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명소탐방기1
( 법흥사/청령포/장릉)
*탐방일자:2011. 4. 26일(수)
*탐방지 :강원 영월 소재 법흥사/청령포/장릉
*동행 :방송대국문과 동아리 현운재 회원
먼 길을 떠나 한나절 둘러 본 영월 땅을 옅은 안개 속에 묻어두고 귀경했습니다. 강원도 속의 강원도라 불러도 좋을 만한 궁벽한 땅 영월을 둘러본 뜻이 오지의 속살을 샅샅이 헤집어 낱낱이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월 땅에 대한 최대의 예우는 앞으로도 태고의 숨소리가 끊이지 않고 전해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기에 관광명소로서 명성과 이익을 다 포기하더라도 영월 한 곳쯤은 더 이상 드러내지 말고 안개 속에 묻어두어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번에 방송대 국문과 동아리인 현운재 회원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다녀온 곳은 적멸보궁이 자리한 법흥사, 비련의 왕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그리고 단종을 모신 왕릉 장릉 등 강원도 영월의 명소들입니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는 몇 안 되는 성스러운 땅에서도 인간들의 아귀다툼은 멈추지 않았기에 성지와 유배지를 연이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10시가 다되어 동숭동의 방송대 정문 앞을 출발했습니다. 밖에는 벚꽃의 화사함을 시샘하는 봄비가 지분지분 내렸지만 현운재 학동들은 버스 안에서 국문학도답게 직유와 은유를 총 동원해 언어의 유희를 즐겼습니다. 신림을 지나 주천에서 점심을 들었는데 어느 한 분의 말씀대로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고 몇 분은 차멀미가 심하게 나 눈앞에 차려진 진기한 음식들이 그림의 떡이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한 술도 못 뜬 분들에 감칠 맛 나는 주천 묵밥을 언제고 한 번은 꼭 들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1)법흥사
불교가 이 땅에 전해진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력372년의 일이니 이 땅에서 석탄일을 맞는 것도 어언 1,639년이 다 되갑니다. 며칠 안남은 석탄일이 축제의 하루가 될 수 있도록 길 가에 달아놓은 법흥사의 연등이 저희를 반겼습니다. 색색의 화사한 연등이 불을 밝히면 며칠 후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도하고자 천년 고찰 법흥사를 찾아오시는 길을 찾기가 한결 쉬울 것입니다.
이번에 찾아간 법흥사는 선덕여왕 12년인 서력643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사자산 기슭의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고자 창건했다 합니다. 처음 흥녕사(興寧寺)로 불린 이절이 법흥사(法興寺)로 이름을 바꾼 것은 소실과 중창을 되풀이하는 동안 폐사지로 변해버린 흥녕사를 대원각사님이 1902년 재건하면서부터입니다. 그 10년 후인 1912년에도 큰 불이 나 가람이 많이 소실됐는데도 오늘날 대찰로 자리 잡은 것은 불난 집이 흥한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아서겠지만 흥녕사나 법흥사 모두 그 이름에 흥(興)자를 써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버스타고 일주문을 통과해 주차장에서 하차했습니다. 대웅전을 보는 등 마는 등하면서 적멸보궁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절을 창건한 자장율사께서 중국으로 건너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시고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스님께서 오대산에 상원사를, 설악산에 봉정암을, 함백산에 정암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 사자산에 법흥사를 창건하시고 진신 사리를 모셨기에 전국 5대 적멸보궁 중 네 보궁이 강원도에 몰려 있습니다.
색색의 연등을 걸어놓은 굽이진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눈앞의 장송들과 가람은 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뒤의 산자락에 안개가 짙게 드려 산속의 숲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2보궁 약사전 옆 약수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10분가량 더 걸어올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에 다다랐습니다. “온갖 번뇌 망상이 적멸하는 보배로운 궁”인 적멸보궁을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온갖 번뇌와 망상을 내려놓을 수 있기에 여기서 꼼짝 않고 몇 시간이고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 또한 망상이다 싶어 자장스님께서 불사리를 모시고 수도하신 뒤편의 토굴을 사진 찍은 후 이내 자리를 떴습니다.
비가 내려 질퍽한 오른 쪽 흙길을 따라 내려가 법운당과 제2보궁 약사전을 둘러본 후 버스에 올라 법흥사를 빠져나갔습니다.
