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동정맥 종주기

낙동정맥 종주기12(당고개-숙재고개-아화리굴다리)

시인마뇽 2011. 10. 30. 16:40

                                                 낙동정맥 종주기12

 

 

                              *정맥구간:당고개-숙재고개-아화리굴다리

                              *산행일자:2011. 10. 13일(목)

                              *소재지 :경북경주/영천

                              *산높이 :부산730m, 청전봉753m

                              *산행코스:당고개-독고불재-부산-숙재고개-비슬지맥 분기봉

                                             -아화리굴다리-서면파출소 건너편 정류장

                              *산행시간:8시55분-17시48분(8시간53분)

                              *동행 :나홀로

 

 

  부산의 다대포에서 시작한 낙동정맥 종주길은 경주 서쪽의 산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산행 시에 경주일원에서 가장 높은 단석산(斷石山)을 들렀고 이번에는 부산성(富山城) 성안의 최고봉인 부산(富山)을 올랐습니다. 단석산과 부산 모두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바, 김유신 장군이 수도 끝에 획득한 보검으로 바위를 세 토막 냈는데 가운데 토막인 중악(中嶽)을 단석산(斷石山)이라 부른다는 전설과,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에 나오는 노화랑(老花郞) 죽지랑(竹旨郞)이 부산에 쌓은 부산성을 다녀갔다는 설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향가란 향찰로 표기된 우리 고유의 정형시가입니다. 신라의 향가 14수와 고려의 균여대사가 지은 11수 등 모두 25수가 전해지는데, 화랑이 등장하는 향가는 신라시대의 혜성가, 모죽지랑가와 찬기파랑가 등 3수가 있습니다. 이중 이번에 오른 부산의 부산성과 관련된 향가는 모죽지랑가로,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이 노래의 배경설화가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의 권제2(卷第二) 기이제2(奇異第二)편의 “효소왕대죽지랑(孝昭王代竹旨郞)”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휘하 낭도 득오곡(得烏谷)이 모량리의 익선 아간에 의해 부산성의 창고지기로 급히 임명된 것을 알고 노화랑 죽지랑이 떡과 술을 싸갖고 부산성으로 찾아가서 득오를 만납니다. 익선은 득오에 휴가를 달라는 죽지랑의 요청을 거절하고 곡식30석을 주면서 득오에 휴가를 허가해 달라는 간진의 청도 거절합니다. 간진이 말과 안장까지 내놓자 득오를 보내준 익선은 이 일로 벌을 받게 되자 종적을 감추어 아들이 대신 물에서 얼어죽고, 모량리의 관리들은 관직에서 내쫓기고 승복 또한 입지 못하게 했다 합니다.

 

 

  모죽지랑가의 배경설화에 나오는 부산성은 부산에 세운 성입니다. 해발고도가 730m로 서울의 도봉산과 맞먹는 높은 산인 부산에 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산의 정상부위가 밋밋한 평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산의 정상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펼쳐진 꽤 넓은 구릉은 고랭지채소밭으로 일궈져 신라 때도 부산성 성민들이 이 땅에 농사를 부쳐 먹었음이 분명합니다. 언뜻 보기에 이 성안의 경작지가 남한산성보다 몇 배는 더 넓었습니다. 전란을 당해 지구전을 펼 뜻이라면 농경지도 더 넓고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여기 부산성이 서울의 남한산성보다 훨씬 오래 버틸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높은 곳에 이 정도 규모의 성을 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초기 통일신라의 위세가 어떠했는지 짐작됐습니다.

 

 

  아침8시55분 당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새벽5시46분에 광명을 출발하는 경주행 첫 KTX에 몸을 실어 자다 깨다를 두 서 너 번 반복해 신경주역에 도착했습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가다 광명리에서 하차해 길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반시간 넘게 기다린 끝에 산내 가는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이번 종주산행의 들머리인 당고개에서 하차해 짐을 챙긴 후 산내 쪽으로 고갯마루를 넘자마자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절개면 위 시멘트수로를 따라 오른 쪽으로 따라 오르다가 꼭짓점 부근에서 왼쪽으로 꺾어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산행시작 20분 만에 삼각점이 박혀 있는 396m봉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른 후 70m가량 고도를 낮추어 임도 삼거리로 내려섰습니다. 곧 이어 만난 임도사거리에서 몇 걸음 직진하다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0시6분 585m봉에 올랐습니다.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서자 자주 묘지가 눈에 띄는 완만한 능선 길이 계속되어 모처럼 재잘대는 새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가파른 길을 따라 해발4백m대의 능선에 오른 후 고만고만한 언덕배기를 지나는 동안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버려진 공용안테나의 잔해(?)를 보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은 다 아름답다고 예찬한 박경리 선생의 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왼쪽으로 외줄 철망(?)이 쳐진 길을 따라 진행해 585m봉에 다다랐습니다. 밋밋한 능선 길의 끝부분에 자리한 585m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다 길이 아닌 것 같아 되올라가 다른 길이 없음을 확인한 후 다시 내려가느라 10분 가까이 까먹었습니다. 철조망울타리 옆길을 따라 걷다가 울타리 안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올라 삼각점이 박혀있는 651.2m봉에 올라선 후 가져간 물로 목마름을 달래고 과일로 당분을 보충하면서 십 수분을 쉬었습니다.

