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백두대간·정맥·기맥/낙동정맥 종주기

낙동정맥 종주기33(토산령-백병산-통리역)

시인마뇽 2013. 7. 12. 18:36

                                                         낙동정맥 종주기33

 

 

 

                               *정맥구간:토산령-백병산-통리역

                               *산행일자:2013. 6. 6일(목)

                               *소재지 :강원태백/삼척

                               *산높이 :백병산1,259m

                               *산행코스:태백산휴양림-토산령-휴양림삼거리-육백지맥분기점

                                             -백병산-면안등재-통리역

                               *산행시간:5시46분-14시50분(9시간4분)

                               *동행 :나홀로

 

 

 

  ‘먼 곳에의 동경’을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제가 진정 가보고 싶은 곳은 강원도 태백시의 통리입니다. ‘멀다’는 단어의 의미가 물리적 거리에 의해서만 혜량되는 것은 아니어서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인 부산이 서울에서 훨씬 가까운 강원도의 벽촌보다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부산을 ‘먼 곳에의 동경’의 대상지로 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먼 곳이란 전깃불이 닿지 않아 별빛이 온전하게 내리비치는 곳이고 하도 깊숙한 곳이어서 자동차가 범접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제가 아무리 멀어도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도시를 향해 ‘먼 곳에의 동경’을 품어 본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통리협곡이 깊기로 이름나 한국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태백시에서 발간한 ‘태백여행’ 포켓관광안내도에도 통리5일장은 소개되었지만 협곡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협곡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통리여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통해 접근하지만 실제 행정구역상으로는 삼척시에 속해서입니다. 접근이 쉽지 않은 협곡 가까이로 나있는 길은 ‘미인폭포’로 가는 길 밖에 없고 그 나마도 미인폭포에 다가갈 수 없어 여래사에서 먼발치의 미인폭포를 조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리역에서 종주산행을 마친 저 역시 427번 도로를 따라 원덕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삼척 땅으로 넘어가 왼쪽아래 여래사로 내려가 미인폭포와 이를 둘러싼 통리협곡을 조망하고 돌아왔습니다.

 

 

 

  미인폭포야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이곳 협곡에 위치하지 않았다면 대접받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폭포를 에워싸고 있는 좌우의 암벽이 거의 수직으로 곧추서있어 협곡이 더욱 깊게 느껴졌습니다. 책을 쌓아놓은 듯한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띄고 있어 더욱 웅장해 보이는 통리협곡의 직벽은 제가 지금껏 보아온 어느 절벽보다 높았고 줄잡아 2-3백m는 족히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우평님은 그의 저서 ‘한국지형산책’에서 이번에 오른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쉰 번을 굽이쳐 흐른다는 오십천이 오랜 세월 1만여 평의 고원지대를 지나면서 약 10Km의 깊은 골을 파놓은 것이 통리협곡이라 적어놓았습니다. 여기 통리협곡은 그 깊이가 하도 깊어 설사 설악산의 토왕성폭포를 옮겨놓는다 해도 장대한 협곡에 끼여 그다지 크게 보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새벽5시46분 태백고원자연휴양림의 산림문화휴양관을 출발했습니다. 시내에서 머무르지 않고 휴양림 안에다 숙소를 정한 덕분에 산행시작 시간을 엄청 당길 수 있었습니다. 구간 종주를 마치고 통리에서 조금 떨어진 미인폭포를 들를 속셈으로 새벽부터 서둘렀습니다. 떡 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휴양관을 출발해 토산령으로 향했습니다. 밤새 산 밑에 머무른 안개에 휘감겨 온 몸이 촉촉해진 아침공기가 풋풋한데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맑게 들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습니다. 왼쪽으로 휴양림삼거리 직행 길이 가리는 삼거리를 지나고 임도가 끝나는 넓은 공터에 이르러 잠시 멈춰 서서 숨을 돌린 것은 올라오는 길이 전날 휴양림으로 내려갈 때보다 시간이 덜 걸려 시간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6시43분 해발950m대의 토산령에 도착해 낙동정맥 정맥종주를 시작했습니다. 공터에서 토산령으로 오르는 길은 키가 작아 허리에 못 미치는 산죽 사이로 나 있어 아침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적셔야 했습니다. 토산령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봉우리를 오르는 중 오른 쪽 나뭇잎사이로 떠오른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붉은 해가 보여 반가웠던 것은 전날 면산을 지난 후부터 계속 해를 보지 못해서였습니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 올라선 첫 봉우리를 넘어 조금 내려갔다가 바위봉을 지나자 오른 쪽으로 골짜기를 가득 채운 운무가 보여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십분 넘게 머무르며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사진 찍기를 마치고 조금 내려갔다가 앞서 넘어온 봉우리보다 조금 높아 보이는 산봉우리를 왼쪽으로 우회했습니다.

