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8경 탐방기
*탐방일자:2012. 7. 17일-18일(화-수)
*탐방지 :경북울진 월송정/망양정, 강원삼척 죽서루, 강릉 경포대
양양 낙산사, 고성 청간정
*동행 :울산대 이규성교수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은 동해와 내륙을 동서로 가르는 거대한 산줄기입니다. 지난 해 6월 부산의 몰운대에서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낸 것은 종주 산행을 마친 후 가능한 한 빨리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탐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이란 백두대간 및 낙동정맥이 동해와 손잡고 빚어낸 동해안의 명승지로, 북한 땅 통진의 총석정, 해금강의 삼일포와 남한 땅 고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을 이릅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이 자리한 모든 곳이 원래는 강원도 땅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되는 바람에 망양정과 월송정이 강원도에서 떨어져나갔다 합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은 가히 수많은 “지역 8경”의 전범이라 할 만합니다. 소설가 박태순님은 그의 저서 “나의 국토 나의 사랑”에서 “대체로 관동8경은 고려 중후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조성된 유교산수라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유교산수란 신라시대의 풍류산수를 유교선비문화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수많은 지자체가 지역 명승지를 굳이 "OO 8경"으로 명명한 것은 어느 지역이든 가볼만 한 곳으로 8경만한 곳이 따로 없음을 관동8경의 예를 들어 널리 알리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관동8경을 다 둘러보고도 저는 정작 누가 언제 관동8경이라 이름 지었는지 모르고 있어 “관동8경 탐방기”를 남기기가 영 민망하고 쑥스럽습니다. 박태순님의 말씀을 따른다 하더라도 16세기를 살았던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관동8경”이라는 문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관동8경이라는 이름이 널리 불린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7세기 이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팔(八)’은 불교에서 빌려온 숫자인 것 같습니다. 팔고(八苦), 팔관회(八關會), 팔대야차(八大夜叉), 팔대용왕(八大龍王), 팔대지옥(八大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팔열지옥(八熱地獄), 팔만대장경(八萬大臟經), 팔복전(八福田), 팔방천(八方天), 팔부중(八部衆), 팔상성도(八相成道), 팔재(八災), 팔정도(八正道) 등과 같이 ‘팔자(八字)로 시작되는 불교단어들이 꽤 많습니다. 불교에서 팔자(八字)는 전부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고통은 다 팔고(八苦)에 속하고, 재앙도 팔재(八災)외에는 더 이상 없으며, 팔만대장경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불경을 모은 것이기에 그리 불릴 것입니다. 이 땅 어느 곳에서도 ‘**七景’이나 ‘**九景’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완성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숫자도 8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제와 그제 이틀간 고교동문 이규성교수와 함께 관동팔경(關東八景)을 탐방했습니다. 낙동종맥 종주를 마치지 못했는데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탐방 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울진의 평해에 병원을 차린 고교동문 이종규박사가 저와 울산대의 이규성교수를 초청해 자기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주고 이튿날 승용차를 내 준 덕분입니다. 1968년 여름 대학입학 후 처음으로 방학을 맞아 이 교수 함께 동해안을 여행하는 중 양양의 낙산사와 강릉의 경포대, 그리고 삼척의 죽서루를 들른 바가 있고, 2004년 가을 패션업계 사장 몇 분들과 함께 금강산으로 관광 갔을 때 삼일포를 다녀왔으니 관동팔경의 반은 다녀온 셈입니다. 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 그리고 고성의 청간정을 이번에 마저 들러, 남은 곳은 북한 땅 통진의 총석정뿐인데 일련의 대남도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아무래도 통일 후에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1경 월송정(越松亭)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월송정은 경북울진의 평해에서 승용차로 10분 안팎의 거리에 있습니다. 