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4
*탐방일자:2012. 2. 22일(수)
*탐방지 :경북 영주소재 부석사(浮石寺)
*동행 :나홀로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찰(宗刹)인 부석사(浮石寺)에서 경북 영주 땅의 명소탐방을 시작했습니다. 해발 819m의 봉화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부석사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어서 벌써부터 탐방을 별러왔습니다. 봉화산을 먼저 오르고 하산 길에 들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러다가 신학기가 시작되면 또 여름방학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만사 제쳐놓고 저 혼자서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소백산하면 영주와 단양이 연상될 만큼 영주시는 경상북도 북부의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도농복합형의 통합시입니다. 조선조에 영천, 풍기, 순흥으로 나뉜 3개 군이 영주로 통합된 것은 1914년의 일입니다. 조선조의 풍수지리학자인 이중환은 그의 저서 “택리지”를 통해 이 지역을 “예안, 안동, 순흥, 영천, 예천 등의 고을은 이백(二白)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여기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라고 예찬했습니다. 이백(二白)이란 소백산과 태백산을, 영천과 예천은 오늘의 영주를 이릅니다. 이중환은 같은 책의 ‘복거총론’에서 사대부가 살만한 곳으로 소백산과 태백산 아래와 황강 상류를 들었습니다.
1968년 여름 향리인 영주의 평은에 계시는 초등학교 은사님을 찾아뵌 후 소백산을 산행하고자 여러 번 영주 땅을 밟았지만, 순전히 관광목적으로 이 땅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기 영주 땅에서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가 창건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사찰의 시대를 끝내고 서원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난숙하게 한 불교와 유교가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영주 땅입니다.
아침8시10분 청량리역을 출발해 풍기로 향했습니다. 청량리역 출발 3시간이 조금 못 지나 먼발치로 눈 덮인 도솔봉이 보이는 풍기역에서 하차했습니다. 1시간가량 시간 여유가 있어 천천히 둘러본 풍기 시가지에서 인삼과 인조견을 취급하는 상점이 즐비한 것을 보고 역시 풍기는 인삼과 인조견의 주생산지이다 했습니다. 풍기를 출발한 버스가 순흥을 거쳐 부석사입구 상가에 도착한 시각은 13시20분경이었습니다. 상가를 돌아 부석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일직선의 시멘트 길로 좌우에 은행나무가 열병하듯 서있었습니다.
신라의 명찰 부석사(浮石寺)는 의상대사(625-702년)가 중국 유학 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대가람을 이룬 천년 고찰입니다. 불교에서 화엄(華嚴)이란 여러 가지 수행을 하고 만덕을 쌓아 덕과를 장엄하게 하는 일을 이르는 것으로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이 화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이 화엄경이고, 이 화엄경을 근본경전으로 하여 연 종파가 화엄종입니다. 부석사는 문무왕16년(676년) 의상이 왕지를 받들어 화엄도량을 창건하고자 지은 여기 부석사가 바로 화엄종의 본산인 것입니다.
일주문을 지났는데도 길 양변에 세속의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어 흔치 않은 풍경이다 했습니다. 천왕문에 못 미쳐 길 왼쪽에 높이 서있는 두 개의 돌기둥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돌기둥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로 쓰인 보물255호의 부석사당간지주로 이 절이 창건된 7세기경에 세워졌다 합니다. 천왕문을 지나 정면의 가파른 계단을 피해 축대 아래 왼쪽 큰 길로 올라가 지은 지가 오래된 것 같지 않은 설법전(說法殿)을 일별했습니다.
1.부석(浮石)
설법전 앞에서 오른 쪽으로 옮겨 부석(浮石)을 먼저 찾은 것은 부석사라는 절 이름이 이 부석에서 유래되어서였습니다. 부석과 관련해 의상을 위해 용이 된 선묘낭자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나라에 유학 중인 의상대사가 머무른 집의 딸인 선묘낭자는 의상을 사모한 나머지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코자 배를 탄 사실을 알고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용이 된 선묘낭자는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해 무사히 귀국토록 합니다.
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고 화엄학을 펴고자 이곳 봉화산 기슭에 절을 지을 때 이곳에 먼저 와 살고 있는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낭자가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묘술을 부려 이교도들을 물리쳐 절 이름을 부석사로 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여느 바윗돌과 다르지 않는 바윗장을 사진 찍은 후 무량수전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무량수전(無量壽殿)
부석사의 무량수전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안동의 봉정사의 극락전에 넘겨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국보18호로 지정된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녀 무량수불로도 불리는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전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량수전에 주목하는 것은 이 건물이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원사에서 발간한 ‘부석사’라는 책자에 따르면, 무량수전에서 가장 유의해 볼 부분으로 평면의 안 허리곡,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수법이라 했습니다. 때마침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스님 한 분을 뵈어 ‘배흘림’이 어떤 것인지 여쭤봤습니다. 제 배처럼 원통형 기둥의 한 가운데가 제 배처럼 볼록 나온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바짝 다가가 스님말씀을 확인했습니다. 불전의 문이 닫혀 있어 아미타여래를 뵙지 못하고 잠시 오른 쪽으로 옮겨 삼층석탑을 카메라에 담은 후 다시 무량수전 앞뜰로 되돌아왔습니다.
