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45.도계서원 탐방기

시인마뇽 2012. 1. 22. 10:03

                                                           도계서원탐방기

 

                                               *탐방일자:2011. 12. 31일(토)

                                               *탐방지   :경북영천소재 도계서원

                                               *동행      :나홀로

 

 

  송강 정철 및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조 3대 가인의 한 분인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 경북 영천의 북안면에 있어, 낙동정맥 종주길에 짬을 내어 들렀습니다. 한 주 전에 다녀간 임고서원보다 더 후미진 시골에 위치해 저 말고 누가 찾아오랴 했는데 한 젊은 부부가 애들을 데리고 이 서원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새해 첫날 일출을 낙동정맥의 연봉에서 맞고자 포항으로 내려가는 길에 영천을 들렀습니다. 영천역에서 하차해 농협 앞 버스 정류장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렸다가 14시30분에 효리로 가는 75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남동쪽으로 내달리는 버스가 임포를 지나자 지난 10월 낙동정맥 종주길에 먼발치서 보았던 만불산의 만불상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허허벌판인 도계서원 입구에서 하차해 왼쪽 찻길을 따라 한 십분 걸었습니다. 원두평저수지 앞에 다다르자 왼쪽 서원과 오른 쪽 묘지 길이 갈렸습니다.

 

 

 

  어디를 먼저 들러도 상관없을 정도로 두 곳 모두 100m 이내의 거리로, 묘지를 먼저 찾았습니다. 10기의 묘가 들어앉은 밀양박씨 묘지의 한 가운데 선생을 모시는 묘가 있어 참배했습니다. 다시 저수지 앞으로 돌아가 50-60m 가량 떨어져 있는 도계서원의 전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저수지방죽 위에 낸 넓은 시멘트 길을 걸어 서원 앞에 이르렀습니다.

 

 

 

  여기 영천의 도계서원(道溪書院)은 노계 박인로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입니다. 언제 지어진 것인지 자료를 찾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지만 얼핏 보아 100년 안팎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계서원(道溪書院)으로 명명된 서원이 여러 곳 있어 특별히 영천의 도계서원이라 밝히지 않으면 노계 박인로 선생을 모시는 서원으로 바로 알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도인 경상북도만 해도 안동과 봉화에 도계서원이 있고, 전라북도 정읍에도 같은 이름의 서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도계와 관련된 이름을 갖고 있는 마을도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꽤 많을 것 같습니다.

 

 

  도계서원은 그 규모가 웬만한 종갓집보다도 작아 조촐했습니다. 도천계곡을 막아 물을 가둔 소류지 원두평저수지도 큰 연못보다 조금 큰 정도여서 아담해보였습니다. 저수지를 둘러싼 산들도 구릉수준의 야산으로 전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서원의 규모에 비해 방죽아래 주차장을 비교적 넓게 잡은 것으로 보아 선생을 뵙고자 이 서원을 찾는 분들이 적지 않은가 봅니다.  이렇게 한적한 시골저수지라면 청둥오리 몇 마리가 물 위에서 노닐만 한대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어 그런 고즈넉한 정경을 카메라에 담아오지 못했습니다.

 

 

  서원 앞 노계가비(蘆溪歌碑)를 훑어보고,  '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의 안내문을 읽어 선생의 일대기를 일별했습니다.  서원 안으로는 문이 잠겨 있어 들어 가지 못하고 까치발을 하고 담벼락너머로 카메라를 들이대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필요한 분들은 연락을 바란다는 종친회의 메시지는 보았으나 혼자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가 번거로울 것 같아 전화를 걸지 못했습니다. 서원 건물은 맨 오른 쪽 화장실을 빼면 두 동입니다. 왼쪽 동은 "팔덕묘(八德廟)"현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당이고, 오른 쪽 동의 아래 쪽은 "도계서원(道溪書院)" 의 현판이 보여 강학당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노계집'을 간행하기 위한 99매의 목판인 '박노계집판목(朴蘆溪集板木)'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고는 오른 쪽 동 위쪽 건물일 것입니다.

