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지맥·분맥·단맥/한남정맥 분기지맥

한남검단지맥 종주기

시인마뇽 2012. 1. 16. 11:12

                                           한남검단지맥 종주기 4


                *지맥구간:태재-법화산-향린동산분기점

                *산행일자:2008. 3. 5일(수)

                *소재지  :경기용인/성남/광주

                *산높이  :불곡산313m, 법화산383m

                *산행코스:태재-불곡산-대지고개-법화산-88컨트리클럽

                          -향린동산분기점-할미성-백현아파트단지

                *산행시간:9시15분-17시21분(구간종주6시간58분/총8시간6분)

                *동행    :나홀로

 


  지맥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이어졌습니다. 검단지맥이 끝나는 용인의 향린동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을 따라 할미성까지 걸어갔습니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안성의 칠장산을 거쳐 속리산에 닿게 됩니다. 속리산에서 대간 길을 따라 북으로 계속 전진하면 백두산에 이릅니다. 일단 백두대간에 오르면 우리나라의 어디에 있는 산이든 산길로 이어갈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줄기이기에 가지나 잎에 해당하는 다른 산으로 맥이 이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임에도 이를 안 것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2004년에 처음 발을 들인 백두대간의 남한 땅 산줄기를 모두 밟고도 몇 개의 정맥을 더 걷고 나서야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섬 산이 아니라면 한반도 어디에 있는 산이든 두 개의 서로 다른 산은 한 줄기로 이어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뒤늦게 터득했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조선조 영조 때에 산경표를 펴낸 여암 신경준 선생의 가르침에 힘입었음은 물론입니다.


  대간이 끝나는 백두산에서도 산길은 또 다시 이어집니다. 우리나라 길은 끝나도 다른 나라 길로 연결되어 궁극에는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로 이어집니다. 에베레스트뿐만 아니라 우랄 산맥 너머 알프스의 몽블랑으로도 이어집니다.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의 산 들이 아니라면 유라시아 대륙의 어느 산이든 어제 마친 검단지맥을 따라 오를 수 있음은 물론, 지금 바로 눈앞에 보이는 의왕의 모락산에서도 산줄기를 따라가면 다다를 수 있습니다. 산길의 이어짐이 이러하다면 어제 마친 검단지맥종주는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하는 엄청 먼 장대한 길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싶어 가슴 뿌듯했습니다.  두 발로 다 이어가지 못하면 세계지도를 펴놓고 상상으로라도 이어가볼 생각입니다. 여암 신경준님이 산줄기의 개념을 체계화시키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그의 산경개념을 확장해서 우리의 산줄기가 백두산을 넘어 히말라야와 알프스로 이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암선생 덕분에 뻗어가는 것은 산줄기만이 아닙니다. 그 산줄기를 따라 우리들의 꿈이 같이 뻗어나가고 우리문화가 그 뒤를 밟아갈  것입니다. 여암 신경준선생은 이미 2백 여 년 전에 산경표를 내 놓아 저희후손들에 세계화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아침9시35분 태재를 출발했습니다. 사당에서 1500-2번 좌석버스를 타고 한 40분 걸려 태재에 도착하자 안개가 자욱했고 날씨도 생각보다 쌀쌀했습니다. 지난번에 내려선 계단 길에서 바로 건너로 보이는 산길로 들어선 것이 초반 알바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서 서쪽 고개 마루로 옮겨 들머리를 찾았어야 했는데 전 번 내려온 길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연결하는 것이 맞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는 산길로 들어섰으니 표지기가 보일 리가 없었고, 그래서 불곡산행 표지판이 서있는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이 넘는 동안 내내 찜찜했습니다. 산행 시작 3-4분 후부터는 길이 없어져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 오른 쪽으로 진행해 간신히 능선에 오르자 길이 꽤 넓은 삼거리가 나타났습니다. 삼거리에서 지도를 보고 오른 쪽으로 진행하며 수시로 나침반을 보았는데 제가 걷는 길과 지도상 지맥 길의 방향이 일치해 이제 제 길로 들어섰다 싶어 마음을 놓았습니다. 밤새 안개를 얼려 나뭇가지에 눈꽃을 피운 상고대가 일품으로 사흘 전 마니산에서 만나 본 설화와 그 아름다움을 견줄 만 했습니다. 두 곳의 안부를 지나고 벤취가 서있는 쉼터를 지나 삼거리에 이르는 동안 능선 길 왼쪽 아래로 건물들이 몇 채 보였습니다.


  10시53분 해발 313m의 불곡산을 올랐습니다. 태재 출발 1시간이 좀 지나 도착한 능선삼거리에서 처음으로 길안내 표지목을 처음 보았는데 똑바로 진행하면 용인가는 길이고 왼쪽의 북쪽 방향으로 확 틀어야 불곡산으로 간다고 표시되어 있어 다 늦게 길을 잘 못 들었음을 직감했습니다. 반시간 넘게 북쪽으로 진행해 불곡산 정상에 올라서야 제가 태재-형제산-불곡산 지맥 길을 탄 것이 아니고 동쪽 맞은편의 산줄기로 오른 것을 알았습니다. 정상의 표지석과 정자를 카메라에 담은 후 태재-불곡산의 지맥 길은 빼먹기로 하고 서둘러 삼거리로 되돌아갔습니다. 삼거리에서 불곡산을 갔다가 부천당 고개를 지나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오는데 딱 1시간이 걸렸습니다.


  12시13분 산마루촌 음식점이 들어선 대지고개에 내려섰습니다. 되돌아온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4-5분을 진행해 또 다른 표지목을 만났습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송전탑을 지나 봉우리삼거리에 이르기까지 삼거리출발 20분이 걸렸습니다. 쉼터로 조성된 봉우리삼거리에 올라서자 철조망 울타리가 앞을 가로 막았고 지맥길은 이 울타리를 따라 오른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울타리 안으로 보이는 골프연습장이 지도상에 나와있는 로드힐골프 클럽이었습니다. 대지고개 바로 못 미쳐 여러 기의 납골당이 들어선 깔끔한 묘지에서 짐을 풀고 10분여 쉬었습니다. 바로 아래 대형음식점 산마루촌에 접한 대지고개로 내려서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한참을 걸어 다다른 지하도를 지나 대형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43번 국도를 건넜습니다. 다시 오른 쪽으로 꺾어 고개마루로 올라서 절개면으로 붙었습니다. 한 여름이라면 넝쿨들로 발목을 잡혔을 철 계단 두 곳을 올라 다다른 능선 길이 유진레미콘 공장의 채석장 바로 위여서 2005년 여름 추풍령에서 채석장 바로 위의 금산에 올랐을 때와 같이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아찔했습니다.


