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46.경주명소 탐방기2(황룡사지 등)

시인마뇽 2012. 1. 30. 23:53

                                                          경주명소 탐방기2

 

                                       *탐방일자:2012. 1. 8일(일)

                                       *탐방지   :경북경주소재 분황사, 황룡사지, 임해전지,

                                                     월성, 계림, 첨성대

                                       *동행      :나홀로

 

 

 

  실로 오랜만에 수학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964년 중학교 3학년 때 단체로 다녀온 경주를 이번에는 저 혼자 찾아가 유적지 몇 곳을 들렀습니다. 아직도 둘러볼 곳이 많아 서 너 번은 더 내려가야겠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경주를 찾아가 오래 잊고 지낸 신라의 유적지를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낙동정맥 종주 덕분입니다.

 

 

 

   방송대 국문과에 입학해 삼국유사를 심도 깊게 공부하면서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고 싶은 욕망이 점점 커갔습니다.  며칠씩 짬을 내 수학여행 길에 오른 다는 것이 쉽지 않아 경주탐방계획을 차일피일 미뤄오다가 낙동정맥 종주 덕분에 실천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부산의 다대포를 출발해 태백산의 천의봉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걷는 낙동정맥을 종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6월이었습니다. 부산을 떠나 양산과 울산을 거쳐 경주의 산줄기를 지나면서 이때다 싶어 하루 미리 내려가 가보고 싶은 곳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향가 모죽지랑가에 나오는 부산성의 부산과 김유신 전설이 전해지는 단석산은 종주산행 길에 올랐습니다. 지난 11월에는 한나절 시간을 내 문무대왕수중릉, 이견대와 감은사지를 둘러보았고, 그 다음에 달 박대통령의 근대화열정이 담긴 보문호를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작심하고 분황사, 황룡사지, 임해전지, 월성, 계림과 첨성대를 차례로 들러 꼼꼼히 메모하고 사진도 찍었습니다.

 

 

  서라벌은 신라의 수도 경주의 옛 이름입니다. 통일신라 때는 서라벌이 장안,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풀과 더불어 세계 4대도시의 하나였습니다. 서라벌에서는 화재를 막고 도시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숯으로 취사를 해 밥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도시 전체가 정사각형의 36방으로 이루어졌고, 1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다시 나누어졌습니다. 방을 가르는 구획에 폭13m쯤 되는 도로를 만들었고, 도로 양쪽에 돌로 배수로를 냈으며, 돌담장을 세워 배수로와 주거지역을 갈랐다 하니 서라벌은 사전에 철저히 계획된 도시임에 틀림없습니다. 서라벌에 17만 9천여 호의 가호에 약 90만명의 인구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삼국통일 후 신라는 통일 전보다 인구와 재정수입이 3배로 늘어난 덕분이라 합니다.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해 신라가 멸망한 것이 935년의 일이니 신라왕국은 무려 천년 가까이 존속된 것입니다. 신라는 천년동안 수도를 경주에서 한 번도 옮기지 않았습니다. 한 왕국이 천년이나 간 것도 역사적으로 아주 드문 사례일텐데 그 긴 세월동안 수도를 한 번도 옮기지 않은 나라가 신라 말고 어떤 나라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앞으로 경주를 찾고 또 찾아도 좋은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1)분황사(芬皇寺)

 

 

  경주역을 출발해 분황사로 가는데 20분 남짓 걸렸습니다. 택시를 타도 기본요금이면 충분한 것을 수학여행 기분을 한껏 내고 싶어 혼자서 걸어갔습니다.

 

 

   평지에 위치한 분황사가 산속에 자리한 여느 고찰보다 절터가 훨씬 좁았습니다. 경내로 들어서자 한 가운데 자리한 분황사석탑이 눈을 끌었습니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쌓아 올린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입니다. 언뜻 보아 여주 신륵사의 전탑을 닮았다 했는데 이 탑은 벽돌로 만든 전탑이 아니고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었습니다. 위 사진처럼 제모습을 많이 잃은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해 다시 쌓았다 하는데 해설사분의 말씀에 따르면 완벽하게 복원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래 7층이거나  9층이던 것이 지금은 세층만 남아 있는데 1층 몸체 돌의 사방에 쌍여닫이 돌문이 있고 문마다 양쪽으로 돋을새김의 인왕상을 세웠으며 기단 위에 네 마리의 돌사자를 배치했습니다.

