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42.경주명소탐방기1(문무왕유적지)

시인마뇽 2012. 1. 16. 13:20

                                                     경주명소 탐방기1

 

                                        *탐방일자:2011. 11. 3일(목)

                                        *탐방지   :경북경주소재 문무대왕릉/이견대/감은사지

                                        *동행      :나홀로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을 통합한 신라의 30대 임금입니다. 박혁거세가 서라벌에 나라를 세워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56분의 왕들이 신라를 다스립니다. 이 왕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모두 삼국사기 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해 상세히 적어놓은 분이 바로 문무왕입니다. 문무왕에 할애된 지면은 선왕인 무열왕보다 배가 넘고 재위 기간이 4배가 다되는 고구려의 장수왕보다 3배 정도 더 많습니다.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도 문무왕의 삶이 별도의 장에 기록된 것을 보노라면 우리 역사에서 문무왕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가 어렵지 않게 가늠됩니다.

 

 

  문무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이름 그대로 문과 무일 것입니다. 당 군을 불러들여 백제를 멸망시킨 무의 제왕 무열왕은 숱한 숙제를 남긴 채 그 다음 해 661년에 붕어합니다. 무열왕으로부터 전쟁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문무왕은 무로써 고구려를 멸하고 676년에 장장 7년을 끌어온 나당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해 당이 결국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만듭니다. 전쟁이 끝난 후 문무왕은 지방소경을 두는 등 국가체제를 재정비해 무의 정치를 끝내고 문의 정치를 엽니다.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무의 상징인 김유신장군은 나당 전쟁 중인 674년에 병사하고, 그 일곱 해 후인 681년에 문무왕도 승하합니다. 다음 보위를 이어간 신문왕이 문치를 펴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왕 문무왕이 무의 시대를 끝내고 문의 시대를 열어놓은 덕분일 것입니다.

 

 

  낙동정맥 종주 길에 짬을 내어 문무대왕릉과 이견대 및 감은사지를 차례로 둘러 보았습니다. 경주역에서 하차해 역 마당 안내소에서 대왕릉행 버스 편을 안내 받아 건너편에서 150번 버스에 올랐습니다. 시내를 빠져나가 왼쪽으로 덕동호를 끼고 토함산 산줄기인 추령을 넘었는데 온 산에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들어 잔뜩 흐린 날씨인데도 가을색이 완연했습니다. 추령터널을 지나 14번 도로가 분기되는 삼거리에 이르자 텅 빈 들판이 꽤 넓게 보였습니다. 929번 도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진행해 감은사지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 문무대왕릉과 지척의 거리에 있는 봉길해수욕장 앞에서 하차했습니다.

 

 

1.문무대왕릉

 

  버스에서 하차해 몇 걸음 옮기자 해변이 나타났고 해변에서 몇 십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오뚝하니 바다에 서 있는 바위섬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이 바위가 바로 문무왕의 유골이 안치된 대왕암입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681년에 붕어한 문무왕의 죽음에 대해 “7월1일에 왕이 돌아가니 시(諡)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여러 신하가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東海 大王岩)에 장사하였다. 속전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 하여 그 돌을 대왕석이라 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대왕은 나라를 21년간 다스리다가 영륭 2년 신사년에 죽었는데,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내라고 유조를 내렸다”고 이르고 있습니다. 경주시에서 발행한 관광안내 팜플렛에도 “내가 죽으면 동해에 장례하라. 그러면 동해의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보호하리라”는 문무왕의 유언을 받들어 여기 봉골리 앞바다 바위인 대왕암 속에 묻고 십자형 수로와 화강암판석 등의 인공장치를 두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해 당 군을 완전히 쫓아낸 문무왕은 서해 건너 당나라가 또 다시 침략해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죽어서 서해 대신 동해의 호국용이 되었을 것입니다. 삼국을 통합한 문무왕이 마지막까지 노심초사한 것은 바로 왜군의 침략을 어떻게 막아내는 가하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의 부흥군을 도와 나당연합군과 싸운 측이 왜군이었으며, 그 전에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신라는 왜군의 침입을 자주 받았습니다.  

