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왕방지맥 종주기3(최종회)
*지맥구간:칠월리고개-종현산갈림길-한탄강 아우라지
*산행일자:2009. 12. 20일(일)
*소재지 :경기 포천/연천
*산높이 :개미산453m
*산행코스:칠월리고개-345.4봉-종현산갈림길-개미산
-박석고개-한탄강 아우라지
*산행시간:10시40분-17시20분(6시간40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 8명
(24기김주홍, 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7기송기훈, 29기유한준,
43기김동희, 서석범)
한탄강과 영평천의 합수점인 아우라지에서 한북왕방지맥 종주를 모두 마쳤습니다.
한북정맥의 287.3봉에서 갈라져 나와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왕방지맥은 천보산, 해룡산, 왕방산, 국사봉과 개미산을 차례로 일군 후 여기 아우라지에서 그 맥이 다하는 산줄기로 도상거리가 39Km에 달합니다. 이 산줄기를 경계로 동쪽으로는 포천천과 영평천이 연이어서 흐르고 서쪽으로는 동두천을 관통하는 신천이 흐르는데 이들 하천 모두 한탄강으로 흘러들어갑니다. 한북정맥의 8지맥 중 한탄강이나 이 강의 제1지류로 내려앉는 산줄기는 무려 셋이나 됩니다. 감악지맥이 지금은 폐쇄된 국민관광단지인 전곡의 한탄강에서 끝나고 명성지맥은 한탄강의 제1지류인 영평천으로 침잠하며 이번에 종주를 마친 왕방지맥은 한탄강과 영평천이 합수되는 여기 아우라지가 끝점입니다. 이렇듯 한탄강은 한북정맥의 지맥을 종주하는 산객들에는 더할 수 없이 가깝고 친근한 강입니다.
북한 땅인 강원도 평강군에 소재한 해발1,052m의 장암산 남쪽 계곡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남대천, 영평천과 신천의 물을 차례로 받아 서쪽으로 흐르다가 연천군 미산면과 전곡읍 도감포사이에서 임진강에 합류되는 임진강 제1지류로 그 길이가 135Km라 합니다. 한탄강이 다른 강과 다른 점은 땅이 푹 꺼져 만들어진 수직단애의 계곡이 많다는 점인데 여기 아우라지도 마찬가지여서 강에 면한 수직단애 위로 평평한 들판이 전개됩니다. 이 강 하류에서 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되었고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이 강 유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했으며 고석정 및 재인폭포 등 절애의 명승지가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6·25전쟁 중 다리가 끊겨 숱한 사람들이 '한탄하며 죽었다'고 해서 한탄강으로 불린다는 우스갯 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격전지였던 이 강을 다시 찾아 한국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왕방지맥 종주는 그 값어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오전10시40분 칠월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왕방지맥 마지막 구간이 지나는 연천군의 최저기온이 영하13도라고 해 얇은 내의 두 벌을 껴입고 집을 나섰는데 막상 본격적인 산행에 들어가자 바람이 불지 않아 견딜만했습니다. 차도에 면한 밭을 지나 왕방지맥에 올라선 후 왼쪽으로 난 넓은 임도 길을 몇 분 걸어 다다른 안부에서 왼쪽 묘지 위 능선 길로 올랐습니다. 오름 새가 완만한데다 산행식구도 조촐해 금세 속도가 붙었고 칠월리고개 출발 35분 만에 오른 쪽 아래로 아도니스 골프장이 보이는 첫 번째 삼각점의 389.3봉에 이르렀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조금 내려가 만난 삼거리에서 직진해 십자안부를 지났습니다.
11시40분 허브농장 위 지맥 길에 예쁜 전망대 건물이 새로 서있어 잠시 올라 숨을 골랐습니다.
십자안부에서 북진해 다다른 허브 농장은 작년2월에 왕방지맥 종주 차 지났을 때 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새로 들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넓은 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가서 오른 쪽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두 번째 삼각점이 세워진 345.4봉으로 올라서는 길에 나뭇가지 사이로 오른 쪽 아래 상추동저수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름 내내 시야를 가린 무성한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나가서인데 냉랭한 날씨로 물 색깔이 더 파래진 저수지가 여기 벌거벗은 나무들보다 더욱 쓸쓸해 보였습니다. 나무들을 베어내고 삼각점을 박아놓은 345.5봉에서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 숲을 지나 서진하다가 바람을 가릴 만한 곳을 찾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24회 김주홍 동문이 배낭에 가득 넣어가지고 올라온 것들로 마련한 뜨거운 먹을거리들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줘 45분간의 점심시간이 한껏 훈훈했습니다.