 

 

  원효대사께서 이 절에서 머물면서 도를 닦았다하여 원효성지로 소개된 이 절에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석대가 있습니다. 옆 자리 분황사석탑을 1차로 해체 수리하신 분으로 알려진 고려의 숙종임금께서 그동안 홀대(?)받은 원효대사를 동방성인으로 추앙하고자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이 절에 비를 세웠다는데 지금은 비석은 사라지고 추사 김정호의 친필이 음각된 비대만 남아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이 절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755년 이 절의 약사여래불 동상이 주조됐는데 그 무게가 30만6천7백근이라 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향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의 배경설화입니다. 경덕왕 때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아이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이 아이를 안고 분황사 왼쪽 전각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千手大悲)앞으로 가 아이에게 노래를 지어 빌게 했더니 눈이 떠졌다 합니다. 이때 부른 노래가 아래의 향가 '도천수관음가'였습니다.

 

 

 

     무릎 꿇으며

     두 손바닥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축원의 말씀 올리나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졌으니

     하나를 내놓아 하나를 덜기를

     눈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주어 고쳐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끼쳐주시면

     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나이까

 

 

 

  부처님의 힘을 빌린 어미의 모정이 자식의 눈을 뜨게 했음을 노래한 것이 신라의 향가 ‘도천수관음가’입니다. 이 노래는 조선조에 들어서 되살아났으니, 용왕의 도움을 받은 딸 자식의  효심이 아비의 눈을 뜨게 한다는 내용의 판소리 ‘심청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2)황룡사지(黃龍寺址)

 

  신라 진흥왕 때  왕궁으로 지으려던 터에서 황룡이 나타나 왕궁 대신 지은 절이 황룡사입니다. 진흥왕이 서력 569년담장을 둘러쌓아  공사를 시작한 황룡사가 완공되기까지 무려 17년이 걸렸습니다. 대웅전만 280평이고 절터는 거의 2만5천평에 이르는 황룡사는 규모면에서 고구려 평양의  정릉사, 백제 익산의 미륵사와 더불어 삼국시대 3대사찰로 꼽히는 대찰이었습니다. 늪을 메워 조성한 그 넓은 절터에 세운 황룡사 건축물은 전소되고 남아 전하는 것은 드넓은 사지(寺址)와 금당지의 주춧돌 등입니다.

 

  황룡사는  남북을 중심축으로 남쪽부터 중문과 탑과 금당과 강당을 차례로 배치했습니다. 중문에서 시작되는 사방의 건물들은 네모난 회랑으로 둘러싸였고,  절안의 모든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되어 비 한방울 안 맞고 돌아다닐 수 있었는데, 이러한 건축양식은 훗날 문무왕이 안압지의 임해전을 지을 때 그대로 사용되었다 합니다. 신라의 화성 솔거가 그려놓은 늙은 소나무에 까마귀와 참새들이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건물이 바로 이 황룡사입니다.

 

  황룡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9층탑입니다.  중국으로 유학간 자장법사는 어느날 문수보살을 잠깐 뵙고 중국의 태화지 둑을 건너다 신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장법사는 이 신령한 사람으로부터 신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니 빨리 돌아가 9층탑을 세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둘러 귀국한 자장법사는 선덕여왕에 진언해 80m높이의 황룡사 9층탑을 세웠습니다. 당시는 석탑을 쌓기 전이어서 백제의 공장 아비지(阿非知)를 모셔다 목탑을 세운 것입니다. 목탑 다음의 건축양식이 모전석탑이고 그 뒤를 이은 것이 석탑입니다. 황룡사와 함께 신라왕실의 2대 원찰(願刹)의 하나인 바로 옆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안산암으로 만들어져 오늘까지 전해지는데, 목탑의 황룡사9층탑은 몽고난 때 몽땅 타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황룡사에 모신 두보살을 주조하는데 철이 1만2천근, 황금이 1만136푼이 들어갔으며,  무게가 3만5천7근이고 황금이 1만198푼이 들어간 동축사의 장륙존상도 황룡사로 옮겼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신라에는 외침을 막아주는 세가지 보물 즉,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9층탑,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고구려 왕이 신라침략의 야욕을 접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적혀 있습니다. 세가지 보물 중 두 개를 간직했던 황룡사는 참으로 보배로운 사찰이었을 것입니다.

