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북감악지맥 종주기3(최종회)
*지맥구간:간패고개-마차산-한탄대교
*산행일자:2010. 3. 20일(일)
*소재지 :경기동두천/연천
*산높이 :마차산588m
*산행코스:간패고개-마차산-댕댕이고개-양원리고개-409.7봉-한탄대교
*산행시간:10시39분-17시30분(6시간51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13명
(24회김주홍, 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7회송기훈, 29회김정호, 오창환,
유한준, 이석태, 43기서석범, 김동희, 45회김영준, 초대회원 박현출)
한북감악지맥이 끝나는 한탄강에서 한탄대교를 건너면 바로 경기도 연천의 전곡리에 이릅니다. 여기 전곡리에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된 노천 유적지가 있습니다. 전곡리 유적 터는 지금은 깎아내려 들판처럼 되었지만 당시는 낮은 산이었다고 하니 현생인류의 선조인 호모사피엔스는 이 산의 숲속과 한탄강을 돌아다니며 채집과 수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때 사용된 석기들은 겉면을 떼어낸 것들이라 울퉁불퉁하면서도 투박했으며 조금 두들겨 보다 쉽게 쥘 수 있도록 했고 약간 날을 세워 땅을 파거나 나무나 뼈 같은 것을 찍거나 또 고기를 자르는데 편리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이화님의 "한국사이야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만들어진 것은 대략 45억 년 전의 일이고, 이 지구에 침엽수가 나타나 숲을 이룬 것은 중생대 때의 일로 2억년이 넘습니다. 인류는 약350만년 전에 지구 상에 등장했으며, 최초의 인류인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는 숲속에서 식물을 채집하고 동물을 수렵하며 살았다 합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대략28만 년 전의 것으로 구석기시대의 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일입니다. 그 후 인류가 채취와 수렵을 끝내고 자연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가 열리는 1만 년 전부터입니다.
그동안 인류는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에서 호모하빌리스, 호모엘렉투스, 호모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로 진화했습니다. 아우스트랄로페테쿠스의 뇌용량이 500cc였는데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뇌 용량이1,500cc-1,600cc로 커진 데는 직립보행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류의 진화가 걷기와 더불어 진행된 덕분에 이번에 저희들은 7시간 가깝게 걸어 감악지맥 종주를 마칠 수 있었고, 먼발치서나마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인 전곡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오전10시39분 간패고개를 출발했습니다. 조금씩 해가 길어져 낮의 길이가 밤과 같아진 춘분을 맞았는데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아침 공기가 냉랭했습니다. 중국에서 황사가 밀려와 누렇게 하늘을 덮으리라는 황사주의보가 해제된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기에 뒤늦게 심술을 부리는 삭풍 때문에 춘분을 곱게 맞이할 수 없다며 투정부릴 계제가 아니었습니다. 간패고개에서 새로 마련한 회기를 펼쳐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시멘트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이내 시멘트 길은 끝났고 묘지를 지나 교통호가 파인 능선을 따라 산 오름을 이어갔는데 북서쪽 사면을 지나서인지 밤새 얼은 지표의 흙이 아직은 녹지 않아 걸을 만 했습니다. 산행시작 25분 만에 “마차산2.8Km/동두천6.0Km/전곡읍(간파리)”의 이정표가 세워진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라 왼쪽 아래 늦은고개로 내려섰습니다. 시멘트길이 고개를 넘는 안부사거리인 늦은고개에서 직진 길인 임도를 따라 올라 다다른 마차산1.2Km 전방의 삼거리에서 6분을 더 걸어 벤치가 세워진 공터의 410봉(?)에 올라선 시각이 11시48분이었습니다.
12시29분 해발588m의 마차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410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안부로 내려섰다가 가파른 길을 따라 걸어 오른 헬기장에서 선두팀에 합류했습니다. 전망이 빼어난 헬기장에서 사방을 둘러본 후 10분 남짓 걸어올라 기도원삼거리 이정표가 서있는 560봉에 이르렀습니다. 560봉에서 0.1Km를 더 걸어 마차산 정상에 올라서자 먼발치서 낯익은 봉우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왔습니다. 천애의 암벽이 동쪽 사면을 받쳐주는 이 산과 마주한 동쪽의 소요산이 그 전모를 내보였고, 초성천을 사이에 두고 이 소요산과 자웅을 겨루는 종현산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이 산들 뒤로 해룡산, 왕방산과 국사봉을 차례로 일군 늠름한 왕방지맥 산줄기가 한 눈에 잡혔고 북동쪽 먼발치에 자리한 종자산도 지난달에 한번 올라서인지 어느 산인지 쉽게 가름 할 수 있었습니다. 감악지맥과 나란히 북쪽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화천을 조망한 후 북적대는 정상에서 자리를 옮겼습니다.