13시52분 이번 구간의 최고봉인 553봉에 올라섰습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13시경 지맥 종주에 다시 나섰습니다. 배낭속의 음식을 뱃속으로 옮겨 놓았다 해서 배낭과 몸무게의 합이 줄어들 리 없기에 두 다리가 받는 하중은 똑 같은데도 짐이 가볍다고 느끼는 것은 그저 느낌일 뿐 산 오름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산행 최고의 깔딱 길은 바로 553봉에 오르는 된비알 길로 바닥에 깔린 낙엽들로 많이 미끄러웠습니다. 24기 이기후 동문이 낙엽이 쌓인 움푹한 곳을 잘못 디뎌 혹시라도 발목을 삔 것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잠시 앉아서 스트레칭을 한 후 다시 일어나 낙엽으로 까탈스러운 된비알 길을 오르는 것을 보고 참으로 다행이다 했습니다. 553봉에 오르자 서쪽의 종현산이 아주 가깝게 보였습니다. 왕복 시간 반이 걸리는 이 산을 다녀오려면 야간산행을 할 수밖에 없어 아쉽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개미산으로 향했습니다.
14시58분 해발453m의 개미산에 다다랐습니다.
553봉에서 내려선 종현산 갈림길에서 오른 쪽의 두 거암 사이를 지나 한참을 내려가다가 벙커가 들어선 482봉을 올랐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가 암봉 오른 쪽으로 난 편안한 길을 걸어 방화선이 시작되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 안내판 앞에 이르렀습니다. 작년 초 혼자서 이 능선을 지날 때는 왼쪽 아래 훈련장에서 포사격훈련을 할까보아 개미산 정상에 올라서기까지 들입다 내달렸는데 이번에는 포성도 들리지 않았고 여럿이서 함께 걸어서인지 그리 긴장되지 않았습니다. 진혁진님의 개념도에 453봉이 개미산으로 나와 있고 많은 분들의 산행기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 저는 이제껏 나무들을 베어내어 만든 방화선 능선이 개미 등처럼 매끄러워 방화선 끝머리의 453봉을 개미산으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동행한 후배가 개미산이 453봉이 아닌 것 같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집에 돌아와 축비 5만분의 1의 지형도를 자세히 보니 개미산은 453봉보다 37번 국도가 지나는 박석고개에 더 가깝게 위치했고 그 높이도 해발160m대였습니다. 지도상의 개미산은 종현산의 한 봉우리이고 원래 개미산은 박석고개에 있는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생긴 산이라는 현지노인의 말씀을 전한 다른 분의 산행기를 읽고 나자 더 헛갈렸습니다. 개미 등을 지나 깃발 없는 깃봉이 덩그렇게 서있는 453봉의 개미산에 오르자 먼저 와 쉬고 있던 선두 몇 명이 서둘러야 해지기전에 아우라지에 도착할 수 있다며 자리를 떴고 저희 후미 팀은 한 친구가 싸온 싱싱한 딸기를 들며 모처럼 숨을 돌렸습니다.
16시8분 37번 국도가 지나는 박석고개로 내려섰습니다.
개미산 정상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선 후 전망이 좋은 공터를 지나 이번 산행 중 처음으로 헬기장에 이르자 전곡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영평천의 굽이진 물줄기와 감악산이 잘 보이는 능선을 따라 내려가 송전탑을 지나자 이번에도 박석고개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그냥 지나칠까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송전탑에서 10분(?) 가까이 내려가 나무에 묶어 놓은 빨간 표지기를 보고 오른 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길이 희미한데다 간벌한 나무들이 길을 막아 군부대가 파 놓은 교통호를 따라 조심해서 내려갔습니다. 이 길이 왕방지맥 능선임을 알리는 표지기가 드물게나마 걸려있었고 한 여름이 아니어서 우거진 풀숲을 뚫고나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중간에 잠시 마루금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다시 마루금을 이어가 박석고개에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선두팀 몇 명은 중간에 오른 쪽의 지맥 길을 타지 않고 그대로 직진해 고개 마루 왼편 아래로 떨어졌는데도 먼저 이 고개 마루로 올라와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7시20분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는 아우라지에 도착했습니다.
