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40. 水路夫人과 함께한 동해명소 문학기행

시인마뇽 2011. 9. 23. 00:48

      

 

                                        水路夫人과 함께한   동해명소 문학기행

 

                                       *여행일자:2011. 9. 15일(목)

                                       *여행지   :강원강릉 허난설헌생가터, 오죽헌, 경포대, 주문진

                                                      강원양양 낙산사

                                       *동행      :방송대국문과  학형 5명

                                                    (세 水路夫人, 純貞公,  牽牛老人)

  

                  

 

  동해안이 주요무대로 등장하는 신라의 향가는 진평왕대의 혜성가(慧星歌), 성덕왕대의 헌화가(獻花歌)와 헌강왕대의 처용가(處容歌) 등 모두 3수입니다. 융천사가 지어 불길한 혜성을 퇴치했다는 혜성가에는 혜성이 사라지고 일본병도 환국해 이를 기뻐한 왕께서 혜성의 등장으로 풍악 행을 중지한 세 화랑을 다시 풍악에 보내는 내용이 나오는데, 짐작해보건대 서라벌에서 지금의 금강산인 풍악까지 길이 나있지 않은 산으로는 가지 못하고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을 것입니다. 처용가의 주 무대는 신라의 서라벌이지만 동해 용왕의 아들 처용이 이 땅에 모습을 나타낸 곳은 지금 울산에 자리한 개운포였습니다. 헌화가에서 꽃을 받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은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부군 순정공(純貞公)과 함께 하는 행차였기에 수로부인의 행로 또한 경주에서 강릉까지 동해안을 따라 이어졌을 것입니다.

 

 

 

  동해안으로 문학기행 길에 오른 저희들이 주목한 향가는 자태와 용모가 하도 빼어나 용왕의 탐욕을 자극하는 수로부인께 소를 끌고 가던 견우노인(牽牛老人)이 벼랑에 올라 꽃을 꺾어 바치면서 노래한 향가 헌화가(獻花歌)입니다.

 

 

                                           헌화가(獻花歌)

 

 

                                       짙붉은 바위 가에

                                       잡고 가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여기서 저희들이란 방송대국문과의 한문스터디그룹인 현운재에서 만난 국문학도 5인방을 일컬은 것으로 4학년 선배 한분과 2학년 학형 3명, 그리고 2학년생인 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문학기행에 앞서 가칭 “헌화가사랑모임(?)”을 결성한 것은 헌화가의 인물들을 하나씩 맡아 그들을 환생시키고 싶어서였습니다. 4학년선배 분은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純貞公)역을 맡아 이번 나들이를 길안내 했고, 2학년 학형들은 수로부인(水路夫人)역을 맡아 졸지에 수로부인이 세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수로부인이 세 명으로 늘어난 덕분에 먹을거리가 충분히 준비되어 견우노인(牽牛老人) 역을 맡은 저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이동 중에 배를 골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헌화가사랑모임(?)의 첫 나들이에 나눠 갖은 기념품은 김욱동 교수가 지은 “광장을 읽는 7가지 방법”과 이어령교수가 지은 “삼국유사 이야기”등의 문학관련 책자입니다. 문학을 매개로 만난 저희들은 반지 대신 이 책들로 커플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하 글에서는 헌화가의 인물은 "水路夫人", "純貞公" 및 "牽牛老人" 등 한자로 표기하고, 그들 역을 맡은 학형들은 "수로부인", "순정공"과 "견우노인" 등 한글로 표기해, 이름이 같은 역사적 인물과 실재인물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牽牛老人에게서 꽃을 받은 水路夫人의 행로는 더 이상 전해지지 않습니다.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친 것이 하도 고마워 水路夫人과 純貞公이 이 노인에 동행을 요청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牽牛老人 역을 맡은 제 상상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강릉에 도착했을 水路夫人과 純貞公 그리고 牽牛老人은 역사의 무대 뒤에 숨어 아주 오랫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그들을 대신해 그들의 이름으로 이번에 동해안으로 문학기행을 떠나는 것도 그들을 흔들어 깨워 역사의 무대에 다시 세운다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음식솜씨가 빼어난 한 수로부인이 거하는 분당을 이번 문학기행의 집결지로 정했습니다. 영혼만 남은 水路夫人과 교감을 유지하는 일은 스마트 폰질이 주특기인 이 부인이 맡을 것입니다. 水路夫人의 "영혼에 브래지어를 채워" 문학기행에 동참토록 하는 것은 평촌 사는 후덕한 수로부인의 몫입니다. 아무리 하늘을 나는 영혼이라 하더라도 문학기행을 같이 가자고 모셔온 水路夫人을 혼자 날게 할 수는 없다며 언제나 얼굴이 밝아 화목해 보이는 막내 수로부인이 水路夫人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일은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막내 수로부인이 운전대를 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강릉태수 순정공은 이들에 점심을 사는 일과 길을 안내해주는 일을 빼놓고는 할 일이 없어졌습니다. 할 일이 없어지기는 견우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마트폰에 내장된 꽃이 야생화들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수로부인이 이 노인에 꽃을 꺾어달라고 한 지가 1,20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분당 사는 수로부인이 준비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막내 수로부인이 운전하는 승용차로 水路夫人을 모시고, 평촌 수로부인이 동행하는 水路夫人의 영혼에 브래지어를 채우는 것으로 나들이 준비가 모두 끝나, 아침 9시가 조금 넘어 분당을 출발했습니다.