동두천 시내를 관통하는 강화천은 한북정맥의 한강봉에서 발원해 한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전장 38.5Km의 물줄기입니다. 동쪽의 왕방지맥, 남쪽의 한북정맥, 그리고 서쪽의 감악지맥을 울타리로 삼고 있는 강화천은 이들 울타리산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덕계천, 초성천 등 총 15개 지류의 물을 받아 한탄강으로 흘러가고, 강화천의 물을 받은 한탄강은 경기도 연천의 미산면과 전곡읍의 도감포 사이에서 임진강과 몸을 섞고, 임진강은 다시 파주 교하의 오두산 앞에서 한강에 합수됩니다. 오두산 앞에 이른 강화천 물은 한강의 도움으로 조강을 거쳐 서해바다의 넓은 가슴에 안기게 됩니다. 이처럼 한강봉에서 발원한 강화천은 한탄강, 임진강과 한강을 차례로 거쳐 서해로 흘러들어가 그 일생을 마무리하기에 이 하천이 한탄강의 제1지류이고, 임진강의 제2지류이며, 한강의 제3지류로 불리는 것입니다.
13시40분 점심식사를 끝내고 다시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마차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진행하다 이내 바람을 가릴 수 있는 아늑한 곳에 자리를 잡아 1시간가량 점심을 들었습니다. 키를 넘는 억새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마른 늪지(?)에서 점심을 든 후 정 북쪽으로 이어지는 감악지맥을 다시 이어갔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인지 능선 길이 거의 말라 댕댕이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생각보다 미끄럽지 않았습니다. 산행재개 15분 후 오른쪽 아래로 소요산역 길이 갈리는 댕댕이고개에 이르렀고, 이 고개에서 낙엽이 쌓여 푹신한 길을 반시간 가량 더 걸어 밤골재에 다다랐습니다. 밤골재에서 몇 분을 더 걸어 올라선 토치카 봉에서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어 내려선 약수터갈림길에서 남은 과일들을 꺼내들며 십 수분을 쉰 후, 다시 10분을 걸어 14시38분에 표지판에는 “마차산정상3.0Km/초성교4.9Km/소요산역3.0Km"라고, 표지봉에는 “양원리고개”라고 적힌 봉우리에 다다랐습니다.
16시21분 거송산악회에서 세운 구정산 제비(九政山 祭碑)앞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했습니다. “양원리고개”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연천군/동두천 시계산줄기를 버리고 왼쪽으로 진행해 임도 길로 들어섰습니다. 임도 길을 따라 진행하는 중 화생방훈련용(?) 종이 걸린 봉우리를 들른 후 다시 임도로 내려섰습니다. 강풍에 못 견뎌 임도 길에 쓰러진 소나무들 거의 다가 절개면에 간신히 뿌리박고 있는 것들이어서 저 나무를 저 지경으로 만든 것도 결국 여기에다 길을 낸 사람들이다 싶어 안쓰러웠습니다. 얼마 후 “마차산정상4.9Km/초성교2.9Km"의 이정표가 세워진 지점을 지나 만난 넓은 임도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돌렸습니다. 동행한 친구들에 감악산 너머 북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줄기가 송악산이라고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은 파주의 선산에 오르면서 이 산을 자주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헬기장을 지나고 계속 이어지는 단조로운 임도 길이 지겹게 느껴질 즈음 1차 종주 시에 보았던 깃대가 눈에 띄어 임도 오른 쪽의 깃대가 세워진 봉우리에 올라섰습니다. 409.7봉의 삼각점은 확인하지 못한 채 다시 내려선 임도를 따라서 10분 남짓 걸어올라 구정산(九政山) 제비(祭碑) 앞에 도착해 먼저 와 쉬고 있는 선두팀에 합류했습니다.
17시30분 한탄대교 앞에서 한북감악지맥 종주산행을 모두 마쳤습니다.
