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산행일자:2006. 11. 7일
*소재지 :충남 청양
*산높이 :칠갑산561미터/삼형제봉544미터
*산행코스:한티마을-칠갑문-칠갑산-삼형제봉-265봉-장승공원-장곡리삼거리
*산행시간:13시30분-17시20분(3시간50분)
가을서리보다 더 빨리 이 산하를 찾아온 첫눈이 입동에 겨울을 열어주었습니다.
입동 날만 되면 수은주가 조금만 내려가도 언론들이 빼놓지 않고 챙겨 굳이 눈을 선보이지 않아도 겨울이 시작됨을 쉽게 알 수 있었는데 올 해는 유달리 이 겨울이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밀려나는 가을에 면전에서 작별인사를 하기가 민망했습니다. 가을서리를 거치지 않은 겨울눈은 절차상의 하자가 있다고 무효라고 어디에다 소를 제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넘긴다면 차분하고도 확연한 사계절의 변화를 기본질서로 하는 우리의 산하가 앞으로도 이 노릇이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해서 엄청 당혹해 할 것이기에 이 겨울에 한마디 고언을 하고자 합니다. 가을이 겨울에 앞서 된 서리로 온 산하를 평정한 다음에 눈이 내리는 것이 자연의 로고스이고 또 그리해야 첫눈도 상서로운 서설로 대접받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함에도 이렇듯 불쑥 눈을 뿌려대면 미쳐 월동채비를 못한 산식구들이 그 새를 참지 못한 이 겨울의 조급함을 원망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던 충남지역 한 가운데 자리한 명산을 찾아 입동나들이를 나섰습니다.
백제의 고도 사비성의 진산인 칠갑산이 제가 어제 오른 명산이었습니다. 대개의 명산이 그렇듯이 이 산도 단순히 주변의 산보다 더 높다고 명산 100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닙니다. 산림청은 백운골 등 계곡의 경관이 뛰어나고 1973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이 명산 100산의 하나로 선정된 이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이에 더하여 이 산에 얽혀 있는 이런 저런 전설들이 오늘날에도 저희들에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점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지 수 화 풍 공 견 식”의 만물의 7대 조건에서 칠자를 따오고 싹이 솟아난다는 의미의 갑자와 결합해 이름을 졌다는 칠갑산은 생명의 시원을 뜻하는 성스러운 산이며, 도림사지와 장곡사 등 백제인의 얼이 담긴 사적들을 천년 넘게 지켜온 의로운 산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1900년 포천에서 이곳 청양으로 옮겨온 후 굴욕적인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이 여기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늦은 아침 8시반경에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전철로 천안까지 가서 청양 가는 시외버스로 갈아탔습니다. 11시에 천안을 출발해서 아산과 예산을 거쳐 13시를 조금 넘어 청양읍내에 도착했고, 다시 공주행 버스로 갈아 타 집 떠난 지 5시간이 다되어서야 이번 산행의 출발지인 한티마을에 도착했는데 경유지인 아산과 예산에서 정차시간을 줄였어도 반시간은 당길 수 있었습니다.
13시30분 한티마을를 출발해 왼쪽으로 난 구도로로 들어섰습니다.
대치고개 밑으로 터널이 뚫려 고개위로 난 옛길은 한가했습니다. 대전에서 한 회사의 영업부장으로 일했던 꼭 10년 전에 이 고개를 수없이 넘나들던 기억이 새로웠고 그보다 9년 앞서 집사람과 이 산을 오르내린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나뭇가지와 잎들에 내려앉은 새벽 눈이 한낮의 햇살에 녹아 땅바닥으로 우두둑 떨어지는 낙수소리가 남은 하루 저를 시인으로 만들 것 같았습니다. 25분을 걸어올라 면암 최익현 선생의 동상이 서있는 대치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10년 전과는 전혀 딴판이어서 생소했습니다. 고개 마루를 가로질러 석성을 쌓고 성문을 내어 “칠갑문”으로 명명했으며, 성 위에다 칠갑산 유래비와 등산로안내판을 세우고 주차장을 설치하고 나무로 레스토랑을 예쁘게 지어놓아 “칠갑광장”을 조성한 것은 이번에야 처음 본 큰 변화였습니다.