진료를 마치는 저녁6시까지 한 시간이 남아 있어 이 원장이 내준 차로 월송정을 미리 다녀왔습니다. 이 병원의 간호원 한분이 운전대를 잡아 곧 바로 찾아간 월송정은 바닷가 둔덕에 자리 잡고 있어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이 개었더라도 이곳은 동해안이라서 낙조를 관망할 수 없었겠지만 바다만은 시원스레 잘 보였을 텐데 날이 잔뜩 흐려 조금은 답답했습니다. 1969년 겨울 이곳 울진으로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일이 있어서인지 군부대에서 바닷가에 철조망을 쳐 놓았습니다만, 제 고향 파주의 휴전선처럼 긴장감이 감돌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의 월(越)나라에서 소나무를 가져다 심었다는 월송정(越松亭)은 이름 그대로 송림을 배후지로 삼고 있는 2층의 누각입니다. 정자에 올라 현액을 돌아보는 중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의 시가 걸려 있어 반가웠습니다. 고려조 충숙왕 17년 안축이 강원도 존무사로 있다가 돌아가는 길에 강원도의 경승을 보고 지은 노래가 경기체가 ‘관동별곡’입니다. 오십천, 죽서루, 서촌팔경, 취운정 등과 같이 ‘관동별곡’에 딱 한마디 적혀 있는 월송정에서 이 정자를 노래한 8행의 긴 시(詩)를 보자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가 끄떡여졌습니다. ‘머리털 반백되어/ 예 놀던 곳 다시 오니/ 넓은 바다 푸른 솔은/ 옛 모습 지녔고녀’로 시를 끝맺은 안축보다 훨씬 앞서 신라의 화랑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소원을 빌고자 월송정을 다녀갔다 합니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숭덕사(崇德祀)를 들렀습니다. 숭덕사는 이 지방의 명망가였을 한학사 황공(黃公)을 모시는 사당인 것 같은데 문이 잠겨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당 밖에 정원으로 꾸며 놓은 연못가를 둘러보면서 참으로 명당자리이다 한 것은 월송정을 찾아오는 탐방객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아서입니다.
*제2경 망양정(望洋亭)
영덕 땅 후포의 바닷가 이 원장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일어나 평해의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친 후 이 원장이 내준 차로 관동팔경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동행한 이규성 교수가 차를 몰고 저는 간간히 지도를 보고 길안내를 했습니다. 동해안에 바짝 붙어 나있는 917번 지방도를 따라 북상해 다다른 망양정은 왕피천이 동해와 만나는 하구인 망양동에 자리했습니다. 굵은 비가 내려 공원주차장에서 망양정에 오르는 길이 다소 음울한 기분이었는데 정자에 올라 송강 정철의 가사 ‘관동별곡’을 보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송강 정철이 선조12년인 1579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던 봄에 금강산을 구경하고 해금강을 거쳐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과정을 기행가사로 지어 남긴 노래가 바로 ‘관동별곡’입니다. 앞서 소개한 안축은 그의 ‘관동별곡’을 경기체가라는 그릇에 담았다면 정철은 가사라는 새 용기에 담아냈다는 것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이 유달리 관심을 끄는 것은 망양정에 올라 고래가 물을 뿜어 올리는 장관을 목격했다는 부분입니다.
하늘 끝을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올라보니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
잔뜩 노한 고래 그 누가 놀랬기에
불거니 뿜거니 어지럽게 구는가.
은빛 파도 꺾어내어 온 세상에 내리듯
오월 하늘에 백설은 무슨 일인가.
조선의 숙종임금은 관동팔경 중 망양정의 경치가 최고라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합니다. 숙종에 이어 정조도 어제시를 하사한 것은 혹시 두 임금보다 한 두 세기를 앞서 살다간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읽어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리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망양정을 오른 김에 십 수분을 더 걸어 망양정공원에 설치한 울진대종을 보았습니다. 7톤이 조금 넘는 대종에 새겨진 시구(詩句)처럼 ‘해와 달 수레로 실어 나르는 천지가 열려 광대무변한 동해와 마주’ 서는 이곳에 정월 초하룻날 새벽같이 올라와 대종을 울리고 바다를 박차고 떠오르는 해오름을 지켜본다면 가히 장관일 것입니다.