  13시2분 천주교묘지 위 322.1봉에 올라섰습니다. 대지고개 절개면에서 322.1봉에 올라서는 동안 상고대가 모두 녹아 여기저기 나뭇가지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마치 굵은 비가 후드득 내리는 소리 같았습니다. 양지바른 길섶에서 점심을 든 후 묘지를 아래에 두고 오른 쪽으로 반원을 크게 그리며 돌아 묘지가 끝나는 지점 앞에 다다르자 “위아(주)”의 망루 같은 큰 건물이 서 있었고 무단출입 시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는 경고문도 같이 붙어 있어 건물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기흥의 경찰대학 쪽에서 올라와 불곡산을 다녀간다는 한 분을 만나 길안내를 받았습니다. 확실히 길을 아는 산이 아니면 혼자서는 절대로 나서지 않는 다는 이 분에게는 산줄기를 따라 혼자 다니는 제가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은 듯 했습니다.


  14시23분 해발383m의 법화산을 올랐습니다. “위아(주)”건물을 출발해 법화산에 오르기까지 반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제는 거의 다 왔다 싶은 안부에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며 눈앞의 봉우리가 법화산인 것 같아 쉬지 않고 올랐는데 정작 법화산은 그 다음 봉우리로 정자 앞 갈림길에서 지맥을 조금 벗어나 오른 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오른 분은 현대인재개발원 쪽으로 먼저 하산했고 저는 삼각점 옆 전망바위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석성산을 조망한 다음 갈림길로 되돌아가 남동쪽으로 뻗어가는 지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전국 자치단체 중에서 골프장이 가장 많은 용인 땅을 걸으며 처음으로 능선 양쪽 아래에 골프장이 들어선 산길을 걸었습니다.


  15시53분 향린동산 갈림길에서 한남검단지맥 종주를 마쳤습니다. 법화산을 출발해 10분 만에 다다른 송전탑 봉우리에서 맨 왼쪽 길로 내려선지 4-5분 후 다시 오른 쪽으로 꺾어 희미한 지맥 길을 이어가다 88골프장으로 들어섰습니다. 골프장 안으로 난 길을 따라가기가 민망해 길도 나지 않은 두 봉우리를 무리하게 넘어 다시 한 봉우리에 올라섰는데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어 별 수 없이 되 내려가 골프장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한참을 걸어 클럽하우스에 이르기까지 불청객이 남의 집 뜰 안을 걷는 것 같아 멋쩍고 죄송했습니다. 골프장을 빠져 나와 서쪽으로 난 차도를 따라 언덕을 오르자 3년 전 한남정맥을 종주할 때 넘었던 출입금지 펜스가 길 왼편으로 보였습니다. 펜스를 오른 쪽으로 비껴서 들어가 시멘트 길을 따라 88컨트리클럽의 물탱크(?)를 설치한 봉우리 앞에 다가섰는데 문이 굳게 잠겨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향린동산 위의 이 봉우리가 바로 검단지맥이 한남정맥에 합류하는 분기점으로 굳게 잠긴 문을 사진 찍고 나서 총4회에 걸친 검단지맥종주를 마무리했습니다.


  17시21분 석성산 아랫마을 백현아파트단지에서 하루 산행을 접었습니다. 향린동산 갈림길에서 검단지맥을 접수한 한남정맥이 2005년 종주 때 짙은 안개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한 할미성으로 이어져, 두말 않고 40분 거리의 할미성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철조망 울타리 옆으로 난 정맥 길도 할미성에 방치된 폐기물도 그 때 그대로였습니다만, 쾌청한 날씨에 전망이 확 트여 석성산도 향수산(?)도 모두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할미성에서 만난 것은 저들 산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곽은 이미 무너져 잔해만 남았지만 밤새 몰래 마고선녀가 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만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할미성에 오르자 이 성은 물론 충주산성을 일주일 만에 쌓았다는 마고선녀께서 저를 보며 잊지 않고 이 성을 다시 찾아 고맙다며 엄청 반기는 듯 했습니다. 이번에는 작고개로 내려가지 않고 헬기장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백현아파트 단지로 내려갔습니다. 지하도를 두 번 건너 다다른 아파트단지에서 수원역 행 시내버스에 오르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찬찬히 기억을 되살려보니 30년 전 용인에서 수원으로 출퇴근할 때 수 없이 지난 석성산 바로 아래 동백리가 바로 이 마을이었습니다.


  길은 향린동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 길은 백두산을 거쳐 에베레스트로 이어질 것입니다. 저의 발걸음도 향린동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에베레스트만큼이나 높고 험한 삶의 길을 쉬지 않고 걸어갈 것입니다. 길은 걷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여암선생의 말씀대로 삶의 길을 걷는 동안은 그 삶의 주체가 바로 저이기에 어떤 길이든 마다않고 걸어볼 뜻입니다.