박석고개 마루에서 조금 올라서자 군부대 울타리가 보였습니다. 이 울타리 왼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세 번째 삼각점이 박혀 있는 160.4봉에 오른 시각이 16시31분이었습니다. 개미산을 끝으로 높은 봉우리는 다 지나자 마음을 놓아서인지 해발160m의 이 봉우리를 오르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삼각점 봉에서 조금 더 나아가 오른 쪽으로 꺾어 오르자 지난 번 직진해 알바를 한 무명봉에 올라섰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가다 잠시 멈춰 서서 서산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해넘이를 지켜보았습니다. 흐릿하게 난 길을 따라 내려가 지난 번 알바로 한번 지났던 넓은 비포장도로로 내려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왼쪽으로 진행하다가 오른 쪽으로 난 시멘트도로를 따라 내려가 합수점인 아우라지에 도착해 왕방지맥 종주를 모두 마쳤습니다.
인근 음식점으로 이동해 유한준 산행대장이 낸 저녁을 맛있게 들었습니다.
인근 미산에서 목축업을 해 짬 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고맙게도 아우라지로 마중 나온 31기 오창규 후배가 소요산역까지 데려다주어 귀가 길이 한결 편안했습니다.
어둠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합수점의 고즈넉한 강변 풍광을 카메라에 옮겨 담으면서 아우라지의 참뜻을 새겨보았습니다. 한탄강의 아우라지보다 더 널리 알려진 아우라지는 한강의 지류인 골지천과 송천이 합류되는 정선의 아우라지로 정선아리랑을 잉태한 곳이기도 합니다. 두 아우라지의 공통점은 두 물줄기가 하나로 아우러진다는 점이어서 혹시 아우라지의 어원이 “아우르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우름의 철학이 요새처럼 절실한 때가 없다 싶은 것은 해가 더 할수록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책임지고 이를 해소할 정치세력들은 날이 갈수록 반목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지역갈등 문제도 영남/호남의 갈등에 수도분할 문제로 충청도까지 더 해지는 것 같아서입니다. 아우라지에서 아우러지는 것은 비단 물만이 아닙니다. 두 물줄기가 흐르는 유역에 뿌리박고 사는 보통사람들의 애환도 같이 아우러질 수 있는 것은 다름은 묻어두고 같음을 드러내어서입니다. 여기 아우라지에서 서로 몸을 섞으려고 부지런히 달려온 한탄강과 영평천이 우리의 스승인 것은 이들의 아우름에는 협상테이블에 올려야 할 조건들이 아예 없는 무조건 적인 "하나 되기"이어서입니다. 영평천과 한탄강이 하나로 아우러져 한탄강과 임진강이 하나 되는 더 큰 아우름을 낳고, 임진강과 한강의 거대한 아우름을 마련하며, 더 나아가 한강과 서해바다가 하나되는 아우름의 완결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작은 아우름의 승수효과가 이러하다면 사람들의 아우르는 아우라지는 분명 유토피아이겠는데 이 아우라지가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입니다.
<산행사진>
- 아사비 아사비 Y
- 2009.12.23 15:28
- 날씨 추운데 고생 많이 하셨읍니다.완주 축하 드립니다.
- 시인마뇽 시인마뇽 Y
- 2009.12.23 19:16
- 바람이 불지 않아 생각보다 춥지 않앗습니다
한북왕방지맥 종주기2
*지맥구간:오지재고개-왕방산-칠월리고개
*산행일자:2009. 11. 15일(일)
*소재지 :경기동두천/포천
*산높이 :국사봉745m, 왕방산737m
*산행코스:오지재고개-왕방산-국사봉-693봉-가마골고개-칠월리고개
*산행시간:10시7분-16시24분(6시간17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11명
(24기이규성, 서중원, 김주홍, 이기후, 우명길, 27기송기훈,
29기오창환, 유한준, 43기서석범, 김동희, 45기김영준)
한북왕방지맥의 두 번째 종주 길에 이 지맥 최고봉인 국사봉(國師峰)을 올랐습니다.