*제3경 죽서루(竹西樓)
왕피천을 건너 강원도 땅으로 들어선 후 7번 국도를 따라 계속 북상했습니다. 다리를 건너 들어선 복잡한 삼척시내에서 왼쪽으로 올라가 오십천변에 자리한 죽서루에 도착했습니다. 문화재발굴작업을 위해 앞밭을 파헤쳐 어수선한 주차장을 지나 경내 안으로 들어서자 2층 누각의 죽서루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서 본 월송정이나 망양정보다 훨씬 커 보이는 죽서루는 커다란 암반 위에 세워진 장방형의 누각으로 바로 아래가 오십천입니다. 아래층 의 여러 기둥이 절름발이처럼 그 길이가 같지 않은 것은 자연석 바위위에 기둥을 세워서인데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關東第一樓’와 ‘竹西樓’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는 죽서루는 관동8경 중 유일하게 바닷가에서 떨어져 내륙에 세워진 누각입니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죽서루는 가운데 5칸이 기둥이 없는 통간이어서 시원스럽습니다만 통간의 규모나 앞에 펼쳐지는 시원스런 전경은 병산서원의 만대루에는 조금 못 미쳐 보였습니다. 2층 누각에 빙 돌아 걸어놓은 현액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았고, 한시라서 제가 해독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으나, ‘正祖御製’(정조어제)의 현액은 바로 눈에 들어왔습니다. 송강 정철이 지었다는 ‘竹西樓’라는 한시가 보였으나 해석이 쉽지 않아, 그 대신 그가 지은 ‘관동별곡’에 그린 죽서루 부분을 옮겨놓습니다.
진주관 죽서루 오십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남산에 닿게 하고저.
경내 안에 뿌리를 내린 350년 된 보호수 회화나무는 그 높이가 19m이고 둘레가 2.1m로 거목임에 틀림없지만, 비를 맞아서인지 줄기가 후줄근해 보였고 표피의 색상은 제 키를 겨우 넘는 오죽과 같이 시커맸습니다.
*제4경 경포대(鏡浦臺)
죽서루에서 경포대까지는 고속도로를 타고가 이동이 빨랐습니다. 작년9월 방송대국문과학형들과 함께 왔을 때는 경포호는 다녀갔지만 경포대를 들르지 않아 이번 탐방은 42년 만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관동8경중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을 들라하면 저는 단연 경포대라 답할 것입니다. 낮은 구릉 위에 세운 경포대의 정자보다 더 친근감이 가는 곳은 그 아래 경포호이고 조금 떨어진 경포대해수욕장입니다. 카나다 토론토의 빅토리아호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해수욕장을 바로 옆에 두고,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둘레가 4Km나 되는 경포호 같은 큰 호수를 품고 있는 도시가 여기 강릉 말고 또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차에서 내려 강원시사랑회에서 걸어놓은 유명문인들의 시들을 읽으며 경포대로 올라갔습니다. 시멘트 계단을 따라 올라선 경포대 역시 조하망의 상량문등 여러 시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 고향 파주에서 성장한 율곡 이이선생이 태어난 곳이 이곳 강릉일진데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시 ‘鏡浦臺賦’(경포대부)에 걸려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현액의 시가 아니더라도 경포대를 노래한 문인들은 많습니다만, ‘관동별곡’이라는 이름으로 노래한 안축과 정철의 두 노래는 읊어볼만 합니다.
고려조의 안축은 경기체가 ‘관동별곡’에서 강릉의 옛 이름인 “임영(臨瀛)”을 노래하면서 경포대를 아래와 같이 찬했습니다.
三韓禮義 千古風流 臨瀛古邑 삼한의 예의, 천고의 풍류 간직한 옛 고을 강릉
鏡浦臺 寒松亭 明月淸風 경포대와 한송정이 있어 달은 밝고 바람도 맑다
海棠路 池春秋佳節 해당화 길, 연꽃 핀 못에서 봄가을 좋은 시절에
爲 遊賞景 何如爲尼伊古 아! 노닐며 감상하는 모습 어떠합니까?
燈明樓上 五更鍾後 등명루 위에서 새벽이 지난 뒤에
爲 日出 景幾何如 아! 해돋이 모습 그 어떠합니까?
