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3
*탐방일자:2011. 12.
*탐방지 :경북포항소재 오어사(吾魚寺)
*동행 :나홀로
경북 포항의 오어사(吾魚寺)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찰입니다. 어느 날 원효와 혜공 두 스님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봤다 합니다. 오어사(吾魚寺)라는 절 이름은 혜공이 원효의 변을 가리키며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고 실려 있습니다. 오어사와 관련된 일화를 삼국유사에 올린 일연선사께서 “어떤 사람은 이 말이 원효법사가 한 말이라 하는데 이것은 황당한 이야기다”라고 부인했으나, 이 절은 아직도 “내 물고기”라는 뜻의 ‘오어(吾魚’를 그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지도를 꺼내보니 오어사는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정남쪽에 위치한 운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터미널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가 문덕에서 하차했습니다. 오어사 행 버스가 하루에 몇 대되지 않아 일만원에 택시를 불렀습니다. 오어사를 거의 다 가 만난 길 왼쪽의 저수지 오어호(吾魚湖)가 참으로 고혹적이어서 시간만 넉넉하다면 차에서 내려 쉬어가고 싶었습니다. 안내책자의 사진에 오어사가 배산임수의 형상을 한 최고의 명당자리에 터 잡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절이 오어호의 윗머리에 자리해서이지, 저수지를 만들기 전부터 물이 많아 천년신비를 머금은 방생도량의 사찰로 자리 매김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장율사께서 오어사를 창건한 것은 신라 26대 진평왕 때(579-632년) 이니 천년고찰이라 부르고도 남을만합니다. 당초에는 항사사(恒沙寺)라 불렸으나 혜공선사와 원효대사의 “오어(吾魚)”사건(?) 이후로 오어사로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규모가 그리 큰 절이 아닌데도 혜공과 원효 외에도 자장이나 의상 등 네 분의 고승들께서 이 절에서 기거하셨다하니 일연선사께서 그의 저서 삼국유사에 이절의 이름을 올릴 만 했을 것입니다. 일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보수공사가 진행 중으로 마당에 택시 한 대가 정차해 있어 경내가 어수선했습니다. 키가 꽤 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몸을 배배 틀고 서 있는 것을 보자 이 절이 겪었을 간난(艱難)의 시절이 어렵지 않게 감지되었습니다.
왼쪽에 자리한 범종각이 절의 규모에 비해 상당히 커 보였습니다. 범종, 법고, 목어와 운판 등의 사물 중 가장 먼저 울리는 범종은 33번의 타종으로 연 이어집니다. 중후한 범종의 울림이 육계33천에 두루 미쳐 이 소리를 듣는 중생 모두가 제도를 받으며, 법고소리를 들으면 산속의 동물들이 평화를 느낀다 합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운판을 두들겨 소리를 내는 것은 새들을 부르기 위해서이고, 목어를 두들기는 것은 나머지 수생물(水生物) 즉 물고기를 불러내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는데 사물의 울림을 듣지 못하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오른 쪽으로 대웅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경내에 세웠다는 13당우(堂宇) 중 현존하는 것은 대웅전을 비롯해서 나한전(羅漢殿), 설선당(說禪堂), 칠성각과 산령각등 5개의 당우뿐입니다. 대웅전 안에 모셔진 원효대사의 삿갓은 집에 돌아와서 사진을 통해 보았습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카메라에 담아왔을 것을 그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가 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색창연한 벽면의 불화들이 대웅전이 조선 정조 때 중건되었음을 일러주었지만 나머지 당우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어서 세월이 할퀴고 간 상흔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 절에는 자장암, 혜공암, 원효암과 의상암등의 부속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들 암자의 이름들이 자장, 혜공, 원효와 의상 등 네 대사께서 이 절에 머무신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제껏 남아 있는 남쪽의 원효암과 북쪽의 자장암 중 이번에는 자장암만 들렀습니다. 오어사 경내에서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보자 대웅전 머리 위로 깎아지른 절벽에 세운 자장암이 작게 보였습니다. 오름 길이 엄청 가파른 된비알 길이겠다 했는데 지그재그로 길이 나있어 걸어오를 만 했습니다. 대나무 밭 바로 위 대성전에 이르자 황견 한 마리가 저를 반겼습니다. 이 높은 곳에까지 비포장도로가 나있어 차로 올라온 분들도 있었습니다. 서울 관악산의 연주암을 연상시키는 절애의 바위 위에 자리한 자장암의 대웅전에 오르자 바로 아래 오어사와 그 앞의 오어지가 한 눈에 들어왔고 왼쪽으로 조금 눈을 돌리자 오어지가 보다 넓게 보였습니다.