산지나 구릉에 짓는 우리나라 절들은 대개가 종심형(縱心型)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어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의 위계가 높아지는 기승전결의 구성을 하도록 배치된다 합니다. 이 절 또한 다르지 않아 기승전결의 구조를 그대로 갖고 있는바, 사찰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공간이 기이고,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승에 해당되며,여기서 축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의 공간이고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으로 결이라고 앞의 책 ‘부석사’에 적혀 있습니다. 기승전결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기가 끝나는 천왕문에서 승과 전을 빙 돌아 건너뛰고 곧바로 결의 부분인 무량수전 앞에 서서 천왕문 너머 부석사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자 방금 지나온 세속의 길이 피안의 길처럼 아주 멀게 느껴졌고, 한편으로 뭔가 형언할 수 없는 평안함과 안온함이 가슴 속에 자리 잡아감도 같이 감지됐습니다.
3.안양루(安養樓)
이번 부석사탐방에서 저지른 큰 실수는 천왕문을 지나 범종각과 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에 이른 것이 아니고 곧바로 무량수전부터 먼저 들른 것입니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고 있는 이절을 탐방하는 동선이 당연 기승전결의 순서를 따랐어야 했는데 천왕문 정면의 돌계단이 너무 가팔라 보여 왼쪽으로 우회하는 바람에 안양문을 거치지 않고 안양루에 올라서느라 천왕문 위부터 범종각까지의 건축물과 안양루에서 무량수전을 잇는 건축물이 약 30도 가량 꺾여 있는 절선축(折線軸) 형식의 공간구조 특징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안양루 아래로 진입할 때 무량수전 앞 뜰 석등이 정확히 중심에 위치하면 대칭구도로 인해 생명력을 잃게 되고 석등이 종국점이 되어 정작 중요한 곳에 무량수전이 잇다는 것을 암시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대원사 간 ‘부석사’의 저자들이 주장입니다.
안양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입니다. 안양루를 얼핏 보자 잠시 서애 유성룡선생을 배향하는 안동의 병산서원에 와 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크기야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사방이 탁 트인 다락의 시원함으로 제 가슴도 같이 트였습니다. 누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되올라간 것은 그리해야 안양루를 제대로 볼 수 있어서였습니다. 안양루가 있는 대석단은 위아래 두 단으로 높이가 4m로 2단으로 나뉘어졌으며, 계단수가 25단이라 합니다. 일직선으로 뻗은 계단을 오르면 2층 다락과 석축사이의 틈으로 중정의 석등 화사석이 살포시 보입니다. 안양루 밑을 지나 석축위로 올라서서 고색창연한 무량수전을 다시 보았습니다. 안양루에서 조망한 가람의 배치는 상당히 짜임새 있어 보였습니다.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먼발치로 소백의 연봉이 한 눈에 잡히는 안양루야말로 부석사 최고의 전망처일 듯싶습니다. 같은 건물에 아래 안양문과 위 안양루의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은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절 밖의 송림을 사진 찍은 후 다시 누하로 내려가 범종각으로 옮겼습니다.
4.범종각(梵鍾閣)
경내에 종각이 둘 있는 것은 여기 부석사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작은 규모의 종각에는 범종만 있고 다른 사물이 보이지 않았으나, 큰 규모의 범종각에는 사물이 다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가람 배치 상 기승전결의 승에 해당하는 범종각은 천왕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정면이 좁고 측면이 더 넓었습니다. 안양루와 더불어 경내 유이(唯二)의 2층누각인 범종각 아래로 낸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 2층 다락과 계단 사이의 틈으로 안양루와 지붕이 반쯤 가려진 무량수전이 눈에 들어온다 하는데 이 또한 공간배치 상의 기승전결의 순서를 따르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범종각 안에 걸려 있는 범종, 목어, 운판과 법고를 사물이라 부릅니다. 사물 중에서 스님들이 가장 먼저 울리는 것은 법고로 산속의 동물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평화를 느낀다 합니다. 이어서 울리는 것은 범종입니다. 큰 나무통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가 손을 놓으면 나무통이 종을 쳐 중후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데, 울림의 시간이 30초를 넘지 않은 것은 범종 바로 아래 종소리를 흡수할 큰 홈을 파놓아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33번의 타종으로 연 이어지는 중후한 울림이 육계33천에 두루 미쳐 이 소리를 듣는 중생 모두가 제도를 받는다 합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운판을 두들겨 소리를 내는 것은 새들을 부르기 위해서이고 매달아놓은 목어를 두들기는 것은 나머지 수생물(水生物) 즉 물고기를 불러내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입니다.
5.기타
무량수전 위에 자리한 선묘각 등 몇 곳은 들러보지 못했습니다. 범종각 위 좌우의 취현암과 응향각을 둘러본 후 아래로 내려가다 3층석탑을 카메라에 실어왔습니다. 무량수전 동쪽의 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범종각 아래 2기의 3층석탑도 다른 곳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합니다. 3층석탑을 지나 높이 쌓아 올린 축대에 낸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천왕문을 빠져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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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년 당에서 급히 귀국한 의상은 당군의 침공소식을 알린 뒤 5년간 유행(遊行)하다가 676년에 오늘의 봉화산인 부석산에 안주하여 화엄종을 포교할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 산에서 의상은 화엄경의 강경(講經)에 주력하고 화엄관을 닦는 청빈한 수행자로 살면서 제자 양성에 힘쓰셨습니다. 지금 보아도 부석사는 화엄사나 해인사 또는 통도사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작습니다. 의상대사의 청빈함에 비춰볼 때 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오늘날의 부석사보다 훨씬 작았으리라는 것이 중론인 것 같습니다. 대형사찰에서 감지되는 오만한 불교권력을 명성에 훨씬 못 미치는 작은 규모의 부석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 부석사에서 의상대사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어 천주교 신자인 저도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명찰탐방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위 글은 김보현/배병선/박도화 세분이 공저한 대원사 간 ‘부석사’에서 많이 인용했습니다.)
<탐방사진>
1)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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