구정산(九政山) 제비(祭碑) 출발 10분 남짓 후 또 다른 구정산(鳩頂山) 제비(祭碑)를 지났는데 구정산(九政山)과 구정산(鳩頂山) 모두 지형도에 표시가 안 되어 어느 산이 그 산인지 가름되지 않았습니다. 구정산(鳩頂山) 제비(祭碑)에서 7-8분을 더 걸어 삼각점이 박힌 291봉에 올라서자 평야가 푹 꺼져 만들어진 듯한 협곡을 따라 굽이져 흐르는 한탄강과 이 강 유역에 자리해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된 전곡리 시내와 넓은 벌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291봉에서 내려가 헬기장을 지나 다다른 교통호삼거리에서 이번에는 오른 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하산 길이 가팔랐지만 1차 종주 때 내려갔던 왼쪽 길보다 한결 쉬웠습니다. 한탄대교 아래에서 전 대원이 함께 사진을 찍는 것으로 한북감악지맥 종주산행을 모두 마치고 동두천 시내로 옮겨 완주를 자축했습니다.
더불어 자축해야 할 것은 나이 들어서도 주요 산줄기를 빼놓지 않고 종주하겠다고 의지를 세우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직립보행을 계속해 완주할 수 있는 체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 달 한북연인지맥으로 옮겨 종주산행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완주에의 강력한 의지와 강인한 체력 덕분입니다. 그동안 뇌용량이 훨씬 커졌고 길이 잘 나있으며 걷기를 도와주는 제반 장비의 성능이 좋아 28만년 전에 전곡리 유역을 걸었던 호모사피엔스보다 훨씬 더 잘 걸으리라 자신합니다.
<산행사진>
한북감악지맥 종주기2
*지맥구간:수르레미고개-감악산-간패고개
*산행일자:2010. 2. 21일(일)
*소재지 :경기파주/양주/연천
*산높이 :감악산675m
*산행코스:수르레미고개-365.7봉-설머치고개-감악산-간패고개
*산행시간:9시15분-18시48분(9시간33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 12명
(24이규성, 이기후, 우명길, 27송기훈, 조동식, 28허우평, 29유한준,
이정주, 김정호, 43기김동희, 서석범, 초대손님 박현출님)
한북감악지맥 종주 길에 감악산에서 수 백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상공을 날며 임꺽정봉 위를 빙빙 도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산위에서 까마귀를 만나보기는 산 밑에서 까치를 만나는 것처럼 흔한 일입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산 한라산 정상에서도 꽤 여러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시위하듯 하늘을 나는 것을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산을 에워싸고 있는 파주/양주/연천 3개 시군의 까마귀들이 한 마리도 빠짐없이 동원된 것이 틀림없을 진데 그들 세상에 뭔가 큰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까마귀를 까치보다 홀대했습니다.
뭘 잘 까먹는 사람들에 까마귀고기를 먹었냐고 비아냥대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 새를 위험하고 흉측한 새로 여겨 멀리했습니다. 후일 태종으로 등극하는 이방원으로부터 연회에 초대받은 포은 정몽주 선생에 모친께서 들려준 아래 시조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까마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둔한 동물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교육심리학 시간에 교수님으로부터 학습을 통해 대를 이어 정확하게 울음소리를 전수받은 까마귀의 기억력은 교육학자들의 테스트결과 13까지 셀 수 있는 것으로 밝혀져 하늘을 나는 새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배운 적이 있습니다. 실제 까마귀는 지혜롭게도 먹이를 저장하기도 하는 데 그 평균저장기간이 무려 13.6일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또 하나 잘못 쓰고 있는 말이 오합지졸(烏合之卒)입니다. 떼를 지어 모여봤자 별 볼 일 없는 무리들을 뜻하는 이 말에는 까마귀가 겁 많고 약한 새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실제는 이와 전혀 달라 매와 1:1로 싸워도 이긴다고 합니다. 실제로 저는 40년 전 쯤 시골에서 까마귀와 매가 서로 싸우다 결국 매가 도망가는 장면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이런 까마귀들이 오후 늦게 임꺽정봉에 모여든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13을 셀 정도로 영특한 새라면 기왕이면 감악산의 주봉인 설인귀봉에서 모임을 가질 법 한데 굳이 언저리 봉우리인 임꺽정봉을 회합장소로 고른 뜻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마도 설인귀는 당나라 장수이고 임꺽정은 비록 대도라 해도 우리나라 백성이기 때문이 아니겠나 생각했습니다. 