 

 

  노계 박인로 선생은 영천이 낳은 조선조 최고의 문인 중의 한 분입니다. 여말에 거유 정몽주를 배출해 충절의 고향으로 이름을 높인 영양(永陽)(지금의 영천시)의 도천리(道川里)(지금의 북안면)에서 선생이 태어난 해는 명종 16년인 1561년입니다. 덕옹(德翁)이 자이고 노계(蘆溪)가 호인 선생은 13살 때 한시를 지을 만큼 총명했다 합니다. 임진왜란을 맞아 곧바로 의병활동을 시작했고, 38세에 경상도 좌병사의 수군이 되어 여러 번 공을 세운 선생은 1599년 무과에 등과했습니다. 수문장선전관을 거쳐 거제도 조라포(助羅浦)에 만호로 부임해 선정을 베푼 선생이 야인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은 40세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전란 중 선생이 지은 작품으로 ‘태평사(太平詞)’가 있습니다. 전투가 한창 치열하던 1598년에 지은 이 노래는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고자 한 것으로, 이 노래의 마지막 구절에서 선생의 평화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천운순환(天運循環)을 아오리다 하느님아.

                 우아방국(佑我邦國) 만세무강(萬歲無疆) 늘이소서

                 당우천지(唐虞天地)에 삼대일월(三代日月) 비추소서.

                 어사만년(於斯萬年)에 병혁(兵革)을 그치소서.

                 경전착정(耕田鑿井)에 격양가(擊壤歌)를 불리소서.

                 우리도 성주(聖主)를 뫼시고 동락태평(同樂太平)하리라

 

 

 

  전란이 끝나고 1605년에 지은 ‘선상탄(船上歎)’에서는 ‘태평사(太平詞)’와는 그 어조가 크게 달라졌다 합니다. 조동일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문학통사”에서 선생께서 왜적을 증오한 나머지 일본에 사람이 살게 된 것부터가 잘못이라 노래했으며 왜적에 대한 근심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 놀잇배를 타고 즐기기를 바라시는 마음을 이 노래에 담았다고 평했습니다.

 

 

 

  선생은 한음 이덕형을 좇아 놀던 1611년에 안빈낙도의 바른 길을 지켜 살겠노라고 신념을 밝힌 가사 '누항사(陋巷詞)'를 지었습니다. 이 가사가 전아한 기품을 지닌 그간의 강호시가와 많이 달랐던 것은 곤궁하고 절박한 당대 양반의 삶을 극명하게 그린 점입니다.

 

 

  선생께서 경전연구와 수신에 힘을 기울이신 것은 향리로 돌아온 40세 이후였다 합니다. 문집 ‘노계집(蘆溪集)’을 지으신 선생께서 후세에 남긴 작품으로 가사 9편과 시조68수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인조20년인 1642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장장 80년을 넘겨 살면서 빼어난 문학작품을 많이 남겨 조선의 3대 가인으로 추앙받기에 이릅니다.

 

  저 혼자서 가끔 읊조리는 시조는 선생의 '조홍시가(早紅枾歌)'입니다. 도계서원의 '노계시비(蘆溪詩碑)에 새겨진 시조도  '조홍시가(早紅枾歌)'였습니다.

 

                           盤中 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柚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노라

 

 

  백두대간이나 긴 긴 정맥 종주를 마치고 나면 이 시조가 유별나게 더 생각납니다. 제게는 몇 백km를 걸어 완주한 것이 반중 조홍감만큼 돌아가신 어르신 들에 올리고 싶은 것입니다. 먼저 간 집사람에도 달려가 들려주고 싶은 소식입니다. 나이 들어 혼자서 그 먼 산길을 다 걸어 정맥 종주를 마친 것만큼, 또 그리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 만큼  부모님을 마음 든든하게 해줄만한 것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저 혼자 남겨두고 먼저 간 집사람에는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제게는 대간이나 정맥완주가 더할 수 없는 반중 조홍감입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