14시 2분 왕복 2차선은 충분히 될 듯한 넓은 임도로 들어서 3키로 떨어진 칠갑산 정상봉을 향해 남진했습니다.
몇 분 후 임도 오른 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서 전망이 일품인 헬기장에 올라섰더니 지난여름에 올랐던 정서방향의 오서산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와 반가웠습니다. 다시 임도로 내려섰다가 쌓인 눈이 일부 얼어붙어 미끄러운 시멘트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선 팔각정에서 1.6키로 떨어진 정상을 올려다보며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팔각정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반으로 좁아졌으나 여전히 넓고 편안한 임도 길이어서 평상화를 신고 정상을 다녀가는 아주머니들을 여러분 만났습니다. 나무줄기 북쪽 면에 하얀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어 눈이 녹아 떨어져 나간 시꺼먼 다른 면과 흑과 백의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보기 드문 이 설경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15시5분 해발 561미터의 넓은 공터로 된 칠갑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정상 바로 밑에서 257개의 나무계단을 걸어올라 110미터 가량 수직으로 고도를 높인 10분 동안이 힘들었습니다. 정상에 오르자 남서쪽으로 계룡산이, 서북쪽으로 오서산이, 그리고 동북쪽으로 지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렸던 금북정맥 산줄기가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내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5분 간 점심을 들며 쉬는 동안 십수마리의 까마귀들이 위협적으로 저공비행을 계속하며 까옥까옥 울어대어 떼거리로 하늘을 나는 그들의 군무가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상 출발 5-6분후 다다른 오른 쪽 장곡사로 내려서는 길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서 4-5분을 더 내려가 오른 쪽 아래로 아흔아홉골로 내려서고 용못계곡 길이 갈리는 안부에 다다르자 저를 따르던 까마귀 몇 마리가 정상봉으로 회군했습니다.
15시46분 정상봉에서 26분을 남진하여 1.3키로 떨어진 해발 544미터의 삼형제봉에 도착했습니다.
헬기장의 삼형제봉에서 한 젊은이가 사과와 감을 건네주어 고맙게 들었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이번 산행의 종착지인 장곡리까지 3.7키로 남아 있다하니 한티마을-정상-삼형제봉-장곡리 -삼거리차도 코스의 총 산행거리가 10키로는 족히 될 것 같았습니다. 삼형제봉에서 오른 쪽으로 90도를 꺾어 서쪽으로 난 능선 길로 내려섰습니다. 삼형제봉을 지나자 밤새 내린 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녹아 길바닥이 촉촉하고 먼지가 일지 않아 걷기에 좋았습니다.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바로 머리 위를 날아간 2대의 전투기가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을 내자 까마귀가 놀란 듯 더 이상 까옥까옥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삼형제봉 출발 10여분 후 지천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오른 쪽 길을 따라 한 봉우리로 올라섰다가 7-8분여 급경사 길로 내려가자 얼마간 평평하고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됐습니다. 칠갑광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산장로에서는 광장에다 차를 주차시킬 수 있어 들머리에로 접근이 용이한데다 길도 널찍하게 잘 나있고 코스도 3키로 밖에 안 되어 오르내리는 분들을 많이 만났는데 삼형제봉에서 장곡리로 내려서는 능선 길은 사람들이 아예 없어 호젓하고 조용했습니다. 적송들 사이로 난 능선 길 가까이의 단풍나무 가지들이 첫눈을 불러들인 입동을 맞았어도 아직은 이 가을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고자 온몸을 불살라 이 산을 새빨갛게 물들인 단풍나무 잎들을 꽉 잡고 있었습니다.
