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명소 탐방기2
*탐방일자:2011. 11. 1일(화)
*탐방지 :충북단양소재 도담상봉, 석문, 광공업전시관,
사인암, 중선암, 상선암
*동행 :한국방송대 국문과 현운재 회원
한국방송대 국문과의 한문스터디 그룹인 현운재에서는 매년 봄가을로 지방명소들을 찾아 나들이를 다녀오곤 합니다. 현운재의 한문스터디를 맡아 주신 오태권 선생님을 모시고 올 가을 나들이 길에 나선 곳은 충북 단양의 명소들입니다. 단양에는 명승지가 하도 많아 하루에 다 들를 수 없기에 자연 몇 곳을 추려 가볼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 회장단에서 탐방지로 선정한 명소는 도담삼봉, 석문, 사인암, 하선암, 중선암과 상선암 등입니다.
단양(丹陽)의 지명은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연단조양(鍊丹調陽)이란 신선이 먹는 환약인 연단(鍊丹)과 빛이 골고루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어 살기 좋은 고장을 뜻하는 조양(調陽)이 합쳐진 말입니다. 신선(神仙)이 불로약을 들면서 다스린 곳이 단양이기에 이번 탐방 길에 신선의 발자취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리라 생각지 않습니다. 상선암과 중선암 및 하선암 모두 신선이 머물렀을 만한 곳이기에 그런 이름을 얻었을 테니 말입니다.
순전히 관광목적으로 단양을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충주호 담수로 단양이 수몰되기 한 해 전인 1985년(?) 여름 집사람과 함께 고수동굴 및 도담삼봉 및 석문을 다녀갔고, 작년 봄에는 고교동문들과 같이 도담삼봉, 온달성과 온달굴을 탐방한 후 장회나루로 옮겨 배를 타고 옥순대교를 다녀왔습니다. 도담삼봉은 세 번째이고 석문은 두 번째이며 상, 중, 하선암은 오다가다 버스에서 흘깃흘깃 보았을 것이기에 이번에 처음 가보는 곳은 사인암뿐입니다.
사인암 한 곳만으로도 이번 나들이가 제게는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고려시대 거유(巨儒) 중 한 분인 역동 우탁선생이 정4품인 사인(舍人)직에 계실 때 이곳에서 머물러계신 것을 기리고자 조선 성종 때 임재관 단양군수가 운산구곡의 남조천에 면해 직립한 넓적한 바위에 사인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합니다. 우씨(禹氏)는 그 인구수가 40위 정도인 희성인데다 본관이 단양밖에 없는 단성단본이어서 단양은 저 같은 우씨들에게는 성지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번 탐방지 모두 우탁 선생이 머물다 간곳임에 틀림없을진대 그렇다면 제게는 이번 나들이가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셈이 되어 더욱 뜻있다 하겠습니다.
1)도담삼봉
아침 10시가 다 되어 서울캠퍼스를 출발한 버스가 12시가 훨씬 넘어 첫 번째 탐방지인 도담삼봉에 도착했습니다. 배들이 고팠지만 도담삼봉과 석문을 둘러본 후 점심을 들기로 하고 먼저 도담삼봉을 배경으로 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직도 상업적인 사진사들이 손님을 맞는 것을 보면 도담삼봉을 찾는 관광객들 중 이들에 사진을 찍는 분들이 적지 않나 봅니다.
도담상봉은 남한강 한가운데 정좌한 3개의 자그마한 봉우리들을 이름 하는 것으로 풍광이 매우 수려합니다. 가운데 봉우리 중턱에 정자가 세워져 있어 시 짓기를 즐겨온 사대부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 단양에서 딱 9개월간 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선생도 이맘때쯤 이곳을 찾아 시 한 수를 남기셨습니다.
山明楓葉水明沙 (산명풍엽수명사) 산은 단풍으로 물들고 강은 모래 벌로 빛나는데
三島斜陽帶晩霞 (삼도사양대만하) 삼봉은 석양을 이끌며 저녁노을 드리우네
爲泊仙橫翠壁 (위박선사횡취벽) 신선은 배를 대고 길게 뻗은 푸른 절벽에 올라
待看星月湧金波 (대간성월용금파) 별빛 달빛으로 너울대는 금빛 물결 보러 기다리네
북서쪽으로 이 강에 면해 직립한 푸른 절벽과 강 건너 남동쪽의 모래벌이 받쳐주어 더욱 돋보이는 도담삼봉은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조선 건국의 초석을 놓은 삼봉 정도전과도 재미있는 일화가 엮여 있습니다. 강원도 정선군이 충청도 단양군에 홍수로 떠내려 간 삼봉을 차지하고 있으니 그 대가로 세금을 내라고 했으나 어린 삼봉이 도로 가져가라고 꾀를 내어 세금을 물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우리 선조들이 도담삼봉을 최고의 경승지로 여긴 것이 분명합니다.
