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산 산행기
*산행일자:2018. 3. 11일
*소재지 :충남보령
*산높이 :성주산 677m
*산행코스:백운사입구-백운사-성수산장군봉-암릉길
-장군봉-521m봉-왕자봉-바래기재-보령세무서
*산행시간:11시35분-19시15분(7시간40분)
*동행 :장군봉-보령세무서 구간을 대천 분과 동행
초등학교 6학년에 막 올라가서 일이니 1960년 봄이 틀림없습니다. 한 친구가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이 나는 산을 알고 있다고 자랑해 몇 명이 떼를 지어 그 산을 찾아 나선 일이 있었습니다. 꽃샘추위로 냉랭했던 3월에 그 산을 찾아 20리는 족히 걸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친구의 안내로 찾아간 산에서 발견한 것은 시꺼먼 돌로 그다지 단단하지 않아 힘을 주면 부서졌습니다. 이런 돌로 연필심을 만들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돌이 석탄인줄을 알지 못했던 저희는 그저 흑연이라고 굳건히 믿고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시꺼먼 돌은 흑연이 아니고 석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석탄이나 흑연 모두 주성분은 같은 탄소(C)이지만, 결정체는 서로 달라 경도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노두에 석탄이 보였지만 매장량이 적어서인지 그 후 그 산에서 석탄을 캐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때 석탄을 처음 보았고 그 다음 해 기차역 공터에 야적한 석탄을 본 것이 두 번째였습니다.
이번에 오른 보령의 성주산을 중심으로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어 내린 계곡 등지에서 채탄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주, 청라, 미산 등 3개 면을 중심으로 생산된 무연탄이 연간 150만톤이었으며, 이 양은 국내 총 생산량의 10%에 상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주산 일대에서 채탄해온 보령탄광은 40년간의 채굴 끝에 채산성이 맞지 않게 되자 1994년에 심원탄광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완전히 폐광조치를 했습니다. 화력발전소가 보령 땅에 세워진 것도 알고 보면 채탄지가 가까워서였는데 탄광이 폐광된 후 주민들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택시기사 분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 보령의 주산물은 머드 화장품으로 바뀐 듯합니다. 해마다 7월이면 보령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는 것은 때맞춰 벌어지는 머드 축제 덕분입니다. 40년 가까이 보령의 경제를 이끌었던 석탄이 주민들의 뇌리 속에서 많이 잊힌 것은 더 이상 캐낼 석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것이 돌이 다 떨어져서가 아니고 돌에 대한 수요가 급작스레 줄어들었기 때문인 것처럼 석탄의 시대가 종언을 고한 것도 석유나 다른 에너지원에 밀려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으로 진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오전11시35분 백운교를 출발했습니다. 대천시내에서 10시50분에 심원마을로 향하는 804번 시내버스에 오른 지 반시간 가량 되어 도착한 백운교에서 하차해 산행을 채비했습니다. 왼쪽으로 이어지는 백운사 길을 따라 걸어 오르는 중 길옆의 폐가 한 채를 보았습니다. 영락없이 귀신이 드나들 법한 버려진 집에서 바람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이 길을 한 밤중에 지났다면 으스스했을 것입니다. 잘 포장된 시멘트 길을 따라올라 다다른 천년고찰 백운사를 그냥 지나친 것은 풀어 놓은 개 세 마리가 다가오며 짖어대서였습니다. 본격적인 산 오름은 백운사를 지나면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오름길은 얼마 걷지 않아 된비알 길로 바뀌었습니다. 이 지역은 폐광지대로 침하될 수 있으니 들어오지 말라는 섬뜩한 경고문을 보고서도 눈 하나 까딱 안하고 산 오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설마하니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희망어린 불신 덕분입니다.
12시48분 571m봉에서 점심을 들었습니다. 해발 370m 대에서 시작된 된비알 길은 능선삼거리에서 끝났습니다. 삼거리에서 잠시 멈춰 숨을 고른 후 오른 쪽 571m봉으로 향했습니다. 고도를 100m 가량 높여 다다른 571m봉에서 20분여 쉬면서 점심으로 떡을 꺼내 먹었습니다. 시야가 막혀 답답한 571m봉에서 북동쪽으로 얼마간 이동해 묘지가 들어선 613m봉에 이르자 시야가 탁 트여 사방이 시원스럽게 조망됐습니다. 한 눈에 잡힌 정상 바로 아래 남쪽 절개면은 잘려 나간지가 얼마 안 되었는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보여 이 산이 겪었을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613m봉에서 조금 내려가자 급경사 내리막길에 잔설이 쌓여 있어 아이젠을 꺼내 찼습니다. 오른 쪽 아래로 심원 마을길이 갈리는 깊숙한 안부삼거리에서 젊은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분들로부터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에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아이젠을 벗었습니다.