 

 

  신라의 24대 진흥왕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의 하나는 한강유역을 차지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고찰해보면 한반도 통일은 한강을 점령한 나라가 이룩했습니다. 중원을 점하고자 벌인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만도 엄청 벅찼을 진흥왕이 황룡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을 이용해 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진흥왕이 환생해 몽골의 침입을 받고 전소된 여기 황룡사의 절터를 돌아보신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이땅의 백성들에 나라가 힘이 약하면 절도 잃고 패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명심하라고 한 말씀 하실 것 같아 더 이상 머무르기가 송구스러웠습니다. 

 

 

3)임해전지(臨海殿址)

 

  철로를 건너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경주박물관을 둘러볼 생각으로 그 쪽으로 가다가 궁궐 같은 큰 건물이 보여  지나가는 한 사람에 물었더니 안압지가 들어선 임해전지라 했습니다. 박물관은 하루 날잡아 여유 있게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아 행선지를 그 곳으로 바꿨습니다.

 

  당과의 전쟁에 정신이 없었을 문무왕이 여기에 임해전 등 왕궁을 건축한 것은 중원확보 전쟁의 어려움 속에 진흥왕이 황룡사 건축을 시작한 것에 비견될 만합니다. 황룡사 건축도 큰 역사이었겠지만 임해전등 왕궁과  안압지라는 큰 연못을 인공적으로 조성하고 섬을 만든 것 또한 만만찮은 공사였을 것입니다. 남달리 검소한 문무왕이 왕궁인 월성에서 가까운 이곳에 임해전과 안압지를 만든 것은 삼국통일의 성과를 과시하여 왕실의 위엄을 보이고 외침으로부터 왕경(王京)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하니, 그 뜻이 진흥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닷가에 있는 전각’ 임해전(臨海殿) 앞에  ‘기러기와 오리처럼 사이좋게 지냄'을 뜻하는 안압지(雁鴨池)를  만든 것은 문무왕14년인 674년의 일입니다. 평지를 파서 물을 끌어대고 돌을 쌓아 세 개의 섬을 만들어 놓은 안압지는 인공연못으로 남쪽의 높은 언덕에서 물을 받았습니다. 굴곡진 연못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북쪽으로 빠져 나갔으며, 장마나 가뭄때도 일정하게 수량이 유지됐다 합니다.  삼신산을 뜻하는 3개의 돌섬을 들어 앉힌 안압지는 전체적으로 하늘과 거북을 본떠 만들었다 합니다. 서쪽을 중심으로 임해전 등 전각을 둘러세우고 이들을 회랑으로 연결한 것은 황룡사의 회랑양식을 본 뜬 것입니다.

 

  천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본 임해전이  경복궁의 경회루를 연상시킨 것은 안압지라는 연못때문이었습니다. 옛날의 회랑은 없어졌지만 , 임해전 건물 안에 회랑으로 연결된 전각을 미니아춰로 만들어 전시해 이런 것이구나 했습니다. 문무왕은 이곳에 양궁과 동궁을 창건하고 가까운 곳에 남산성을 수축해 왕실의 권위를 내보였습니다만, 더 이상의 축성을 멈춘 것은 백성을 보살펴야 한다는 의상대사의 간언을 받아들여서라 합니다. 임해전과 두 개의 전각, 그리고 그 옆의 안압지를 둘러보느라 임해전지를 한 바퀴 빙돌았습니다.

 

  문무왕이 통일을 이루고, 또 당군을 내쫒고 이곳에서 연회를 베푼 것은 분명 축하연이었습니다. 안압지의의 영광의 역사는 경순왕에 이르러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신라를 바치며 왕건에 환영잔치를 베푼 곳이 임해전으로, 경순왕은 안압지를 바라보며 ''이 작은 나라가 천운을 얻지 못하여 견훤의 핍박을 받으니 애통해한들 어쩌겠소이까?'' 하고 한탄했다 합니다.  