 

  대왕암 바로 앞 바닷가가 수학여행 온 중학생들로 시끌벅적했는데 대왕신을 모시는 무인들의 굿이 벌어져 더했습니다. 주위가 소란해 편안한 영면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우리나라의 국력도 세계 10위를 넘볼 만큼 강해졌으니 이제는 문무왕께서도 호국은 우리 후손에 맡기시고 편히 눈을 감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2.이견대(利見臺)

 

  일연은 사중기(寺中記)를 인용해 이견대의 내력을 대왕릉 및 감은사와 함께 그의 저서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습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지었으니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2년에 완성했다. 금당 섬돌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해변을 따라 200m가량 북쪽으로 옮겨 대종천 냇물이 바다에 안기는 하구에 이르렀습니다. 폭은 좁았지만 바다가 빨아들이는 힘이 세서인지 하구의 물 흐름이 매우 빨랐습니다. 구두를 벗어들고 바짓가랑이가 물에 젖지 않도록 무릎위로 걷어 올린 후 내를 건너다 잠시 멈춰 서서 밤마다 용왕으로 현신한 문무왕이 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감은사지를 들르는 장면을 그려보았습니다.

 

 

  좁은 해구 위에 세워진 이견대는 흔히 보이는 팔각정자보다 그 규모가 조금 큰 사각정자였습니다. 이견대(利見臺)는 용이 나타나서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이롭다는 뜻을 가진 주역의 “見龍在田 利見大人)”이라는 문구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신문왕이 세웠습니다. 대왕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감은사지를 먼저 세운 후 그 중간에 이견대를 세운 신문왕은 자주 이곳에 들러 대왕암을 바라보며 자주 쉬어갔다 합니다. 이견대에 오르니 어스름이 깃든 대왕암의 모습이 한 없이 안온해보여 과연 신문왕이 이곳에서 모든 번뇌를 잊을 만했다 싶었습니다.

 

 

3.감은사지(感恩寺址)

 

  이견대에서 31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가 929번 도로가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자, 길바닥에 어지럽게 놓인 굿거리 집기들이 보였습니다. 이곳에서 큰 길을 버리고 오른 쪽 논둑길을 걸어 감은사지로 갔습니다. 땅거미가 내려 사방이 어둑어둑해 사진이 제대로 나올지 걱정됐습니다.

 

 

 앞서 인용한대로 감은사(感恩寺)는 삼국을 통합한 문무왕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짓기 시작해 문무왕에게서 보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신문왕이 즉위 다음해인 682년에 준공했습니다. 죽어서 호국용이 된 문무왕이 이 절로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초석과 기단 아래를 비워둔 점이 특이하다 합니다. 죽어서 호국용이 된 문무왕은 백(魄)은 대왕암에 남겨두고 혼(魂)만 홀로 대왕암을 빠져나와 대종천 하구로 옮긴 다음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가다 제가 걸은 논둑 옆 수로를 따라가 감은사 내 금당초석과 기단 아래에 비워둔 공터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언제 무너졌는지 절은 없어지고 휑하니 절터만 남아 있어 지금은 감은사지(感恩寺址)로 불리고 있는 이 절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중문과 강당의 한가운데 들어선 금당에서 중문 쪽으로 동서 양쪽에 자리해 이제껏 말없이 절터를 지켜온 두기의 삼층석탑에도 불이 들어왔습니다. 서쪽 석탑 한 구석에서 음식을 들고 있는 한 여인네와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나자 이 늦은 저녁시간에 혼자 남아 자리를 뜨지 않는 사연이 무엇일까 새삼 궁금했습니다. 혹시 저 여인도 해수욕장에서나 삼거리에서 본 바와 같이 문무왕에 소원을 빌고자 이 절터를 찾아와 제를 올린 것이라면 문무왕은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된 것만이 아니고 더 낮은 곳으로 내려와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풀어주는 토속신이 같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여인보다 먼저 일어나 중문 아래 차도로 내려갔습니다. 캄캄한 밤에 감은사지 정류장에서 20분 가까이 버스에 올라 경주시내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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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식사를 끝내고 모텔로 들어가 짐을 다 풀자 이번 탐방길 내내 저와 함께하며 부왕을 찾아 나선 신문왕께서 왜 만파식적 이야기는 빼놓았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문무왕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문무왕은 붕어 다음 해에 무의 상징인 김유신과 함께 보배를 가지고 신문왕 앞에 나타납니다.