서울 근교 청계산의 국사봉은 국왕을 연모하는 국사봉(國思峰)이고, 이번에 오른 포천의 국사봉은 국왕의 사부를 그리는 국사봉(國師峰)이어서 그 둘의 한글은 같지만 한자표기가 다릅니다. 임금을 그리는 국사봉(國思峰)이 연주대(戀主臺)의 범칭이라면, 임금의 사부를 그리는 국사봉(國師峰)은 왕사봉(王師峰)으로 바꿔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국사봉(國師峰)은 국사봉(國思峰)과 달라서 왕이 머무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야 하는 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국사(國師)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봉우리는 조선조의 태조께서 친히 다녀갔다는 포천의 진산 왕방산(王訪山)과 붙어 있으면서 임금의 스승 봉우리답게 산 높이도 조금 더 높아 과연 국사봉(國師峰)으로 불릴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왕방산을 찾아 오른 임금은 조선조의 태조만이 아니랍니다. 그보다 훨씬 전인 신라의 헌강왕도 왕방산을 올랐다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국사봉에 정좌한 국사(國師)가 꼭 조선조의 무학대사 한 사람만이 아닐 것입니다. 헌강왕의 스승이 어느 분인지는 몰라도 그분도 이 봉우리에 한자리 잡고 나중에 오른 무학대사와 한담을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작 국사봉의 정수리에 똬리를 튼 것은 이들 왕의 국사들이 아니었습니다.
가파른 된비알 길을 치고 올라 만난 본 것은 미군부대였습니다. 언제 미군들이 태평양 건너 한반도 중앙의 이 산에 올라와 먼저 자리 잡은 국사들을 하산시켰는지 잘 모르지만, 왕방산의 임금들도 그들의 위력에 어찌할 수 없었나봅니다. 왕방산의 임금들이야 그렇다 해도 인근 소요산의 원효대사나 의상대사라면 부처님의 힘을 빌려 얼마든지 미군부대의 국사봉 주둔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리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아무려면 영어만 아는 이들이 미처 영어를 배우지 못한 우리나라 임금들의 스승 감으로 문제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삼은 대한민국이 비록 지금은 휴전선 남쪽만 실효적으로 점하고 있지만 경제적 부와 평화가 충만한 이 나라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국가임을 굳게 믿은 이분들의 영혼이 오랜 고민 끝에 나라의 안위가 국사들의 자리보다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 분명한 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그분들이 그리 쉽게 국사봉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전쟁의 폐허 위에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자유민주국가로 우뚝 세운 것은 여기 국사봉에 군대를 주둔시킨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은 것이기에 이들 영혼들의 판단은 역시 옳았습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함에도 휴전선 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국사봉을 왜 서둘러 되돌려 받지 않느냐고 성화입니다. 때가 되면 대한민국이 어련히 알아서 돌려받아 국사봉에다 국사들을 다시 모실 터인데, 당사자도 아니면서 성화를 부리는 그 나라 지도자나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매번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머리 조아리며 거리 투쟁에 나서는 이들에 진정한 국사(國師)는 왕과 그 세력의 안위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들의 국리민복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오전10시7분 오지재고개를 출발했습니다.
동두천중앙역 인근의 버스정류장에서 9시30분 경 대진대학 가는 버스에 올라 이번 종주산행의 들머리인 오지재고개에 도착하기까지 20분가량 걸렸습니다. 삭풍이 밤새 몰고 온 냉랭한 시베리아 기단이 수은주를 0도 밑으로 끌어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얀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손끝이 아려오고 귀 바퀴가 시려와 겨울추위가 시작됐음을 실감했습니다. 겨울이 이렇게 가을을 밀어내고 11월 한 가운데에 자리 잡는 것이 올해만의 일이 아닌데도 등을 보이며 떠나가는 가을에 눈길이 간 것은 회갑을 막 넘기고 오래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는 저희들처럼 그 발걸음이 마냥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관광버스 3대를 동원한 재경 경남고 동창들이 같은 시간에 산행을 시작해 들머리가 붐볐습니다. 오지재에서 북사면을 타고 돌탑이 세워진 570봉에 오르기까지 25분이 걸렸는데, 땅바닥이 축축하고 서릿발이 선 곳도 많아 미끄러질까봐 조심해 올랐습니다. 이내 눈발은 멈췄지만 나뭇가지에서 단풍들을 떨쳐 낸삭풍의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래서 햇살이 닿는 능선에 올랐어도 냉기는 여전했습니다.
11시33분 해발737m의 왕방산을 올랐습니다.