 

 

 

1)허난설헌 생가터/ 박물관

 

  첫 번째 탐방지는 강릉의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허난설헌 생가터”입니다. 뜻하지않은 수로부인들의 등장에 허난설헌께서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수로부인 모두 누구하나 흠잡을 데 없는 절세가인인데다 당신께서 애써 지은 한시를 읽어 그 뜻을 새겨보겠다고 나서는 품이 남달라 보여서인데, 긴장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견우노인으로부터 수로부인들의 한문 실력이 현운재에서 배운 것이 전부여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귀띔 받고나서 당신의 작품을 문제없이 해독할 수 없음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허난설헌은 1589년 2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입니다. 아버지 허엽은 대사성을 지낸 동인의 영수로 첫째부인 청주한씨에게서 두 딸과 임진왜란 전 종사관으로 일본을 다녀온 악록 허성을, 둘째부인 강릉김씨에게서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저서 “하곡집”을 남긴 하곡 허봉, 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을 차례로 얻었으니, 난설헌집을 낸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6년 손위 누님이 됩니다. 화담 서경덕이 아버지 허엽의 스승이고, 오빠 허성과 허봉은 미암 유희춘의 제자이며 동생 허균은 유성룡과 이달에서 배웠으니 집안의 분위기가 문학으로 충만했던 것은 능히 짐작되는 일입니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문재로 칭송받은 허난설헌은 중국의 “양조평양록”과 김만중의 “서포만필”에서도 격찬을 받았지만, 김성립에 시집간 후 결혼생환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해송들에 둘러싸인 허난설헌 생가는 바닷바람에 잘 견뎌냈을 것입니다. 4백년을 넘긴 생가의 하얀 회벽이 너무 깨끗해 개수된 지 오래된 건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토담과 주변 솔밭이 어우러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으로 알려진 허난설헌 생가 터는 문화재자료5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흑백의 단조로운 한옥건물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마당을 환히 밝히는 빨간 백일홍의 배롱나무였습니다. 생가에 인접한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역시 조촐했습니다. 기념관에 전시된 허난설헌의 채련곡(采連曲)은 조용히 생가의 후원을 거닌 수로부인들의 눈길을 끌었다면, 견우노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풍운아 허균과 허난설헌이 속한 가계도였습니다. 모두가 명망가인 허씨 가문의 가계도를 보고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옛 말씀이 틀리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수로부인 일행들은 허난설헌의 채련곡을 가슴에 새겨 넣고 오죽헌으로 옮겼습니다.

 

 

                              채련곡                                    采連曲

                              

 

          가을 호수 맑고 푸른 물 구슬 같아               秋淨長湖 碧玉流

          연꽃 핀 깊은 곳에 목단 배 매었고               荷花深處 繫蘭舟

          임을 만나 물 건너 연밥 따 던지고는            逢郞隔水 投蓮子

          행여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부끄러워           或被人知 半日羞

 

 

2)오죽헌

 

 

 