 

 

                                                          <산행사진>

 

 

 

 

 

 

 

 

 

 

 

 

 

 

 

 

 

 

 

 

 

 

 

 

 

 

 

 

 

 

 

 

 

 

 

 

 

 

 

 

 

 

 

 

 

 

 

 

                                         한남검단지맥 종주기 3


            *지맥구간:남한산성남문-영장산-태재

            *산행일자:2008. 2. 28일(목)

            *소재지  :경기광주/성남

            *산높이  :검단산535m, 왕기봉500m, 영장산414m

            *산행코스:남한산성남문-검단산-왕기봉-이배재-갈마재-영장산-태재

            *산행시간:10시35분-18시10분(7시간35분)

            *동행    :나홀로

 


  검단지맥 여기저기에 시들음 병에 걸려 베어낸 참나무들이 즐비해 참으로 참혹해 보였습니다. 남한산성 남문에서 갈마재를 거쳐 태재에 이르는 지맥 길은 그다지 높은 봉우리가 없고 길도 넓은데다 길섶에 훤칠한 활엽수의 참나무들이 많이 들어서 한 여름 복중에도 더운 줄 모르고 편안하게 이 길을 산책할 수 있겠다 했는데, 여기 저기 참나무들이 시들음 병에 걸려 죽어가고 베어낸 나무토막과 그루터기 모두 2차 감염방지를 위해 비닐로 봉해 놓은 것을 보고 마치 나무들의 무덤을 보는 것 같아 섬뜩했습니다. 백만 가까운 성남시민들에 더 할 수 없는 산책코스인 이 숲이 이렇게 철저히 망가져가는 데도 병든 나무를 베어내고 감염을 막고자 비닐을 씌우는 것 외에 달리 예방책이 없는 것 같아 정말 딱했습니다.


  참나무는 소나무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림의 대표적인 수종입니다. 낙엽활엽수인 참나무는 옛날부터 상록침엽수의 소나무에 비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장자는 참나무를 보고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쉽게 썩고 가구를 만들면 잘 망가지는 쓸모없는 나무가 오래도 살아남는다고 말씀했다 합니다. 궁궐을 짓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소나무에 비해 땔감이나 숯 만드는데 주로 쓰인 참나무는 한낱 잡목으로 취급당해 쉽게 잘라내는 바람에 제대로 된 참나무 숲이 남아 있을 리 없었습니다. 참나무들의 시련이 끝난 것은 땔감이 나무에서 석탄과 석유로 바뀐 후였습니다. 벌거벗은 우리 산이 오늘처럼 푸르러진 데는 참나무 덕이 크다 할 것입니다. 김준민 교수께서 지은 “들풀에서 줍는 과학”에 따르면 광릉의 소나무 숲에서 1년간 쌓인 낙엽양이 평방미터당 1.2Kg 인데 비해 참나무 숲은 1.4 Kg이었고, 낙엽이 완전히 썩기까지 소나무 숲은 38.4년이, 참나무 숲은 17.9년이 걸렸다 합니다. 우리 산의 주 수종이 소나무만 있었다면 대도시 근교 산에서 오늘처럼 울창한 삼림을 찾아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나무는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들뿐만 아니라, 술 저장용 오크(oak)통, 선박, 합판 및 고급가구인 오크가구를 만드는데도 두루 쓰입니다. 이렇듯 고마운 참나무가 시들음 병에 걸려 신음하는 것을 두 손 놓고 지켜보자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오전10시35분 남한산성의 남문에서 검단지맥 3구간종주를 시작했습니다. 산본 집을 나와 남문에 이르기까지 버스를 세 번 갈아탔고, 시간도 3시간이 거의 다 걸려 생각보다 늦었지만 이틀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어 하얀 눈길을 걸으며 산뜻하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9분 후에 다다른 성문을 빠져나가 잠시 시멘트 길을 걷다가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10여분 후 물이 졸졸 흐르는 지곡을 만나 다시 시멘트 길로 복귀한 후 적당한 곳에서 다시 능선에 붙고자 했으나 2004년에 제거한 지뢰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서있어 별 수 없이 시멘트 길을 계속 따라 올랐습니다. 


  11시47분 해발535m의 검단산 헬기장에 올랐습니다. 바로 앞 높은 봉우리에 자리했어야 할 정상석이 여기 헬기장에 세워진 것은 KT송신탑이 먼저 자리 잡고 있어서인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7-8분 전 송신탑 바로 밑 정문까지 갔다가 되내려왔습니다. 동쪽의 돌탑봉에서 우회로로 내려가 만난 능선사거리에서 직진해 2-3분을 걷다가 아차 잘못 들었다 싶어 사거리로 되돌아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망정이지, 자칫 방심해 계속 진행했다가는 광주의 불당리로 빠질 뻔 했습니다. 제가 광주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1970년대만 해도 불당리는 사이비종교의 집합지로 서울 사는 가정주부들이 한 교주의 꾐에 빠져 여기 불당리로 가출해 사회문제가 된 일도 있었습니다. 왕기봉에 올라서기까지 불당리로 빠지는 갈림길은 몇 곳 더 있었습니다. 눈이 녹기 시작하자 산길이 질펀해져 걷기에 조금은 불편했어도 길 자체가 넓고 평탄해 시민들의 산책길로 안성맞춤이다 싶었습니다.


  12시32분 해발500m의 왕기봉에 올라 10분가량 쉬었습니다. 평일인데도 함께 올라온 부부들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여름철에는 눈 부비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박새들이 눈만 내리면 사람들이 쉬어가는 쉼터에 나타나는 것은 먹이를 찾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해서나마 앙증맞게 귀여운 새를 산위에서 만나볼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밧줄이 쳐져 있는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며 왼쪽 아래 텅 빈 골프장을 보았습니다. 큰 돈 들여 골프장을 경영하는 컨트리클럽 회사에는 욕먹을 소리이겠지만 저는 텅 빈 골프장의 여백에서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을 함께 보았습니다. 13시13분에 이배재로 내려섰습니다. 왼쪽 사면에 자작나무가 조림된 계단 길을 올라 송전탑 옆 쉼터에 도착해 떡을 꺼내든 후 갈마재로 향했습니다. 이배재에서 태재까지는 송전탑과 동행했습니다.


  14시10분 갈마재를 지났습니다. 갈마재 못 미쳐서 초록색 철망으로 휀스를 친 소나무 두 그루를 보았습니다. 뿌리가 다른 한 소나무의 줄기가 5-60Cm 떨어져 있는 다른 소나무에 붙어 H자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말로만 들어온 연리지(連理枝)를 실제로 만나본 것입니다. 갈마터널 위를 지나 이 터널이 뚫리기 전에 광주와 성남을 소통시켰던 간선도로가 지나는 갈마재로 내려섰습니다. 계단 길을 따라 봉우리에 올랐다가 내려선 안부에 “영생관리사업소”라는 표지목이 서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영원한 삶이 영생(永生)이라면 영생관리는 하느님의 몫이 분명한데 어느 누가 감히 불경스럽게도 영생관리를 사업으로 한단 말인가 의아했습니다. 조금 후 오른 쪽 아래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승화장임을 알고 나서 거창한 영생관리사업소란 다름 아닌 화장터였구나 싶어 혼자서 실소했습니다.  