왕방산(王訪山)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 임금께서 자식들의 골육상쟁을 피해 이산 아래 왕방사에서 잠시 은거하였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합니다. 오지재고개에서 동진해 오른 570봉에서 정북으로 뻗어나간 산줄기를 따라 걸어 왕방산 정상에 다다르기까지 딱 1시간 걸렸습니다. 가파른 길은 로프를 잡고 내려가고 커다란 암봉은 에돌아가 헬기장에 도착한 시각이 11시6분으로 오지재고개를 출발할 때 흩날렸던 눈발은 벌써 멈췄으며, 새파란 하늘이 도도하고 냉랭해 보였습니다. 헬기장에서 19년 후배 둘을 사진 찍는 동안 환희 웃는 그들에게서 세월이 앗아간 제 젊음을 다시 보는 듯해 반가웠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포천 시내가 확연하게 보이는 능선 길을 따라 걸어 왕방산 정상에 올라서자 북서쪽으로 한북정맥 분기점에서 감악산으로 이어지는 한북감악지맥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이번에 걷고 있는 왕방지맥이 동두천을 관통하는 신천의 동쪽 울타리라면 감악지맥은 서쪽 울타리입니다. 한북정맥의 한강봉에서 발원한 신천은 이 두 지맥으로부터 받는 물을 전곡의 한탄강으로 실어 나릅니다.
13시27분 해발745m의 국사봉 앞 헬기장에서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왕방산을 같이 오른 경남고동문들이 다른 길로 하산 해 국사봉 가는 길은 저희들이 전세 낸 듯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조용했습니다. 왕방산에서 북서쪽으로 내려가 다다른 왕방이고개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면 깊이울 계곡을 거쳐 심곡저수지에 이르게 되는데 저희들은 직진해 국사봉으로 향했습니다. 얼룩무늬의 수피가 낯익어 보이는 물푸레나무 숲을 지나 오른 587봉의 동사면에서 바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잡아 점심을 든 후 13시 정각에 종주산행을 재개했습니다. 610봉을 넘어 오른 쪽 아래로 깊이울 계곡 길이 분기되는 안부로 내려갔다가 이번 산행에서 가장 가파른 깔딱 길을 올랐습니다. 왕방산에 오르는 길에 만난 수북이 쌓인 낙엽에 살짝 내려앉은 싸레기 눈은 이미 다 녹아 국사봉으로 오르는 된비알길이 미끄럽지는 않았습니다. 헬기장에 올라서자 국사봉에서 서쪽으로 갈리는 소요지맥이 한 눈에 잡혔습니다. 헬기장에서 조금 올라가 정상에 자리한 미군부대를 왼쪽으로 우회해 시멘트길로 올라섰습니다. 십 수m 걸어 내려가다 오른 쪽 능선으로 올라 지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15시15분 가마골고개에서 잠시 머물러 합동사진을 찍었습니다.
미군부대를 왼쪽 밑으로 에돌아 다시 오른 지맥 길은 북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곳곳에 표지기가 걸려있고 내려가는 길의 경사도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낙엽이 쌓인 길이 언 곳도 몇 곳 있어 여전히 조심스러웠습니다. 헬기장을 출발 42분 후 693봉 바로 앞의 전위봉에 올라 남은 과일을 들며 10분 넘게 쉬었습니다. 바로 앞의 693봉을 14시21분에 오른쪽으로 에돌고 나자 바람이 닿지 않아 몸에서 온기가 되살아났습니다. 430봉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름병의 확산을 막고자 참나무들을 베어내 비닐로 밀봉한 것들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더할 수 없이 맑은 산 공기를 마시며 사는 참나무들도 전염병에 저토록 고전하는 데 온갖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무슨 수로 신종 플루를 피해갈 수 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430봉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인 지맥 길은 울창한 잣나무 단지를 지나 490봉으로 이어졌고 490봉에서 다시 왼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북동쪽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오른 쪽 아래 심곡저수지가 아주 가깝게 보일 정도로 고도를 낮추어 왼쪽 아래 기도원 같은 단독 건물이 보이는 가마골고개로 내려섰습니다. 신북면 갈월리와 포천읍 심곡리를 이어주는 깊숙한 십자안부인 이 고개 마루의 황토 흙 맨살이 저녁 햇살을 받아 포둥포둥해 보였습니다. 5분간 걸어올라 오른 쪽으로 하늘봉 길이 갈리는 능선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16시21분 칠월리 고개에 도착했습니다.