매를 이기는 까마귀가 임꺽정과 한 편만 되어준다면 임꺽정이 설인귀를 쫓아내고 주봉을 차지할 날도 멀지 않겠다 했습니다. 감악산의 산 이름이 까막산에서 유래됐다면 이 산을 새까만 까막산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1등공신이 까마귀일 것이고 이 땅에 사는 일등공신 까마귀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설인귀와 손잡을 리 없고보면 까마귀가 모여들 곳은 임꺽정봉 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아침9시15분 경기도파주시와 양주시를 가르는 수르레미고개를 출발했습니다.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우수가 이틀 전인 이날 한낮 기온이 영상9도까지 올라간다고 해 겨울산행 시 늘 입었던 하복내의를 집에다 벗어두고 산행 길에 올랐습니다. 2년 전 이 구간을 9시간 걸려 종주한 바 있어 그때처럼 랜턴을 켜고 하산하는 일을 피하고자 초장부터 서둘렀습니다. 수르레미고개에서 점심식사가 예정된 365.7봉까지는 북진 길로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고 넓은 군사도로를 따라가는 것이어서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출발해 눈 덮인 군사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잠시 능선으로 올라 묘지를 지나면서 지난 번 지뢰를 매설했던 지역이어서 마루금을 벗어나서 빙 돌아간 노고산-수르레미고개 구간의 산줄기를 뒤돌아 본 후 다시 임도로 내려가 북진했습니다. 얼마 후 오른 쪽 능선 길로 내려섰다가 이내 길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복귀해 알바를 면했습니다.
10시49분 수레네미고개로 내려섰습니다.
복귀한 군사도로를 따라 북진해 헬기장을 지나고 그 한참 후 삼거리에서 큰 길을 벗어나 임도 길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후 암봉에 다다라 배낭을 내려놓고 과일을 꺼내들며 첫 쉼을 가졌습니다. 서쪽 건너로 보이는 우람한 산이 해발496m의 파평산(坡平山)으로 이 산은 파주시와 양주시 양쪽에 걸쳐 있는 감악산이나 고령산을 제외한다면 파주시 안에 있는 산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입니다. 이 산 북쪽 자락의 용연(龍淵)연못은 신라 진성왕 때 파평윤씨의 시조인 신달이 태어난 곳으로 파평윤씨의 성지입니다. 수양대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파평윤씨 가문의 부인이 정의왕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제 고향이 원평도호부에서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하니 파평산은 파주시민에는 그저 그런 산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암봉에서 수레네미고개로 내려서는 북사면은 잣나무 숲으로 쌓인 눈이 녹지 않은 데다 발자국이 보이지 않아 내려가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암봉에서 북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제 길이 아닌 것 같아 오른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이내 나타난 희미한 길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내려가 수레네미고개에 다다랐습니다. 이 고개의 마루에서 산길로 치올라가 봉우리에 올랐다가 다시 군사도로로 내려가 북진하면서 사격통제용 깃대와 헬기장 그리고 군차량을 숨겨놓는 시설물을 차례로 지났습니다.
12시24분 365.7봉에 올라 점심을 들었습니다.
묘지 옆 고개 마루를 외롭게 지키는 소나무 한 그루를 카메라에 담은 후 오른 쪽으로 인삼밭이 보이는 무건리고개에 다다른 것이 11시44분이었습니다. 군 초소(?)로 지어진 듯한 2층 시멘트건물이 세워진 무건리고개에서 설머치고개까지 감악지맥의 산줄기가 이제껏 같이 해온 시계를 벗어나 서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이어지기에 신경 쓰지 않고 시계를 따라 북진하다가는 지난 번처럼 알바하기 십상인 길입니다. 무건리고개에서 산길로 들어서 훈련용 종이 세워진 봉우리로 올라갔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내려선 군사도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밭가의 시멘트로 포장된 넓은 공터에 이르렀습니다. 오른 쪽 시멘트 포장도로를 다라 오르다가 다시 산길로 들어가 헬기장이 들어선 365.7봉에 올랐습니다. 삼각점이 박혀 있는 이 봉우리에서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 동안 매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빙빙 돌았습니다. 이번 산행 멤버의 막내인 한 후배가 혼자 사는 저를 위해 싸온 밥을 맛있게 들면서 반시간 남짓 담소를 나눈 후 13시가 조금 지나 설머치고개로 향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14시10분 설머치고개마루에서 371번 도로를 건넜습니다.