14시28분 해발677m의 성주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안부삼거리에서 이 산의 정상인 장군봉으로 오르는 길도 된 비알길이어서 쉬엄쉬엄 올라갔습니다. 날씨가 풀려 산행하기에 딱 좋은데도 정상에 올라 만나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직 산 위에 눈이 남아있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아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산길을 혼자서 걷노라면 어쩌다 들리는 새소리는 물론 상공을 높이 나는 비행기 소리도 그렇게 반가울 수 없습니다. 조용한 정상에 올라 찬찬히 조망한 곳은 남쪽 건너편의 만수산입니다.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평가받았던 금오신화를 지어 방외문인으로 자리를 굳힌 매월당 김시습이 얼마간 머물다 입적한 명찰 무량사가 이 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조만간 들르고자 합니다.
정상에서 수리재로 이어지는 능선 길 중간에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암릉 길이 있어 조심해야한 다는 것은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10년전 용화산에서 추락해 수술을 받은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갖게 된 바위공포증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나이도 같이 들어 심약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밧줄을 매 놓은 곳까지 가서 눈으로 확인한 후 내려갈지 되돌아갈지를 정하기로 하고 장군봉을 출발했습니다. 정상 동쪽 바로 아래 암릉과 한참 더 가 만난 바위 길 두 곳에서 밧줄을 잡고 내려갔더니 오른 쪽 팔을 들어 올릴 때 살짝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계속 내려가 문제의 밧줄 길이 보이자 바위공포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런 기분으로는 혼자서 밧줄을 잡고 저런 바위 길로 내려가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 싶어 포기하고 장군봉으로 되돌아갔습니다. 1대간 9정맥과 숱한 지맥들을 종주하면서 바위 길이 겁이 나 포기하고 되돌아 간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13년 전 금북정맥 종주 길에 지난 백월산에서 본 역암을 정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다시 보아 반가웠습니다. 자갈들이 촘촘히 박힌 바위를 일컫는 역암은 일종의 퇴적암입니다. 고생대 초부터 바다 속에 퇴적된 퇴적층이 조산운동으로 융기되어 이곳에 자리 잡게된 역암을 이렇게 만나 보니 반가운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다시 돌아간 정상에서 군산 분들을 만나 중도 포기한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잘한 일이라고 칭찬해주어 쑥스러웠습니다.
장군봉에서 백운사쪽으로 내려가다 첫 번째 안부에서 왼쪽 아래 심원마을로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바꾼 것은 정상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대천 분이 장군봉-향천봉-왕자봉-바래기재로 이어지는 새 길을 안내해서였습니다. 이 길로 금북성주지맥이 지나는 것을 안 것은 능선의 한 안내판에 ‘성주지맥’이 쓰인 것을 보고나서입니다. 금북성주지맥이란 금북정맥의 백월산에서 분기된 금북기맥이 성태산에 이르러 본 줄기는 장항쪽으로 내닫고, 이 산에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가 문봉산-성주산-왕자봉-통달산을 거쳐 웅천 앞 서해바다에 이르는데 바로 그 산줄기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분이 안내하는 대로 성주지맥 길을 함께 걸으며 세상 돌아가는 일을 마음 편히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고 유수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책임질 일이고 끼니를 굶는 가난한 사람들에 한해 도와주어야지 국민들 삶을 도맡아 잘 살게 해주겠다며 국가가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데도 쉽게 의견을 같이 한 것은 저희 세대 거의다가 자력으로 가난을 극복하고 오늘의 국부를 이루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6시47분 해발519m의 향린봉을 지났습니다. 장군봉을 출발해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한동안 고도를 낮추었다가 헬기장을 지나 올라선 봉우리는 593m봉입니다. 여기서부터 521m봉으로 이어지는 성주지맥 길은 고도차가 크지 않아 별반 힘들지 않았습니다. 521m봉에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가 올라선 527m봉에서 장군봉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을 사진 찍었습니다. 군부대장과 한 기업체 대표이사가 함께 세운 안내판에 적혀 있는 글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군 3천명을 무찔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도선호 김성우 장군이 작전지역을 세밀히 살피고 군사를 조련한 봉우리인 장군봉은 앞서 지나온 정상의 장군봉이 아니고 여기
527m봉이라는 것입니다. 일몰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한데 왕자봉까지만도 장군봉에서 걸어온 길보다 0.7Km가 더 긴 3.5Km가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연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청라터널 위를 지나 올라선 향린봉에서 왕자봉까지 거리가 2.7Km로 줄어들어 잠시 벤치에 앉아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동했으나 이를 참고 계속 내달렸습니다.