  지맥 길의 연리목(連理木)이 30여 년 전 열심히 사랑하며 살았던 광주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1974년 12월 난생 처음으로 광주를 찾게 된 것은 광주중학교 선생으로 발령받아서였습니다. 혈기 방장한 20대 후반의 선생이었기에 매사 서투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랑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족과 친한 친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이때처럼 사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의 학생사랑에 대한 학부형들의 답례는 담배와 박카스, 그리고 참외 및 과일이 전부였기에 촌지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수많은 선생님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삼고 촌지나 챙기는 소인배로 몰아가는 한 장관의 처사에 심히 분노했었습니다. 교직에 몸담은 기간이 불과 5년밖에 안 되는 저의 분노가 이러했으니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는 더욱 컸을 것이기에 많은 여선생님들이 TV에 “해찬들” 광고만 나와도 채널을 돌렸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퍼졌을 것입니다.  제가 사랑한 사람은 학생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보다도 더 제자들을 사랑하는 한 여선생도 지독하게 사랑했습니다. 종국에는 제가 가르친 많은 학생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 여선생과 결혼을 했습니다. 3년 가까이 한 교무실에서 마주보고 근무하다가 연리지(連理枝)처럼 한 나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후 만 23년을 같이 살며 비익조(比翼鳥)처럼 언제나 깃 가지런히 한 몸이 되어 날자고 했었는데 8년 전에 그녀가 먼저 날아가 연리지사랑을 끝냈습니다.


  15시47분 해발414m의 영장산을 올랐습니다.

모리야산 기도원 갈림길을 지나 영장산 정상에 오르기까지 길마재 출발 시간 반이 조금 더 걸렸습니다. 가파른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자 노송과 벤취 그리고 재잘대는 박새들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먹이를 구하고자 바닥으로 내려앉은 거의 때까치만한 큰새 한 마리를 카메라에 담으며 십분 가까이 쉬었습니다. 인근의 문형산을 들러볼까 시간계산을 해봤더니 문형산을 다녀오면 태재에 도착해 산행을 마치는데 최소 4시간이 걸릴 것 같아 포기하고 곧바로 태재로 향했습니다.  영장산 정상봉을 왼쪽으로 에돌아 급하게 안부로 내려선 다음부터는 다시 길이 편해졌습니다.  곧은골고개를 지나 참나무에 비닐 끈을 묶는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시들음 병에 걸려 베어낼 나무를 가려내 표시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조금 더 오르자 이미 베어낸 나무토막을 비닐로 싼 뭉치가 여기 저기 많이 보여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실감했습니다. 왼쪽 아래로 골프장이 들어서 쳐 놓은 철망 울타리를 지나 깔끔한 전원주택(?)이 들어선 안부에 다다른 시각이 16시44분으로 왼쪽으로 선명하게 보이는 문형산으로 가는 갈림길을 확인 한 후 태재를 향해 쉬지 않고 내달렸습니다.


  18시10분 분당과 모현을 넘나드는 태재 고개에 도착해 3구간 산행을 마쳤습니다.

전원주택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지맥 길에서는 더 이상 시드름병에 걸려 베어낸 참나무가 보이지 않아 큰 다행이다 했습니다. 마치 구릉과 같은 나지막한 능선을 가로지르는 샛길이 많이 나있어 새마을고개, 봉적골고개, 넘어골고개 등 정감 가는 고개들을 연이어 지났습니다. 새마을고개를 지나 오른 쪽 아래로 저수지가 보였는데 그곳이 국군통합병원 가는 길목의 율동공원인 것 같았습니다. 얼마를 더 걷자 차 소리가 들려왔고 열병합발전소도 보였습니다. 태재고개 바로 위 묘지에서 잠시 멈춰 서서 탄천 건너 청계산 줄기 뒤로 숨는 저녁 태양을 지켜봤습니다. 주변의 색조가 붉기는 마찬가지인데 떠오르는 아침 태양은 장대해 보이고 스러지는 석양은 숙연해 보이는 것은 만남과 이별에 익숙해진 학습효과 때문일 것입니다. 교차로가 복잡한 태재로 내려서 곧바로 사당가는 1500번 좌석버스를 탄 덕에 러쉬아워 시간임에도 2시간 만에 산본 집에 도착했습니다.


  지나놓고 나서야 젊어 한 때 제가 한 시골중학교에 근무하며 꿈과 사랑을 키웠던 광주시를 남북으로 에두르는 산줄기가 바로 한남검단지맥임을 알았습니다. 하남시와 성남시 그리고 용인시와 맞닿는 산줄기를 차례로 이어 종주하면 검단지맥의 80%는 마치게 됩니다. 이 지맥 길에서 사랑의 상징인 연리목 소나무를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은 이 지맥길이 제가 꿈과 사랑을 심었던 광주시의 시계에 있어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만큼 위대하고 파워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들음 병에 죽어가는 참나무들도 같이 구할 수 있기를 염원하면서 3구간 종주기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한남검단지맥 종주기 2


             *지맥구간:은고개-남한산-남한산성남문

             *산행일자:2008. 2. 21일(목)

             *소재지  :경기광주/성남

             *산높이  :남한산521m, 청량산480m

             *산행코스:은고개-벌봉-수어장대-남문-동문-벌봉-은고개

             *산행시간:8시50분-17시20분(총8시간30분/구간종주4시간40분)

             *동행    :나홀로

 


  지맥종주에 곁들여 남한산성을 한 바퀴 빙 돈 후 출발지인 은고개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침에 은고개를 출발할 때만 해도 남한산성과 검단산을 지나 이배재까지 진출할 뜻이었는데,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산성을 한 바퀴 휘돌아보느라 종주산행에서 좀처럼 하지 않는 원점회귀 산행을 했습니다. 예정대로 이배재까지 간다 해도 걸음이 느린 제가 검단지맥의 남은 구간을 발 빠른 다른 분들처럼 한 번에 마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두 번에 나누어 종주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자, 그렇다면 굳이 이배지까지 갈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남한산성을 한번 일주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돌아와 마루금을 이어가기에 편한 남문에서 지맥종주를 접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나머지 산성을 마저 돌은 것은 이렇듯 우발적으로 행해졌습니다.