물이 빠져 맨살의 허리춤을 내보인 삼도봉을 보자, 애당초 맨몸인 세 봉우리가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딱해 신선들이 나무들로 하여금 살짝 뿌리를 박게 해 지표를 가리게 하셨겠지만 삼도봉의 몸뚱어리는 저 허리춤과 같이 바위덩어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석문
1985년 처음 찾아 왔을 때는 모래 벌에서 배를 타고 도담삼봉을 둘러본 후 강을 건너 산에 올라 석문을 보고 갔습니다. 지난 봄 탐방시에는 어디에서 하선해 석문을 올랐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다가 그냥 돌아갔는데, 이번에 다시 와 석문이 지척의 거리에 있고 길안내 표지목이 주차장 북쪽 끝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그때는 잠시 제 눈이 삐었음이 분명하다며 실소를 머금었습니다.
가파른 목제 계단을 걸어 올라 다다른 석문은 한양의 대감 집 대문보다 훨씬 커 보였습니다. 이 산 저산을 오르내리며 가운데가 뻥 뚫린 바위 문들을 지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흔히들 통천문이라 불리는 바위 문은 지리산에도, 월출산에도 또 금강산에도 있습니다만, 모두들 문의 크기가 여기 석문에 비할 수 없이 작습니다. 더구나 바로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바위문은 여기 석문이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울릉도에도 바위가 뻥 뚫린 엄청 큰 바위 구멍이 있지만 물가가 아닌 산속에 있고, 제주의 산방굴이 바다에 면해 있지만 이는 한쪽이 막힌 암굴이지 터널처럼 양쪽이 다 뚫린 문은 아닙니다.
해발고도가 100m는 족히 될 위치에 이런 바위 문을 인공적으로 뚫려 했으면 그 공사가 꽤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사람들을 대신해 해 낸 것은 바로 세월입니다. 자료를 찾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지만 바위문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석회암일테고 이 석회암을 조금씩 녹여 구멍을 낸 것은 오랜 세월 암석에 스며든 빗물일 것입니다.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기 힘들어하는 것은 생물만이 아닙니다. 암석과 같은 무생물도 견뎌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여서 낙숫물에 툇돌이 뚫리는 것입니다.
세월이 공들여 만든 석문이 아름다운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어 신선들이 보기에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술과 담배를 좋아했다는 마고할미가 여기서 살다가 죽어서 바위가 됐을 리가 없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취형의 석문을 통해 본 강 건너 모래밭을 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는 소월의 시 구절이 절로 생각났습니다.
미국의 시사평론가 토마스 프리드만은 그의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황금아취로 상징되는 맥도날드가 진출한 나라들은 이미 세계화가 진전되어 서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소위 ‘골든아취이론’을 선보였습니다. 아취형태의 문이라면 여기 석문이 맥도날드의 ‘골든아취’를 뛰어넘습니다. 남북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에 맥도날드가 진출하는 것보다 여기 아취 모양의 석문을 휴전선으로 옮겨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 것은 원수 중의 ‘원쑤’인 미국 기업을 북한이 받아들일 리 없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3)사인암
도담삼봉 식당가에서 점심은 든 후 남쪽으로 옮겨 사인암을 들렀습니다. 주차장에서 하차해 북서쪽에 자리한 사인암을 찾아 가는 길에 길 건너 천변에 소나무 두 그루와 비석이 하나 서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비석이 이곳에서 사인 벼슬을 지낸 역동 우탁선생의 기념비인데 사진만 찍고 가보지는 못했습니다.
먼발치서 볼 때는 사인암이 무등산의 입석대 같이 주상절리의 암괴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정 간격으로 가로로 나있는 금은 층리를 나타내는 선은 아니고 위와 아래가 미세하게 벌어진 생긴 틈이었습니다.
남조천에 면해 곧추선 사인암은 그 높이가 약 50m에 이른다 합니다. 높이도 높이려니와 천변에 우뚝 솟아 있는 암면도 엄청 넓어보였습니다. 주상절리처럼 보이는 암면에 수평방향으로 금이 가 있어 마치 고만고만한 바위들을 쌓아 올린 것 같았습니다. 소나무가 자리 잡은 바위 꼭대기는 극상림의 대표수종 자리를 다투는 참나무가 대신 들어설 수 없는 척박한 곳이어서 소나무의 푸르름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수 십 미터 높이의 기암절벽과 그 꼭대기의 소나무만으로도 넘칠 만한데 그 아래 남조천으로 푸른 물이 흐르고 있으니 사진깨나 찍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구도를 잘 잡아 작품을 남기고 싶을 것입니다.
조선조 최고의 화백이라 부를 만한 단원 김홍도도 사인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도담삼봉, 옥순봉과 함께 그의 병진년화첩에 그려놓은 사인암 그림은 지금의 사인암과 거의 같아 누렇게 변한 사진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절경의 사인암에 정자가 없다하면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김홍도의 그림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네이버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선재선재”라는 긴 이름의 카페를 운영하시는 법상님은 서벽정(棲碧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찾아보니 ‘郡名 赤山 赤城 丹山’편에 ‘南川川之 左岸 有樓’의 문구가 보였는데, 이 정자를 이르는 것 같습니다.
