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4)
*산행일자:2015. 5. 9일(토)
*소재지 :인천 강화
*산 높이 :469m
*산행코스:정수사 주차장-360m봉-마니산-참성단-흥왕초교
*산행시간:13시40분-17시24분(3시간44분)
*동행 :산서회회원 8명
(강승혁, 안일수부부, 정광식, 조장빈, 조철규, 호경필, 우명길)
신록의 5월을 맞아 한국산서회 회원 분들과 함께 이번에 봄나들이를 다녀온 곳은 인천의 강화도입니다. 조선의 수도 한양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는 고려의 수도 송도에서는 더욱 가깝습니다. 강화도는 고려의 고종 임금이 몽골의 침입을 받아 1232년 개경에서 천도한 이래 무려 68년이나 고려의 수도로 기능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강화도가 비록 섬이지만 한 나라의 어엿한 수도였다는 것입니다.
고려의 한림학사 최자(崔滋, 1188-1260)는 삼도부(三都賦)를 지어,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했던 당시의 송도(松都, 개성)와 고구려의 수도 서경(西京, 평양), 옮겨간 강도(江都, 강화도) 등 세 도읍지의 역사와 문물 및 통치제도 등을 자세히 읊었습니다. 삼도부는 평양의 언변 좋은 젊은이와 송도의 말솜씨 좋은 노인이 함께 강화의 바른 말 잘하는 정의대부(正議大夫)한테 놀러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경과 송도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나서 대부가 풀어놓은 강도(江都)의 지리적 강점은 이렇습니다.
“안으로는 마리산(摩利山), 혈구산(血口山)이 첩첩히 도사리고 밖으로는 동진(童津;通津山), 백마산(白馬山)이 사면의 요새 되고, 출입을 단속하기엔 동편의 갑화관(岬華關)이요, 외빈을 맞고 보내기에는 북쪽의 풍포관(楓浦關)이니 두 화(華)가 문턱이요, 두 효(崤;문틀)는 지도리로 되어 있으니 참으로 천하의 오구(奧口)이다”
삼도부를 읽어보면 훗날 조선의 인조임금이 난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고자 애쓴 이유를 알만합니다.
김포에서 연륙교를 건너 첫 번째 찾아간 곳은 초지진입니다. 신미양요 때 미국과 혈전을 벌였던 초지진을 둘러본 후 전등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서력 381년에 세워져 국내에 현존하는 절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알려진 전등사는 연분홍색의 연등이 많이 걸려 화사해 보였습니다. 전등사를 둘러보고 점심을 든 후 정수사로 이동해 회장님을 비롯한 관광팀 여덟 분은 바로 아래 정수사로 내려가고, 부회장님 등 산행팀 8명은 마니산을 올랐습니다.
13시40분 정수사 주차장을 출발했습니다. 주차장에서 고갯마루까지는 북쪽으로 제법 가파른 오름 길이 이어졌습니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꺾어 360m봉에 이른 다음 함허동천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이르는 사이 암릉 길 밑으로 난 우회로를 지났습니다. 이 우회로도 만만치 않은 것이 길옆에 쳐놓은 줄을 잡고 오르락내리락해서입니다. 그간 마니산을 네 번 올랐으면서 다른 길로 올라, 정수사로 오르는 이번 산행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14시52분 해발467m의 마니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함허동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왼 쪽으로 꺾어 114계단을 걸어 올랐습니다. 삼각점이 희미한 정상에서 남쪽 아래로 조망되는 간척지 앞 바다는 마침 썰물 때여서 갯벌이 꽤 넓게 드러났습니다. 북동쪽으로 염화강 건너 보이는 산은 김포의 문수산입니다. 정북으로 보이는 앞 쪽의 혈구산과 뒤 쪽의 고려산은 아직 오르지 못했습니다. 걸음이 늦은 저를 살피려 일부러 뒤로 쳐져 산행하는 강승혁/조장빈 두 회원님과 참성대로 이어지는 암릉 길을 같이 걸었습니다. 마니산 정상보다 4m낮은 참성대를 향해 서진하는 길에 참성단 중수비를 보았습니다. 곧추선 바위에 새긴 중수비의 비문은 많이 마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그 옆 안내판에 한문 원문과 한글 번역문이 같이 실려 있어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1717년 강화유수로 부임해 이 비를 세운 분은 이번 나들이를 주선한 회장님의 11대 선조이십니다.