  남한산성을 탐방하고 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산성은 이런 것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남한산성이 원성과 옹성인 외성으로 축조되었음도, 또 능선과 산허리를 따라 성을 쌓기에 산성은 계곡을 건너지 않아 끝이 열려 있으리라는 제 생각이 틀렸음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이제까지 산성을 끝이 열린 개곡선의 선의 개념으로만 이해했지, 끝이 닫혀 안과 밖을 가르는 폐곡선의 경계선이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여러 개의 문을 통해서만 남한산성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은 성곽을 경계로 성안과 성 밖이 나누어지고, 이는 바로 이 성곽을 이어가면 폐곡선을 됨을 뜻하는 것인데 멍청하게도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자명한 사실을 저는 한참 동안 발품을 팔고서야 뒤늦게 깨우쳤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이번 탐방에서 “여장(女墻)”이 무엇인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하고 그저 여자와 관련된 무엇이려니 했던 제 예단이 부끄러운 것은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이름 해서였습니다.


  아침8시50분 하남과 광주를 경계 짓는 은고개를 출발했습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광주행 시내버스에 올라 은고개로 가는데 대략 1시간이 걸렸습니다. 날씨는 쾌청했고 바람도 잔잔했지만 아직은 햇살이 퍼지지 않아 귀가 시렸습니다. 은고개에서 교차로신문사 오른쪽으로 난 들머리로 들어서 산소가 여러 기 들어선 묘지를 지나 가파른 오름 길로 올라선 첫 봉우리에 대림학원 학교림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었습니다.  고개 길이 희미하게 길이 나있는 안부사거리로 급하게 내려섰다가 송전탑이 세워진 두 봉우리를 넘어선 후로는 얼마간 편안한 길이 이어졌습니다. 산성 전방1.1Km지점 갈림길에 다다르기까지 왼쪽 아래로 엄미리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여러 곳 있어 한눈팔지 말고 계속 직진해야 마루금을 놓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10시45분 해발521.1m의 남한산에 올랐습니다.

남한산성 1.1Km 전방 갈림길로부터 조금 떨어진 삼거리에서 왼쪽의 나무 계단 길로 올라섰습니다. 잔설로 미끄러운 길을 잠시 지나 올라선 산성은 남한산성의 외성인 봉암성으로 숙종 때 축조되었다 합니다. 이 옹성 안에 삼각점이 세워진 해발521.1m의 남한산 주봉이 자리하고 있음에도 많은 분들이 지척거리에 있는 암봉인 벌봉을 정상으로 잘 못 알고 있습니다. 3년 만에 벌봉을 다시 올라 주변 산세들을 조망했습니다. 하남의 검단산과 광주의 검단산이 모두 보이는 벌봉이 남한산 최고의 전망지라는 생각이 들어 사방을 휘둘러보며 사진 몇 방을 찍었습니다.


  11시29분 남한산성 원성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산성에 붙여 쌓은 옹성인 봉암성에서 원성 안으로 들어서는 문은 동장대 암문입니다. 이 문으로 원성 안으로 들어가 표지판의 안내지도를 보자, 여기 암문에서 시작하여 시계반대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북문, 서문, 남문과 동문을 거쳐 다시 암문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언제고 다시 와서 제대로 한 번 일주해 보겠다는 마음이 동했습니다. 산줄기를 따라 곡선으로 이어지는 성곽을 따라 몇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산성의 안과 밖을 동시에 볼 수 있어 사진 한 커트에 안팎을 모두 담아 보았습니다. 보면 볼수록 곡선의 성곽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이 성은 전쟁대비용으로 축조한 산성이 아니고 휴양 차 임금이 묶고 가는 별궁(?)의 담장 같다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동장대 암문 출발 반시간 후 커다란 성문 북문에 다다랐습니다. 암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람한 북문을 보자 얼마 전 소실된 남대문을 복원할 때는 단순히 불타 없어진 건물만 복원할게 아니고 극히 일부라도 양 옆에 성곽을 같이 복원해 남대문을 우리나라 최고의 성문으로 되돌려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2시27분 연주봉 옹성으로 나가보았습니다. 

2005년 1월 광주의 검단산에 올랐다가 벌봉으로 옮겨 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타고 내려가 만남의 광장 바로 옆으로 하산하면서 서쪽으로 마주 보이는 산줄기가 매끈해 보여 언제고 한번 밟아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산성에 올라와보니 여기 연주옹성에서 금암산을 거쳐 춘궁동으로 내려서는 산줄기가 바로 그 줄기였습니다. 이배재에서 끝내겠다는 지맥 종주는 남문에서 접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이 산줄기를 타고 춘궁동으로 하산하겠다고 계획을 바꾼 후 발걸음을 재촉해 서문으로 향했습니다. 보수공사 중인 서문을 거쳐 병자호란 때 조선의 작전본부였던 수어장대에 도착했습니다. 해발480m의 청량산에 세워진 수어장대(守御將臺)는 인조임금이 45일간 항전을 지휘한 지휘소이자 국사를 본 임시 어전이기도 했기에 바로 이곳에서 청 태종에 항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척화파와 주화파가 설전을 벌였을 것입니다.


   폐곡선 안의 성안으로 들어가 전쟁을 치를 요량이면 가장 먼저 충분한 식량과 식수를 확보해야 합니다. 성 밖의 모든 자원을 성 안으로 들여다 놓아야 하고, 여의치 못하면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없애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낸 청야작전의 요체입니다. 인조임금이 허겁지겁 산골짜기 산성으로 피신하느라 식량을 제대로 챙겼을 리 만무했다면,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김상헌 등 척화파의 주장은 성 밖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외면한 공허한 소리일 뿐입니다. 고려 때 원의 침공을 피해 강화도로 피신해 수명을 유지한 것은 고려조의 집권층이었을 뿐, 이 동안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또 이 땅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는가는 필설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엄연한 교훈을 애써 외면하고 항전을 고집한 척화파를 충신인양 떠받드는 역사서를 갖고 학교에서 공부했기에, 제가 최명길 등 주화파의 나라사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3시42분 남문에서 지맥종주를 접고 역사탐방을 이어갔습니다. 