(위 글은 인터넷 사이트 “디지탈강릉문화대전”에서 따왔습니다)
250년이 지나 송강 정철이 가사 “관동별곡”을 지어 경포대를 노래했는데 한문일색에서 한글로 많이 바뀐 것이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라 하겠습니다.
斜陽峴山의 躑躅을 므니발와 저녁햇빛이 비껴드는 현산의 철쭉꽃을 이어 밟아
羽蓋芝輪이 鏡浦로 나려가니 수레를 타고 경포로 내려가니
千里氷紈을 다리고 고텨다려 십리나 뻗쳐있는 얼음같이 흰 비단을 다리고
長松 울흔 소개 슬카장 펴뎌시니 큰 소나무 숲이 둘러싼 곳에 한껏 펼쳐져있으니
물결도 자도 잘샤 모래랄 혜리로다 물결도 잔잔하여 모래알을 헤아릴 정도로구나
孤舟解纜야 亭子우해 올라가니 한척의 배를 띄워 정자 위에 올라가니
江門橋너믄 겨태 大陽이 거긔로다 강춘교 너머 그 곁이 동해로구나
從容한다 이 氣像 濶遠한다 뎌境界 조용하다 이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경계여
이도곤 가란대또 어듸 잇닷말고 이보다 아름다운 경치갖춘 곳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紅粧古事랄 헌사타 하리로다 홍장의 옛 이야기를 야단스럽다고 할 만 하구나
(위 글은 인터넷 사이트 “무경선생의 국어사랑방”에서 따왔습니다. )
경포호가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고려시대 강릉기생 홍장과 안신사 박신과의 애절한 이야기가 담긴 경포호의 홍장암(紅粧嵓)은 차도 바로 옆에 있어 작년 9월 이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점심때가 벌써 지나 초당두부집으로 직행했습니다.
*제5경 낙산사(洛山寺)
경포대까지 동행한 이교수는 이 원장이 퇴근하기 전에 차를 돌려주어야 한다며 낙산사입구에서 저를 내려놓고 울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작년 9월에는 방송대국문과의 다섯 명이 한 팀이 되어 낙산사 경내를 돌아보았는데 이번에는 저 혼자여서 조용하게 움직였습니다. 앞서 탐방한 관동팔경 네 곳이 모두 정자였다면 제5경인 낙산사는 정자가 세워진 의상대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낙산사 전체를 이르는 것이어서 50분에 걸쳐 다 둘러보았습니다.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사찰인 곳이 여기 낙산사여서 모처럼 사대부들의 시를 멀리하며 유교산수(儒敎山水)를 잠시 접어둔 채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여기 낙산사는 서력671년 의상대사께서 설악산에서 동해로 뻗어나가는 산줄기의 끝머리에 자리한 구릉 “오봉산”을 ‘낙산“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수관음 도량을 개찰한 가람(伽藍)으로 천년고찰 중에서도 으뜸으로 뽑힐만합니다. 작가 박태순은 그의 저서 ”나의 국토 나의 산하”에서 사대부중의 신성공간으로 비구, 비구니와 재가불도인 거사와 보살들의 원림(園林)을 가리키는 가람인 낙산사는 일반시민들의 순례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에 ”오부대중“의 가람으로 불러야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가 구저분하게 내리는데도 작년9월 날 좋은 날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이 절을 찾은 것은 7년 전의 화마를 이겨내고 다시 중건된 낙산사를 보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작년과는 역순으로 의상대를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자주 이곳에 들러 좌선한 것을 기리기 위해 1925년에 세웠다 하니 유적지랄 수는 없겠지만 해송과 암벽과 바다가 어우러진 정자여서 해오름을 지켜보기에 이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7년 전 큰 불이 났을 때 기적적으로 화마를 피해간 홍련암입니다. 의상대에서 내려다 본 홍련암이 바짝 다가가서 보아도 절대 못하지 않은 것은 바로 아래 바다가 받쳐주어서인데 이점은 의상대 또한 다르지 않아 홍련암에서 올려다 본 의상대 역시 사진으로 남길만한 명소였습니다. 홍련암은 다섯 평 남짓한 아주 작은 암자로 관음굴 위에 세워졌으며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하기 앞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라 합니다.