 

 

 

  8시2분 왼쪽 아래로 휴양림 길이 갈리는 휴양림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산봉우리를 우회해 휴양림삼거리로 이어지는 길이 잘 다듬어진 데다 고도차가 별로 없어 산행이 편안했습니다. 산행 중 비를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지는데 그 급함은 빗줄기의 굵기에 비례합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비로 한 두 방울 내리다가 이내 굵은 빗줄기로 바뀌는 것이 소낙비의 특징인데 그때서야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우의를 꺼내 입지만 이미 얼마만큼 비를 맞고 나서라서 옷이 젖는 것을 막지 못하기가 일쑤입니다. 전날 산행이 그러했습니다만, 이번 산행은 해가 비춰 훨씬 깔끔하게 진행할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휴양림삼거리를 조금 지나 낮은 봉우리를 올랐다가 넓은 길을 걸어 다다른 능선삼거리에서 잘 정비된 길은 끝났습니다. 능선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우회하는 길은 좁고 나뭇가지들이 길을 막아 이제껏 걸어온 휴양림 길과 완연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봉우리 우회를 끝내고 만난 능선 길은 북쪽으로 이어졌습니다.

 

 

 

  9시56분 육백지맥 분기점을 지났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어 9시 정각에 다다른 송전탑 바로 위 봉우리에서 깊숙한 안부로 내려가는 중 왼쪽 멀리 골짜기에서 멧돼지의 울부짖음 소리가 꽤 크게 들려왔습니다. 저의 존재를 드러내보이고자 크게 소리를 내기도 하고 두 스틱을 두들겨봤지만, 십 수분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아 섬뜩했습니다. 가파른 봉우리를 올랐다가 오른 쪽으로 꺾어 내려가 능선에 앉아 잠시 쉬면서 멧돼지의 울음을 떠올렸습니다. 천적이 없어 우리나라 산림에서 확고하게 제왕의 위치를 굳힌 멧돼지가 무엇이 두려워 저렇게 울어대나 싶다가 그게 아니고 야행성동물인 멧돼지가 밤새 일을 잘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어가겠다는 신호음일 수도 있는데 제가 공연히 신경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발1,070m의 육백지맥 분기점에 올랐다가 왼쪽의 완만한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10시57분 해발1,259m의 백병산에 올라섰습니다. 육백지맥 분기점에서 내려선 안부에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낙엽송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다는 것이 반드시 질서정연함과 상치되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낙엽송 나무아래에는 산죽들이 땅을 덮어 다른 식물들은 발을 붙이지 못해, 이러다가는 혹시 한라산처럼 극성스런 산죽이 이 산 거의 다를 덮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자연이든 문화이든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 분명한 것은 자연에 뿌리를 둔 각종 생물이나 문화를 자기들만의 것으로 자랑해온 인간들 모두 서로들 주고받아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은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산죽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오르는 것이 지겹고 시간도 많이 걸려 짜증이 더해 갈 즈음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정맥 길에서 왼쪽으로 0.4Km 벗어나 있는 백병산에 이르자 낙동정맥의 최고봉답게 정상석이 세워졌고 표지기도 여럿 걸려있었습니다. 나뭇잎들로 앞이 가려 제대로 조망하지 못하고 삼거리로 되돌아가 고비덕재로 내려갔습니다.