365.7봉을 처음 오른 것으로 잘못 알았음을 인지한 것은 이 봉우리에서 경사진 길을 따라 고개마루로 내려선 후로 2년 전에도 이 길로 내려선 일이 기억나습니다. 서쪽너머에서 불어오는 삽상한 골바람을 한 아름 품고 오른 쪽 군사도로를 따라 진행했습니다. 군차량 엄폐용 구축물을 지나고 상산김씨12대손 묘지가 들어선 능선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두 해전 이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갔다가 계곡을 만나 되올라온 씁쓰레한 기억을 떠올리며 직진해 얼마 후 도 다른 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왼쪽으로 잘못 내려가 군부대를 왼쪽 울타리 밑으로 우회해 371번 도로로 내려선 다음 이 길을 따라 설머치고개로 올라간 된 알바가 시작된 곳이 이 갈림길임을 확인한 후 오른쪽의 동쪽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내 임도 길은 끝나고 산길이 이어졌고 넓은 묘지를 지나 급경사 길을 내려가 설머치고개로 내려갔습니다. 지난번보다 40분가량 늦게 도착해 서두르지 않으면 어둠보다 빨리 간패고개에 도착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몸 상태가 조금 덜 좋은 후배 동문 셋이서 종주산행을 이곳에서 중단하고 나머지 9명이 전열을 가다듬고 감악산을 설머치고개를 출발했습니다.
15시22분 제5훈련장의 가스실습실을 지났습니다.
공사로 파헤쳐진 질퍽한 길을 올라 다시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365.7봉 아래 고개마루에서 시작된 동진 길은 설머치고개를 지나 해발3배m중반의 봉우리까지 이어졌습니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걸어 올라선 이 봉우리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왼쪽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을 쫓아 깊지 않은 안부로 내려서는 길에 오른쪽 신암저수지를 조망했습니다. 다시 올라가 군사도로를 만나기까지 길 자체는 오르기가 힘들 정도가 아니었는데 이 길이 남사면에 나 있어 녹는 눈이 아이젠에 덕지덕지 들러붙어 엄청 불편했습니다. 군사도로를 7-8분 따라 올라 텅 빈 제5훈련장의 가스실습 건물을 지난 조금 뒤 다다른 삼거리에서 낙엽이 소복이 쌓인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밧줄을 잡고 바위길을 오르고 암봉을 왼쪽으로 우회해 첨성대모양의 군부대방공호를 지나 “신암저수지2.5km/정상0.7Km"의 이정목이 세워진 삼거리 안부에 도착한 시각이 14시19분이었습니다.
17시4분 해발675m의 감악산 고스락에 올라섰습니다.
삼거리 안부에서 새로 생긴 목조계단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정상을 0.6Km 남겨놓은 안부에서 다시 한 번 가파른 목조계단을 걸어 장군봉에 올라서니 남쪽으로 신암저수지와 원당저수지 및 봉암저수지가 한 눈에 보였습니다. 파주의 범륜사를 거쳐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곡 길은 누구라도 편히 쉬다 갈 수 있는 숲길인데 비해 설머치고개에서 오르는 능선 길은 깎아지른 천애의 암벽이 절경으로 조망이 빼어난 암릉 길이어서 그 맛이 같지 않은 데 이 산에서 암벽 아래 양주 쪽으로 흘러가는 물을 받아 가둬두는 곳이 이들 세 저수지입니다. 장군봉에서 암릉 위를 걸어 임꺽정봉으로 옮기는 중 수 백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이 봉우리 위를 날며 까옥까옥 짖어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임꺽정봉에서 안부로 내려섰다가 정상에 오르자 북서쪽으로 굽이져 흐르는 임진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아래 적성에서 멀지 않은 두지나루를 지나는 임진강 물줄기가 눈에 익은 것은 지난여름 그곳을 찾아가 황포돛배를 타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상에 세워진 비석은 설인귀비라고도 하고 진흥왕 순수비일 것이라고도 하는 데 글자가 보이지 않는 몰자비여서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18시50분 간패고개에 도착했습니다.