6년 전에 암으로 먼저 간 집사람의 영혼이 아무도 걷지 않는 고즈넉한 이 산길을 저녁시간에 저 혼자 걷는 것이 쓸쓸해 보인다며 같이 걷겠다며 나섰습니다. 1998년 11월 경기도 북단의 감악산을 오른 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산행이었기에 8년 만의 동행이고 1987년 5월에 이산을 오른 것을 기준하면 19년 만의 일입니다. 살아서도 그랬듯이 죽어서도 그녀의 발걸음은 한참 더뎠습니다. 해지기 전까지 시간 반은 남아 있어 그녀에 속도를 맞추어 천천히 걸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들려주었습니다. 작년에는 당신과 공동명의로 하객들을 모시고 큰아들의 결혼식을 잘 치렀고, 5년 간 경영해온 회사를 작년에 접었으며, 당신의 막내아들이 증권회사에 취직해 잘 다니고 있음을 일러주었습니다. 레지던트로 일하는 며늘아기가 좋은 논문을 써 학교에서 미국의 학회에 발표하러 출장을 보내 지금 미국에 가 있다는 이야기를 가장 최근의 소식으로 전해주었습니다. 자기가 자리를 지키지 못해도 혼자서 집안일을 잘 꾸려가 고맙고 이제 안심하고 돌아갈 수 있겠다며 제게 작별인사를 고해왔습니다. 살아서도 이렇게 사무적인 이야기만 나눈 것은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에 6년분을 한꺼번에 전해주자니 자연 보고식이 되어버렸음을 그녀를 보내고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사실은 젊은 날에 나누었던 사랑이야기도 나누고 싶었고 백두대간을 완주한 산행담도 들려주고 싶었으며 당신을 보낸 후 당신을 따라 믿기 시작한 종교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지천리로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시작한 그녀와의 동행을 장곡리 장승공원으로 내려서는 마지막 봉우리에서 끝내기까지 50분간의 산행은 더할 수 없이 오붓해 높지 않은 봉우리를 꽤 여러 개 오르내렸어도 힘든 줄 전혀 몰랐습니다.
16시51분 마지막 봉우리 앞 능선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어 시멘트 계단으로 내려섰습니다.
경사가 엄청 급한 계단 길을 10분 여 걸어 내려가 아흔아홉골의 계곡 물이 흐르는 다리를 건넜고 곧 이어 장승공원 주차장에 도착해 인근 슈퍼에서 맥주를 사 든 후 장곡리 삼거리로 걸어 나갔습니다.
17시20분 삼거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3시간 50분간의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마침 손님을 태우고 청양읍내로 돌아가는 택시를 만나 3천원에 편승해 편안하게 청양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첫 눈이 제법 많이 내렸습니다.
칠갑광장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중 아직도 녹지 않은 눈이 북사면을 하얗게 덮고 있는 것을 보자 강아지처럼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습니다. 정상봉에서 삼형제봉으로 옮기는 중 하얀 눈길을 걷고자 산보를 나선 흰둥이와 검둥이의 개 두 마리를 만났습니다. 저 딴에는 반가워 길을 비켜주며 지나가라고 손짓을 해줬는데 이 개들이 저의 진의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온 길로 되올라가며 줄행랑을 쳐 미안했습니다. 동시대에 살아도 소통할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면 서로 오해를 해 고생하게 됩니다. 백제의 유적지를 어느 곳 한 군데도 들러보지 못하고 산행을 마쳐 백제의 선조들과 대화할 기회를 놓쳐버린 아쉬움을 수년 안에 다시 이산을 찾아 장곡사와 도림지등 천년 사적지를 들러보고 풀어볼 생각입니다.
<산행사진>
'VII.산림청선정 명산100산 > 명산100산 탐방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8.마니산 산행기(1-4) (0) | 2007.01.03 |
---|---|
57.덕숭산 산행기(1-2) (0) | 2007.01.03 |
55.소요산 산행기(1-2) (0) | 2007.01.03 |
54.강천산 산행기(1-2) (0) | 2007.01.03 |
53.방장산 산행기(1-2) (0) | 200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