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정맥 종주기29
*정맥구간:애미랑재-통고산-답운치
*산행일자:2012. 12. 4일(화)
*소재지 :경북봉화/울진
*산높이 :1,067m
*산행코스:애미랑재-937.7m봉-통고산-810m봉-답운치
*산행시간:8시9분-15시45분(7시간36분)
*동행 :나홀로
낙동정맥에 29회를 출산해 백두대간의 분기점인 천의봉을 50km 남짓 남겨놓은 답운치까지 진출했습니다. 지난 정월 초하루 경북 포항의 한티재를 출발해 이번에 봉화의 답운치에 이르기까지 낙동정맥에 출산한 것은 총13회로 금년도 종주산행은 이만 마감 짓고자 합니다. 내년 봄에 다시 내려가 남은 구간을 이어갈 계획이어서 1대간9정맥 종주의 대장정 마무리 를 내년 상반기로 미룰 수밖에 없어 아쉽기도 합니다.
이번에 눈이 펑펑 내렸는데도 봉화로 내려가 다음 날 강추위를 무릅쓰고 산행을 강행한 것은 하얀 눈이 덮인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살짝 길을 덮은 정도의 눈길을 걸었고 계곡의 눈을 능선에 옮겨놓은 골바람 덕분에 발목이 빠질 만큼 소북이 쌓인 눈 위도 걸었습니다. 엄청 크게 굉음을 내는 삭풍을 안고 걷느라 귀가 다 멍했습니다. 산행날짜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잡아 모처럼 눈과 귀, 그리고 살갗 등의 감각기관이 정신없었지만, ‘맛 따라 길 따라’나들이가 아니어서 혀와 코만은 뒷자리로 밀려 제 기능을 못했습니다.
우리의 오감에도 그 중요도에 순위가 있다는 것을 최근 한 책을 읽고 나서 알았습니다. 감각을 연구하는 영국의 사학자 마크 스미스 교수가 지은 ‘감각의 역사(Sensory History)’가 바로 그 책인데, 예상했던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시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이 책은 적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이 한마디를 금언으로 새기고 사는 한, 감히 귀가 눈에 한 판 붙자고 덤벼들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만합니다. 초기 중세에는 대부분의 계약이 구매자와 판매자가 손바닥을 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글이 실질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소리와 청각의 문화가 지배력을 가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문자가 널리 보급되면서 중요한 계약은 문서를 작성해 교환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청각의 문화지배는 끝나가고 시각의 문화지배로 전환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청각이 시각보다 천대받는 것보다 더 심하게 비하된 것은 후각입니다. 땀에 지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으려하고 그들을 계급적 관점에서 낮게 보려는 경향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합니다.
아침8시9분 애미랑재를 출발했습니다. 전날 밤 봉화 땅 현동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애미랑재로 이동했습니다. 영하 10도는 족히 될 만큼 매섭도록 추운 날씨에 차도를 살짝 덮은 눈이 얼어 길 상태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지난 번 애미랑재에서 현동까지 이 택시를 탄 적이 있어 기사분이 베테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택시 안의 50분 가까운 시간이 엄청 불안할 뻔 했습니다. 애미랑재에서 하차해 차도 왼쪽 절개면 위에 난 미끄러운 길을 따라 올랐습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햇살이 퍼진 후여서 냉기는 그런대로 참을 만했습니다. 전날 내린 눈이 많지 않아 신설을 걸을 때도 사각사각 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만, 새까만 토끼(?)가 저를 가로 질러 내달으며 낸 발자국은 꽤 선명해 보였습니다. 산행시작 1시간이 다되어 올라선 해발 920m대의 무명봉에서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갔습니다.
9시36분 해발950m대의 봉우리삼거리에 다다랐습니다. 무명봉에서 오른 쪽으로 내려가 동쪽으로 진행하는 중 좌측 사면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맞아 왼쪽 볼이 얼얼했습니다. 해발 900m대의 봉우리를 눈이 제법 많이 쌓인 오른 쪽 길로 에돌 때도 강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몸무게가 80Kg를 넘어 웬만한 바람에 미동도 않는 제가 바람에 밀려 눈길을 잘못 딛지 않을까, 그래서 밑으로 나뒹구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웠습니다. 봉우리 높이가 비슷비슷하고 표지물이 따로 없어 지도상의 위치 확인은 어려웠지만 이렇다 할 갈림길이 나타지 않아 길 잃을 염려는 붙들어 매도 좋은 길을 걸어 해발950m대의 봉우리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동진하면서 계속 눈길을 걸었습니다.
10시43분 삼각점설치 안내판이 세워진 937.7m봉에 올랐습니다. 기말고사가 멀지 않은데도 이번에 낙동정맥을 오른 것은 눈 사진을 찍기 위해서인데, 950m봉에 쌓인 눈을 보고 이 정도 눈이면 됐다 했습니다. 장장 630Km를 걸어 펴낸 졸저 ‘섬진강둘레산줄기에서 길을 찾다’에 눈 사진을 싣지 못한 것을 지금도 옥의 티로 생각하고 있는 제가 여기 봉화지역에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부랴부랴 내려온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를 놓쳐 한 겨울에 오른다면 워낙 눈이 많은 지역이어서 어떤 한 분처럼 구조대의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 봉우리가 937.7m봉인 줄 잘못 알고 마음 놓고 십 분가량 쉬었다가 왼쪽으로 진행했는데 정작 표지물은 산죽 길을 지나 반시간 후쯤 다다른 봉우리에 걸려있었습니다. 937.7m봉에서 잠시 멈춰 삼각점안내문을 읽은 후 정북 쪽으로 진행했습니다.