동쪽의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기도를 올린 후 650봉을 왼쪽으로 우회해 장군봉을 마주보는 병사바위를 지났습니다. 지성터 오른 쪽 능선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 헬기장을 지나서는 주력이 좋은 선발대 4명과 거리차가 크게 났습니다. 가래토시로 걷기가 불편한 한 친구와 후미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가면서 간패고개로 내려가는 길이 설마치고개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보다 경사가 완만해 다행이다 했습니다. 해가 많이 길어져 아직 어둡지는 않았지만 밝아서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18시20분 조금 지나 헤드랜턴을 켰습니다. 낮 동안은 녹는 눈이 아이젠에 붙어 애를 먹었는데 해가 지자 기온이 떨어져 걷기는 더 편했습니다. 다음 구간의 주산인 마차산이 정면으로 보이는 가 싶더니 얼마 후 묘지가 나타나고 이내 375번 도로가 지나는 간패고개에 도착했습니다.
택시로 동두천으로 옮겨 중앙역 부근에서 저녁을 함께 들었습니다.
설머치고개에서 산행을 먼저 종료한 두 후배동문들이 긴 시간을 기다려 저녁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저 같으면 시내에서 장시간 기다리는 것이 그 시간만큼 산행하는 것보다 더 고역이겠건만 마다않고 기다려준 두 동문이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선현들께서도 까마귀를 옳게보고 시조를 지으신 분도 계셨습니다.
조선조 세종 때 정승자리에 오르셨던 문인 이직선생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다하고 속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희고 속검은 건 너뿐인가 하노라
이제껏 알아온 까마귀와 실제 까마귀는 많이 다릅니다.
까마귀를 통해 본 세상도 서로 다릅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아 타협할 줄 모르고 자기만 옳다고 박박 우기는 무리들은 까마귀만도 못한 떼거리들임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산행사진>
한북감악지맥 종주기1
*지맥구간:한강봉-노아산-수르레미고개
*산행일자:2010. 1. 17일(일)
*소재지 :경기양주/파주
*산높이 :팔일봉464m, 노아봉337m, 노고산401m
*산행코스:(한강봉)...소사고개-팔일봉-노아산-노고산
-갈곡리버스정류장...(수르레미고개)
*산행시간:10시45분-17시20분(6시간35분)
*동행 :경동동문산악회원 11명
(24기이규성, 김주홍, 이기후, 우명길, 27기송기훈, 29기유한준,
이정주, 정병기/김의정, 43기김동희, 초대손님 박현출님)
이번에 두 번째로 오르는 한북감악지맥종주가 제게 의미 있는 것은 이 지맥을 지나며 장삼이사들의 그저 그런 이야기들을 마음 편히 엮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돈은 제6감이다”라는 명구는 영국의 작가 서머세트 모옴이 남긴 자전적 소설 “인간의 멍에”에 나오는 명언입니다. 돈이 없으면 인간의 5감이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므로 고우나 미우나 돈을 제6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읽은 이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밀드레드”는 돈을 제6감으로 생각해 돈을 쫓아 살아간 여인입니다. 다리를 저는 남자 주인공 필립캐리어는 네 번째 여인으로 만난 밀드레드에 철저히 농락당하고 마지막으로 세태에 물들지 않은 농장 처녀 셀리를 만나 결혼해 살아갑니다. 작가가 인생은 지나놓고 보면 다 그저 그런 것이다 함을 이야기하고 싶어 비중 있게 등장시킨 여인이 밀드레드였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이 60이 넘어 대학시절에 만났던 “밀드레드”라는 한 여인이 생각나 한북감악지맥의 첫 구간 종주산행을 마치고 의정부로 가야 할 친구가 법원리로 행선지를 바꾸는 것을 보고 7080 프로그램이 장수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친구와 함께 밀드레드를 처음 만난 곳은 그녀가 일하는 서울의 한 다방으로 1971년의 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얼마 후 이 여인이 서울에서 제 고향 파주의 소읍인 법원리 다방으로 옮겨왔고 겨울방학 때 파주 광탄의 제 집을 찾은 몇몇 친구들이 법원리로 가서 이 여인을 만나본 것이 숨겨진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얼굴이 예쁘장하다 해서 “밀드레드”라고 이름 붙여주었을 뿐 정작 그녀는 자신이 왜 밀드레드로 불리는 지도 잘 몰랐던 같고 꽤 두꺼운 이 소설을 읽어본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인생을 얼마만큼 살아온 이 친구와 제가 아직도 껄렁하기 이를 데 없는 이런 추억을 지워버리지 않는 것은 이런 것들로부터 잊혀 진 젊은 날의 초상화를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황금 같은 대학생활을 암울한 시대에 보내는 것이 한스럽고 아쉬워 빈털터리 저희들은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함께 문사철을 이야기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논하며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차를 날라주는 예쁘장하고 친절한 아가씨에 눈길을 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렇게 만난 여인이 밀드레드였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려 일자리를 옮긴 시골읍내까지 찾아가 커피를 마셨던 모습들이 1970년대 초반 저희들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당시 저희들은 비장하지는 못했지만 객기가 어릴 만큼 순수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간 시인 박인환님이 그의 시 “목마와 숙녀”에서 읊은 것처럼 “인생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배워온 저희들이기에 그 옛날 세속의 여인이지만 순수할 것으로 기대했던 여인 밀드레드를 만나보고자 법원리로 향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때의 순수한 추억을 불러내고자 법원리로 향한 것입니다.