16시13분 참성대 얼마 앞 지점에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참성대 조금 못가서 저희를 기다리는 후미 팀을 만났습니다. 가볍게 등산 주를 마시며 환담을 나눈 후 하산 길에 올랐습니다. 참성대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가 하늘고개에서 산행을 마치겠다는 계획을 변경해 바로 흥왕초교로 내려갔습니다. 리본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다닌 길은 분명한데 길 대부분이 낙엽으로 덮여있어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제가 잘 못 건드린 주먹크기의 돌이 굴러 내려가 앞서 내려간 회원들이 위험할 뻔 했습니다. 처음에는 “돌 굴러 갑니다”하고 소리쳤다가 돌이 점점 빨리 굴러 내려가 다급해진 저는 “낙석”, “낙석”하고 다시 소리쳤습니다. 다행히 돌이 회원들을 비껴가 안도했지만 나중에 그 돌이 얼굴 바로 옆을 지나 뜨끔했다는 회원분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17시24분 흥왕초교 운동장에서 마니산 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2/3 쯤 내려가자 흥왕초교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평탄해져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에 딱 좋았습니다. 저와 보조를 맞춘 조장빈 회원으로부터 회암사지를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 조만간 이 절터를 탐방해야겠다고 마음 굳혔습니다. 흥왕리 마을 어귀를 지나며 홍익한 택지의 안내판을 보았습니다. 홍익한은 병자호란 때 청과 맞서 싸워야하며 절대로 항복을 해서는 안 된다는 대표적인 주전파로 전쟁이 끝난 후 오달제, 윤집 등과 같이 북경으로 끌려가 함께 죽음을 당한 삼학사 중의 한 분입니다. 말년에 강화에서 머무르셨다는 선생의 묘지는 평택에 있습니다. 학교는 폐교되고 생활체험관으로 쓰이는 흥왕초교에서 산행을 마쳤습니다.
회장댁으로 옮겨 고기를 구워먹고 담소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저녁시간을 가졌습니다. 김영도 고문님께 편안하게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고자 젊은 회원 한 분이 마당에 정성들여 텐트를 쳤습니다. 92세의 노구를 이끄시고 자리를 함께 해주신 우리나라 산악계의 큰 스승 김영도 고문님께 감사하고 존경하는 후배들의 마음이 발로된 것으로 보여 가슴 뿌듯했습니다.
요즘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조선의 선비들은 과연 산을 어떻게 올랐나 하는 것입니다. 마침 심경호교수가 쓴 “산행기문, 조선의 선비 산 길을 가다”라는 책에 조선후기의 문인 홍석모(洪錫謨, 1781-1837)의 마리산(摩尼山) 山紀行이 있어, 2백여 년 전의 산행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기미년(1799년) 4월21일 나귀에 올라 심도(沁島, 강화)남문을 나서서 서남쪽 마리산으로 향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분의 마리산 산행은 40여리를 들어가 마리산 아래 민가에서 밥을 지어 먹은 후, 전등사의 중들이 맨 견여(肩輿)를 타고 산행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가파른 작은 길과 굽은 오솔길로 절벽을 따라 가기도 하고 낭떠러지를 등지고 가 더럭 겁이 나고 가슴이 조여 부쩍 두려워서 오를 수 없을 것 같다는 기록만 가지고 산행코스를 정확히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저희가 오른 이번 코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산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쉴 곳이 마땅치 않아 바위 위에 올라 앉아 다리를 쭉 펴서 휴식을 취합니다. 정상에 오르자 10여 길 높이로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보여 같이 간 사람들에 물어 옛날 단군이 이곳에서 감응하여 태어난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 참성단임을 압니다.