  오죽헌(烏竹軒)의 오죽(烏竹)은 까마귀처럼 줄기가 까만 대나무를 이른다는 것을 여기 오죽헌에서 실물을 보고 나서 처음 알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까마귀를 까치보다 훨씬 홀대했습니다. 뭘 잘 까먹는 사람들에 까마귀고기를 먹었냐고 비아냥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 새를 위험하고 흉측한 새로 여겨 멀리했습니다. 후일 태종으로 등극하는 이방원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포은 정몽주 선생에 모친께서 들려준 아래 시조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나셨고 그에 앞서 조선조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칭송받는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께서 태어나신 이곳을 “까마귀 烏”자가 들어가는 오죽헌(烏竹軒)으로 이름 지은 것은 까마귀의 영특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까마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둔한 동물이 아닙니다. 대를 이어 정확하게 울음소리를 전수받은 까마귀의 기억력은 교육학자들의 테스트결과 13까지 셀 수 있는 것으로 밝혀져 하늘을 나는 새들 중 가장 뛰어나다 합니다. 실제 까마귀는 지혜롭게도 먹이를 저장하기도 하는 데 그 평균저장기간이 무려 14일이나 됩니다. 사람들이 또 하나 잘못 쓰고 있는 말이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떼를 지어 모여 봤자 별 볼 일 없는 무리들임을 뜻하는 이 말에는 까마귀가 겁 많고 약한 새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실제는 이와 전혀 달라 매와 1:1로 싸우면 까마귀가 이깁니다.

 

 

 

  5천 원짜리 종이돈에는 율곡 이이선생이, 그리고 모친 신사임당께서 5만 원짜리 지폐에 나오는데도 무슨 돈이 모자라는지 오죽헌은 입장료로 3천 원씩 받아 규모는 작아도 무료로 관람하는 허난설헌생가터와 대비됐습니다.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배향되는 율곡 이이선생의 생가답게 오죽헌은 우선 터가 넓었습니다. 자경문을 지나 문성사에 이르기까지 넓은 마당이 있어 시원스러웠습니다. 문밖 동상보다 훨씬 인자하게 그려진 율곡 선생의 영정이 전면 한 가운데 걸려 있는 문성사 자리는 원래 이 건물 왼쪽구석에 모셔진 어제각 이 들어섰던 곳이라 합니다. 안마당 왼쪽으로 별당건물 烏竹軒이 자리했고 신사임당께서 아드님 율곡을 현몽하셨다는 “몽룡실”도 같이 있었습니다.

 

 

  오죽헌 별채 안에 모셔진 신사임당의 영정을 보자 수 년 전 한국은행에서 이분의 얼굴을 지폐에 새겨 넣겠다고 했을 때가 생각났습니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9종의 화폐 중 최고액권인 5만 원짜리 지폐에 신사임당의 얼굴을 새겨 넣는다는 뉴스를 듣고 이제 이 나라는 중앙은행조차도 여성의 눈치를 보는 구나 싶어 씁쓰레했는데, 어인 일인지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여성계에서 일부 단체이기는 하지만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일수는 있으나 남성들로부터 독립해 당당하게 살아가는 오늘날의 바람직한 여성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을 보고 세상이 변해도 참 고약하게 변해간다 했습니다.

 

 

 

  알뜰살뜰 살림을 해가면서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국문학을 공부하는 수로부인들에는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조 최고의 여류문인으로 칭송받는 신사임당은 뛰어넘을 수 없는 고봉이기에 영정을 보는 눈이 여권운동가들과 같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1551년 48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신사임당은 무엇보다도 대학자 율곡 이이를 훌륭하게 길러내 수로부인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분입니다. 사대부 부녀자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두루 갖춘 신사임당은 한시만 잘 지은 것이 아니라 포도, 꽃, 곤충 같은 그림도 잘 그렸다하니 이런 분을 여권운동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폄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대동시선”에 단 2수의 한시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인 “유대관령망친정(蹂大關領望親情)”은 친정어머니 생각을 참으로 애틋하게 그렸습니다.

 

 

                    어머님은 백발이 되어 임영에 계시는데                     慈親鶴髮在臨瀛

                    이 몸 홀로 서울로 가고 있는 심정이여                      身向長安獨去情

                    머리 돌려 북평 땅을 한 번 바라보니                         回首北坪時日望

                    흰 구름 일어나는 밑에서 저무는 산이 푸르구나          白雲飛下暮山靑

 

 

 

  16세에 모친을 잃은 율곡 이이선생의 충격은 컸습니다.긴시간  방황 끝에 율곡이 택한 것은 금강산에 입산해 불경을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만에 하산했지만 그간 율곡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는, 어느 유학자도 해보지 못한 특이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성리학의 깊이를 더 했고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게 됐습니다만, 하산 후 내내 선생과 학파를 달리한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입산했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주자학은 본시 불교와의 대결의식에서 태어난 학문이어서 불교를 모르면 주자학을 이해할 수 없는데 안타깝게도 율곡  이후로는 불교의 땅을 디뎌본 유학자가 없다 합니다. 역시 퇴계 이황은 대학자이셨으니, 한때 불교에 입문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35세 연하의 율곡 이이에게 “그대는 제때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窮鄕)에 들었던 일을 슬퍼하지 말아주오”하고 시를 지어 보내 위로를 했습니다.

