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과의 대화
제가 산을 오르면서 남 달리 신경을 쓰는 부분은 산에 사는 산 식구들과의 대화입니다.
야생화, 산짐승, 나무, 야생조류 등의 생물과 물, 바위, 바람, 구름, 별 등의 무생물 모두 제가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산식구들입니다. 이 많은 산식구들을 다 붙잡고 한 번에 대화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제가 나누는 대화가 거의 다 묵언의 대화여서 시간이 들게 뭐 있느냐 할지도 모르지만 때때로 옷소매를 붙잡고 대화를 청해오는 산식구들을 외면할 수 없어 가던 길을 멈추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진이라도 찍게 되면 어느새 시간은 저 만치 앞에 가서 제게 서둘러 마무리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화를 깊이 나눌 어느 한 부류의 산 식구를 마음속으로 정해놓고 산에 들어갑니다. 막상 산에 들어가면 마음먹은 대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하지 않고는 매번 만만한 야생화만 붙잡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하산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야생화라고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잘못 이름을 불렀다가는 “제가 아니고 4촌 동생이에요”라는 답을 듣기가 십상입니다. 흔히 보이는 제비꽃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냥 제비꽃 외에도 왜제비꽃, 둥근털제비꽃, 자주잎제비꽃, 알록제비꽃, 털제비꽃, 흰털제비꽃, 고깔제비꽃, 호제비꽃, 콩제비꽃과 낚시제비꽃등 제 핸드북에 소개된 것만도 11종이 됩니다. 비교적 이른 봄에는 피는 꽃이 몇 종 안 되어 식별이 용이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도감을 갖고 다녀도 이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대화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막혀버리면 그 다음은 형식적인 대화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야생화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살기에 다른 산식구들 보다는 이런 저런 분들의 블로그나 카페에 많이 실려 있는 편입니다. 야생화도 미인이라고 너무 박명하여 빨리 져버려 다시 만나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렵기에 많은 분들이 공을 들여 카메라에 담아오나 봅니다. 야생화는 직접 대화가 안 되면 벌과 나비에 제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습니다.
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공원에서 명찰을 빌려다 가슴에 차지 않는다면 수피나 잎을 보고 어느 나무인가를 식별하는 것이 제게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단풍제전이 끝난 후면 낙엽이 지는 모든 나무들은 수피를 통해서만 자기 정체를 알립니다. 껍질이 불그스레한 거제수나무나 뽀얗고 귀 티 나는 서어나무 등 몇 나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저 그러해 비슷한 나무로 인식될 뿐입니다. 이래서는 나무와의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나무라 해도 자기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사람과 어느 나무가 선뜻 대화에 나서겠습니까? 제가 즐겨 인용하는 “나무는 하느님이 만들었다”는 조이스 킬머의 시 “나무”를 들려주어 나무들의 마음을 끈다 해도, 만날 때마다 이 시만 들려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미님이 쓴 “우리나무 백가지”를 사서 읽었고,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가슴 속 한편이 휑하게 비어있는 것은 설사 책의 도움으로 제 이야기는 싫도록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잎파랑이를 바르르 떨며 메시지를 보내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무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어야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제선충을 앓고 있는 소나무나 마름병으로 죽어가는 참나무들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나무들인데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해 무조건 베어내서 격리시키는 것을 빼놓고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산짐승 멧돼지와는 많이 가까워졌다는 판단입니다.
멧돼지가 분탕질한 흔적만 보아도 놀라 가슴이 뛰었는데 이제는 차분하게 제가 지나는 소리를 내 길을 열어달라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최고의 맹수로 군림하는 멧돼지들 대부분이 저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슬쩍 길을 비켜줍니다. 비가 많이 퍼붓는 날에는 성질을 부려 큰 소리로 겁을 주기도 합니다만, 이때는 그들의 편한 쉼을 깨뜨리지 않고자 좀 멀더라도 제가 빙 돌아갑니다. 멧돼지들이 노는 모습을 꽤 가까이에서 여러 번 보았지만 아직 한 번도 바짝 다가가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언제고 그들이 제 요청을 받아들여 사진모델이 되어주는 날 멧돼지와도 진정한 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산식구들이 야생조류입니다.
산새들과 친구만 될 수 있다면 산행이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고 편안할 터인데 아직도 새들이 가슴을 열지 않습니다. 가슴은 고사하고 얼굴도 엄청 생색을 낸 후 살짝 프로필만 보여주는 정도여서 야생화처럼 도감을 보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유일한 식별수단이 그들이 내는 소리를 구별하는 것이라면 아예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산새들이 내는 소리에도 송(song)과 콜(call)이 있고 울음소리 송(song)에도 구애용과 세력권방위용이 있답니다. 명관을 울려 내는 아름다운 소리가 송(song)이고 그 밖에 새가 내는 모든 소리는 콜(call)입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며 내는 소리가 바로 콜(call)입니다. 울음소리가 짧으면 작은 새가 부르는 것이고 별로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면 큰 새들이 내는 소리구나 하는 정도를 아는데도 꽤 많이 시간이 걸렸습니다. 제 능력이 이런 정도인데 음색과 음량 또는 장단과 고저만으로 그 소리를 내는 새를 식별하라고 하면 차라리 그냥 하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래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만 한 것은 바위입니다.