정상에 올라 바다와 산을 둘러보고 난 이분의 소회는 남다릅니다. 하늘과 땅의 관점에서 본다면 넓은 바다도 한 움큼의 물이며, 큰 산도 주먹만한 돌맹이에 불과하다며 어찌 스스로를 작다고 낮출 것이며 또 어찌 높은 곳에 올랐다고 능사로 여기랴 하고 자문한 것은 높은 산에 오르면 마냥 겸손해 하면서 주변 풍광을 찬미하는 여느 사람들과는 달라도 많이 다른 것입니다. 수락산과 도봉산을 마주하는 남산 아래 서너 칸의 집에서 가슴 속에는 오경과 백가의 글을 쌓고 마음속에는 만물과 만사의 이치를 추론하는 이 분이라면 집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의 이치를 다 안다 할 만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견여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갑니다. 골짜기를 벗어나니 숲바람이 옷소매를 끌어당기고 새들이 권주가를 부르는 것으로 산기행은 끝을 맺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르는 것을 등산이라 할 수 없다면. 이분이 가마를 타고 마니산에 오른 것을 등산이라 하기가 좀 뭣합니다. 이 분이 마니산 정상에 올라 감격하지 않은 것은 땀 흘려 올라온 것이 아니고 중들을 동원해 어깨에 가마를 메게 해 편히 올라서가 아닐 까 싶기도 합니다.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른 조선의 선비가 이분만이 아닙니다. 명문대가의 선비들이 가마를 타고 산에 오르는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퇴계 이황 선생도 소백산을 오를 때 더러 가마를 타고 오르십니다. “택리지”에 나오는 이인복(李仁復, 1683-1730)이라면 가마를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평생토록 온 세상을 모두 다녀보겠다는 뜻을 품고 나라 안의 명산을 모두 다녔다는 지인 강박의 증언이 틀리지 않다면, 설마하니 나라 안의 명산을 모두 가마를 타고 올랐을 리가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심경호교수가 홍석호의 “摩尼山 山紀行”을 “마리산 산기행”으로 옮긴 것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제강점기 때 마니산(摩尼山)으로 바꿔 불리다가 1995년 마리산으로 되었다. 마리란 머리를 뜻한다“고 밝혔습니다만, 사실은 이와 다릅니다. 1995년 인천시에서 마니산을 마리산으로 고쳐달라며 중앙지명위원회에 올립니다. 고려사에 마리산(摩利山)으로 되어 있고 마을 이름도 마리이니 일제가 강제로 바꾼 마니산(摩尼山)을 마리산으로 원상회복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앙지명위원회는 근거가 약하다며 기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확인한 대부분의 자료가 머리를 뜻한다는 마리의 마리산(摩利山)이 아니고 마니산(摩尼山)으로 나와 있습니다. 국립지리원에서 서비스하는 지도에 마니산으로 나오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마니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최자의 삼도부에는 마리(摩利-혈구(穴口)로 나옵니다만, 1530년에 발간된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니산으로 나오고, 구조선의 홍석모가 남긴 산기행에도 마리산이 아닌 마니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약3백 년 전에 세워진 참성단 중수비에도 마니산으로 표기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심경호교수가 마리산이라 한 것은 아무래도 국립지리원이 인천시의 개명청원을 각하한 것을 간과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행사진>
마니산(3)
*산행일자:2013. 10. 27일
*소재지 :인천 강화
*산높이 :469m
*산행코스:하늘재-참성단-마니산 정상-함허동천-버스주차장
*산행시간:11시2분-15시55분(4시간53분)
*동행 :대구참사랑산악회원 등 16명
대구 팀과의 합동산행 덕분에 강화도의 마니산을 올랐습니다. 산림청이 산 높이가 5백m도 채 안 되는 마니산을 명산100산의 한 산으로 선정한 것은 이 산 꼭대기에 단군께서 세우셨다는 참성단이 사적으로 지정되어서만은 아닙니다. 강화도가 외침을 받아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조정이 피난 와서 항전해 이 나라를 지켜낸 보루라면, 이 섬에 뿌리 내린 마니산은 강화도가 겪었을 시련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할 산 증인이기에 명산100산으로 대접받고 있을 것입니다.