2)청령포
재야사학자 이이화는 조선왕조는 자비와 중생 구제라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군주는 인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인간 중심적인 현실관에 충실한 나라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재위 2년 만에 승하한 문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단종께서 왕위에 오른 것이 조선개국 61년만인 1453년의 일이고,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한 것 또한 같은 해 10월의 일이니 단종께서 백성을 인덕으로 다스리지 않았다고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중신들의 핍박으로부터 단종을 구하고자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기에 단종께서 왕위를 선위하고 유배를 떠났다가 사사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불과 4년 안에 숨 가쁘게 진행됐던 것입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청령포로 유배 떠나는 길은 저희들이 버스 타고 온 편안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세조가 환관을 보내 영월 떠나는 노산군을 화양정까지 배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산군은 남한강의 뗏목을 타고 영월의 청령포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물살이 급해 래프팅 코스로 널리 알려진 한강의 상류를 뗏목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가는 1894년 나룻배를 타고 서울을 떠나 단양의 영천에 이르기까지를 기록으로 남긴 영국의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저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the neighbors)”에 잘 나와 있습니다.
“거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이틀을 더 고생하였다. 급류는 끔찍할 정도였고 영춘의 아래쪽에서 아주 험한 급류를 만났을 때 김씨는 부질없는 노력을 몇 번 한 후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이번에 저희가 찾아간 청령포는 영춘에서 더 올라가 동강이 나뉘는 두물머리를 조금 지나 서강에 자리했습니다.
청령포는 선착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어수선했습니다. 배를 타고 서강을 건너 자갈밭을 지났습니다. 금강송이 우거진 송림 안으로 들어가 조촐한 단종어소에서 해설사분으로부터 단종이 유배되어 사사되기까지 애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강이 청령포를 끼고 돌아 동, 남, 북의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인 데다 서쪽 뒤로 험준한 바위봉우리인 육육봉이 딱 버티고 서 있어 배를 타지 않고는 청령포를 빠져나갈 수 없었으니 단종은 육지 속의 섬에 유배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곳 청령포에 큰물이 들어 단종은 강 건너 영월읍내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어소 담장 안에 위치한 단묘재본부시유지를 사진 찍은 후 밖으로 나가 청룡포금표 앞에 섰습니다.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도 금지하는 데 해당된다는 영조임금의 어명을 지키느라 지금도 청령포 앞 서강을 건너는 다리를 놓지 못해 매일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로 강을 건너고 있습니다. 해설사분의 상세한 안내는 관음송 앞에서 끝났습니다. 단종의 유배당시의 모습을 보았으며 오열하는 소리도 들었다 해서 관음송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의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된다 하니 그간 이곳에서 관음송을 바라보며 수양대군의 패륜에 분노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뒤이어 망향탑과 노산대에 올라 굽이져 흐르는 서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을 단종을 떠올렸습니다.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가 반드시 같지는 않습니다. 인륜을 중시하는 분들은 세조를 패륜아로 낙인찍었지만, 집권 후 훌륭한 치적을 들어 수양대군의 집권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이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시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양 끝에 서기를 거부하는 저는 수양대군이라는 특정한 인간의 선악 문제가 아니고, 12살의 어린 나이에 일국을 다스리는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한 당시의 정치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말하면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회색인의 주장쯤으로 매도될 지도 모르겠지만, 그 400여년 후 같은 나이에 등극한 고종을 10년간 섭정했다가 물러난 대원군의 사례는 충분히 참고할 만한 것입니다.
다시 강을 건너 버스로 돌아와 장릉으로 옮겼습니다.
3)장릉
현운재 학동들의 마지막 나들이 행선지는 장릉이었습니다. 조선왕릉 42기 중에서 단종을 모신 여기 장릉이 종묘에서 100리 밖에 위치한 유일한 능이라는 데는 나름대로 곡절이 있었으니 단종이 승하한지 200년이 훨씬 지나 종묘 100리 안쪽으로 이장코자 하였으나 누구하나 길지를 내놓지 않아 그대로 이곳에 두었다고 합니다. 이곳 장릉이 왕릉의 모습을 갖춘 것은 1516년부터이고, 묘호를 단종으로 복위하고 능호를 장릉으로 높여 부른 것은 숙종24년인 1698년의 일입니다.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한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는데 단종의 시신을 털끝하나라도 옮길 경우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서슬 퍼런 엄명을 어기고 남몰래 시신을 오늘의 장릉인 동을지산 줄기에 암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영월의 호장인 엄흥도입니다. 엄흥도에 관한 이야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자의 음애일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옛날 역사 기록에 “노산군이 영월에 있으면서 금성대군이 실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자살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당시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이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중략-.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에 몰아넣고 나서야 마음에 쾌함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은 엄흥도에 비하면 어떻겠는가.”
