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종주기11
*정맥구간:소호고개-메아리농장-당고개
*산행일자:2011. 10. 7일(금)
*소재지 :경북경주
*산높이 :무명봉605m, 단석산827m
*산행코스:태종마을입구삼거리-소호고개-535.1m봉-메아리농장
-OK그린 목장-단석산-당고개
*산행시간:7시46분-17시32분(9시간46분)
*동행 :나홀로
부산을 거쳐 낙동정맥에 오르는 종주산행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지난 6월 부산역에서 다대포로 옮겨 낙동정맥에 첫 발을 들인 이래 이번으로 모두 11번을 출산해 경주의 당고개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딱 한 번을 빼놓고 10번을 모두 부산역으로 내려가 들머리로 이동하느라 꽤 여러 번 전철을 탔고 인근시장에 들러 아침밥을 들기도 했습니다. 부산 시내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낙동정맥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는 동안 없던 정이 새로 생겼는지 밤차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도 이번이 끝이다 하니까 가슴 한 구석에서 섭섭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부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은 돌아가신 큰형님입니다. 1961년 겨울 제대를 보름 앞둔 큰 형님께서 동계훈련 중 크게 다쳐 경복궁 근처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게셨는데, 간병을 하시는 어머니를 따라가 딱 한 번 문병을 간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며칠 간 묵으면서 무료한 밤 시간을 죽이고자 원내에서 상영하는 흑백영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보았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지만, 부산의 스산한 도시풍경과 부산역에서 이별하는 애절한 장면 등이 어렴풋하게 생각납니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다 까먹었어도, 긴 내용을 압축해 놓은 듯한 주제가 “이별의 부산 정거장”만은 지금도 따라 부를 수 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봄 큰 형님은 부산의 육군병원으로 이송되셨고 몇 달 후 그 병원에서 숨지셔서 따라 내려가 간병을 하신 40대의 어머니와 집에서 하루 빨리 완쾌되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신 20대 형수님의 가슴에 큰 못을 박았습니다.
제가 부산에 첫 발을 들인 것은 3년후인 중학교3학년 때로 1964년 가을이었습니다. 수학여행 길에 부산을 들러 초량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영도다리를 가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영도다리를 바라보면서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의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땅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는 라는 가사가 떠오른 것은 제가 이산가족이어서가 아니고 어머니의 이름에 “금순”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도 살아가기 힘들었지만 하루 세끼 제때 끼니를 잇고 반반하게 옷가지를 차려입을 만한 집안이 거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이 땅에서 이남의 서민들도 살아가기 힘듦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악물고 굳세게 살아가야하는 “금순”은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보통명사이자 또 고유명사였습니다.
살아 생전 자식을 잃은 참척의 아픔은 얼마 전에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님이 그의 소설“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참으로 명징하게 그려냈습니다. 딸만 셋을 두고 먼저 가신 지아비를 그리는 우리 형수님 같은 분들의 한 많은 삶을 그린 문학작품은 부지기수 일 것입니다. 남은 두 아들에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쓰신 어머님은 27년이 지난 1989년에 돌아가셨고 형수님은 세 딸을 다 출가시킨 후 뒤늦게 개가를 하셨습니다. 우리 집의 대들보였던 큰 형님이 어머니와 형수님에 남기신 그리움과 한의 이야기는 이렇게 세월 과 더불어 흘러가 버렸습니다.
큰 형님께서 제게 만들어준 “영화 속의 부산”과의 만남은 그 후에도 몇 번 계속되었습니다. 곽경구 감독의 “친구”가 그랬고 윤제균감독의 “해운대”가 그러했습니다. 이러는 사이 부산은 아시아 최대의 영화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이제 부산은 이별의 도시가 아니고 온 세계 영화인이 모여드는 만남의 도시입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헤맸을 “금순”의 처절한 삶은 옛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부산영화제를 통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극적으로 등장하는 화려한 여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숱한 이야기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들었던 부산역도 이제 마지막이다 싶어 지하철로 옮기는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습니다.