 

 

 

  11시28분 어두목장이 들어선 독고불재로 내려섰습니다. 651.2m봉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독고불재로 내려가는 길이 가팔랐습니다. 산 중턱의 철조망을 넘어서도 가파른 길은 계속 이어져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길 왼쪽에 폐축사가 있는 넓은 길을 지나 어두목장 정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마루금이 오른 쪽 정문 안 목장 땅을 지나 이어가지 못하고 두 눈을 껌벅대는 한우들과 눈인사를 나눈 후 정문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른 쪽으로 난 시멘트 길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사각 정자를 지나 어두목장의 전기철선 울타리가 끝나는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내 마루금에 복귀해 왼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얼마간 비알 길의 능선을 숨 가쁘게 올라 완만한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12시37분 해발753m의 청천봉을 올랐습니다. 오름 길에 철모르고 피어난 진달래(?)꽃송이를 만나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10월의 진달래가 외롭게 피운 꽃송이는 봄철의 진달래보다 색상이 훨씬 엷어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 영낙없는 계절의 미아였습니다. 그늘진 숲길을 지나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진 753m봉에 오르자 소나무에 걸어놓은 “청천봉” 표지물이 보였습니다. 억새 풀밭에 듬성듬성 바위들이 들어선 청천봉 산마루는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여 첩첩산중의 산세를 조망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청천봉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옮겨 헬기장을 지나서부터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가는 길이 마치 계곡 길 같은 느낌이 들어 찜찜해 하다가 얼마 후 길이 왼쪽으로 이어지면서 이제껏 걸어온 길이 마루금 길임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했습니다.

 

 

 

  13시56분 해발730m의 부산에 올랐습니다. 710m봉으로 오르는 길에 신라 때 축성된 부산성의 잔해로 보이는 돌무더기를 보았습니다. 능선에 오르자 고랭지작물로 재배한 무와 감자를 다 걷어 들인 텅 빈 밭이 꽤 넓게 보였습니다. 해발600-700m대의 고지대에 일궈놓은 밭을 보자 이 정도 넓이면 부산성이 유사시에 피난처로 제법 유용하게 쓰였겠다 싶었는데, 지형도를 보고나서 부산성이 작은 성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밭가를 지나 올라선 구릉에서 조금 내려가 그늘진 곳을 찾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밭 위로 올라가 들어선 풀숲에서 잠시 동안 길 찾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잡목이 우거진 나지막한 봉우리에 표지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봉우리가 해발730m의 부산인 것 같았습니다. 부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오봉산에 단풍이 아름답게 들어 성지(城址)도 확인할 겸 다녀오고 싶었으나 시간이 여의치 못해 포기하고 숙재고개로 내려갔습니다. 북서쪽으로 얼마간 내려가 석성을 쌓는데 쓰였을 돌무더기들을 지난 시각이 14시13분이었으니 1시간 조금 넘게 부산성 안에 머무른 셈입니다.

 

 

 