수어장대에서 10분여 걸어 다다른 영춘정 앞에서 점심을 든 후 남문으로 내려갔습니다. 남문에 도착하자 연주봉 옹성으로 돌아가 북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춘궁동으로 하산하겠다는 생각을 또 바꾸어 마지막 남은 동문을 거쳐 동대장암문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동대장 암문으로 가서 시간여유가 있으면 춘궁동행 산줄기를 타고, 그렇지 못하면 은고개로 바로 내려가기로 하고 다시 성곽에 바짝 붙어 동문으로 향했습니다. 남문 출발 15분 후 성문 밖 검단산으로 이어지는 지맥 길에서 벗어나 동문으로 향했습니다. 개축공사 중인 성곽을 지나 급하게 내려서자 광지원으로 가는 아스팔트길이 나타났습니다. 성곽은 계곡을 가로 질러 아스팔트 길 앞에서 끝났고 다리 건너 동문에서 다시 이어졌습니다.



  14시46분 마지막 하나 남은 동문을 지났습니다.

여기 동문에 이르기까지 산줄기를 따라 쌓은 성곽이 동문을 지나자 거암들을 피해 산허리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동문출발 20분 후 장경사를 들렀는데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을 쌓을 때 축성에 동원된 스님들의 숙식제공을 위하여 창건한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절이라 합니다. 가파른 길을 올라 장경사신지옹성을 둘러본 후 동장대지에 올라 안내문을 읽고 나서 몸을 숨겨 쉽게 총이나 활을 쉽게 쏠 수 있도록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女墻)이라 부름을 처음 알았습니다. 이번 남한산성 탐방을 통해 이것저것 많이 보고 또 새롭게 배웠으니 이제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구해 읽어볼 생각입니다.


  15시40분 약 4시간 만에 동장대암문으로 돌아왔습니다.

오전에 별 뜻 없이 보았던 봉암성을 다시 보고자 암문을 지나 이 성으로 들어섰습니다. 다시 벌봉에 다가서자 병자호란 때 산성 안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봉우리를 선점한 청군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끈 것은 당연하고, 숙종임금이 여기에다 옹성을 쌓은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기는 하지만 잘한 일이다 싶었습니다. 아침에 발을 들인 산성에서 잠시 쉬면서 1.7Km 떨어진 한봉으로 가서 이 옹성의 끝자락을 만져볼 까 했으나 다음 숙제로 미뤄두고 일단 여기서 산성탐방을 마쳤습니다. 


 이번에 둘러본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된 유적지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을 서기 1626년인 인조4년에 석성으로 개축했다 합니다. 남한산성은 원성과 이에 붙여 쌓은 외성인 5개의 옹성으로 되어 있으며, 그 둘레가 약 8Km나 되는 긴 성곽에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의 커다란 문이 4곳에 있고 비밀스레 드나드는 암문이 16개가 있으며, 성안에는 임금이 기거하는 행궁과 관아, 그리고 군사들이 머무는 125개소의 군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산성 안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어 물 걱정은 없었겠지만, 논과 밭이 전부해서 124결(1결은 소가 4일간 갈수 있는 면적)밖에 안 되어 인조 임금이 이 성안으로 몽진해와 45일 밖에 버텨내지 못한 것도 바로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라 합니다.


  17시20분 은고개로 되돌아와 하루 산행을 마쳤습니다. 

두 시간 걸려 올라선 산성에서 은고개로 되짚어 내려가는 데는 1시간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오름 길이 아닌 내림 길이고 한번 걸었던 길을 다시 걷는 학습효과 덕분이었습니다. 마음 편한 하산길이어서인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바람이 살랑거리는 소리도 모두 다 잘 들려왔습니다. 중간에 계획을 바꾸어 목적했던 이배재까지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모처럼 산성을 둘러볼 수 있어 가슴 뿌듯했습니다.


  

  

  남한산성 탐방을 마치고도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전국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적의 후방을 교란해 보급로를 끊는 등 그 활약이 대단해 왜란을 승전으로 이끄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는데, 왜란 종전 34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는 의병들의 활동이 어째서 왜란 때보다 비할 수 없이 미약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병자호란은 임진왜란보다 훨씬 빨리 끝나 의병들을 조직해 참전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됩니다만, 과연 전쟁기간이 짧다는 이유 하나로 부실한 의병활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는 제게는 의문입니다. 이 의문을 풀기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저로서는 남한산성 탐방을 통해 혹시라도 답이 될 만한 단서를 찾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산성탐방을 끝내고 말이 되 든 안 되든 저 나름대로 그 이유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왜란이 끝나고 임금과 조정중신에 대한 민중들의 적개심이 컸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을 속인 임금의 몽진과 전후 잘 못된 전공평가 그리고 핍박해진 살림살이 등이 백성들의 적개심을 자극했다는 생각입니다. 광주출신 김덕령장군은 무수한 전공을 세웠어도 무고에 의해 반역군으로 몰려 죽었으며, 의병장 곽재우도 잡혀와 문초를 받았으나 용케 풀려나 살아났다 합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장들의 고초를 지켜본 백성들이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선뜻 나섰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혹시라도 이징옥과 이시애가 일으킨 양난으로 조정에서 평안도와 함경도등 서북지방 사람들을 고위직에 등용하지 않는 등 차별을 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수많은 중신들을 배출한 경상도 지방의 유림들이 주도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왜군의 배후를 공격했지만, 호란 때는 의병을 조직해 청의 배후를 쳐야 할 서북지방 민중들이 그동안 당한 괄시로 조정에 대한 반감이 커 의병활동이 미약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거론한 이유가 틀리지 않는다면 소외받는 백성들이 따로 없도록 보살피고, 국군들의 국토방위 노고를 격려하며 정당한 대우를 아끼지 않는 것이 전란에서 나라를 구하는 첩경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002년 서해교전 중에 전사한 장병들이 정부로부터 그들의 희생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결식 날 높은 분은 월드컵 관전 차 일본으로 건너갔고, 정부는 희생자유족들을 섭섭하게 대해 그 때 전사한 한 장병의 부인 한분이 이 땅을 등지게 했습니다. 영국의 사학자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의 대화라 했습니다. 산성탐방을 통해 우리 역사와 나눈 대화의 주 내용은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스스로 나서지 않는 한 아무리 견고한 산성도 별 소용이 없다는 것으로 정리하며 모처럼 떨어본  산행과 관련 없는 객적은 수다를 맺습니다.

