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 종주기21(최종회)
*정맥구간:영운이고개-신어산-매리 앞 낙동강
*산행일자:2011. 4. 4일(월)
*소재지 :경남김해
*산높이 :신어산631m, 장척산531m, 동신어산460m
*산행코스:영운이고개-신어산-장척산-동신어산-매리 앞 낙동강
*산행시간:7시-17시37분(10시간37분)
*동행 :나홀로
수년 전 한 신문에 실린 어느 분의 칼럼을 읽고 짜릿한 감흥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그 신문과 칼럼니스트의 이름을 몰라 그 후 다시 찾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기억하기로는 영조 때의 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한마디보다 길의 공공성을 잘 나타낸 문구를 저는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길이 지나는 땅의 주인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길은 그 위를 걷는 사람이 걷는 순간만은 임자가 되는 것이니 주인이 길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으로 선생의 말씀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길을 지나는 과객에 긴 시간의 점유는 인정할 수 없지만 순간점유는 인정하는 것이 세상 살아가는 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국토의 67%가 산이고 이 산의 71%가 사유지라 합니다. 이 땅의 산줄기를 이어가는 종주꾼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백두대간이나 9정맥을 종주할 수는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쳐놓은 철조망 울타리에 개구멍을 내어서라도 남의 땅을 통과해야 산줄기를 이어갈 수 있어 저 또한 앞서 지나간 분들이 낸 개구멍을 이용한 적이 많습니다. 골프장을 지날 때면 직원들에 연신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적거리는 것은 달리 무슨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사유지를 허가 없이 지나서였습니다.
마음 졸이며 사유지를 지날 때마다 속으로 읊조리는 말이 여암 신경준 선생의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이다”라는 한 말씀입니다. 낙남정맥 마지막 구간을 종주하며 마루금에 들어앉은 가야CC를 완전히 통과하기까지 여암 선생의 이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었습니다. 비록 골프장 땅과 그 안에 나 있는 길의 주인이 따로 있지만 제가 발을 내딛는 이 순간의 발자국만한 땅의 임자는 누가 뭐라 해도 바로 저라고 말입니다. 땅 주인에는 궤변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71%가 넘는 사유림을 지날 때마다 범죄를 저지른다는 죄의식을 갖아야한다면 어느 누군들 대간과 정맥을 끝까지 종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유림뿐만 아니라 국유림인 국립공원에서도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길을 막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이 사회의 명망가들도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것으로 보아 이분들도 여암선생의 이 말씀을 실정법과 관계없이 옳다고 믿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전장이 220Km가량 되는 낙남정맥 종주를 마치며 그간 허락을 받지 않고 지난 사유지의 주인 분들에 죄송함을 전하면서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이다”라는 여암선생의 한 말씀도 여기 함께 올립니다.
아침7시 가야CC에서 하루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영운이고개에서 시작하려면 개구멍으로 들어가 그 위 구름다리로 올라가야 하는데 아침부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산복 차림으로 정문을 통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택시를 타고 골프장 안으로 들어가 4번 티홀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클럽하우스로 이동하는 중 직원들로부터 앞으로는 이 길로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제가 나이가 들어보여서인지 예를 갖추고 조심스레 말을 해와 저 또한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지나지만 정말 미안하다는 뜻을 조용히 전했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봉우리하나를 넘고 필드를 건너 신어산 숲속으로 완전히 들어서기까지 길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클럽하우스와 가까운 1번 그린 앞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을 따라가다가 왼쪽 산등성으로 올라가 오른 쪽으로 희미한 길을 어렵게 찾아 올라선 시멘트구조물 위 공터에 피뢰침을 벗 삼아 서 있는 불상을 사진 찍은 후 오른 쪽 먼발치의 낙동강 강줄기를 조망했습니다. 다시 내려선 골프장의 그린을 가로 질러 일단 숲길로 들어선 후 발자국이 희미하게 난 길을 따라 몇 분을 걷지 않아 정맥 길을 알리는 표지기를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된비알 길을 오르는 중 가느다란 밧줄을 잡고 바위 길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골프장 그린에서 해발고도를 350m가량 높여 해발630m의 신어산 서봉에 다다른 시각이 8시45분이었습니다.
