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탐방기
*탐방일자:2012. 5. 4일(금)
*탐방지 :전북익산시 소재 미륵사지
*동행 :나홀로
현존하는 천년 고찰은 거의 다가 신라 때 창건된 절들인 것 같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다보니 패망국인 백제는 그 역사는 물론 사찰들도 후세에 온전하게 전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저 또한 그간 여러 고찰들을 탐방했지만 백제의 절을 따로 찾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며칠 전 큰맘 먹고 백제의 대찰 미륵사가 자리했던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다녀온 미륵사지는 그 규모면에서 신라 경주의 황룡사지나 고구려 평양의 정릉사지에 견줄만한 절터입니다. 신라의 황룡사지는 지난겨울 다시 찾아가보았고, 이번에 백제의 미륵사지를 탐방해, 이제 남은 절터는 평양에 자리한 고구려의 정릉사지뿐입니다.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되지 않는 한 정릉사지는 통일 후로 그 탐방을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산본 집에서 익산의 미륵사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도 5시간이 채 안 걸렸습니다. 거의 두 배가량 멀리 떨어진 경주의 고찰들은 여러 번 가보았으면서 가까운 미륵사지를 이제야 비로소 탐방한 것은 미륵사가 역사적관심권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백제가 세운 절이어서였습니다. 익산역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금마 가는 버스를 타고 익산공설운동장과 금마를 지나 미륵사지 입구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3시 즈음이었습니다. 꽤 넓게 보이는 미륵사지 안에 햇빛을 가릴 만한 곳이라곤 연못가 수양버들나무 아래뿐이어서 목덜미를 내리쬐는 5월의 햇볕이 따갑게 느껴졌습니다.
미륵사지 정문이 닫혀 있어 그 왼쪽 유물전시관으로 통하는 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문 쪽으로 조금 옮겨 두 곳의 연못 사이로 낸 넓은 도로를 따라 절터로 접근했습니다. 오른 쪽 못가 나무 그늘에서 연못을 사진 찍은 후 바로 앞 9층 석탑 쪽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석탑에서 북쪽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해발430m의 미륵산으로 그 아래 미륵사를 보듬기에 충분할 만큼 높아보였습니다. 얼핏 보아 미륵사지가 황룡사지보다 좁게 보이는 것은 미륵사지는 높은 산에 붙어 있는데, 황룡사지는 산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에 자리하고 있어서일 것입니다. 여기 9층석탑은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아직 세월의 때가 끼지 않아 화강암의 회색보다 백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런 석탑에 미륵사의 창건역사를 물어본들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을 간추려 옮겨놓습니다.
서동의 어머니는 과부로 부여 남쪽 연못가에 살았는데 어느 날 연못의 용과 잠자리를 하여 아들을 낳습니다. 이 아들이 마를 캐서 팔아 살림을 꾸려갑니다. ‘마를 파는 아이’라는 뜻으로 불린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 아이들에 마를 나누어주며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두고 서동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라는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신라의 진평왕은 이 노래를 들은 벼슬아치들의 등살에 못 이겨 공주를 먼 곳으로 보냈으며, 왕후는 공주에 순금 한 말을 줍니다. 시위로 뒤 따른 서동이 누구인지 모르고 통정한 공주는 백제 땅으로 와 순금을 서동에 내놓자 서동은 대수롭지 않게 “내가 어릴 적부터 마를 캐면서 이 따위 것을 진흙처럼 쌓아놓았소”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 공주가 그 금을 부모궁전에 실어 나르자고 합니다. 이에 서동은 금을 가져다 언덕처럼 쌓아놓고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의 사자사로 지명법사를 찾아가 신라의 궁전으로 실어 나르는 방법을 묻습니다. 지명은 신통력으로 금을 하룻밤에 모두 날라주고, 이를 받은 진평왕은 서동을 존경하여 안부를 묻는 답신을 보냅니다. 이 덕분에 서동은 명성을 얻어 왕위에 오릅니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도착하는데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경의를 표합니다. 왕비의 간청을 받은 무왕은 절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듭니다. 미륵법상 세 개와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로 했는데 진평왕은 여러 공인을 보내 이 절을 짓는데 도와줍니다.