수국 꽃이 소담스럽게 핀 홍련암을 떠나 높이가 16m나 되는 해수관음(海水觀音) 앞으로 다가가 사진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날이 흐려서인지 설악산의 대청봉이 배경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습니다. 마냥 자비로워 보이는 해수관음을 뒤로하고 관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시는 원통보전(圓通寶殿) 안으로 들어가 관음보살과 7층석탑 등을 두루 보았습니다. 온갖 세상사 어려움과 소원을 받아들여 구제해 주기 위해 33가지 형태로 몸을 변화시켜 대비행을 완성시키는 관음보살은 두루 원만하여 걸림이 없다해 원통대사로 불리며 이런 보살을 모시는 전각이어서 원통보전이라 이름 붙였다 합니다. 원통보전의 둘러보기를 마친 후 마지막 문인 홍예문을 지나 낙산사를 빠져나갔습니다.
*제6경 청간정(凊澗亭)
낙산사 입구 정류장에서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속초시내에서 하차해 청간정을 지나는 대진 행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며 하일리비치해수욕장, 봉포해수욕장과 천진해수욕장을 지나 청간해수욕장 입구에서 하차했습니다. 저녁 5시가 넘으면 해안가의 군부대에서 인접한 청간정 출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15분 거리를 부지런히 걸어 그 시간 직전에 청간정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적지 아니 내린 비로 주차장 바로 아래로 흐르는 천간천의 물이 탁해 보였지만, 일단 빗발이 멈추어 우산의 도움 없이 절벽 위의 청간정에 올랐습니다. 주차장 안내판에 적힌 대로 청간정이 자리 잡은 구릉의 위치가 절묘해 청간정이 더욱 살아나는 듯했습니다.
“청간정은 청간천과 천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바닷가 기암절벽 위 만경청파가 넘실거리는 노송사이에 위치해 있다. 파도와 바위가 부딪혀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갈매기가 물을 차며 날아오르는 순간의 일출은 가히 천하 제1경이다.”
더러더러 표현이 매끄럽지 못한 비문(非文)도 보이지만 청간정이 더할 수 없는 명소에 자리 잡고 있음만은 잘 묘사했습니다.
1980년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동해안을 순시할 때 청간정의 보수정화를 명해 그 이듬해 오늘의 모습으로 다시 개축되었다는 청간정은 정면3칸과 측면 2칸의 겹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죽서루나 경포대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아담스러울 정도로 작지만, 이보다 더 컸다면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지 않아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습니다. 청간정 현액에서 찾아낸 조선의 문인은 택당 이식 선생입니다. 힘들여 이 멀리 와서 6행의 칠언절구로 된 한시 ‘凊澗亭’을 읊을 정도로 가슴 따뜻한 분이 어인 일로 한글소설 ‘홍길동’을 지은교산 허균에 그리 심한 독설을 퍼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독설이 없었다면 허균이 ‘홍길동’의 작가임을 입증하는 문헌자료가 전무해 소설 ‘홍길동’의 작가가 영원히 묻힐 뻔 했습니다.
청간정에서 바로 아래 바닷가로 내려갔지만 철책선이 쳐져 있어 백사장에 접근하지는 못했습니다. 북쪽 바로 위가 청간해수욕장인 것 같은데 개방시간이 지나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철책선 너머로 펼쳐진 동해의 몸놀림이 망양정 앞바다 못지않은데 고래 노래가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고래가 여기까지 북상하지는 않았는가봅니다.
이번에 들른 관동팔경의 6경 중 가장 규모가 작은 명소는 여기 청간정인 것 같습니다. 천진천도 왕피천보다 폭이 훨씬 좁았고 누각의 규모도 가장 작아 관동팔경탐방을 조촐하게 마치기에 딱 알맞았습니다. 청간정 정자 모습과 해안선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지인 몇 분들에 보내 저의 관동팔경탐방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차도로 나가 시내버스를 타고 속초시내로 돌아갔습니다.
