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3. 부산(釜山), 그리고 부산(Busan)

시인마뇽 2012. 2. 13. 22:06

                                               부산(釜山), 그리고 부산(Busan)

 

 

 

 

  부산을 거쳐 낙동정맥에 오르는 종주산행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지난 6월 부산역에서 다대포로 옮겨 낙동정맥에 첫 발을 들인 이래 이번으로 모두 11번을 출산해 경주의 당고개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딱 한 번을 빼놓고 10번을 모두 부산역으로 내려가 들머리로 이동하느라 꽤 여러 번 전철을 탔고 인근시장에 들러 아침밥을 사 먹기도 했습니다. 부산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낙동정맥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는 동안 없던 정이 새로 생겼는지 밤차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도 이번이 끝이다 하니까 가슴 한 구석에서 섭섭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부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은 돌아가신 큰형님입니다. 1961년 겨울 제대를 보름 앞둔 큰 형님께서 동계훈련 중 크게 다쳐 경복궁 근처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게셨는데, 간병을 하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딱 한 번 문병을 간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며칠 간 묵으면서 무료한 밤 시간을 죽이고자 원내에서 상영하는 흑백영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보았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지만, 부산의 스산한 도시풍경과 부산역에서 이별하는 애절한 장면 등이 어렴풋하게 생각납니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다 까먹었어도, 긴 내용을 압축해 놓은 듯한 주제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만은 지금도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봄 큰 형님은 부산의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셨고 몇 달 후 그 병원에서 숨지셔서 따라 내려가 간병을 하신 40대의 어머니와 집에서 하루 빨리 완쾌되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신 20대 큰형수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습니다.

 

 

 

  제가 부산에 첫 발을 들인 것은 3년후인 중학교3학년 때로 1964년 가을이었습니다. 수학여행 길에 부산을 들러 초량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영도다리를 가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영도다리를 바라보면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의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땅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라는 가사가 떠오른 것은 제가 이산가족이어서가 아니고 어머니의 이름에 “금순”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도 살아가기 힘들었지만 하루 세끼 제때 끼니를 잇고 반반하게 옷가지를 차려입을 만한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이남의 서민들도 살아가기 힘듦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악물고 굳세게 살아가야하는 “금순”은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보통명사이자 또 고유명사였습니다.

 

   살아 생전 자식을 잃은 참척의 아픔은 얼마 전에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님이 그의 소설“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참으로 명징하게 그려냈습니다. 딸만 셋을 두고 먼저 가신 지아비를 그리는 우리 형수님 같은 분들의 한 많은 삶을 그린 문학작품은 부지기수 일 것입니다. 남은 두 아들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신 어머님은 27년이 지난 1989년에 돌아가셨고 형수님은 세 딸을 다 출가시킨 후 뒤늦게 개가를 하셨습니다. 우리 집의 대들보였던 큰 형님이 어머니와 형수님에 남기신 그리움과 한의 이야기는 이렇게 세월 과 더불어 흘러가 버렸습니다.

 

 

 

  큰 형님께서 제게 만들어준 “영화 속의 부산”과의 만남은 그 후에도 몇 번 계속되었습니다. 곽경구 감독의 “친구”가 그랬고 윤제균감독의 “해운대”가 그러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부산(釜山)은 아시아 최대의 영화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이제 부산(Buan)은 이별의 도시가 아니고 온 세계 영화인이 모여드는 만남의 도시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헤맸을 “금순”의 처절한 삶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부산영화제를 통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극적으로 등장하는 화려한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숱한 이야기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최대의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부산은 더 이상 눈물어린 이별의 도시가 아니기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로 목청을 높여 축제분위기를 김 뺄 뜻은 전혀 없습니다. 종합예술 영화를 문화산업의 총아로 육성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으며,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이 대중의 충동과 욕망을 승화하지 않고 억압한다는 독일의 철학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로노의 비판에 상당 부분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를 이유로 부산의 도시축제를 폄훼하거나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부산시민들의 영화제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어서입니다.

 

 

 

  요즘 부산에는  외지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다 하여 영화제를 망칠까 걱정하는 시민들이 많다 합니다. 그렇잖아도 저축은행 사건으로 부화가 난 시민들이 많은데  외지 분들까지 내려가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말만 희망버스이지 실제는 절망버스라 부르며 극력 반대하는 부산시민이 그 지역의 주인이고 보면 정말 희망버스인지 물어보고 내려가는 것이 예의라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는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제가 오르는 산의 주인인 나무와 동물, 꽃등에 희망을 나눠주겠다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들에 희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에게서 희망을 배워오기 때문입니다. 부산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분들에 “부화 돋은 날 사돈 온다”고 시큰둥해 할 것 같아  한 말씀 올렸습니다.  

 

 

                                               2011. 10. 7일 낙동정맥의 11번째 구간종주를 마치고

 

*위 글은 낙동정맥 종주기11에서 발췌해 일부 수정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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