오전 11시2분 하늘재에서 마니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마니산 국민관광지에서 참성단으로 오르는 길이 북적댈 것 같아 서쪽으로 10분여 더 가서 왼쪽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길을 따라 가다가 하늘재 바로 밑에서 하차했습니다. 지도에는 고개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길가 바위에 ‘하늘재’로 적혀 있지 않았다면 이 산행기에 ‘무명재’로 써넣을 뻔 했습니다. 합동산행을 기념하는 사진을 함께 찍은 후 왼쪽 계단 길을 따라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예상대로 길은 한적했고 경사도 급하지 않은데다 햇살도 따갑지 않아 만추의 마니산을 마음껏 완상하며 걸었습니다. 1시간가량 남진해 12시 조금 넘어 다다른 303.6m봉에서 서쪽으로 진행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참성단까지 가서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이 봉우리에서 멀지 않은 데다 짐을 내려놓고 빙 둘러앉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달랑 떡 한 팩만 싸 갖고 간 제가 몸 둘 바를 몰라 한 것은 대구분들이 바리바리 음식을 싸와 조촐했을 오찬의 상차림이 진수성찬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13시27분 해발465m의 참성단(塹星壇)에 올랐습니다. 점심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13시가 조금 못되어서입니다. 마니산국민관광단지에서 올라오는 길을 만나고 나서부터 참성단으로 오르는 길에 인파가 부쩍 늘어 진행이 많이 더뎠습니다. 계단 길로 걸어 오르자 제단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첨성단이 엄청 붐볐습니다. 남동쪽으로 0.9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이 산의 정상 봉은 매우 한적해 보여 시끌벅적한 참성단과 대비되었는데 이는 이 산의 정상 봉이 여기 참성단보다 4-5m 높다는 것을 빼고는 이렇다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명산 중의 명산인 속리산도 세조 임금이 올랐다는 문장대는 여기 참성단처럼 붐비지만 그보다 10m 가량 높은 정상의 천황봉은 찾아 오르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예부터 제단이란 제천의식을 행하는 곳이기에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가 제를 올리고자 가능하면 높은 산꼭대기에 제단을 쌓고자 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산 위의 제단을 천신께 제를 올리는 천제단(天祭壇)과 단군께 올리는 참성단(塹星壇)으로 나누고, 태백산의 천제단과 여기 마니산의 참성단을 그 예로 들기도 합니다만, 1717년 강화유수 최석항이 세운 참성단중수비에 이 제단 또한 단군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자 세운 것으로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천제단이나 참성단이나 같은 기능을 해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성단만 오르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많아 남동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해발469.4m의 정상봉으로 이어지는 암릉 길이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능선 오른 쪽 아래 벌판이 바닷가에 바로 닿아 해안선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그 선이 일직선이어서 개간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마니산을 품고 있는 강화도는 그 넓이가 우리나라 섬 들 중 네 번째이고 전답도 많은 편인데도 개간을 한 것은 강화도가 전란을 피해 와 항전을 하는 곳이기에 개간을 통한 경작지 확장으로 수확을 늘리는 것이 절대 필요했을 것입니다. 정상에 올라 시원스런 바다를 조망한 후 함허동천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15시55분 함허동천 주차장에서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정상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몇 분 안 지나 다다른 목제계단 길을 걸어 내려가 오른 쪽으로 정수사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삼거리에서 능선 따라 왼쪽으로 진행하다 오른 쪽으로 꺾어 얼마간 내려가자 함허동천(涵虛洞天)계곡이 나타났습니다. 이 계곡이 함허동천의 이름을 얻은 것은 정수사를 중수하고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조선전기의 명승 기화(己和)스님 덕분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의 세종임금 때까지 살다간 기화스님의 호가 함허(涵虛)이기 때문입니다. ‘구름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잠겨 있는 곳’이라는 함허동천을 몇 번 지났으면서도 계곡 한가운데 암반에 새긴 ‘涵虛洞天’ 네 글자를 찾아내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과연 명필이다 싶어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한 여름 장마철이라면 바위 위를 흐르는 계곡물이 하얗게 포말 지며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일 텐데 이번에는 물 흐름이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계곡 따라 한참을 더 내려가 야영장을 지나고 차도 건너 주차장에 도착해 대구분들이 타고 올라온 버스에 승차해 합동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강화도를 빠져나가는 귀가 길이 대교 앞에서 막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관광객들이 거의 같은 시간대에 이 섬을 빠져 나가, 차가 몰려서입니다. 김포와 강화를 잇는 연륙교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나 교통체증이 야기되는 것은 30년 전인 1980년대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옛날에도 이 섬과 내륙 간의 교통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과 다른 점은 그 방향이 요즈음과 반대라는 것일 뿐입니다. 옛날에는 김포에서 이 섬으로 들어오기가 엄청 힘들었기에 적군을 막을 수 있어 조정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것입니다. 원의 침공을 받아 피난 온 고려조정이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김포와 이 섬 사이의 좁은 해협을 흐르는 해류가 엄청 빨라 물길을 잘 모르는 대륙의 원나라 침략군이 감히 이 섬에 발을 들이지 못해서였습니다.