 

 

                                                              <산행사진>

 

 

 

 

 

 

 

 

 

 

 

 

 

 

 

 

 

 

 

 

 

 

 

 

 

 

 

 

 

 

 

 

 

 

 

 

 

 

 

 

 

 

 

 

 

 

 

 

 

 

 

 

 

                                      한남검단지맥 종주기 1


             *지맥구간:팔당대교옆 바깥창모루-검단산-은고개

             *산행일자:2008. 2. 16일(토)

             *소재지  :경기하남/광주

             *산높이  :검단산657m, 용마산596m

             *산행코스:팔당대교옆 바깥창모루-검단산-고추봉-용마산-은고개

             *산행시간:10시4분-15시57분(5시간53분)

             *동행    :나홀로

 

 

  한수 이남의 경기도 남부를 관통하는 한남정맥은 평균 해발고도가 300m가 채 안되어 산줄기를 잘라내고 도로를 낸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해발1,000m가 넘는 고봉들이 여럿 있는 한북정맥보다 해발600m를 넘는 봉우리가 하나도 없는 한남정맥 종주가 더 어려운 것은 여기저기 산줄기가 잘려 있어 절개면을 오르내리기도 짜증스럽고 끊어진 길을 다시 이어가기가 만만치 않아서입니다. 한남정맥 연봉들의 산 높이가 워낙 낮다보니 다른 정맥들과는 달리 오히려 이 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들에 더 높은 봉우리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검단지맥의 검단산이나 앵자지맥의 앵자봉 모두 그 산 높이가 600m를 넘어 언제고 한 번은 이 지맥들을 밟아볼 생각이었습니다. 


  어제는 팔당대교 옆 바깥창모루에서 한남검단지맥에 첫 발을 들였습니다.

한남검단지맥이란 한남정맥 상 용인의 향린동산입구 능선삼거리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와 불곡산, 청량산, 검단산 등을 거쳐 팔당대교의 한강으로 침잠하는 도상거리가 약43Km가량 되는 산줄기로 이 지맥을 중심으로 서쪽의 탄천과 동쪽의 경안천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지맥의 최고봉은 하남에 있는 해발657m의 검단산으로 서기577년에 고창의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께서 이 산에서 기거하셨다하여 이 산 이름이 검단산으로 붙여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침10시4분 하남의 바깥창모루를 출발해 나무계단 길을 올랐습니다.

애니매이션 고등학교 앞에서 하차한 후 약 15분을 걸어 팔당대교 옆 바깥창모루에 다다르니 이곳 종점에 정차 중인 시내버스 한 대가 보였습니다. 오른쪽으로 난 배수구 옆 계단 길을 올라 송전탑을 지났습니다. 그동안 검단산은 열 번 가깝게 올랐지만 모두가 검단산을 목표로 한 점의 산행이었기에 안창모루나  산곡초교에서 출발했을 뿐, 이곳 바깥창모루에서 출발하여 한강을 내려다보며 검단산을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산행시작 40분이 지나 삼각점이 서있는 283봉(?)에 다다랐고 바로 아래가 안창모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안부였습니다. 날씨가 매섭도록 차가와서인지 안부에 차려진 비닐커튼의 간이쉼터를 찾아 술(?)을 마시는 몇 분들이 보였습니다. 삼거리안부에서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되어 가드로프가 쳐진 암릉 길을 지났고, 한강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두 곳의 전망바위도 지났습니다. 위험표시가 있는 두 번째 전망바위에서 한 동안 말없이 강 건너 예봉산을 바라다보고 있는 한 중년남자 분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옮겨 담으면서 그 분의 양어깨를 내리누르는 삶의 무게를 혜량해보았습니다.


  11시54분 해발 657m의 검단산을 올랐습니다.

전망바위에서 팔당대교 아래쪽의 넓은 한강을 사진 찍은 후 산줄기를 타고 검단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맨 흙이 그대로 드러난 토사지의 한 봉우리 아랫길을 지나며 내려다 본 두물머리 정경이 일품이었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정상에 오르자 이곳에도 술을 파는 분들이 산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넓은 공터가 거의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북동쪽 멀리로 하얀 관을 쓰고 있는 듯이 보이는 눈 덮인 용문산은 최근 군부대에서 정상을 열어놓았다 합니다. 용문산에서  오른 쪽 가까이로 집사람과 함께 올랐던 앵자봉이 희미하게 보여 반가웠습니다. 어느 한 시인이 “하늘이 열리던 날 백두를 맏형으로, 태백의 막내로 광주산맥 한 자락에 호젓하게 태어났다”고 칭송한 검단산이 뭇 산객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내려다만 보아도 시적 감흥이 절로 이는 두물머리 한강변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광 덕분일 것입니다.


  백두산과 태백산에서 검단산의 족보를 찾은 시인이라면 한반도의 등뼈가 다름 아닌 산경표에 나오는 백두대간임을 익히 알고 있음직 한데, 그의 시에 뚱딴지같이 “광주산맥”이 불쑥 튀어나와 당혹스러웠습니다. 백두대간의 족보는 지상의 산줄기를 체계화한 영조 때의 여암 신경준선생이 펴낸 ‘산경표“이고, 광주산맥은 1903년 일본인 고토분지로 교수가 제안한 지하의 지질구조선을 잇는 산맥체계에 따른 것이기에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광주산맥은 태백산맥의 철령에서 분기하여 서쪽으로 내뻗다가 한강을 몇 번이고 넘나들며 지하로 산맥을 이어가는데 반해, 대간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북검단지맥은 한남정맥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이기에 산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한 번도 강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의 장군봉에 이르게 됩니다. 산줄기 족보에 익숙지 못한 시인에 검단산을 칭송한 시를 “하늘이 열리던 날 백두를 맏형으로 속리를 막내로 검단지맥 산줄기에 호젓하게 태어났다.”고 고쳐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고 보면 산줄기와 산맥의 혼용에 따른 어지러움은 피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13시37분 해발596m의 용마산에 올라섰습니다.