하늘봉 갈림길에서 나지막한 봉우리를 넘어 “가마골”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진 꽤 넓은 임도로 내려서기까지 간벌한 나무들이 길을 막아 걷기에 불편했습니다. 15시38분에 내려선 임도에서 쉬지 않고 15분간 더 걸어 이번 산행의 마지막봉우리인 373봉에 올라섰습니다. 373봉에서 왼쪽으로 3-4분 진행하다 지맥길이 아님을 확인하고 되돌아와 오른 쪽 능선으로 들어선 알바는 작년 1월 저 혼자서 종주했을 때도 똑 같았습니다. 373봉에서 오른 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좌사면에 빽빽이 들어선 잣나무들로 지맥길이 어둡게 느껴졌습니다. 368번 지방도가 지나는 칠월리고개의 청산고개쉼터 앞으로 내려선 후 왼쪽으로 2-3분을 걸어 다다른 갈월리 버스정류장에서 왕방지맥 2구간 종주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미군부대가 국사봉에서 철수한다 해도 그 자리에 다시 국사(國師)를 모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국사(國師)란 임금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아야 하는 데 이 혼탁한 땅에서 그런 분을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찾았다 해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도 남의 눈의 티끌을 찾아내는 데 이력이 난 이들이 이분을 청문회에 세우겠다고 하면 아무리 백성들이 모시고자 해도 그 자리를 맡겠다고 누가 나서겠는 가 싶어서입니다. 국사봉에다 국사를 모시지 못해온 부끄러움보다 이 나라 국사들인 훌륭하신 원로들을 존경하지 않는 핍박한 오늘날의 사회분위기가 더 부끄럽고 원로 자리를 세치 혀가 능한 인터넷 세객들이 차지할 까 두렵기도 합니다.
천마지맥 종주 후 처음으로 지맥종주를 같이 한 송회장이 끝까지 잘 버텨주어 16시30분에 갈월리를 지나는 동두천행 버스를 놓치지 않고 오를 수 있었습니다. 길안내를 맡은 유대장과 먼 길을 마다않고 따라나선 송회장, 그리고 다른 회원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산행사진>
한북왕방지맥 종주기1
*지맥구간:287.3봉-회암고개-오지재고개
*산행일자:2009. 10. 19일(일)
*소재지 :경기동두천/포천
*산높이 :해룡산661m, 칠봉산508m, 천보산423m
*산행코스:축석고개-한북정맥갈림길 287.3봉-어하고개-회암고개
-천보산-칠봉산-해룡산-오지재고개
*산행시간:9시23분-17시42분(8시간19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 회원7명
(24회서중원, 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9기유한준, 오창환, 45회김영준)
요즈음 아이들은 고모보다 이모를 더 따르는 듯합니다.
IMF금융위기 이후 많은 아버지들이 직장에서 밀려나고 어머니들이 일터에 나가 가계를 꾸려가는 가정이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가정에서 핵심적 리더역할을 해온 아버지들의 위상이 옛날만 못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버지의 위상하락은 자연 아버지에 대한 의존이 줄어들게 되고 존경심도 같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데 대부분 이 빈 부분을 어머니들이 채우고 있으므로 어머니의 파워가 점점 강해지는 같습니다. 어머니의 파워가 그 세를 더해갈 수록 어머니와 자매간인 이모에 대한 이야기 양이 늘어나고 그 결과로 아이들의 이모에 대한 호감도도 같이 커진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자랄 때에는 고모 네든 이모네든 나들이를 가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교통편도 여의치 못했고 나들이를 자주 갈만큼 가정형편도 넉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방학 때 주로 놀러간 곳은 고모 네였습니다. 한 분 밖에 안 게신 고모님은 아버지보다 손 윗분으로 제 집에서 좀 떨어진 포천에서 사셨습니다. 지금은 동두천시로 바뀐 광암리가 그곳인데 고모네 동네는 제 집 동네보다 훨씬 두메산골로 주위 산들이 꽤 거해 보였고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깊고 맑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모님은 뒤뜰의 대추와 감은 물론 앞산에서 잣을 따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제게 챙겨주셨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이분들과 지내온 이야기를 듣고자 고모님을 찾아뵙곤 하다가 몇 년 전 고모님이 세상을 뜨신 후로는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이번에 그 근처 해룡산을 오르면서 돌아가신 고모님이 아직도 제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지난 일요일 고모 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산으로 어렸을 때 참으로 거한 산이다 했던 동두천의 해룡산을 올랐습니다. 