 

 

  만파식적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가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신문왕 즉위 2년인 682년 5월 한 해관이 동해 한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 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한다고 왕에 아룁니다. 일관이 왕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신 임금이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고, 또 김유신 공이 33天의 아들이 되어 대신이 되었으며, 이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하여 보배를 내릴 것이니 신문왕께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이라 했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 이견대로 가서 바라본 산에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은사로 돌아온 왕은 며칠 후 그 산으로 가서 용으로부터 검은 옥대를 받습니다. 용은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이라면서, 문무왕은 바다 속 큰 용이 되신 문무왕과 천신이 되신 김유신이 한 마음이 되어 이런 큰 선물을 신문왕께 바치도록 하셨다고 아룁니다. 궁궐로 돌아온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보검을 내리지 않고 피리를 만드는 대나무를 내린 데는 백성을 무력으로 통치하지 말고 음악으로 다스리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의 상징인 김유신을 같이 등장시켰다는 생각입니다. 김유신이 같이하지 않는 문민화는 백성들의 동의를 구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만파식적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문무왕과 신문왕으로 상징되는 문과 김유신과 그의 후예 화랑으로 이어지는 무간에 진정 아무런 갈등이 없었겠나하는 궁금증이 일은 것은 역사란 승자가 기록한대로 그리 깔끔하거나 말쑥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은 정통사학자들의 몫이 아니기에 믿거나 말거나 간에 정통에서 빗겨 서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비류백제 일본 망명설”을 주장한 김성호님이 지은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라는 책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문무 대 유신의 혼령대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대왕릉의 위치가 왜구가 쳐들어오는 길목인 부산 앞바다에 있지 않고 한참 북쪽인 월성의 감포인 것에 주목하여 문무왕이 정작 겁을 낸 것은 바다 건너 왜군이 아니고 유신의 혼령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문무왕은 대왕암 남쪽인 <울산-동래-부산>이 바로 신라본기가 왜로 칭한 임나였고 그가 암살한 김유신이 바로 임나왕족이었으니, 대왕암은 바다 건너 왜가 아니고 월성 남쪽 왜인 임나를 막으려던 바다의 임관성이라 했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문무왕이 죽은 다음 달인 신문왕 원년인 681년 8월8일에 김유신과 함께 삼국전쟁을 수행한 흠돌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신라본기에 나오는 흠돌의 반역일정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의 진행일자가 정확히 일치한다면서, 신문왕의 장인인 흠돌은 33천의 아들인 유신이 지상으로 환생한 대신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문무왕은 즉위 8년 6월21일 대각간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흠돌 등을 대당 총관으로, 그리고 죽지 등을 경정총관으로 삼았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유신은 문무대왕 생전에 죽고, 흠돌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합니다.  죽지는 향가 모죽지랑가에 나오는 노화랑(老花郞) 죽지랑으로 제2위 관등인 이찬(伊湌)까지 올랐었습니다. 죽지가 부하 득조의 휴가를 제6위 관등 아간(阿干)인 익선에게  간청했으나 거절 당한 것으로 보아 통일전쟁이 끝나고 흠돌이 반란에 실패한 후 김유신의 추종세력인 화랑들은 그 존재가치가 심하게 폄하되고 힘을 많이 상실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통일과업을 완수하고 성덕왕까지 이어지는 중흥의 시대를 활짝 열어 신라를 반석으로 올려놓은 문무왕이 남북이 분단된 이 나라에 다시 나타난다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합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