*제7경 삼일포(三日浦):
2004년 10월 31일 14시30분 온정각을 출발, 삼일포 관광 길에 나섰습니다. 동해에 근접한 곳에 자리잡은 삼일포는 그 둘레가 4.8키로로 보기 드물게 큰 호수입니다. 규모도 규모려니와 강릉의 경포호에 필적할만한 호수의 아름다운 자태가 저의 눈을 끌었습니다. 이 호수에 홀딱 빠진 봉래 양사언 선생이 삼일포 호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바위산 봉래대에서 오래 머무를 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만 묵겠다던 어느 왕이 3일을 머물렀다 하여 이름을 붙여진 삼일포는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포근하게 느껴졌으며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 관동팔경의 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관동관찰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이 관동팔경을 두루 돌면서 가사를 지어 읊었는데, 그 가사가 바로 관동별곡입니다.
송강의 가사에는 따르지는 못하지만 북한 여성 조장의 삼일포 에 관한 해설도 뛰어났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감사한 여성조장이 관광객의 요청에 부응하여 노래로 답하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우리는 하나라는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명승지의 쓸만한 바위마다 새겨져 있는 여러 내용의 글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하나이기 쉽지 않겠다는 위화감도 동시에 느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비겁한 자여 가라”는 적기가의 내용이 섬뜩해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운율이 이 섬뜩한 가사로 손상되지 않았을까 걱정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바위가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옥외의 홍보매체이겠지만, 자연보호를 일찍부터 배워 실천해온 제게는 눈에 거슬렸습니다.
호텔로 돌아와 짐을 풀고 금강산온천으로 이동, 짧은 시간 사우나로 하루피로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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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팔경은 금강산과 연계해 패키지로 돌아보는 것이 정석일 텐데 그리할 수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남쪽에서 북상하면서 관동팔경을 둘러보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금강산을 먼저 보고 남하하면서 여덟 명소를 차례로 들러 쉬어갔다 합니다. 쉬어가는 곳마다 글을 짓거나 그림을 남긴 분들이 꽤 여러분입니다. 관동별곡을 지은 안축과 정철이 글을 남겼고 단원 김홍도는 그림을 남겼습니다.
관동팔경을 유람한 분들 중에 좀 특이한 분이 조선 순조 때의 여인 김금원입니다. 1817년에 태어난 김금원은 열네살 때 부모님의 허락을 어렵게 받아 남장을 하고 산천유람에 나섭니다. 몰락한 양반의 서녀인 김금원은 사서삼경에 통달해 1851년 20년에 걸친 자신의 여행기를 기록해 묶은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를 내놓습니다. 김금원도 금강산을 다 돌아본 후 관동팔경을 보기 위해 통천으로 향합니다.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경포대 등을 거치며 가는 곳마다 시로써 응답합니다. 김금원의 여행기는 여행의 감흥이나 여정의 풍경에 주력한 보통의 기행록과는 달리 인생철학 내지 여행철학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합니다. 호서와 관동을 다 돌아본 김금원은 한성 여행을 마치고 원주 집으로 돌아갑니다. 1845년 김금원은 의주부윤으로 부임하는 남편과 함께 다시 서도와 금강산을 유람합니다. 열네 살의 나이로 금강산과 관동여행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당찬 여인 김금원의 ‘호동서락기’의 번역본이 있다면 하루 빨리 구해 꼼꼼히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이 부분은 규장각한국연구원에서 엮고 글항아리에서 출간한 ‘조선사람의 조선여행’을 많이 참고 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처럼 시를 남길 능력이 없고 보니 저는 이제껏 겨우 이런 글에다 사진 몇 장을 첨부해 탐방기를 작성해왔습니다. 지금도 부끄러운데 김금원의 호동서락기를 본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할 지 모릅니다. 그래도 읽어보고 싶은 것은 저 또한 조선의 여인 김금원처럼 호기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탐방이 가능하도록 도와준 이종규 원장과 이규성 교수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탐방사진>
1)평해병원
2)월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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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후포리
4)망양정
5)죽서루
6)경포대
7)낙산사
8)청간정
9)속초항
10)삼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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