 

 

  2만평이 넘는 궁터를 둘러보고 신라왕족과 귀족들의 호사스러움이 어느 정도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은 이 좋은 곳을 두고 다른 곳으로 천도하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상도 동쪽 한 구석에 자리한 경주를 수도로 고집하기에는 통일신라의 땅이 엄청 넓었지만 신라 땅 한 가운데로 천도를 못한 것은  안압지로 상징되는 귀족문화가 신라를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신문왕이 달구벌로 옮기려는 천도계획을 접은 것도 경주에 안주하기를 원하는 왕족과 귀족들의 완강한 반대때문이었습니다.

 

 

 

4)월성(月城)

 

 

  경주 월성은 경주역에서 불국사로 이어지는 7번 도로를 가운데 두고 동쪽의 임해전지 건너 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차도를 건너 나지막한 둔덕을 넘어 월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성이 남아 있지 않아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이 정확히 맞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신라의 5대 파사왕이 이곳에 토성을 쌓은 것은 서력101년의 일입니다. 성안으로 왕궁을  옮겨 재성(在城)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성은 성의 모양을 두고 반월성 또는 신월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땅은 원래 호공(瓠公)의 땅이었는데 석탈해가 사술을 부려 탈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석탈해가 신라의 4대 왕이었고, 이 땅에 월성을 쌓은 파사왕은 석탈해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신라에 철기문화를 널리 퍼뜨린 석탈해에 이 땅을 탈취당한 호공은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협조했고 왕위에 오른 석탈해는 호공을 대보로 임명하고 손을 맞잡아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그때도  대타협의 정치는 미덕으로 받아들여 진 것 같습니다.

 

  시계방향으로 월성을 한 바퀴 빙돌았습니다. 그 거리가 2.5km라 하는데 사진도 찍고 여기 저기를 둘러보느라 1시간이 다 걸렸습니다.  옮겨온 왕궁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성터에 더러 축성에 쓰였을지도 모를 돌들만 흩어져 있었습니다. 월성 한 가운데에 축구장을 만들어도 될만한 넓은 공터가 있고, 성터를 따라 길이 잘 나있어 산책을 즐기는 분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 성 남쪽으로 흘러 자연적인 요새역할을 단단히 해냈을 남천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동, 서, 북쪽으로는 성밖으로 도랑인 해자(垓字)를 파 왕궁을 보호했다 합니다.

 

  당시 신라의 축성술은 고구려에 비해 한참 뒤쳐졌습니다. 그래서 토성으로 쌓을 수 밖에 없었던 월성이 왕궁의 성곽으로는 한참 못미쳤기에 진평왕은 591년 이 성의 남쪽에 고구려의 석성을 본떠  남산성을 쌓았고 동쪽 언덕의 명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했습니다.

 

  조선조 때 만든 석빙고가 자리한 곳도 월성입니다. 석빙고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것 처럼  두 나무의 밑등이 착 달라붙어 있어 마치 이 땅을 뺐고 빼앗긴 석털해와 호공이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상대당과 공존을 못하고 죽기살기로 싸움질만 하는 우라니라 정치인들이 한 번 내려와 이 나무들을 보고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계림(鷄林)

 

 