  14시46분 숙재고개로 내려섰습니다. 부산성터를 지나 숙재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경사진 비알 길이었습니다. 철조망울타리 옆길을 지나 내려선 비포장 차도는 왼쪽 위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따라 십 수분 간 걷는 동안 미풍에도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보았습니다. 저리 약한 잎들이 무슨 힘으로 한 여름의 태풍을 견뎌냈나 궁금해 하다가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생각나 나무 또한 다르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장도로가 지나는 숙재고개로 내려선 후 더 이상 산행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던 것은 해떨어지기 전까지 3시간 남짓밖에 시간이 남지 않아 목적지인 아화고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버스정류장도 어디 있는지 잘 모르고 서두르면 아화고개에 조금 못 미쳐 차들이 지나다는 굴다리까지는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15시34분 해발656m의 비슬지맥분기봉에 올라섰습니다. “우라생식마을” 안내석이 서 있는 숙재고개에서 우라생식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이내 오른 쪽 산길로 들어가 능선으로 올라섰습니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얼마간 진행하다 숙재고개에서 우라생식마을로 이어지는 포장도로로 내려선 후 오른 쪽 식물분석장의 푸른 정문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께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앞을 지났습니다. 열려 있는 철제 문을 지나 포장도로가 끝나기 얼마 전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개들이 짖어대는 양옥집을 지나서부터 가파른 비탈길은 비슬지맥 분기봉까지 계속됐습니다. 비슬지맥이 지나는 해발685m의 사룡산이 왼쪽으로 0.6Km 떨어진 비슬지맥분기봉에서 오르는데 숙재고개 출발 48분이 걸려 이 속도라면 굴다리까지 저녁6시안에 충분히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습니다.

 

 

 

  16시54분 “사룡산3.4Km/효리1.6Km/천촌리0.6Km"의 표지목이 서있는 안부사거리를 지났습니다. 비슬지맥 분기봉에서 효리쪽으로 10분을 채 못 걸어 다다른 전망바위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서쪽 아래로 올망졸망한 저수지들이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고, 그 주변 논 뜰에는 황금 빛 벼들이 고개 숙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이 편안한 편이어서 바람을 가르며 내달렸습니다. "효리4.0Km"와 “효리2.2Km" 지점을 차례로 지나 넓게 자리한 묘지에 이르렀습니다. 뒤돌아본 오봉산이 석양을 받아 단풍의 색상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천촌리 길이 갈리는 안부에 이르러 잠시 숨을 고른 후 아화고개를 향해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17시48분 아화리 굴다리에서 12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안부사거리에서 직진해 송전탑을 지나고 “효리1.0Km/사룡산4Km" 지점에 이르는데 15분이 걸렸고. 15분을 더 걸어 ”영천시북안면“의 안내판이 서있는 909번 지방도 앞에 도착했습니다. 차도건너 묘목 밭의 오른 쪽 길로 올라갔다가 왼쪽으로 밭이 있는 넓은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밭을 고른(?) 트랙터 한대가 댕그러니 멈춰 서있는 밭가 길을 걸으며 저도 모르게 “아름다운 베르네”로 시작되는 요델송을 불렀습니다. 서녘 하늘을 뻘겋게 물들인 석양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넓은 길을 따라 내려가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낸 아화리 굴다리를 건넜습니다. 40분이 걸린다는 아화고개까지 진출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이곳에서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18시10분 아화리 서면파출소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굴다리를 지나 만난 여학생에 길을 물어 오른쪽 시멘트 길을 따라갔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큰길만 따라 15분 남짓 걸어 35번 도로가 지나는 서면 아화리 시내에 도착해 맥주 한 캔을 사든 후 서면파출소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350번 시내버스에 올라 경주신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지랑은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왕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입니다. 제6위 관등 아간(阿干)인 익선이 제2위 관등인

이찬(伊湌)까지 올랐던 노화랑(老花郞) 죽지랑의 청을 거절했다는 것은 삼국통일 후 화랑의 존재가치가 심하게 폄하되고 힘을 많이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런 역사는 통일신라에서 끝나지 않고 후대에도 반복됩니다. 고려시대 무신의 난도 무인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은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국가를 끌어가는 양 날개는 문(文)과 무(武)일 것입니다. 어느 한 쪽에 지나치게 기울면 그 나라는 위기에 처할 것이 자명합니다. 요즈음의 대한민국은 무(武)에 치우쳤던 현대사의 반성으로 문(文)에 많이 기운 듯합니다. 국가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이 많이 약해져 과연 우리나라가 정말 전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안한 나라인가 되묻게 합니다. 천안함 피침을 보고도 전쟁이 두려워 조용히 지내기만을 원한다면 우리의 국군은 날개 죽지가 꺾인 새들과 다를 바 없어 때 맞춰 힘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향가 모죽지랑가를 김완진 선생의 현대역으로 여기에 올려놓는 것도 노화랑 죽지랑에 쇠잔한 모습에도 변하지 않는 존경과 안타까움을 나타낸 낭도 득오곡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간 밤 못 오리니

                                   계시지 못해 우는 이 시름

                                   전각(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아가도다

                                   눈 돌림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낭이여,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북 구렁에 잘밤 있으리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