 

 

 

  오죽헌 왼쪽 끝머리에 자리한 어제각(御製閣)은 정조임금의 명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지었다 하여 이름 붙여진 건물로 율곡선생의 저서“격몽요결”과 선생이 쓰시던 벼루를 보관한 곳입니다. 견우노인이 읽은 율곡선생의 저서는 “격몽요결” 한 권뿐이어서 어제각 앞에 오래 서있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오죽헌의 입장료가 3천 원씩 가는 것은 박물관 관람료가 포함되어서일 텐데 수로부인들을 모시고 들를 곳이 몇 군데 더 있어 어제각을 끝으로 오죽헌 둘러보기를 마친 후 경포대로 향했습니다.

 

 

 

3)경포대

 

  1968년은 대학에 갓 입학한 견우노인이 고교동창과 둘이서 동해안 명소를 둘러보는 것으로 여름방학을 보낸 한 해입니다. 속초에서 시작해 낙산사 의상대, 강릉 경포대를 거쳐 삼척 죽서루에서 끝낸 나들이 길은 고려의 안축이나 조선조 정철의 여로와 같은 방향이었고, 純貞公이 이끄는 水路夫人의 행차 길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서라벌에서 시작한 水路夫人의 행차는 純貞公의 부임지인 강릉에서 끝났고, 안축과 정철의 행로는 통천의 총석정에서 시작해 삼척의 죽서루에서 끝났으니 그들의 여로는 그 거리가 크게 차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릉까지 水路夫人과 동행한 純貞公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총석정까지 수로부인들을 이끌 순정공이 이번에는 강릉의 경포대를 거쳐 양양의 낙산사까지만 모시기로 했습니다. 이 여로를 끝내고 수로부인들이 읊어낼 가사가 기대되는 것은 어느 한 세대의 관동팔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시대적으로는 신라성덕왕대에서 오늘에 이르는 천 수백년을, 지리적으로는 서라벌에서 총석정에 이르는 천 몇 백리 길을 담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純貞公이 강릉에 부임한 이후의 일이 속보로 전해지는 것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관내에 자리한 경포대를 純貞公이 水路夫人과 함께 돌아본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잡혀갔다 돌아온 동해 용궁의 별천지를 그리워할지도 모를 水路夫人을 달래기 위해서도 경포대에 함께 올라 경포호에 드리운 달을 보고 사랑노래 한수를 읊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 바입니다. 안축의 관동별곡이나 정철의 관동별곡에 純貞公의 사랑노래가 얼마라도 녹아 있을지 몰라 이들의 노래를 찾아 다시 읊어 봅니다.

 

 

 

  고려조 충숙왕17년(1330년) 안축은 총9장에 이르는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었는데 강릉의 옛 이름인 “임영(臨瀛)”을 노래한 제7 장에 경포대를 찬하는 글이 나옵니다.

 

 

三韓禮義 千古風流 臨瀛古邑                            삼한의 예의, 천고의 풍류 간직한 옛 고을 강릉

鏡浦臺 寒松亭 明月淸風                                  경포대와 한송정이 있어 달은 밝고 바람도 맑다

海棠路 池春秋佳節                                         해당화 길, 연꽃 핀 못에서 봄가을 좋은 시절에

爲 遊賞景 何如爲尼伊古                                  아! 노닐며 감상하는 모습 어떠합니까?

燈明樓上 五更鍾後                                         등명루 위에서 새벽이 지난 뒤에

爲 日出 景幾何如                                           아! 해돋이 모습 그 어떠합니까?

(위 글은 인터넷 사이트 “디지탈강릉문화대전”에서 따왔습니다)

 

  조선조 선조13년(1580년) 정철은 관동팔경을 두루 둘러보고 가사 “관동별곡”을 지었는데 그 중 경포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부분은 아래와 같습니다.