  월성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면 몇 분 안걸어 계림에 닿습니다. 계림은 경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곳입니다. 여기 숲에서 닭울음소리가 나 가서 보니 황금궤가 나무에 걸려 있었다 합니다. 김알지가 그 황금궤 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김알지의 탄생설화입니다. 이 설화에 따르면 박혁거세가 기원전 69년에 태어났고 석탈해가 기원후 5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김알지는 맨 마지막으로 서력 60년에 이 계림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나뭇 잎이 다 떨어져 숲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습니다. 과연 이런 곳에서 김알지가 태어났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사방이 훤해 신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숲 답게 나무들은 모두 고목이었고 거목도 많이 보였습니다. 소나무도 보였고 주 수종이 참나무와 느티나무 같은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 숲에서 김알지가 태어났다 하여 옛 일본에서는 신라를 백국(白國)으로 불렀다는 기록도 있고보면 자작나무일지도 모릅니다. 김알지 탄생을 기록한 비석이 안치된 비각과 향가 '찬기파랑가'가 새겨진 탑이 숲안에 세워졌는데 찬기파랑가와 계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비문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서라벌이 신라가 망한 뒤 붙여진 경주보다 먼저 쓰인 수도이름이듯이, 계림국(鷄林國)은 신라보다 먼저 불린 나라이름입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나 계림국이라 했는데 일설에는 탈해왕 때 김알지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나라이름으로도 쓰인 경주의 계림(鷄林)이 중국의 계림(桂林)에 밀려 이곳을 찾는 이들이 줄어들지는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포탈의 검색창에 '계림'을 치면 온통 중국의 게림에 관한 글만 떠서 하는 말입니다. 경치를 보려면 중국의 계림도 괜찮겠지만, 역사를 보려면 경주의 계림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6)첨성대(瞻星臺)

 

 

  이번 수학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계림에서 멀지 않은 첨성대입니다. 7세기 초엽 신라를 통치한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첨성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입니다. 제가 감탄한 것은 천문관측용 건물을 이리도 아름답게 만들은 신라인들의 예술적 감각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구도가 단순하면서도 선의 아름다움이 살아나는  아담한 규모의  첨성대를 본 뜬 미니아춰를 만들어 집에 두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2중의 기단위에 30cm 높이의 돌을 쌓아 올렸고 맨 꼭대기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 돌을 짜 올렸습니다. 높이가 9.1m, 밑 지름이 4.9m, 윗지름이 2.9m 크기의 첨성대에 1m길이의 정사각형 창문이 중간에 정남쪽으로 나 있으며, 전체적으로 위쪽이 잘룩한 병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쌓아 올린 돌은 맨 위의 정자석(井字석)까지 합해 28단으로 동양식 기본 별자리와 일치합니다. 중앙의 창문까지 12단, 창문에서 윗부분까지 또 12단이고 전체 돌의 숫자가 365개여서 1년의 12달, 24절후와 365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문을 정남향에 낸 것은 해가 비칠 때 춘분, 하지, 추분과 동지를 관찰하기 위해서라니 이정도면 천문대 기능을 충분히 해냈을 것입니다.

 

  맨 위의 지름이 2.85m 밖에 안되어 혼천의를 놓고 관찰하기에 너무 좁다는 것이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고 제단이라 주장하는 분들이 제시하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첨성대가 편히 관찰할 만큼 크지 않다 해서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돌의 숫자, 12단, 24단, 28단의 더 중요한 증거를 과소평가한데서 비롯됐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제라도 우리 천문학자들이 첨성대에 들어가 천문을 관측해 그 결과를 내놓는다면 불필요한 논쟁은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해가 막 넘어가고 땅거미가 내려앉았습니다. 천문대가 가동할 시간인데 역사적 유물로 남아 있는 첨성대는 너무 조용해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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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에서 경주역까지 걸어가 4시간에 걸친 수학여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경주는 가는 곳마다 유적지가 있어 과연 천년고도 다웠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 했습니다. 이번 수학여행으로 이제 신라인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에 내려오면 본격적인 대화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관련문헌들을 뒤적이며 이 글을 작성하는 것도 보다 성실하고 내실 있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신라의 천년 역사를 만든 것은 신라인지만, 그들의 역사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일정 부분 제 몫이기에 앞으로 서너번은 경주를 찾고자 합니다.

 

 

 

 

 

                                                            <탐방사진>

 

1)경주역-분황사  

 

 

 

 

2)분황사

 

 

 

 

 

 

 

 

 

 

 

3)황룡사지

 

 

 

 

 

 

 

 

 

 

 

 

 

 

 

 

 

4)안압지

 

 

 

 

 

 

 

 

 

 

 

 

  

 

 

5)경주 월성 

 

 

 

 

 

 

 

 

 

 

 

 

 

 

 

 

 

 

6)경주 월성

 

 

 

 

 

 

 

7)신라왕릉

 

 

 

 

 

 

 

 

 

8)첨성대

 

 

 

 

 

 

 

 9)포항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