이 바위는 우탁선생 덕분에 정사품인 사인반열에 오른 셈입니다. 정이품에 오른 속리산 소나무에 비할 수는 없지만, 생명체가 아닌 바위가 이 정도에 오른 것은 순전히 선조이신 우탁 할아버지 덕분이다 싶어 어깨가 으쓱여졌습니다.
4)상선암과 중선암
사인암에서 하선암과 중선암을 거쳐 상선암으로 가는 길은 상선계곡이 흐르는 도락산으로 가는 길이어서 눈에 많이 익었습니다. 어인 일인지 기사양반이 사전예고도 없이 하선암을 건너뛰어 3곳의 바위들을 차례대로 보고 가겠다는 계획이 깨졌습니다. 제멋대로 코스를 빼먹는 기사양반에 심사가 뒤틀려 나머지 중선암과 상선암도 보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중선암 표지판이 세워진 길가에 차를 세워주어 내려가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느 바위가 중선암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당연 조선 효종 때 문신인 곡우 김수증이 써 놓았다는 “사군강산삼선수석”이라는 글자도 보지 못하고 상선암으로 이동했습니다. 도락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상선리 입구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져 위치한 상선암은 우암 송시열선생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이름 지었다 합니다. 상선계곡의 마지막 경승지라는 상선암을 먼발치서 일별했는데 이런 정도의 바위들은 이름난 산들의 계곡에서 수 없이 보아와서인지 이렇다하게 감흥이 일지 않았습니다.
이들 바위보다 제 눈을 끈 것은 상선암주차장 입구에 서있는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였습니다. 열흘 후 고교동문들과 함께 여기 도락산을 오를 예정이어서 그때 이 단풍잎들을 다시 볼 것입니다. 어느새 올 가을도 막바지인 11월에 접어들어 하루가 다르게 고왔던 단풍이 퇴색해갑니다. 절정에 이른 저 새빨간 단풍이 열흘을 기다려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사진이라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5)광공업 전시관
일정에 없는 광공업전시관을 혼자서 들렀습니다. 광공업전시관이 자리한 곳이 도담삼봉 식당가 한쪽 끝이어서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지하 1층과 지상2층으로 지어진 단양광공업전시관은 2004년에 개관했다는데 작년 봄 도담삼봉에 왔을 때는 전시관이 있는 줄 몰라 그냥 돌아갔습니다.
먼저 지하1층으로 내려가 석회석에 관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단양에 시멘트공장이 여럿 있는 것은 석회석이 많이 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동굴이 몰려 있는 것도 이 지역에 주로 석회암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1층에서는 단양의 유래와 역사, 자원과 특산물을 소개하고 지구의 역사도 개괄해주어 단양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되었습니다. 패널과 모형으로 보여준 인류의 진화과정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유익했습니다.
광업전시관으로서 진면목을 보여주는 전시장은 지상 2층이었습니다. 광물과 암석의 종류와 특성뿐만 아니라 그 생성과정을 패널로 보여주고 대표적인 암석을 표본으로 전시해 볼거리가 참 많았습니다. 책에서만 보아온 삼엽층 화석을 이곳에서 처음 보았으며 자수정의 표본도 그 크기가 엄청 나 보석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귀경버스 안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리고 나들이는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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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나들이를 하나로 엮어주는 키워드는 바위입니다. 사인암, 상선암과 중선암이 모두 이름난 바위이고 석문은 이름 그대로 바위 문이며 도담삼봉도 나무들에 숨겨진 몸통은 바위입니다. 그리고 단양의 바위와 광물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 제가 다녀온 단양광업전시관입니다.
바위를 암석으로 바꿔 부르면 그 범위가 지질학의 대상으로 좁혀집니다. 지구를 덮고 있는 단단한 고체부분을 암석이라 부르는데, 이 암석은 크게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으로 나뉩니다. 서울 인수봉의 화강암과 제주도의 검은 돌 현무암이 화성암이고, 단양에서 많이 보이는 석회암은 퇴적암이며, 고급건축자재인 대리석은 변성암입니다.
바위를 암석이 아닌 바위로 보아야 문학이 살아납니다. 청마 유치환님은 바위를 바위로 보았기에 “바위”라는 시를 지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위
내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트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디지털문명의 빠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언저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두쪽으로 깨트려도 소리하지 않은 단단한 바위가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이번에 다녀간 바위들을 만나러 길을 떠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바위를 암석이 아닌 바위로 보아야 석불이 창조됩니다. 암석이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기껏해야 그 쓰임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석불이 새겨진 바위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같으려면 바위가 암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광물을 이루는 암석으로는 지질학의 내용을 담을 수 있어도 부처님의 메시지를 담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만나본 단양의 바위들이 들려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자기들을 닮으라는 당부인 것 같습니다. 진정 그런 뜻이라면 사인암에도, 상선암에도 고마워할 뜻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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