먼 길을 마다 않고 내륙 깊숙한 대구에서 새벽같이 올라와 마니산을 함께 등정한 참사랑산악회원들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산행사진>
마니산 (2)
*산행일자:2008. 3. 2일
*소재지 :경기강화
*산높이 :참성단465m
*산행코스:화도매표소-315봉-참성단-455봉-기도원-화도매표소
*산행시간:10시9분-13시37분(3시간28분)
*동행 :과천산사랑산악회 회원
3월의 대지를 하얗게 물들인 함박눈이 몇 가지 큰일을 했습니다. 과천산사랑 산악회의 산행지를 석모도의 낙가산/해명산에서 마니산으로 바꾸게 만든 것이 첫 번째 한 일이고, 서해안을 뒤덮을 것이라는 황사의 위력을 현저하게 약화시킨 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또 벌써 물러갔어야 할 겨울을 3월의 봄 무대에서 확실하게 끌어내린 것이 바로 펑펑 쏟아진 함박눈이었습니다. 5mm가량의 비 또는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접하고 그 양이 많지 않아 별 신경 쓰지 않고 집을 나섰는데 외포리 선착장에서 저희들이 타고 있는 대형버스를 대기 중인 석모도 행 큰 배에 승선시킬 수 없다고 해 당혹스러웠습니다. 해명산 들머리인 전득이 고개에서 눈에 미끄러져 빙그르 돈 버스 한 대가 길을 가로 막고 있어 갈 수 없다고 해 별 수 없이 산행지를 마니산으로 바꾸었습니다. 예보된 정도의 적은 눈비로는 고비사막에서 날아오는 황사의 공습을 막을 수 없겠다 했는데 마니산을 오르는 중 내내 큰 눈이 내려 다행스럽게도 황사를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화도매표소를 출발해 참성단을 오르는 동안 공중에서 난무하던 하얀 눈이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고혹적인 설경을 빚어냈습니다. 아이젠 없이는 산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고 또 바람에 휘날려 마치 겨울이 되돌아 온 듯해,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선 산 중턱에서 장갑을 벗고 도시락을 드는 동안 손끝이 꽤 시렸습니다. 다시 화도매표소로 되내려와 산행을 마치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해가 중천에 올랐고 기온도 급상승해 봄 날씨를 완전히 되찾았습니다. 경칩을 며칠 앞둔 춘삼월의 이 땅에서 아직도 머뭇거리며 지분대는 겨울을 더 이상은 못 보겠다며 제우스신께서 내려 보낸 저승사자가 바로 함박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못간 낙가산이야 조만간 다시 가면 될 일이고, 추하다 싶게 지분대는 겨울을 무대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봄을 불러올린 하얀 눈에 감사하고 또 고마워할 뿐입니다.
석 달 만에 같이 하는 과천산사랑산악회의 정기산행지는 강화 석모도의 낙가산/해명산으로, 제게는 미지의 섬 산인데다 해발고도가 2-3백미터대로 낮고 산행코스도 4시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코스여서 모처럼 느긋하게 쉬며가며 하면서 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눌 수 있겠다 싶어 이번 산행이 적지 아니 기대됐습니다. 버스로 2시간 남짓 달려 석모도행 배가 떠나는 외포리포구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처음 외포리에 와 본 것은 1963년인 중2 때입니다. 수학여행 차 전등사 탐방을 마치고 여기 외포리까지 걸어 나와 난생 처음으로 넓은 바다를 가르며 내달리는 큰 배에 올라 인천으로 향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로워져 선착장 정경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얼마 후 선착장에서 눈길에 미끄러진 버스가 석모도의 전득이고개 길을 가로 막고 있어 대형차량은 승선시킬 수 없다고 해 마니산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오전 10시9분 화도 쪽 매표소에서 마니산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그새 내린 눈으로 온산이 새하얗게 변했는데도 함박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매표소 출발 3-4분 후에 다다른 삼거리에서 계곡을 건너 오른 쪽 산등성으로 올라섰습니다. 2003년 가을 운장산 산행 때에 황대권님이 지은 “야생초 편지”의 일독을 권해온 한 분과 함께 맨 후미에 서서 천천히 올랐습니다. 어느 산악회에서 휘날리는 눈발을 맞아가며 시산제를 올리는 것을 보고 참성단이 세워진 마니산이 무사산행을 기원하는 데는 최적의 산이겠다 싶었습니다.