아침7시46분 태종마을 입구를 출발했습니다. 노포버스터미널을 6시30분에 출발한 첫 버스가 언양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각은 7시10분이 조금 못되어서였습니다. 터미널에서 하차해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이번 산행의 출발점인 태종마을로 향했습니다. 소호고개까지 택시로 올라갈 생각으로 태종마을 입구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포장된 태종잿골길을 따라 여기 저기 들락날락해보았으나 끝내 임도를 찾지 못해 포기하고 입구삼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택시를 보내고 지형을 확인한 다음 걸어서 태종마을 안으로 들어가 태종1잿길과 2잿길에서 소호고개로 올라가는 길이 없음을 확인한 후 마지막 3잿길에서 비로소 제 길을 찾았습니다. 쑥부쟁이 꽃들이 화사하게 핀 지그재그 임도가 전부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아니고 중간 중간에 맨 흙길도 있어 택시를 끌고 올라왔다면 기사 분 눈치를 볼 뻔 했습니다.
8시52분 소호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산행시작 57분 만에 올라선 소호고개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사륜자동차 한 대가 이 고개를 넘어갔습니다. 안내산악회를 따라왔다면 손쉽게 올라왔을 이 길을 제때 찾지 못해 시간을 많이 까먹은 바람에 초반부터 산행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소호고개에서 북쪽으로 난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걸어 삼각점이 박혀 있는 700.1m봉에 오르는데 23분이 걸렸습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거목에 받침목을 끼워 놓어 생긴 아취형의 문을 지나고 조그마한 밭떼기만한 억새풀밭을 지나 700m봉의 암봉에 이르기까지 능선길이 평탄해 이런 보너스 길을 다시 만나랴 싶었습니다. 진행방향은 분명 맞는데 지도상의 헬기장이 보이지 않아 찜찜해 하다가 잡풀 속에 가려진 희미한 흔적으로 보고나자 마음이 놓였습니다. 달랑 표지기 하나가 걸려 있는 무명봉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얼마간 내려가자 임도가 보였습니다.
10시40분 535.1m봉에 올랐습니다. 임도로 내려선 후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는 청초한 들국화가 무리지어 환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몇 분 안 걸어 만난 시멘트 길의 안부사거리를 가로질러 오른 쪽 산길로 올라섰습니다. 가느다란 줄을 잡고 올라선 535.1m봉은 암봉으로 시야가 탁 트여 남쪽으로 지난번에 오른 백운산이 눈에 잡혔습니다. 서쪽 건너 채석장에서 내는 굉음에 묻히지 않고 ‘꼬끼오’하고 내는 닭소리가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철조망 울타리를 왼쪽에 끼고 15분가량 능선 길을 걸어 임도로 내려서자 오른 쪽 위에 꽤 잘 지은 2층 양옥이 보였습니다. 청우농산관광단지로 조성된 넓은 공터를 가로 질러 임도삼거리에 이르자 얼굴모습이 각각인 장승들이 저를 반겼습니다. 익살스러우면서도 시름이 깃든 듯한 장승의 얼굴에서 모진 세월을 살아가며 터득했을 선조들의 해학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북서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 만난 첫 삼거리 왼쪽의 사면 일부를 가을 들국화가 가득 채워 산상에서 화원을 만난 듯했습니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길이 나있지 않은 한 가운데로 조금 올라가 605m봉에 올랐습니다.
12시25분 메아리농장에 이르렀습니다. 두 번째 삼거리에서 올라선 605m봉에는 나무들만 무성해 지도와 나침반을 보고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풀숲 길로 몇 분간 걸어 넓은 공터로 내려섰습니다. 저 아래 메아리농장의 목초지로 쓰이고 있을 공터를 가로 질러 끝머리로 다가가자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은데다 잡풀이 무성해 도저히 뚫고 내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메아리농장은 보이는데 제 길을 찾지 못해 여기저기 찔러보다가 마루금이 오른 쪽으로 난 것을 확인하고 그 쪽으로 이동하자 임도가 나타났습니다. 임도로 내려선 후 왼쪽으로 내려가 배추밭과 무밭을 지났습니다. 폐축사들로 스산한 분위기의 메아리농장에 이르렀습니다. 달랑 한 채 남은 집 앞에서 약주 잔을 주고받는 두 분에 물어 이곳이 메아리농장임을 확인 한 후 두 채의 폐건물 사이로 난 큰 길을 따라 직진해 바로 앞 묘지 앞에서 머무르면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15분 남짓 쉰 후 다시 북진해 529m봉에 오른 후부터 얼마간 능선 길이 넓고 경사가 나지 않아 모처럼 속도를 높였습니다. 그늘이 없는 한낮의 임도 길은 손수건을 꺼내 목에 둘러야 할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습니다.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이 세워진 삼거리를 지나 구릉을 몇 개 넘어 올라선 571m봉에 자리한 ‘OK목장 기지국’을 다다르자 저보다 앞서 낙동정맥을 종주하며 생생한 정보를 제공하는 KT의 성봉현님이 생각났습니다.