 

 

斜陽峴山의 躑躅을 므니발와                     저녁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밟아

羽蓋芝輪이 鏡浦로 나려가니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千里氷紈을 다리고 고텨다려                     십리나 뻗쳐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長松 울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큰 소나무 숲이 둘러싼 곳에 한껏 펼쳐져있으니

물결도 자도 잘샤 모래랄 혜리로다             물결도 잔잔하여 모래알을 헤아릴 정도로구나

孤舟解纜야 亭子우해 올라가니               한척의 배를 띄워 정자 위에 올라가니

江門橋너믄 겨태 大陽이 거긔로다              강춘교 너머 그 곁이 동해로구나

從容한다 이 氣像 濶遠한다 뎌境界             조용하다 이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경계여

이도곤 가란대또 어듸 잇닷말고              이보다 아름다운 경치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紅粧古事랄 헌사타 하리로다                     홍장의 옛 이야기를 야단스럽다고 할 만 하구나

(위 글은 인터넷 사이트 “무경선생의 국어사랑방”에서 따왔습니다. 아래 . 를 표기하는 방법을 몰라 "아"발음으로 바꾸어 적었습니다)

 

 

 

 

  오죽헌에서 멀지 않은 경포호는 원래 둘레가 16킬로였다가 토사가 흘러들어 그 반의반으로 줄어들었는데도 꽤 넓게 보였습니다. 43년 전 여름 친구와 둘이서 몇 십리를 걸어 경포호를 찾아왔을 때는 심신이 많이 지쳐 이 호수의 전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고려시대 강릉기생 홍장과 안신사 박신과의 애절한 이야기가 담긴 홍장암(紅粧嵓) 옆에 설치해놓은 전망대에서 마음 편히 둘러보았습니다. 물 한가운데 바윗돌에 사뿐히 내려앉은 갈매기(?)의 다소곳한 모습과 그 너머 자그마한 수중 정자의 원경을 정성스레 카메라에 담앗습니다. 강릉기생 홍장(紅粧)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정감어린 순정공 앞에 다가온다면 그 또한 안신사 박 신처럼 열정을 앓을 만도 하건만, 미모에서 하나도 빠질 것이 없는 수로부인들의 시샘어린 눈총과 이 호수 주위 아파트에서 내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인지 홍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경포호까지 와서 정작 경포대를 찾지 않은 것은 정자에 올라도 달을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으로 치는 데는 경포호를 비추는 교교한 달빛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순정공의 말씀대로 경포대에 오르면 하늘, 호수, 바다, 술잔과 님의 눈동자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데 수로부인들이 홍장과 맞부딪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아 진득하게 달뜨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곧 바로 주문진으로 이동했습니다.

 

 

4)주문진  

 

 

수로부인들의 오찬은 강릉태수 순정공께서 맡았습니다. 고교동창분이 주인인 제일식당에 차려진 점심상은 60대 중반의 견우노인도 이제껏 맛보지 못한 진귀한 것이었습니다. 수로부인들이야 동해 용왕에 잡혀갔을 때 벌써 대접을 받았겠지만, 뭍에서 소나 끌어온 견우노인이 제주 먼 바다에서 아주 드물게 잡히는 다금바리 생선회의 감 칠 맛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원님 덕분에 부는 나발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어서 견우노인은 엄청 감사하는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옛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며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생선회를 드는 수로부인들을 지켜보는 순정공의 흐뭇해하는 눈빛에서 베풀음의 미학을 배웠습니다. 주문진에서 낙산사로 이동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북 커플 식(Book Couple 式)을 가지며 문학기행의 참 뜻을 되새겼습니다.  

 

 

5)낙산사

 

  4월을 잔인한 달로 비유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같지 않은가 봅니다. 견우노인이 미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를 읽는다면 이 시의 깊은 뜻을 선뜻 헤아리지 못하고 4월이 잔인한 이유로 별 게 다 있다 싶어 시큰둥했을 것입니다. “황무지”는 "사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아래와 같이 시작됩니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Mixing memories and desire                            추억과 열망을 뒤섞고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봄비로 활기 없는 뿌리를 일깨운다

 

 

 

