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산림욕장
인류는 숲과 더불어 진화를 거듭해왔다. 지구상에 침엽수가 나타나 숲을 이룬 것은 중생대 때의 일로 숲의 역사는 얼추 계산해도 2억년이 넘는다. 인류가 지구의 한 가족이 된 것이 약350만 년 전의 일이니 숲이 인류보다 훨씬 먼저 이 지구에 자리 잡은 셈이다.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가 숲속을 돌아다니며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수렵하여 살기시작 한 후 숲은 인류의 중요한 생활공간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숲이 침엽수림에서 수종이 다양한 활엽수림으로 진화하는 동안, 인류 또한 호모하빌리스, 호모 엘렉투스,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해왔다.
숲이 생활공간에서 경제공간으로 그 역할이 바뀐 것은 불과 1만 년 전의 일이다. 자연 속에서 채취와 수렵으로 생활해온 구석기시대의 획득경제 시대가 끝나고 신석기시대를 맞아 자연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생산경제 시대가 열렸다. 획득경제시대에 생활공간이었던 숲이 생산경제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공간으로 바뀌었고, 이후 숲이 인류에 미치는 영향은 급격히 감소했다. 인류는 이때부터 숲을 생활공간으로 보지 않고 자원을 통해 경제적 편익을 얻는 경제공간으로 여겨왔다. 숲을 개간해 농지를 얻고 목재를 얻기 위해 채벌도 서슴지 않는 등 인류가 숲에 가한 가해행위는 인류의 주 연료가 나무에서 화석연료로 바뀐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숲이 지니고 있는 본원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은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나친 숲의 남벌로 이 지구에서 점차 숲이 사라지면서 인류가 누려온 쾌적한 생활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이제 좀 비용을 들여서라도 환경친화적인 생활을 해야겠다는 자성에서 숲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된 것이다. 연료나 목재로 쓰이는 숲의 가치는 곁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숲의 본원적 가치는 인류생활에 꼭 필요한 물과 공기를 깨끗하게 공급하는 데 있다. 2005년도 산림청 통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림의 공익적가치는 총66조원이라 한다. 이 금액은 국민총생산액의 8%에 해당되며 국민들 모두에 1인당 136만원씩 돌아갈 수 있는 큰 금액이다. 이 중 수원함양기능, 산림정수기능 및 대기정화기능과 관련된 공익적가치가 무려 56%나 점하고 있다. 이 통계는 숲의 파괴를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인류는 숲으로부터 더 이상 깨끗하고 충분한 물과 공기를 공급받을 수 없음을 일러주는 자료로 서둘러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인류의 지속적인 생존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 숲은 산림청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경제공간에서 문화공간으로 상당부분 변모하고 있다. 자연의 숲에 최소한의 편의시설을 추가해 가치를 높인 숲속의 문화공간에는 산림욕장, 휴양림과 수목원이 있다. 이들 중 내가 자주 찾는 곳은 장시간 숲길을 걸으며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산림욕장이다. 작년 10월 춘천의 용화산을 오르다가 바위에서 떨어져 허리를 크게 다친 후 매주 해온 산행을 반년 가까이 접을 수밖에 없어 의사선생의 말씀대로 매일 3시간씩 집근처 운동장을 걷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운동장 돌기는 곧 싫증이 났고 그래서 운동장과는 달리 그늘과 산책로 및 쉼터가 있는 산림욕장으로 옮겨 걷기를 계속해왔다. 내가 별쭝나게 숲길 걷기를 고집하는 것은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용량이 500cc이었는데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는 그 뇌가 1,500cc-1,600cc로 커진 것으로 보아 숲속에서의 직립보행이 인류의 진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서이다.
내가 즐겨 찾는 산림욕장은 경기도 군포의 수리산 산림욕장이다. 수리산은 그 높이가 해발489m밖에 안 되는 낮은 산이지만 관모봉에서 슬기봉까지의 주능선에 아슬아슬한 바윗길이 포진하고 있어 짜릿함도 같이 맛볼 수 있다. 주능선 바로 아래 산허리에 조성된 산림욕장에는 참나무, 벚나무와 때죽나무 등 키가 훤칠한 활엽수들이 우거지고, 산림욕장의 길이가 약5Km 정도여서 마음 편히 산책하기에 딱 알맞다. 수리약수터를 출발해 5-6분이면 각종 운동시설이 있는 사교의 광장에 닿는다. 노랑바위와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다다른 독서의 숲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명상의 숲을 거쳐 넓은 공간의 쉼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점심을 들고 등을 눕혀 산림욕을 즐긴 후 고개 하나를 넘으면 팔각정과 의자가 세워진 만남의 광장을 만난다. 마지막 문화공간인 시가 있는 숲으로 내려가 군포시민들의 고운 시를 감상한 후 피크닉약수터에서 물 한바가지를 들이마셔 폐부 속의 먼지를 씻어내는 것으로 산책을 마친다.
나는 그간 산림욕장 산책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두 다리와 허리에 힘이 붙어 쉬었던 산행도 다시 시작했다. 몸무게도 7개월 동안 6Kg이나 줄였다. 눈도 밝아져 35년간 처박아둔 깨알 같은 글씨의 또스또예프스키 전집 8권을 모두 꺼내 다 읽었다. 이번 산책으로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은 숲으로부터 공생의 지혜를 배운 것이다. 내 육체와 정신 모두 숲속의 문화공간인 산림욕장 걷기로 건강해졌다 싶어 나는 지금도 이 숲에 엄청 고마워하고 있다.
2009. 9월 산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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