해발고도가 661m인 이 산과 견줄만한 고산이 제 집 근처에 없었고 동네 산에서 보지 못한 잣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서 이 산을 유독 높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절터만 전해지는 회암사 위 천보산과 일곱 개의 봉우리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칠봉산이 가까이 있어 이 산들과 한 덩어리의 산군(山群)을 이루고 있는 해룡산이 이번 산행에서도 고도가 비슷한 다른 산보다 더 거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산을 오르내리는 중 돌아가신 고모님이 떠 오른 것은 제게 대추와 감, 그리고 잣 등을 챙겨줄 만한 어른 들이 이제는 한 분도 살아계시지 않아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찾아가 뵙고 마음속으로나마 응석을 부릴 수 있었던 유일한 분이 고모님이었기에 이분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도 얼마간 남아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경동동문산악회에서 한북정맥과 이 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천마지맥, 오두지맥과 화악지맥 종주를 모두 마치고 이달부터 한북왕방지맥 종주에 들어갔습니다. 한북왕방지맥은 축석고개 위 한북정맥의 한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갈라져나간 산줄기로 해룡산, 왕방산, 국사봉과 개미산을 일군 후 연천의 아우라지에서 한탄강을 만나 끝나는 지맥입니다. 이번에 오른 해룡산은 한북정맥분기점에서 오지재에 이르는 첫 번째 구간의 봉우리 중가장 높은 봉우리로 포천과 동두천을 가르는 고산입니다. 군부대가 자리한 정상을 밟을 수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칠봉산과 천보산을 연계해 오르면 가볍게 하루를 즐길 수 있는 짭짤한 산행이 될 것입니다.
오전9시23분 축석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산행시작 20분이 채 안되어 왕방지맥에 발을 들였습니다.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왕방지맥은 해발고도가 300m 내외인 산줄기로 이어져 어하고개로 내려서기까지 딱 한 번 큰 바위를 지났을 뿐 1시간 40분 내내 산행이 편안했습니다. 어하고개에서 회암고개에 이르는 능선도 앞서 지나온 산줄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여전히 산행이 편안했습니다. 2년 전 저 혼자서 이 구간을 지날 때는 눈발이 내려 추웠었는데 이번에는 날씨도 쾌청하고 한낮의 기온이 20도선으로 덥지도 춥지도 않아 산행하기에 딱 좋았습니다. 여기에다 온 산에 단풍이 울긋불긋 절정을 이루었고 산행코스를 짧게 잡아 시간도 넉넉했습니다. 어하고개에서 50분을 더 걸어 왼쪽 아래 천보약수가 있고 오른쪽으로 체육공원 길이 갈리는 십자안부에서 나무계단 길을 올라 능선 길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가을단풍이 한창이어서 이런저런 나들이들이 많이 잡혀 있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기일이 겹치는 등 개인적인 일들로 몇 몇 동문들이 이번 산행을 같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의 자리 비움을 실감한 것은 넓은 곳에 자리 잡고 빙 둘러 앉아 점심을 들 때였습니다. 그전만큼 점심메뉴도 풍성하지 못했고 반주가 돌아가는 흥도 전과 같지 않았으며 식사시간도 반시간이 넘지 않았습니다.
12시 34분 오후산행을 재개했습니다.
오른 쪽 사면에 들어선 천주교 공원묘지를 지나 헬기장이 들어선344봉에 올라선 시각이 13시1분이었습니다. 동두천시에서 이 봉우리를 천보산으로 명명하고 표지목을 세운 것은 최근의 일로 칠봉산에서 가까운 암봉인 423봉을 천보산으로 알아온 저로서는 5만분의 1 지형도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이 봉우리를 어떤 근거로 천보산이라고 이름 지은 것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투바이고개로 알려진 회암고개로 내려서자 길 건너에 한 낮의 가을햇볕을 즐기고 있는 까만 염소 두 마리가 그 옆을 지나는 저희들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마사토의 능선 길을 걸어 왼쪽 아래로 회암사지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13시45분 로프 줄이 늘여진 423봉에 올랐습니다.