11시13분 315봉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225봉에서 헐거운 아이젠이 자꾸 벗겨져 고전하는 한 분과 서로 바꿔 찬 후부터는 산 오름이 순조로웠습니다. 눈이 펑펑 내려 전망은 트이지는 않았지만 2년 전에 한 번 오른 길이고 곳곳에 서 있는 표지목이 길안내를 잘 해주어 길 찾기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는데도 후미대장을 맡은 한 분이 315봉에서 저희들을 기다려 고맙고 죄송했습니다. 315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선 안부에서 참성대까지는 오른 쪽 사면이 낭떠러지인 암릉길로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상당부분 전에 없던 꽤 긴 나무계단길이 새로 놓여 있었습니다. 12분 간 계속된 계단 길이 끝나자 비로소 참성단이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12시6분 해발 455m의 참성단 옆 봉에 올랐습니다. 무질서도가 극에 달해 하늘을 나는 눈발이 나뭇가지에 내려 앉아 질서의 세계로 편입되면 눈이 갖고 있던 운동에너지는 위치에너지로 변화해 모두 눈꽃을 만드는데 쓰입니다. 그래서 눈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뭇가지의 눈꽃에 엷은 안개가 더해진 산속 정경이 더할 수 없이 몽환적이고 소담스러워 몇 번이고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계단 길이 끝나고 917계단 길과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자 급작스레 사람들이 늘어 미끄러운 길이 많이 붐볐습니다. 해발465m의 참성단을 왼쪽으로 에돌아 455봉에 올라서자 남쪽 아래로 안개가 옅게 낀 논과 해안선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비릿한 바닷바람이 느껴졌습니다. “江華島摩尼山”이라는 표지목이 세워진 455봉도, 참성단이 들어선 465봉도 마니산의 정상은 아닙니다. 동쪽으로 암릉 길을 따라 반시간 이상 더 가야 다다를 수 있는 469.4봉이 이 산의 정상봉입니다. 아쉽지만 정상을 다녀오는 것은 포기하고 바로 917계단 길로 하산했습니다.
13시37분 매표소로 되내려와 산행시작 3시간 반 만에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하산코스로 917계단 길을 택했습니다. 나무계단 길로 갈리는 삼거리는 여전히 붐볐습니다만, 삼거리를 지나자 하산 길은 비교적 한적했고 편했습니다. 25분가량 내려와 바위가 바람을 막아주는 공터에서 도시락을 꺼내 든 후 돌계단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배도 부르고 하산 길도 편해 사진도 찍고 동행한 한 분과 자식교육과 신앙을 화두로 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455봉 출발 한 시간 만에 기도원에 내려서자 시멘트 길이 시작됐습니다. 20여 분 간 이 길을 따라 내려가 매표소에 다다랐습니다. 눈은 벌써 그쳤고 그간 쌓인 눈도 어느새 스러져버렸습니다. 눈과 함께 겨울도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번 눈이 겨울의 저승사자였다면 눈 내리는 현장에서 눈꽃을 만나보려면 한 열 달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지척거리며 발을 빼지 못해 밉살스러웠던 겨울이 이렇게 끝나간다 싶어지자 아쉬운 마음도 일었습니다.
귀가 길에 전등사를 들렀습니다.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일명 정족산성)의 성안에 자리한 전등사 경내에는 600년 지난 보호수도 있고 고색창연한 가람들이 보여 창건된 지 1,600년이 넘는 고찰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 노송 숲이 그윽해 보였고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정족산성에 믿음이 갔습니다. 이토록 아늑한 고찰 전등사에서 본격적인 봄을 맞는다 하자 경내 찻집의 인사말처럼 이만하면 강화도탐방을 같이한 몇 분들과 맺는 연이 참 좋은 인연이다 싶었습니다. 이어서 들른 풍물시장에서 오래 잊고 지낸 갈퀴를 보아 이 또한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참성단(塹星壇)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입니다. 고려원종 때에 보수했고 조선의 인조 및 숙종 때 개축한 이 제단이 과연 단군이 쌓은 제천단인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개천절의 제천행사와 전국체전 성화 채화가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이상, 강화도의 마니산은 민족의 성지로 모셔질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한 중간에 위치한 마니산이 평범한 산이 아니듯이, 마니산이 자리한 강화도 또한 그저 그런 섬이 아닙니다.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몇 번이고 지켜낸 곳이 바로 이 섬이기에 언제고 짬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올 뜻입니다.