9시31분 해발631m의 신어산(神魚山)에 올라섰습니다. 골프장을 통과해 신어산서봉에 오르기까지 잔뜩 긴장했는데 사방이 탁 트인 신어산서봉에 오르자 긴장이 절로 풀렸습니다. 서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정맥 길을 따라 신어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헬기장과 구름다리를 지나 이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석 옆에 배낭을 세워 놓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사방을 둘러보며 금정산과 백두산의 위치를 확인했습니다. 동쪽 멀리 보이는 강줄기가 낙동강 본류이고 남쪽 가까이에 보이는 강줄기가 서낙동강인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바다를 얼마 앞두고 두 강이 합류하는 것은 흔히 보아온 바지만 거꾸로 두 줄기로 갈리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낙동강본류와 서 낙동강 사이에 바다에 면해 있는 삼각형의 땅을 삼각주로 부르는 것이 맞는다면 김해공항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삼각주의 공항이 됩니다. 가락국의 올림프스 산으로 불릴만한 신어산의 신어는 수로왕릉 정면에 새겨진 두 마라 물고기를 뜻한다 합니다. 저 아래 은하사는 수로왕 때 장유화상이 창건한 고찰로 이 절 대웅전의 수미단에 새겨진 쌍어문양은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도래했음을 일러주는 징표일지도 모른다 합니다. 오른 쪽 아래로 은하사가 보이는 능선을 따라 걸어 돌탑이 세워진 신어산 동봉에 올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다 지리산에서 몇 번 본 불그스레한 수피의 노각나무를 만났습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 10시 29분에 오른쪽 아래로 주중천에 이르는 시멘트 길이 나있는 생명고개에 내려섰습니다.
11시26분 해발531m의 장척산에 올랐습니다. 생명고개의 시멘트길을 건너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수 분간 산길을 올랐다가 왼쪽 시멘트길을 건너 다시 산길을 걷기를 반복하다 세 번째로 시멘트 길을 건너 산길로 들어선 후부터는 한동안 오름길이 계속됐습니다. 오른 쪽으로 백두산 길이 이어지는 장척산에서 십 수분을 쉬면서 과일을 까먹은 후 왼쪽으로 내려간 것이 이번 산행 중 유일하게 겪은 알바입니다. 10분가량 내려가도 표지기가 보이지 않아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 가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산행기를 꺼내 읽어본 즉 현재진행방향은 금동초교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어서 다시 장척산으로 되올라갔습니다. 15분 후 복귀한 장척산에서 남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522.2m봉에 올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15분가량 내려가 도착한 안부에서 20분 가까이 점심을 들면서 푹 쉬었습니다.
13시31분 478m봉을 지났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12시45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평탄한 길을 따라 동진했습니다. “백두산4Km/신어산정상4.1Km/백두산3.4Km"의 표지목이 세워진 삼거리에서 왼쪽 위 능선으로 붙었습니다. 가파른 길을 올라 큰 바위를 지나서 481m봉까지 오름길은 완만했습니다. 481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이 봉우리를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과 만나는 안부삼거리에 이르렀다가 60-70m가량 고도를 높여 오른쪽으로 백두산 길이 갈리는 478m봉에 올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잠시 멈춰 서서 낙동강과 면한 이곳의 백두산이 민족의 성지로 불리는 백두산과 어떤 관계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장대한 산줄기를 우리 선조들은 백두대간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낙동강 남쪽에 자리한 산줄기를 낙남정간이라 이름 했는데 요즈음은 낙남정맥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습니다. 산경표에 나오는 장백정간과 12정맥은 모두 백두대간의 중간 중간에서 분기되는데 유독 낙남정맥만은 대간의 마지막 산인 지리산에서 나뉘어 김해의 낙동강까지 뻗어나갑니다. 여기 478m봉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해발352.9m의 백두산은 낙남정맥이 끝나는 매리에서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낙남정맥이 끝나는 산을 이 산으로 정했다면 백두산에서 시작해 백두산에서 끝나는 거대한 백두산-백두산의 산줄기가 그 거대함에 어울리는 어엿한 이름을 얻을 뻔 했는데 마지막 끝에서 몇 Km 비껴가는 바람에 여기 백두산은 좋은 이름을 갖고도 이름값을 못한다 싶었습니다.