이제껏 천보산으로 알아온 이 봉우리는 암봉으로 표지석은 세워져 있지 않았지만 시야가 탁 트여 전망이 빼어났습니다. 동쪽 멀리로 수원산과 주금산이, 서쪽으로 감악산이 선명하게 보였고 칠봉산과 해룡산이 지척의 거리에 자리한 여기 포천의 천보산까지 저 멀리 의정부의 천보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북으로 북으로 내달아 이어졌는데 중간 중간의 암봉들과 절정에 이른 단풍들로 이제껏 걸어온 능선의 실루엣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서쪽 바로 아래 소나무(?) 여러 그루가 울타리를 치고 있는 공터가 회암사지라고 같이 오른 서중원 동문이 일러주었습니다.
예정에 없던 보너스 산행지는 북서쪽 가까이에 위치한 해발508m의 칠봉산이었습니다.
바로 해룡산을 올라 오지재로 내려서면 15시를 조금 지나 산행을 마칠 것 같아 칠봉산을 올라 곁불을 쬐었습니다. 탱크가 지나가도 충분할 만큼 넓은 길의 장림고개로 내려섰다가 고도를 100m 가량 높여 14시51분에 칠봉산 정상에 오르는 동안 새빨갛게 물든 단풍나무를 만나 카메라에 옮겨 담아 왔습니다. 정상인줄 알고 오른 첫봉우리에서 100여m 북서쪽으로 옮겨 올라선 암봉이 주봉으로 서쪽으로 시야가 탁 트였습니다. 일곱 봉우리를 모두 올라야 이 산의 진수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여의치 못해 바로 장림고개로 내려갔습니다. 다시 천보산으로 오르다가 왼쪽으로 이 봉우리를 우회해 산허리를 에도는 임도길이 갈리는 해룡산 바로 아래 십자안부로 내려섰습니다.
16시48분 해룡산 정상의 군부대 앞에 다다랐습니다.
임도 갈림길 안부에서 50분을 치고 올라 정상에 오르는 길이 이번 산행에서 모처럼 숨을 헐떡여야 했던 깔딱 코스였습니다. 잔뜩 흐린 날씨에 간간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저 혼자 올랐을 때는 참으로 을씨년스럽다한 이 산이 동문들과 같이 오르자 만산홍엽으로 바뀐 산길이 환해 보여서인지 힘도 그다지 들지 않았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다다른 군부대 앞에서 편안한 왼쪽 길 대신 제가 앞장 서 지난번에 밟았던 오른 쪽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길도 좋지 않고 조금 더 힘들었지만 포천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이곳에서 졸업한 서중원동문에는 바로 아래로 생가가 보여 이번 산행이 회갑기념산행으로도 뜻 있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밑에서 바라만 보았던 고향 산을 이번에 처음으로 직접 오른 이 친구가 느꼈을 그 감회가 같이 오른 저희들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군부대 울타리를 오른쪽으로 우회해 정문 앞 시멘트도로로 내려서기까지 20분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17시42분 오지재고개로 내려가 첫 구간 산행을 마쳤습니다.
시멘트군사도로를 따라 굽이굽이 돌며 오지재고개로 내려서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고 바위 길을 1시간 가까이 치고 올라간 데다 산행시간이 8시간을 넘자 모두들 힘들어 했습니다. 왕방산으로 이어지는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 한 후 때마침 이 고개를 넘는 버스를 타고 무봉리로 나갔습니다. 무봉리순대집 본점에서 감동의 산행을 치러낸 서중원동문이 저녁을 내 순대와 순대국을 맛있게 들면서. 반주로 곁들인 막걸리로 무사산행을 자축했습니다. 저녁자리를 마련해준 서중원동문과 산행대장을 맡은 유한준 동문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두 해전에는 오지재 고개에서 버스를 타고 동두천으로 이동하는 중 제가 탄 버스가 고모집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고모님 댁 앞산이 해룡산의 한 줄기임을 알았습니다. 이모님들은 파주 금촌 등 대처에서 사셨기에 이렇다하게 높은 산이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이모님들 보다 고모님을 자주 찾아 뵌 것도 고산인 해룡산이 저를 그리로 불러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도 나무를 하러 동네 야산을 많이 올랐습니다. 나무를 하러 지게지고 산에 오르기가 정말 싫었지만 그렇게 오른 산이 싫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으니까 대학교 다닐 때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꾸준히 산행을 이어왔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 높게만 느껴진 고모님 댁 인근의 해룡산이 저를 산으로 이끈 듯싶어 이 산과 돌아가신 고모님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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