지형을 살펴보니 저 아래 저수지가 생기기 전에는 오어사 앞이 지금처럼 물이 가득 차 있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절애의 절벽과 오어사 사이로 계곡이 흘렀을 테고 원효와 혜공이 그 계곡의 널찍한 바위에 앉아 놀다가 변을 보았을 것입니다. 혜공께서 원효에게 말씀하신 한 마디 “汝屎吾魚(여시오어)”를 김원중님은 그의 번역서 “삼국유사”에서 “자네가 눈 똥은 내 물고기다”라고 해석했지만, 고영섭님은 그의 저서 “나는 오늘도 길을 간다 -원효, 한국사상의 새벽”에서 “너는 똥을 누고, 나는 물고기를 누었다”로 다르게 풀이했습니다. 똑 같은 물고기를 먹고 똥을 눈 원효보다 물고기를 그대로 누었다는 혜공을 고영섭 님이 더 높이 평가한 것은 불교에서 제 1계로 여기는 가르침이 바로 불상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혜공은 늘그막에 지금의 오어사인 항사사(恒沙寺)로 옮겨 살았습니다. 그즈음 원효는 혜공을 찾아가 가끔씩은 서로 말장난을 하기도 했지만, 여러 불경의 소(疏)를 지으면서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항상 혜공께 물었다 합니다. 과연 혜공은 원효에 가르침을 준 스승이었습니다.
자장암에서 하산해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 오어사를 떠났습니다.
혜공스님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더 실려 있습니다. 저자이신 일연스님은 ‘권 제4 의해(義解)’편에 혜공스님에 관한 글을 “혜숙과 혜공이 여러 모습을 나타내다(二惠同塵)”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적어놓았습니다. 승려 혜공(惠空)은 천진공의 집에서 품을 파는 노파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종기를 터뜨려 천진공의 생명을 구한 혜공은 신령스럽고 기이함이 드러나자 승려가 됩니다. 만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춤을 추고 종종 절의 우물에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는 등 기행을 보인 혜공은 늙어 옮긴 이 절에서 원효대사를 만나 ‘오어(吾魚)’의 일화를 남깁니다. 죽을 때는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입적하는 등 신비스런 자취를 많이 남긴 혜공스님이 일찍이 후진의 학승 승조(僧肇)가 지은 ‘조론(肇論)’을 보고서 “이것은 내가 예전에 지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다 합니다. 일연스님은 이래서 혜공스님이 승조의 후신임을 알았다고 ‘二惠同塵’ 장(章)에다 적어놓아았습니다.
동행한 원효가 당나라 행을 포기해 혼자 당에 가서 수행한 분은 의상입니다. 원효봉 있는 산에 의상봉이 없는 산이 거의 없고, 의상암 있는 절에 원효암이 없는 절을 찾아보기 쉽지 않을 정도로 원효와 의상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보기 드문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상께서 화엄사상을 널리 알리셨다면 원효께서는 화정 사상을 널리 퍼트리셨습니다. 아무래도 원효대사가 의상대사보다 중생들에 보다 가까이 하신 것은 혜공 스님의 가르침 덕분일 것입니다.
일연스님은 혜공스님을 기리는 시를 아래와 같이 덧붙였습니다.
벌판에 쫓아다니며 사냥하고 침상 머리에 누웠으며,
술집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잤네.
짚신 한 짝만 남기고 공중에 떠 어디로 갔는가.
한 쌍의 보배로운 불속의 연 꽃이구나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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