<산행사진>
마니산 (1)
*산행일자:2006. 2. 11일 *소재지 :인천 강화 *산높이 :469미터 *산행코스:화도마니산입구-단군로-첨성단-정상-함허동천계곡-매표소 *산행시간:11시12분-14시42분(3시간30분)
강화도는 황해 바다에 박혀 있는 그저 그런 섬이 아닙니다. 육지와 아무런 연을 갖고 있지 못한 다른 섬들과는 달리 강화도는 육지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들을 먼발치서 바라보며 관전평을 써도 좋을 만큼 한가한 섬이 아니었습니다. 북으로부터 외침을 받을 때마다 조정을 이 곳으로 옮겼거나 옮기고자 했던 이 나라 제1의 피난처였고 19세기 들어 외세의 압력에 못 이겨 빗장을 풀은 개국의 전초기지였습니다. 그러기에 강화도는 육지의 어느 도시에도 빠지지 않는 이 나라의 몇 안 되는 역사박물관 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가을 수학여행 차 처음으로 이 곳에 발을 들인 것도 또 1986년 초등학교를 다니는 애들을 데리고 이 섬을 찾은 것도 이 섬 어느 곳을 가도 이 땅이 시련으로 점철된 역사의 현장임을 증언하는 선조들의 체취를 쉽게 맡을 수 있어서였습니다. 지금도 조강을 경계로 남으로는 남한의 김포군과 북으로는 북한의 개풍군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의 현장을 코앞에서 지켜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강화도입니다.
마니산도 그냥 보통 산이 아닙니다. 이 땅에다 하늘을 연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께서 이 산에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마니산은 그 높이가 해발 469미터로 5백 미터도 채 안되는 낮은 산이지만 한반도 최고봉의 백두산이나 강원도의 영산 태백산과 함께 단군의 체취가 전해지는 성산으로 BC 2283년에 세워진 참성단에서 매년 가을 단군께 제를 올리고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해왔습니다. 뿐더러 마니산은 한라산과 백두산의 한 가운데 솟아 있어 남과 북 최고의 두 산을 어우르는 명산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강화도의 명산 마니산을 찾았습니다.1997년 함허동천에서 시작해 정상에 올랐으나 잔설로 길이 미끄러워 참성단을 가보지 못하고 되 내려갔기에 이번에는 정상과 참성단을 모두 오르고자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8시 조금 넘어 산본 집을 나서 강화도 화도의 마니산 입구 정류장에 도착하기 까지 3시간가량 걸렸습니다.
오전 11시 12분 마니산 입구 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입구 근처 큰 건물에 단군과 관련된 한 문화원의 간판이 걸려있어 마니산의 상징이 단군임을 일찌감치 일러주었습니다. 매표소에서 4-5분을 걸어 918개의 계단을 오르는 지름길을 버리고 오른 쪽의 단군로로 접어든 것은 무릎을 보호하고 전망이 좋은 능선 길을 걷고 싶어서였습니다. 단군로를 따라 올라 다다른 참성단 전방2키로 지점에서 시작된 능선 길은 선수로로 갈리는 삼거리 갈림길까지 경사가 완만한 흙길이어서 비록 눈이 덮였지만 걷기에 편했습니다. 이 지점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마니산에 서생 하는 대표적인 동물들은 고라니, 족제비, 구렁이와 날개와 꼬리에 큰 얼룩무늬가 있는 후투티 새라고 하는데 이 중 후투티 새를 제외하고는 육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들이어서 강화도는 심해에 떨어져 있는 무인도와는 생태계가 전혀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시 정각 참성단과 선수로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올랐습니다.남쪽으로 바다와 직선으로 된 해안선이 흐릿하게 보였습니다. 여말 목은 이색 선생의 주유천하는 이곳에서도 이어져 그가 남긴 “참상단”이라는 시 한수가 나무에 걸려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왼쪽의 참성단으로 이어지는 암릉 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참상단에 가까이 갈수록 안개가 가시고 바다가 제 모습을 드러내 곳곳의 전망바위에서 바다풍경을 한껏 관조할 수 있었습니다. 안개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섬들과 직선의 해안선에 맞닿아 있는 염전들이 눈에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12시39분 해발 468미터의 참성단 바로 밑에 도착했습니다.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출입이 막힌 참성단을 가까이서 몇 커트 사진 찍고 나서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암봉으로 옮기자 몇 십 미터 떨어진 참성단의 제단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분명 정상은 동쪽으로 가까이 보이는 암봉 임에 틀림없는데 이곳에 해발468미터라는 정상목이 세워져 있어 조금은 헛갈렸습니다. 먼저 오른 많은 산객들이 이 암봉을 점하고 있어 쉴 자리를 찾아 동쪽의 마니산 정상을 향해 암릉길을 걸었습니다. 산불감시 초소 출발 십수분후에 1716년 강화유수 최석항이 고쳐 세웠다는 참성단중수비를 지났습니다.