엄흥도는 정조 때 공조판서로 증직되었습니다. 왕이 승하하면 반드시 설치되는 산릉도감의 총책을 공조판서가 맡게 되는 데 엄흥도는 죽어서도 공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능역의 일을 맡아 한 셈입니다.
아쉽게도 시간이 늦어 능역 안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입구의 단종역사관만 들러보았습니다. 단층의 역사관에 전시된 영정에서 마상의 단아한 단종을 뵈었습니다. 곱상하기 이를 데 없는 저 용안이 눈물 마를 날이 없었으리라 생각하니 과연 조선은 "군주는 인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인간중심적인 현실관에 충실한 나라였는지 의구심이 일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아는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 했습니다. 재위 3년 만에 노산군으로 강등당한 단종이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길 수 없었지만, 후세의 왕들에 인륜의 중요함을 일깨워준 것은 분명합니다. 사육신과 생육신, 의금부도사 왕방연, 영월호장 엄흥도가 후세의 사가들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데 반해 세조를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한명회와 그 후 단종을 등지고 세조를 도운 몇 분들이 얼마간 욕을 듣는 것은 역사와 대화를 끝내고 인륜에 대한 믿음이 더욱 두터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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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을 다시 들러 저녁을 든 후 귀경했습니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영월 땅을 벗어나며 낮 동안 내내 영월 땅을 감싸준 안개를 떠올렸습니다. 영월 땅에 발을 들일 때 기왕에 낄 안개라면 가시거리가 십 수 미터에도 못 미칠 만큼 아주 짙게 끼었으면 좋았을 걸 했습니다. 모처럼 나선 나들인데 시야가 막혀 답답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만 우리의 소중한 이 산하가 안개 속에 숨어서 모처럼 늦잠 자며 쉴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제가 안개를 좋아하는 것은 꼭 우리의 산하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흐릿하고 애매모호한 안개의 특성을 좋아해서입니다. 밤의 어둠은 이 세상을 모두 검은 색으로 덮어버리고 낮의 밝음은 이 산하의 현란한 모든 색을 드러나게 하지만 안개는 이른 아침 밤과 낮의 완충지대에 자리 잡아 희뿌연 색깔로 이들 간의 색 대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안개의 이러한 모호성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양극사이에 완충지대(Buffer Zone)를 만들어 세상을 편안하게 한다는 믿음 때문에 저는 안개를 좋아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공익이라는 이유로 개인과 기업의 비밀스러움을 다 내보여줄 것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투명을 이유로 버선목을 뒤집어서라도 속의 것을 다 보고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는 분명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개인의 아름다운 비밀은 추억으로 내버려 두고 기업의 성공적
인 경영 비밀은 경영노하우로 남겨두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투명성 제고에 매달려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것은 밤과 낮을 만드신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지독한 관
음증 중독현상을 치유하고자 한다면 남의 옷을 더 이상 벗겨서는 안 됩니다. 그 보다는 흐릿하고도
모호한 안개라는 완충 복(?)을 입혀 벌거벗겨진 이 사회의 긴장을 줄여나가야 건강한 사회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 둘러본 영월의 명소들에 자주 안개가 끼었으면 합니다. 언제고 몸을 숨기고 싶으면 안개 낀
영월의 명소들로 달려가고 싶어서입니다. 안개가 숨겨놓은 은밀한 쉼터를 영월 땅에 점찍어 놓은 이
번 나들이를 삼국유사라는 문학의 안개 속에서 같이 헤매는 현운재 학동들과 같이해 즐겁고 행복했
습니다.
<탐방사진>
1)주천식당(점심)
2)법흥사
3)청령포
4)장릉
5)주천식당(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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