 

 

 

  12시8분 면안등재에 도착했습니다. 헬기장이 들어선 고비덕재에서 짐을 내려놓고 점심을 들면서 반시간 넘게 편히 쉬었습니다. 재작년 겨울 산우 성봉현님이 석개재를 출발해 눈이 엄청 쌓인 정맥 길을 뚫고 통리쪽으로 진행하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왼쪽 원통골로 탈출한 데가 바로 여기 고비덕재로 옛날에는 태백황지 사람들이 동해안에서 나는 각종 해산물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넘나들던 주요 교통로였다 합니다. 13시 고비덕재를 출발하기 얼마 전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는가 싶었는데 고비덕재 출발 첫 봉에 오르기 전에 비가 몇 방울 내리기 시작했지만 이내 그쳤습니다. 곳곳에 표지목을 세워 안전산행을 할 수 있도록 한 산림청의 친절이 고마운 것은 종주꾼들이 다음에 같은 길을 걷는 산객들에 도움을 주고자 걸어놓은 표지기를 지저분하다며 떼어버리는 국립공원의 소행과 대비되어서입니다. 표지목만 서 있고 재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 면안등재를 지나고 계속 직진해 올라가 나무 의자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13시50분 능선 위 마지막쉼터에 이르렀습니다. 1,000m대의 봉우리를 몇 개 오르내려 도착한 1095m봉(?)에 세워진 ‘백병산2.4Km’의 표지목을 확인하고 왼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급한데다 길이 미끄러워 속도를 확 낮추어 내려갔습니다. 언제라도 비를 내릴 듯이 기세등등한 먹구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가슴 답답했는데 날씨도 후덥지근해 여름산행의 진수를 맛보는 듯 했지만 간헐적으로 골바람이 불어와 견딜 만 했습니다. 한참 동안 내려가 평탄한 능선이 끝나는 즈음해서 오른쪽 아래 차도까지 0.3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목을 보고 이쯤해서 쉬었다가 옷을 갈아입는 것이 맞을 것 같아 얼마간 의자에 등 기대고 편히 쉬었습니다.

 

 

 

  14시50분 통리역에 도착해 33번째 종주산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속옷을 갈아입고 오른 쪽으로 난 비알 길을 따라 내려가 427번 도로로 내려선 시각이 14시30분으로 생각보다 일러 미인폭포를 들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도로 변에 '통리삼거리0.3Km/여래-미인폭포1.0km/백병산정상4.6km'의 세워져 있어 미인폭포가 멀지 않음을 알았지만 통리역으로 가서 산행을 마무리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어서 왼쪽 도로를 따라 내려가 통리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길을 건너 왼쪽으로 조금 이동해 철로를 건너자 통리시내가 나타났습니다. 거리가 너무 스산하다 했는데 길 따라 오른 쪽으로 조금 걸어가 지난 3월 폐쇄되어 문이 닫힌 통리역을 보고 그러면 그렇지 했습니다. 이런 소읍에서 방송대의 학습관 건물을 보고 반가워하다가도 얼마나 오래 남아 있으려나 싶어 안타까운 마음도 일었습니다.

 

 

 

  미인폭포의 주인공은 절세미인답지 않게 한 번도 영화를 누려보지 못하고 애절하게 죽었습니다. 이 폭포에는 “옛날 절세의 미인이 완벽한 신랑감을 가다리다 어느새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폭포수에 비친 걸 보고 뛰어내려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세미인이 폭포에 뛰어 내려 죽은 후에도 평생을 두고 기다린 완벽한 신랑감이 이 폭포를 찾아와 죽은 미인의 영혼을 달랬다는 후속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습니다. 완벽한 신랑감이 없었다면 삼척에 부임한 현감이라도 나서서 오구굿을 올릴 만한데 그런 기록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밀양의 아랑아씨의 전설이 장화홍련전으로 결실된 것은 이진사가 나서서 아랑아씨의 원수를 갚아주어 원혼을 달래준 덕분입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미인폭포에 빠져 죽은 절세미인과 완벽한 신랑의 영혼들을 짝짓게 한다면 아주 훌륭한 서사문학이 태동될 것입니다. 그리 된다면 미인폭포를 통해 통리협곡을 널리 알리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산행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