  2005년 4월6일 낙산사의 화재 소식을 접한 불교신도라면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라며 망연자실했을 것입니다. 낙산사가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절이 아니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서력671년 의상대사께서 설악산에서 동해로 뻗어나가는 산줄기의 끝머리에 자리한 구릉 “오봉산”을 ‘낙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수관음 도량을 개찰한 것이 바로 낙산사라 하니 천년고찰 중에서도 으뜸으로 뽑힐만한 가람(伽藍)입니다. 사대부중의 신성공간으로 비구, 비구니와 재가불도인 거사와 보살들의 원림(園林)을 가리키는 가람인 낙산사는 일반시민들의 순례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에 ”오부대중“의 가람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작가 박태순은 그의 저서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절이 4월의 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됐으니 4월은 잔인한 달이라며 푸념할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화마가 남긴 상처가 거의 다 아문듯해 기뻤습니다. 시인 엘리어트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운다며 4월을 잔인한 달로 몰아갔는데 망연자실했던 많은 분들은 거꾸로 불타버린 땅에다 씨를 옮겨 나무와 풀을 소생시킨 대자연이 고맙고 또 고마울 것입니다. 한 곳에 모아 놓은 화마의 잔흔들을 보며 당시 불길이 얼마나 드셌는가를 어림해 보았습니다. 무지개 형상의 문을 낸 홍예문을 지나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원통보전(圓通寶殿)을 찾았습니다. 온갖 세상사 어려움과 소원을 받아들여 구제해 주기 위해 33가지 형태로 몸을 변화시켜 대비행을 완성시키는 관음보살은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해 원통대사로 불리며 이런 보살을 모시는 전각이어서 원통보전이라 이름 붙였다 합니다. 원통보전 안의 관음보살과 앞마당의 7층 석탑을 눈여겨 살펴 본 후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해수관음(海水觀音)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서해안이라면 낙조가 장관일 저녁시간에 동해를 바라보는 높이가 16m인 해수관음의 목덜미를 비추는 빛을 쫓아 뒤돌아보자 설악산의 대청과 중청의 한 가운데서 구름 뒤로 몸을 숨긴 석양에서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저녁햇빛이 참으로 볼만 했습니다. 이 순간을 포착한 한 수로부인이 스마트폰으로 이 광경을 담았는데 자타가 공인하는 작품사진이어서 이 글 맨 위에 올렸습니다. 동해에 면해 자리한 의상대와 홍련암을 차례로 둘러보았습니다.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산세를 살핀 곳으로 옆자리에 홀로 곧추선 관음송이 일품이고, 홍련암은 그 크기가 5평 남짓한 아주 작은 암자로 관음굴 위에 세워졌으며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 하기 앞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라 합니다.

 

 

 

  5년 전 화마가 극적으로 피해간 곳은 의상암과 홍련암입니다. 또 하나 원통보전 건물은 소실됐어도 그 안의 관음보살상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원통대사로 불릴 만큼 많은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화마가 피해간 홍련암을 마지막으로 낙산사 탐방을 끝내고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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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처럼 별들이 밝게 빛났습니다. 예비전력이 거의 다 동이 나 한전에서 부분단전을 실시한 바람에 설악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오색마을은 칠흑같이 캄캄했습니다. 날이 맑으면 별빛의 밝기는 지구촌의 밝기에 반비례합니다. 가까운 작은 산이 먼 큰 산을 가리듯 눈앞의 전깃불이 태양보다 훨씬 더 더 강력한 에너지를 발하는 별빛을 먹어 삼켜 도시에서 별을 보는 것은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비 오듯이 쏟아지는 별빛을 보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준 것이 전기 빛으로 밤을 밝히는 일이 주 업무인 한전 덕분이라니 어안이 벙벙하기는 하지만 별들이 문학기행을 깔끔이 마무리 짓고 귀경하는 수로부인들에 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알고 고마워했습니다.

 

 

 

  영동과 영서를 가름하는 백두대간은 꿈과 현실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해발900m대의 한계령에 올라 잠시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은 여전히 밝았습니다. 바람이 쌩하고 불었습니다. 한계령의 고갯마루에서 내려가 분당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점검한 속도는 시속 60마일을 넘어 쌩하고 부는 한계령의 바람보다 더 빨랐습니다. 이렇게 꿈의 문학기행을 끝내고 시속 120Km의 속력으로 현실세계를 향해 내달렸습니다.

 

 

 

  순정공 역을 맡아 저희들을 이끌어준 선배님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모처럼의 문학행을 기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차 몰이까지 맡아준 수로부인님들께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모두가 고생하셨습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