15시25분 해발459m의 동신어산에 다다랐습니다. 478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감천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편했습니다. 반시간 가량 이어지는 경사가 완만한 길을 따라 내려가며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라는 여암 신경준선생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금정산 바로 아래 낙동강이 눈앞에 보이는 고즈넉한 이 길을 걸으며 마냥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은 눈치 보지 않고 제가 주인인 양 이 길을 걸어서일 것입니다. 감천고개에서 499m봉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지만 몇 번이고 잠깐 쉬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낙동강이 빚어내는 풍광이 너무 고혹적이어서 산 오름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낙동정맥과 낙남정맥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의 본류는 구포 앞으로 흐르고 오른 쪽으로 갈리는 서낙동강은 김해 앞으로 흐르는데 구포와 삼각주를 잇는 아취 브리지 가까운 곳에 그 분기점이 있음을 직접 확인했고 백두산의 곧추선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499m봉은 암봉으로 낙동강 최고의 전망지로 불릴 만하다 싶은 것은 낙동강과 그 건너 낙동정맥이 한눈에 들어와서입니다. 4대강 살리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오른 쪽 아래 낙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북쪽 방향으로 내려갔다가 낙남정맥이 마지막으로 일군 동신어산에 올랐습니다. 제 두 다리에 힘을 주셔서 무사히 이곳까지 이르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이 먼 길을 함께하며 수호신이 되어준 집사람의 영령에도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17시37분 낙동강 변 매리의 삼거리에 도착해 낙남정맥 종주를 모두 마쳤습니다. 동신어산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얼마간의 길이 암릉 길이어서 조심해서 통과했습니다. 안전지대로 내려서자 산행을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로 1시간 안에 매리에 도착해 종주를 마치면 18시20분 발 버스를 타기 위해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데 그럴 바엔 차라리 쉬엄쉬엄 내려가는 편이 더 낫겠다 싶었습니다. 무명봉에서 오랫동안 쉰 후 천천히 내려가 267m봉을에 다다랐습니다. 267m봉에서 매리로 이어지는길이 엄청 급해 보였는데 실제 내려가 보니 초반 몇 분간만 비알 길로 급했을 뿐 나머지 길은 완만했습니다. 만개한 진달래 꽃들을 여유롭게 감상하면서 내려선 중앙고속도로 절개면 위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현대개발 김해공장 입구로 내려갔습니다. 덤프트럭이 쉴새 없이 오가는 길을 따라 내려가 중앙고속도로를 밑으로 통과한 다음 오른쪽으로 올라가 고속도로가 끊어 놓은 마루금에 복귀했습니다. 땀에 젖은 속옷들을 갈아입은 후 나지막한 봉우리를 지나 가파른 바위 길로 내려선 곳이 낙남정맥의 끝점인 매리삼거리로, 이곳에서 날머리를 알리는 표지목을 사진 찍는 것으로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매리삼거리에서 낙남정맥을 종주 중인 한분을 만나 그분 차를 타고 구포역으로 옮겼습니다. 부산의 백구산악회 회원 분으로 두 달 전 담티재-발산재-오곡재 구간을 종주할 때 한 번 뵈었는데 용케도 저를 기억하시고 우정 차를 세워 태워주셨습니다. 덕분에 구포역에서 18시40분 발 열차에 올라 밤12시가 넘기 전에 산본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졸저 “섬진강산줄기에서 길을 찾다”를 보내드리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했지만 이 분의 후의를 갚기에는 많이 부족해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낙남정맥 종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몇 분에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천자봉님이 남긴 상세한 산행기는 전 구간 내내 저와 함께 했습니다. 고교동문 이규성교수가 한 구간을 같이해주어 암릉 길을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성봉현님 등 한국의 산하 회원들과 방송대 국문과의 현운재회원들의 격려 댓글이 마지막까지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경동고교 OB산악회의 선후배분들에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낙남정맥 종주 덕분에 제가 고마워하며 쌓는 “고마움의 탑”의 높이가 더 높아졌습니다. 이리 고마워하는 저는 마냥 행복합니다. 그래서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앞으로 걸어야 할 산줄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달에 중간시험을 끝내고 5월부터 낙동정맥을 종주할 계획입니다. 낙동정맥에 이어 백두대간과 낙남정맥을 다시 해 낙동강둘레산줄기를 전부 돌아보는 것이 제 꿈입니다. 전장 1,100Km 가량 되는 낙동강둘레산줄기를 한 번 돌아보는 데 3-4년은 족히 걸릴 것입니다. 장대하고 때로는 험한 이 길을 걷는 순간 제가 바로 이 길의 주인이 된다는 뿌듯함 덕분에 먼 길을 멀다 않고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새삼 “길은 걷는 사람이 임자이다”라는 여암선생의 말씀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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