바위는 살아 숨 쉬는 생물이 아니기에 설혹 이름을 잘 못 불러준다 해서 토라져 등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과 보살님을 돌에다 새기는 것도 바위의 듬직함 때문입니다. 찾아와 절하는 신도가 누구냐에 따라 얼굴표정이 달라진다면 부처님도 보살님도 사람 차별한다는 비난에 견뎌내기 힘들 것입니다. 바위가 바위인 것은 바로 무표정한 얼굴입니다. 웬만한 생물이라면 자신을 찬한 시를 듣고 꾸벅할 터인데 바위는 청마 유치환 선생의 애절한 아래 시를 듣고도 눈썹 하나 껌벅거리지 않습니다.
바위
내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구름과 바람은 그 콘트롤러인 제우스신과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편합니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구름보다는 제우스신이 훨씬 이야기가 잘 통합니다. 제우스신은 보통의 다른 신과는 달리 성질을 낼 줄 아는 인격신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제 진심을 보이고 때로는 성질을 돋우어 제우스신을 대화의 광장으로 끌어내어 구름의 동향을 알아냅니다. 제우스 신이 나 몰라라 하면 바람에 살짝 물어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우스신도 어찌할 수 없는 구름과 바람이 있습니다. 열대성저기압이 빚어낸 태풍과 시꺼먼 구름입니다. 바다에서 태풍을 몰고 오는 이 구름은 제우스의 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말만 듣기 때문입니다. 제우스신과 포세이돈 신이 서로 형제간인데도 사이가 좋지 않아 포세이돈신이 형님인 제우스신의 말을 통 듣지 않는다 합니다. 그렇다고 산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제가 포세이돈 신에 부탁하러 바다로 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별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제 나이가 너무 많이 든 것 같습니다.
쌩덱쥐페리의 “어린왕자”나 알퐁스 도테의 “별”등 별을 소재로 한 유수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모두 어린아이들입니다. 별은 동화의 소재이지 소설 감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태양을 제외한 모든 별은 밤에만 모습을 내보이기에 밤 산행을 애써 피하는 제가 별을 볼일은 별로 없습니다.그래도 산줄기를 종주하며 간혹 산 속에서 밤을 보낼 때 정겹게 다가오는 친구는 별입니다. 별은 꿈의 한 표현이기에 애써 그 별을 이 땅으로 끌어내려 이름을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하면 꿈도 같이 사라지기에 별은 그저 바라만 보고 꿈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로도 산 식구 대접을 다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요즈음 부쩍 관심을 갖는 것은 강물입니다.
산은 강의 어머니입니다. 모든 강의 발원지는 산입니다. 그리고 강에 물을 대는 젖줄이 바로 산입니다. 그러기에 산은 강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산은 강의 아버지입니다. 서로 다른 강물들이 섞이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 가름하는 것이 산입니다. 한 집안의 울타리역할을 아버지들이 하듯이 강줄기 둘레에 울타리를 쳐 강물의 흐름을 잡아주는 것이 산줄기입니다. 그래서 산은 강의 아버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산은 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인 것입니다. 산줄기를 타고 다니며 종주산행을 주로 하는 제게는 산행 중 물줄기를 직접 만나는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작년 5월부터 섬진강을 시작으로 남한 땅을 흐르는 큰 강들에 물을 대는 울타리 산줄기들을 하나하나 밟아나가고 있어 강물과의 대화의 끈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매번 안타까운 것은 산식구들과의 대화가 아직도 “그들과의 대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대화란 쌍방 간 공통의 언어가 존재할 때 “우리들의 대화”가 가능한 데 불행하게도 저는 아직 산식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찾지 못했습니다. 산 속에서 그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우리들의 대화가 아니라 입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그들에 저 혼자서 짓고 까불고 하며 그들과의 대화를 끌어가기가 정말 힘듭니다. 어느 스님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한마디만 던져놓고 물러서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면 산식구들과의 대화는 끝납니다. 제가 관찰한 산식구들은 스님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더라도 그들과의 대화를 우리들의 대화로 발전시키기 위해 공통의 언어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공통의 언어가 존재한다면 언제고 찾을 것이고 그렇게 찾은 언어는 아마도 온 우주를 어우르는 최상의 언어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2008. 7. 26일 산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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