10시45분 소사고개에서 경동동문산악회의 종주팀에 합류했습니다.
전날 마신 술이 과해 제 시간에 일어나지 못한 저는 아예 성당에 나가 아침미사를 올린 후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시간이 늦어 감악지맥이 시작되는 한강봉에서 종주 팀과 같이 출발할 수가 없어 중간에 합류키로 한 소사고개에 제가 도착한 시각이 10시40분으로, 미쳐 산행채비를 끝내지 못한 채 종주 팀을 만났습니다. 아침 9시경 말머리고개를 출발한 종주 팀이 한강봉에서 감악지맥에 발을 들인 후 은봉산을 거쳐 이곳 소사고개까지 오는데 100분 남짓 걸렸습니다. 소사고개에서 절개면을 오르는 길이 가팔랐고 올라선 능선에 눈이 많이 쌓여 눈 밟는 소리가 리드미칼하게 들렸습니다. 자작나무 조림지를 지나 정신없이 앞 사람을 따라가느라 팔일봉으로 한참 오른 후에야 오른 쪽 길로 들어서야 할 것을 그대로 직진해 마루금에서 벗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12시15분 해발464m의 팔일봉에 올랐습니다.
가파른 비알 길을 올라 전망 좋은 헬기장에 다다랐습니다. 챌봉과 한강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과 이 정맥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지는 오두지맥이 선명하게 조망되는 헬기장에서 같이 오른 두 친구와 사진을 찍은 후 조금 떨어진 팔일봉으로 향했습니다. 헬기장 아래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있는 몇 사람들이 길을 내주어 편히 올랐음을 안 것은 헬기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팔일봉으로 오르는 눈 쌓인 능선에 길을 힘들게 길을 내고 오르면서였습니다. 팔일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산줄기를 따라가면 고향의 선산에 닿게 됩니다만 종주산행 길이 아니어서 그 길을 버리고 감악지맥과 만나는 삼거리로 복귀하고자 이내 팔일봉 정상을 떴습니다. 십분 넘게 내려갔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조바심하다가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감악지맥에 복귀했습니다.
12시50분 하우고개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팔일봉을 오른 쪽으로 에돌아 내려선 하우고개는 군사도로가 넓게 나있는 십자안부로 1시간 전에 먼저 내려온 동료들이 이곳에다 자리 잡고 저희 3명을 기다리고 있어 미안했습니다. 날씨가 푹해 다행이었지 살을 에는 추운 날씨에 삭풍이 몰아쳤다면 엄청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겨울 산행의 단골메뉴인 오뎅 국을 준비해온 김주홍 동문 덕분에 이번 점심상도저 혼자 집에서 먹는 점심보다 훨씬 잘 차린 성찬이 되었습니다. 저녁 때 제사를 지내는 이기후 동문은 이 고개에서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 일행들은 13시30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금을 이어갔습니다.
14시9분 노아산이 얼마 남지 않은 헬기장에 이르렀습니다.