12시5분 해발1,067m의 통고산에 올라섰습니다. 933.7m봉에서 통고산 쪽으로 진행하면서 까마귀 외에 다른 새들이 우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것은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눈이 살짝 덮인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선 1065m봉에서 조금 더 가 “왕피리/하산 3.3Km”의 등산로안내판이 세워진 능선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통고산에 올라 산불무인감시카메라를 정비하러 올라온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잠깐만 장갑을 벗어도 손끝이 아려오는 이 추위에 해발 천 미터가 넘는 통고산의 고봉에 올라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이런 분들이 있어 이 나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된다 싶어지자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무인감시카메라 수리에 필요한 기자재들은 정상의 헬기장에 운반용 그물망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헬기로 실어 나른 것 같았습니다. “通古山”의 표지석을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탁 트인 사방을 빙 돌아서 보았습니다. 북서쪽 먼발치로 하얗게 눈이 덮인 백두대간의 능선이 보였는데 그 길의 가장 높은 봉우리가 낙동정맥분기점과 아주 가까운 매봉산일 것입니다. 무인감시카메라로 부족했던지 산불감시초소까지 세운 통고산을 출발해 북쪽으로 내려가다 자연휴양림 갈림길 바로 앞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바로 아래 통고산 자연휴양림을 들르지 못해 아쉬웠던 것은 휴양림의 소나무 숲에서 머물지 못한 것입니다. 인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평가받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제6권 ‘인생도처유상수’에 따르면 저자 유홍준님은 문화재청장 재직 중인 2004년 11월11일 조연환 산림청장과 업무협약서를 작성했다 합니다. 그 내용인즉 150년 후 산림청에서 여기 통고산 휴양림의 150만평에 이르는 솔밭을 문화재청에 넘긴다는 것으로, 2155년에 개봉하기로 하고 타입캡슐 넣어 묻어두었다 하니 저자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다 했습니다. 통고산 휴양림의 소나무는 가지가 짧게 뻗고 위로 치솟아 올라 목재로서 아주 적합한 금강송으로 궁궐을 짓는데 사용되는 최고의 소나무입니다. 고성, 울진, 삼척, 봉화의 산에서 주로 자라는 금강송이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것은 이 나무들이 여기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출하되었기 때문이라 하니 억지를 부려 춘양역을 유치한 ‘억지춘양’의 억지도 가끔은 부려볼 만한가봅니다.
13시42분 889m봉을 지났습니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다시 이어간 능선 길은 내림 길이 얼마간 계속 됐습니다. 이번 산행의 끝점인 답운치에 15시까지 도착할 수 있다면 15시45분에 현동을 출발하는 경북선 열차에 오를 수 있지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낸 “通古山” 표지석의 사진을 보고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한 친구가 ‘通古’의 의미가 ‘고산자와 통함’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 김정호님이 백두산을 몇 번 오르고 전국을 몇 번이나 돌았다는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대동여지도 덕분에 족보 식으로 작성된 여암 신경준님의 산경표가 생생하게 이미지화되어 通古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通古’를 ‘고산자와 통함’으로 해석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벌목한 나무들을 실어 나르려 낸 것 같은 넓은 임도를 건너 889m에 올랐습니다. 조금 내려가다 얼핏 보면 까치집으로 오인될만한 깔끔한 원형의 겨우살이를 카메라에 잡아 국문과학형들에 전송했습니다.
15시45분 답운치에서 낙동정맥의 29구간 종주를 모두 마쳤습니다. 겨우살이를 사진 찍고 시멘트 블록(?)이 몇 개 보이는 810m봉의 헬기장을 올라 왼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유별나게 삐져나온 양 발의 새끼발가락이 등산화에 눌려 바짝 구두끈을 조여 맸는데도 걸어 내려갈 때는 발걸음을 옮기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아주 천천히 가파른 길을 걸어 내려가 730m봉에 세워진 산불감사초소에 다다르자 젊은 산지기님이 초소로 올라와 몸을 좀 녹이고 가라고 권해와 고마웠습니다. 답운치까지 한 20분이면 족하다는 이분의 말씀을 듣고 현동 택시기사분에 전화를 걸어 도착예정시간을 알린 후 답운치를 향해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갔습니다. 헬기장과 묘지를 차례로 지나 답운치에 다다른 시각이 너무 일러 옷을 갈아입으며 15분가량 기다렸다가 아침에 애미랑재로 저를 실어 나른 택시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산 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만, 바람 소리를 녹음해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청각은 그 쓸모를 찾지 못한 채 내버려두고 익숙한 시각만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특기할 것은 우리 선조들이 과분할 정도로 청각을 대접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의태어만큼 다양하게 발전한 것이 다름 아닌 의성어입니다. 의태어란 눈으로 본 짓거리를 시늉 낸 말이라면, 의성어는 귀로 들은 소리를 시늉한 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말이 다른 나라 말보다 의성어가 비할 수 없이 다양하다는 것은 청각 또한 시각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드센 북풍을 맞으며 눈길을 걷는 동안 생각난 시는 김수영님의 “풀”이었습니다. 바람이란 공기의 이동을 일컫는 것이기에 바람의 실체는 무색, 무미, 무취한 공기입니다. 다시 말해 바람 앞에서는 오감의 시각, 미각과 취각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는 것은 바람이 지나갈 때 촉감을 느껴 누운 것이 아니고, 오로지 청각으로 저만치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고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풀이 동원한 감각은 오직 청각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수영님은 역시 청각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시인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저도 시각 못지않게 청각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 갈 길만 바쁘지 않았다면 바람보다 먼저 누워 쉬어가고 싶었습니다.
바람소리를 들어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는 “풀”들의 애처로운 몸짓이 눈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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