13시53분 OK목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571m봉에서 왼쪽으로 꺾어 임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OK 목장 땅에 발을 들였습니다. 광활한 목장에 소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이 목장이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밋밋한 야산아래 한 중앙에 저수지가 자리 잡았고 저수지를 둘러싼 산줄기가 분기되는 꼭지 점에 주홍색 지붕의 세모꼴 건물이 서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마저 느껴졌습니다. 억새풀밭을 지나다 찻길로 내려선 다음 그 길을 따라 꼭지 점의 교회 건물로 오르는 중 제초기로 풀을 베어내는 분을 만났는데 이분으로부터 이 목장의 넓이가 120만평에 이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건물 바로 옆에 세워진 이정표에 이번에 들를 단석산까지 거리가 2.8Km로 적혀 있어 시간이 넉넉할 것 같았습니다. 모처럼 마음 놓고 십 수 분간 푹 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북쪽으로 진행했습니다. 벌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경주국립공원에서 이 산을 관리하고 있어 길도 잘 나있고 거의 5백m간격으로 표지목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5시38분 해발827m의 단석산에 올랐습니다. 교회에서 2.0Km를 걸어 당고개갈림길에 이르는데 43분밖에 안 걸렸습니다. 갈림길삼거리에서 잠시 정맥 길에서 벗어나 단석산으로 향했습니다. 0.8Km 거리의 반은 거의 평지 길이었고 그 다음 반은 가파른 오름길이어서 부지런히 걸었는데도 반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커다란 정상석이 서 있는 고스락에 오르자 동쪽 먼발치로 경주시내와 이름 난 산들이 다 보였습니다. 가장 멀리 자리한 토함산은 아주 흐릿하게 보였고 몇 년 전 다녀온 적이 있는 중간 위치의 남산은 암릉 길이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맨 앞 선도산은 그 이름으로 보아 마고할멈이 머무를 법한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단석산은 경주의 최고봉답게 신라 최고의 장군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수도 끝에 획득한 보검으로 바위를 세 토막 냈는데 가운데 토막인 중악(中嶽)을 단석산(斷石山)이라 불러왔다 합니다. 17세에 이 산에 입산한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고자 수련하던 중 하늘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대과업을 이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명산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렀는데 왕복 50분가량 걸렸습니다.
17시37분 해발3백m대의 당고개에 도착해 하루 산행을 끝냈습니다. 단석산 정상에서 당고개삼거리로 돌아가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정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560m(?)대의 깊숙한 안부로 내려섰다가 662m봉을 향해 100m가량 고도를 높이는 길이 마지막 깔딱 길이었습니다. 잘 나있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이렇게 또 한 구간을 마친다 하자 제 스스로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차도가 바로 아래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20번 도로가 지나는 당고개로 내려섰습니다. 고갯마루의 땅고개휴게소식당에서 라면을 사들며 건천을 거쳐 경주로 가는 350번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저의 안전한 하산을 기다려 고갯마루로 어둠을 불러들인 산신령께 감사하며 경주 버스를 타고 내려가다 광명리에서 하차해 경주신역으로 옮겼습니다.
아시아 최대의 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부산은 더 이상 눈물어린 이별의 도시가 아니기에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로 목청을 높여 축제분위기를 김 뺄 뜻은 전혀 없습니다. 종합예술 영화를 문화산업의 총아로 육성하는 것이 정말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으며,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이 대중의 충동과 욕망을 승화하지 않고 억압한다는 독일의 철학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로노의 비판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그렇다고 그를 이유로 부산의 도시축제를 폄훼하거나 방해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부산시민들의 영화제에 대한 열정을 잘 알고 있어서입니다.
요즘 부산에는 외지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다 하여 영화제를 망칠까 걱정하는 시민들이 많다 합니다. 이 분들이 타고 내려오는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 부르며 극력 반대하는 부산시민이 그 지역의 주인이고 보면 정말 희망버스인지 물어보고 내려가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제가 오르는 산의 주인인 나무와 동물, 꽃등에 희망을 나눠주겠다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들에 희망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에게서 희망을 배워오기 때문입니다.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가 눈시울을 적셨던 그 옛날이라면 부산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분들에 “부화 돋은 날 사돈 온다”고 시큰둥해 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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