13시7분 바람이 피해가는 양지바른 바위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오른 쪽 바다 한 가운데 여기 저기 박혀 있는 섬들이 빚어내는 정경이 마냥 한가로워 저 섬에는 세속의 아귀다툼이 발붙일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십 수분을 쉬는 동안 눈이 사르르 감겨와 춘광의 따사로움이 봄이 실고 와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는데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은 북사면을 덮고 있는 냉랭한 흰눈이 주였습니다. 간간이 응달진 눈길을 지나야 해 아이젠을 벗지 않고 암릉길을 걸었는데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중 암릉 길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13시38분 해발469미터의 마니산 정상에 섰습니다. 정작 있어야 할 이 곳에 표지석이 세워져 있지 않아 국립지리원의 안내판을 보고 여기가 해발 469미터의 정상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참성단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릉 길을 뒤돌아보고 선명하게 보이는 그 길을 카메라에 실었습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 정수사로 하산하겠다는 애당초 생각을 접고 버스 편이 조금 더 편리한 왼쪽의 함허동천 행 하산 길을 택했습니다. 정상에서 몇 분간은 하산 길이 급경사여서 고됐습니다. 이 섬에서도 제주도처럼 까치는 없고 까마귀만 살고 있는지 산등성을 날고 있는 까마귀가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14시17분 능선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서 함허동천의 계곡을 만났습니다. 계곡을 덮고 있는 빙판이 유수와 같은 세월을 감금해 흐르는 물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니산에서 유일하게 경관이 좋다는 이 계곡에서 함허대사가 수도를 했음에 착안하여 계곡입구에 청소년 시범 야영장을 설치한 것은 역사와 오늘을 함께 되살린 잘한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계곡을 덮은 얼음장은 시멘트 길과 만나는 계곡입구까지 계속되었고 가느다란 밧줄이 장대한 빙판을 가로지르고 계곡 곳곳에 쳐져 있어 안전사고를 대비한 듯싶었습니다.
14시42분 함허동천 매표소를 지나 3시간 반 동안의 마니산 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주초에 내린 눈이 산 중턱 넘어서는 그대로 남아 있어 아이젠을 차고 산행을 하느라 암릉길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정수사행 암릉길을 마다하고 함허동천계곡으로 하산했습니다. 암릉 길 중간 중간에서 자주 쉬었기에 등에 땀이 제대로 나지 않아 산행코스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인데 버스는 16시 넘어 있으며 여기저기를 거쳐 17시가 되어야 강화읍에 도착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난감해 하는 중 젊은 산객 한 분이 전등사까지 걸어가자고 제의해와 서슴없이 일어섰습니다. 15시 버스정류장을 출발하여 결국은 전등사 입구를 지나 온수까지 7키로를 걸어가 16시10분에 신촌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송정에서 전철을 갈아타서 잠시 조는 동안 뵙고 싶었던 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놓치어 모처럼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모처럼 짬을 내어 가볍게 다녀온 이번의 마니산 산행은 강화도 역사탐방의 시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기왕에 시작한 역사탐방을 이어가기 위해 보다 자주 강화도를 찾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산행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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