 때부터 벽소령을 관통하는 도로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궁금했는데 이곳 음정이 그 시발점임을 확인했습니다. 지리산의 한 자락을 차고 들어앉은 깊고 깊은 시골 마을 음정에서 들은 저녁식사는 어느 성찬보다 풍성했고 맛이 있었습니다.
16시 20분 음정을 출발, 20시 30분 과천 집에 돌아왔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연하천에서 멈춘 지리산 종주산행이 놓친 고기처럼 커 보였고, 그래서 세석산장의 숙박비만을 환불하겠다는 첫 번째 입장에서 1인당 2만원씩 환불 또는 다음 산행비용에서 감해주겠다고 물러선 산악회의 처신에 화가 났습니다. 산악회에서는 천재지변으로 강변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폭우를 무릅쓰고 프로그램을 강행하다 중단하는 잘못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산악회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제 뜻을 산악회대표 분에 전했습니다. 사전에 집중호우로 산행을 도중에 멈출 수도 있으며 그 경우 환불규정이 어떠함을 고지하지 않고 뒤늦게 시혜를 배푸는 양 환불을 해주는 것이 고객을 최우선적으로 배려하는 회사가 할 일은 아닙니다. 이 기회에 안내산악회에서는 합리적인 환불규정을 정립하여 사전에 고지해줄 것을 요청하며, 산행기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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