2009년 1월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리호와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봉안기에 백제의 귀족 사탁적덕의 딸이 당시 왕후로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합니다. 이는 무왕이 왕비 선화공주의 간청을 받아 미륵사를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내용과 다른 것이어서 다분히 논쟁의 소지가 있습니다. 백제의 군사권과 외교권이 위축될 대로 위축된 서력600년에 무왕이 등장합니다. 정략에 능한 무왕은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백제의 새로운 이미지를 연출했다는 것이 재야사학자 이이화님의 시각입니다. 그는 서동설화의 유행이 무왕이 귀족의 발호를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면서,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라 했습니다. “불국토를 꿈꾼 그들”을 쓴 한양대의 정민교수는 선화공주 대신 후비인 사탁왕후의 이름이 새겨진 것은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 전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라면서, 선화공주는 분명 무왕과 결혼했으며 또 마륵사 창건을 추진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창건 당시 동양 최대의 가람이었던 미륵사가 소실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입니다. 이번에 미륵사에서 만나 본 것은 드넓은 절터와 최근에 세워졌을 9층 석탑, 당간지주, 해체된 석탑과 가설덧집, 그리고 절 터 앞 두 곳의 연못이었습니다. 몇 년 만 미리 와봤어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사진 속의 석탑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와서 보니 석탑은 전부 해체되어 복원을 기다리고 있고 꽤 높은 가설덧집이 서 있었습니다. 동원의 석탑으로 복원됐을 깔끔한 9층 석탑을 배경으로 해 당간지주를 사진 찍었습니다. 옛 것 그대로여서 백제의 비운을 눈물로 지켜봤을 당간지주를 만져본 후 넓은 공터를 휘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석탑을 만나보고자 가설덧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사진 속의 석탑은 모두 해체되어 복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륵사는 본래 탑과 금당을 갖춘 사찰 3개를 나란히 배치한 절이라 합니다. 탑과 금당을 기본 단위로 세 곳에 배치된 개개구역은 독자적인 사찰형태를 보이면서 동시에 회랑에 의하여 서로 이어지며 강당을 공유했습니다. 양쪽의 동원이나 서원보다 약간 높은 곳에 더 넓게 자리한 중원에는 목탑이 들어섰고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이 세워진 점이 경주 황룡사의 9층 목탑과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 다른 것은 황룡사에는 금당과 탑이 하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와 황룡사가 같은 점은 두 절 모두 왕권강화를 과시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무왕이 동양최대의 가람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미륵신앙을 통하여 민중들의 일체감을 다지고 무왕 자신이 미륵의 도움을 받는 다는 암시를 풍겨 절대왕권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 이이화님의 진단입니다.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운 것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진흥왕이 14년이라는 공력을 들여 서력566년에 황룡사를 개찰한 것도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지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대 동양에서 황룡은 왕을 상징한데서도 진흥왕의 뜻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라는 황룡사를 창건한 진흥왕이 한강 일대와 죽령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진데 반해 백제는 무왕이 미륵신앙의 힘을 빌려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지키고자 애썼으나 이미 국운이 기울어 자식인 의자왕 때에 들어서 나당연합군에 패해 나라를 잃습니다.
미륵사지를 둘러본 후 옆자리의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전시된 미륵사 옛 가람의 모형을 보고 복원 후의 미륵사를 그려보았습니다. 과연 웅장하고 장대해 보였습니다. 저런 규모의 절이라면 소실 후 곧바로 복원을 서두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후 재정이 고갈되어 나라가 휘청할 정도였다는데, 이 절 마자 조선조에서 복원했다면 가렴주구가 너무 뻔해 보여서입니다.
미륵사지를 둘러보고 나름 생각한 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의 ‘미륵’과 황룡사의 ‘황룡’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들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만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돕지 않았음이 분명한 것이, 그렇지 않았다면 미륵이 백제의 멸망을 내버려둘 리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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