하우고개에서 군사도로 위쪽의 산줄기를 올랐다가 얼마 후 다시 군사도로로 내려갔습니다. 소북이 쌓인 하얀 눈이 아직은 녹지 않아 걷기에 딱 좋은 군사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중 몇 곳에서는 눈이 녹아 질퍽한 길도 지나야 했습니다. 노아산이 지척에 있는 넓은 헬기장에 이르자 하얀 눈이 쌓여 있어 더욱 넓게 보였습니다. 사방이 시원스레 보이는 헬기장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으면서 몇 분간 쉬었습니다. 감악지맥의 마루금은 노아산에서 오른 쪽으로 꺾인다는 제 기억과는 달리 산행대장이 카피해온 산행기에 나와 있는 대로 마루금은 이 헬기장에서 오른쪽 아래로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기억보다 기록이 더 정확함을 다시 한 번 새겼습니다. 가파른 내림 길에 가속도가 붙어 왼쪽으로 꺾이는 갈림길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친 산행대장을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두 해전 저도 이 길에서 똑같은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능선 길을 따라 360번 지방도가 지나는 게네미고개 왼쪽으로 내려선 시각은 14시52분이었습니다.
16시 삼현 터널 위 에코브리지를 건넜습니다.
게네미고개 마루를 넘어 왼쪽으로 난 시멘트 길로 들어섰습니다. 동네 끝가지 올라가 왼쪽 능선으로 올라서자 이제껏 걸어온 길이 한눈에 조망되는 묘지들이 나타났습니다. 최상단의 묘지에서 멈춰 서서 숨을 돌리는 동안 이번에 종주산행에 처음 참여한 이정주 동문은 가져온 산행기를 체크해 산행대장에 알찬(?) 정보를 제공하느라 혼자 바빴습니다. 사거리안부로 내려갔다가 얼마간 더 걸어 만난 봉우리를 왼쪽으로 에돈 후 에코브리지로 내려갔습니다.
에코브리지를 건너는 고라니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멀쩡한 산줄기를 잘라내 동물의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든 오만한 사람들이 그나마 자성을 해 보인 것이 동물이동통로인 에코브리지일 것입니다. 사람인 저도 산을 잘라내고 낸 차도를 보면 위험스러운 절개면을 따라 내려가 도로를 건 넌 후 다시 절개면을 오르는 일이 걱정되고 두려운 데 하물며 동물이야 오죽하랴 싶고, 이런 짓은 저희들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 동물들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에서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제가 에코브리지를 건너는 동물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동안의 폭력을 반성하고 동물에 이동통로를 만들어주는 일이 뒤늦기는 했지만 이런 자성마저 없다면 종국에는 사람들이 지구로부터 영원히 추방될 것이라 생각하자 그나마 다행이다 했습니다.
17시20분 56번도로가 지나는 갈곡리버스정류장에서 첫 구간 종주산행을 마쳤습니다.
삼현터널에서 절개면 꼭지점을 지나 다다른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5-6분 간 진행해 운동기구와 의자가 설치된 쉼터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에서 잠시 쉰 후 바로 앞 사거리에서 이번에는 모형 레이다가 있는 봉우리를 올랐다가 되돌아와 왼쪽 아래 군사도로로 내려서지 않고 바로 왼쪽으로 꺾어 군사도로를 따라 걸어 시간을 벌었습니다. 감악지맥의 마루금은 모형레이다봉을 거쳐 공군부대가 들어선 노고산 정상을 넘어 이어지는데 이 길에 옛날에 매설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 있다하여 마루금을 버리고 그 왼쪽 아래 큰길을 택한 것입니다. 16시54분 노고산 서쪽 아래 넓은 공터에 도착해 아이젠을 풀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병들이 눈을 싹 치운 군사도로를 따라 내려가 56번지방도가 지나는 갈곡리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종주산행을 마무리 졌습니다.
오른쪽으로 차도를 따라 20분 넘게 걸어가 수르레미고개에서 산행을 마쳐야 다음 구간 들머리 접근이 용이한 데 한 친구가 그 반대쪽인 법원리행을 원해 그리로 옮겼습니다. 이번에 찾은 법원리가 40년 전의 법원리가 아니기에 밀드레드가 일했던 다방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도 이제는 나이60을 막 넘은 초로의 할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짓궂게 밀드레드라는 이름 붙여준 것은 저희들의 장난일 뿐, 이제껏 그녀는 돈만 쫒는 밀드레드가 아니고 남을 위해 헌신도 하는 셀리의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제가 그리 믿고 싶은 것은 그래야 추억이 아름답다는 명제가 참일 것 같아서입니다.
<산행사진>
- 松琳 통나무 松琳 통나무 Y
- 2010.01.20 22:06
- 81봉이라 하여 순간 감악지맥이 아닌 딴 산을 착각을 했습니다.....
- 시인마뇽 시인마뇽 Y
- 2010.01.22 08:34
- 八一峰이 아니고 八日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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