일단은 용마산까지 진출해 점심을 들 생각으로 서둘러 검단산 정상을 떴습니다. 두 주전 고교동창들과 함께 지났을 때만 해도 산길의 눈이 녹지 않아 아이젠을 차고 산행을 했는데, 그 새 눈이 거의 다 녹아 양지바른 길에서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펄펄 날렸습니다. 십 수분을 걸어 내려선 오른 쪽 산곡초교로 갈리는 안부삼거리에서 술을 파는 세 번째 간이쉼터를 지나면서 다 먹고 사느라 이 높은 곳에 힘들게 지어 올라 술을 팔겠지 하면서도 산의 보호와 안전사고방지를 위해서는 단속이 불가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낮은 고개를 넘어 송전탑이 서있는 안부로 내려섰다가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는 동안 얼굴가리개를 꺼내 써야 할 만큼 오른 쪽 산 밑에서 불어올라 오는 삭풍이 드셌습니다. 고추봉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고른 후 급경사길을 내려가 산곡리 휴게소로 길이 갈리는 안부삼거리를 지났습니다. 몇 개의 봉우리를 넘어 깃발이 휘날리는 용마산에 오르자 먼저 오른 남자 분 셋이서 점심을 들고 있었습니다. 검단산이 두물머리 전망지라면 용마산은 분원리 한강변을  내려다보는 최고의 전망지일 뿐더러, 산자락에 천진암이 들어선 앵자봉도 검단산에서 보다 훨씬 잘 보여 검단산보다 뛰어난 전망지다 싶었습니다. 용마산에서의 점심시간은 박새와 함께 했습니다. 한 여름에는 나뭇잎사이로 숨어 머리도 내밀지 않는 박새들이 한겨울이면 사람들 가까이를 날아다니는 것은 먹을 것이 부족해서겠지만 어쨌든 재잘거리는 박새들과 함께 한 점심시간은 즐거웠습니다.


  14시 정각 용마산을 출발해 은고개로 향했습니다.

냉혹한 바람은 여전했지만, 넓은 길에 눈이 다 녹아 하산 길이 편했습니다. 산곡휴게소로 내려서는 또 하나의 안부삼거리를 지나 봉우리에 올라섰고, 왼쪽으로 꺾어 얼마고 걸어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흙바닥의 무명봉에 다다른 시각은 14시24분이었습니다. 이 봉우리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서는 낙엽 속에 묻힌 아주 희미한 길이 은고개로 내려서는 지맥 길로 신경 써서 표지기를 보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길만 희미한 것이 아니고 경사도 급해 눈이 녹아 없어졌는데도 낙엽 길이 미끄러워 중간에 멈춰 서서 아이젠을 꺼내 차야 했습니다. 대간종주 시에 산행기로 도움을 준 진혁진님의 표지기가 길안내를 해주어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15시57분 은고개에서 지맥종주를 끝냈습니다.

무명봉에서 어렵사리 25분을 걸어 내려가 묘지를 만나자 이제 희미한 길은 끝났다 싶어 마음이 놓였습니다. 안부로 내려서자 왼편 가건물(?)에 매여 있는 개 두 마리가 죽어라고 짖어 댔습니다. 밭을 지나 만난 임도에서 다른 분들은 왼쪽으로 내려가 시멘트길로 접어들었다 하는데 기왕이면 지맥능선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얼마 후 다다른 나지막한 봉우리 삼거리에서 어느 길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오른 쪽 길을 버리고 그대로 직진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7-8분을 더 걸어 밋밋한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바로 아래 묘지를 이장하고 땅을 고른 곳으로 여겨지는 공터가 자리했고 더 아래로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더 이상 길이 나지 않아 은고개로 내려서는 방도가 서지 않았습니다. 별 수 없이 삼거리로 되돌아와 그냥 지나쳤던 오른 쪽 길로 들어서 4-5분을 걸어 낮은 봉에 올랐더니 중부고속도로 너머 왼쪽으로 은고개가 보여 제 길이 아님을 확인했고 그래서 삼거리로 되돌아 왔습니다. 더 이상 산줄기를 타는 것은 무리겠다 싶어 임도로 돌아와 다른 분들처럼 시멘트 길로 내려섰습니다. 인공낚시터를 거쳐 중부고속도로를 아래로 지났고 다시 46번 국도를 밑으로 건너 은고개에 도착해 교차로신문사 건물 오른 쪽으로 난 다음 구간 들머리를 확인했습니다.


  욕심 같아서는 산행을 계속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후 어둡더라도 수어장대까지 가서 그 아래 산성로터리에서 끝내고 싶었지만, 연 2주 주일미사를 빼먹을 수 없어 은고개에서 하루산행을 접었습니다. 지난주와 같이 연 이틀 지방의 산을 종주하느라 주일미사를 올리지 못한 것이 한해에 3-4회는 됩니다. 세례를 받은 지 8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신앙심이 깊지 못해 다른 교회활동은 일절 못하고 오직 주일미사를 빼놓지 않고 드리고자 노력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산에 미친 다른 분들은 대부분 냉담중인데 그래도 주일미사를 거의 빼놓지 않고 올리는 것이 얼마냐며 자위할 수 없는 것은 진정한 신앙은 자기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산과 신앙 중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고 보면 이러한 고민과 갈등은 계속될 것입니다만, 제 실존의 징표가 바로 이 두 가지에 있기에 앞으로 얼마고 더 고민스럽더라도 감수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어쩌면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들의 삶의 본질은 고뇌일 수도 있다 싶어서입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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