17시57분 해발513m의 왕자봉에 도착했습니다. 향린봉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 길을 따라 내려가 해발300m대에 이르자 길이 평탄해져 걷기에 한결 편했습니다. 산행 중간 중간에 물마시고, 사진 찍고, 지도를 보느라 잠시 멈춰 선 짧은 시간이 달콤한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대천 분과의 담소는 자식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나이 든 저희가 지켜보기에 다소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지만 다들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식들이 대견스럽고 고맙기도 하다는 것에도 저희 둘의 생각이 같았습니다. 다시 시작된 오름 길이 그다지 길지 않은 데도 두 다리가 무겁다 싶은 것은 제대로 쉬지 못하고 내달린 때문입니다. 444m봉을 지나 다다른 헬기장에서 조금 더 올라가 생각보다 빨리 왕자봉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를 기다린 석양의 마지막 햇살이 비추어 안온해 보이는 우람한 돌탑을 사진 찍고 나서 남쪽으로 내달려 바래기재로 내려서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19시15분 보령세무서 앞에서 산행을 마쳤습니다. 바래기재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내려가 팔각정인 옥미정을 지나 성주사 앞에 이를 즈음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습니다. 그 아래 넓은 주차장을 지나 옥마산으로 오르는 길을 확인 한 후 오른 쪽으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대천 시내 야경이 한 눈에 보일 만큼 높아서인지 넓은 길을 오가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내려가 보령세무소 앞에 이르자 마침 택시 한 대가 지나가 긴 시간 동행한 대천분과 작별을 고한 후 이 차를 집어타고 보령버스터미널로 이동하는 것으로 하루산행을 마쳤습니다.
서구의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석탄의 시대적 사명은 벌써 끝났습니다. 시대적 사명이 끝난 것은 석탄만이 아닙니다. 1960년대 이후 상당기간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주도해온 연세든 세대들의 시대적 사명도 다해가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주 에너지원이 석탄이 아니고 석유이며 또 원자력이듯이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중추 세력은 더 이상 연세든 세대가 아니고 40-50대로 바뀌었습니다. 석탄이 옛 지위를 되찾게된다면 그것은 우리나라가 북한이나 그리스처럼 경제적으로 몰락한 후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분명 재앙이어서 절대로 일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70대 이상의 연세든 분들을 다시 부르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쟁이나 정변이 일어나 자유민주국가의 근본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을 때일 것입니다. 그 또한 재앙임에 틀림없어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연세든 분들이 다시 부름을 받지 않도록 오늘의 중추세력인 40-50대들이 우리 사회를 잘 끌어가기 바라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선거 때 빠지지 않고 투표해 오늘의 중추세력들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연세든 분들이 꼭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교시절 자취할 때 연탄불을 갈면서 나무를 때지 않고도 밥을 하고 방을 데울 수 있게 해준 석탄에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며 살았던 시절이 있어 저는 스스로를 석탄세대(?)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제 나이도 70세를 넘겼습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나라의 안위가 존망의 위험에 처해지지 않는 한 석탄시대를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제가 갖고 있는 가용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저 자신을 위해 집중해 쓰고자 합니다. 건강도 열심히 챙기고 젊어서 하지 못한 취미도 즐기며, 스스로를 위해 가치 있는 일들을 발굴해 빠져보고도 싶습니다. 그리해도 괜찮은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주산의 폐광지대를 걸으며 느낀 바를 술회한 이 글이 너무 장광설이 된 것 같아 이만 맺습니다.
<산행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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