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포명소 탐방기3(수리사)
탐방일자:2018. 6. 28일(목)
탐방지 :경기도군포시소재 수리사
동행 :나 홀로
‘寺’라는 한자를 자전에서 찾아보면 ‘절 사’와 ‘관청 시’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寺’를 해자하면 ‘土’와 ‘寸’이 됩니다. 풀이하면 寺란 땅(土)을 재는(寸) 곳, 즉 관청을 뜻합니다. ‘時’나 ‘詩’ 모두 ‘관청 시(寺)’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먼 옛날 백성들에 널리 시간을 알리고 언어로 소통하는 일들 모두 관청의 고유 업무였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청과 절이 ‘寺’라는 한자를 함께 쓰는 까닭을 고대사회에서는 제정(祭政)이 나뉘지 않아 절에서 관청업무를 보아서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주 옛날에는 절이 요즘처럼 산속에 들어있지 않고 대처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절에서 관청업무를 보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寺’에서 ‘관청’의 의미가 사라지고 ‘절’만 남게 된 것은 그 후 제정이 분리되었기 때문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들어온 것이 제정이 분리된 고구려 소수림왕 때여서 절 사(寺)’가 ‘관청 시(寺)’로 쓰인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군포명소 탐방 차 세 번째로 찾아 나선 곳은 제2경으로 선정된 수리사(修理寺)입니다. 수리산의 제2봉인 슬기봉의 남서쪽 기슭에 깊숙이 자리한 수리사가 관청으로 쓰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의 소수림왕 보다 두 세기 뒤에 왕위에 오른 신라 진흥왕 때 이 절이 창건되었다는 것과 이 절이 수리산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백성들이 찾아가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서입니다. 이 절에 절터를 내준 수리산은 도립공원으로 선정될 만큼 산세가 수려하기는 하나, 최고봉인 태을봉의 산 높이가 해발 5백m가 채 안 되는 높지 않은 산이어서 천년 고찰이 들어앉았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이 크지 않은 절이 1,400여 년 전에 지어진 천년고찰로 고승 경허스님이 얼마간 머물렀고, 임진왜란 중 의병대장으로 맹활약한 곽재우 장군도 이 절을 찾아와 수리한 후 여생을 지냈다는 안내 글을 읽고서 수리사가 그냥 지나쳐도 좋은 그저 그런 절이 아니다 싶었습니다.
군포시청이 지근거리인 산본 집을 출발한지 반시간 가량 지나 수리산 들머리인 정수장 입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경입니다. 갑자기 소낙비가 드세게 내려 버스정류장에서 비를 피했다가 8-9분 후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데도 산행을 멈추지 않은 것은 이미 자주 오른 길이어서 산행코스를 훤히 알고 있어서였는데, 슬기봉 바로 아래에서 비를 흠뻑 맞은 산길이 미끄러워 혹시라도 넘어질까 두려워 이 봉우리를 오른 쪽으로 돌아 수리사로 가는 길을 버리고 반대쪽의 임도오거리로 내려갔습니다. 데크 계단을 내려가며 골짜기를 가득 채운 운무를 내려다보노라니 수리산도 그리 낮은 산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임도오거리에서 수리사로 이어지는 길은 넓은 임도여서 산악자전거를 타는 분들에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 오른 쪽 아래로 내려가다가 임도사거리에서 왼쪽 차도를 버리고 계곡 옆으로 낸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줄기차게 내린 비가 흘러들어가 수량이 늘어난 계곡의 물소리가 꽤나 크게 들렸습니다.
지금은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로 내려앉은 여기 수리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6세기에 창건된 천년 고찰로 대웅전 외에 36동의 건물과 이 산 안에 132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하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많은 건물이 들어설 공터가 보이지 않아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곽재우 장군이 말년에 중건했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불타 없어져 1955년에 그 일부를 중건한 것이 오늘의 수리사라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백과대사전은 현존하는 당우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산신각·칠성각·종각·요사채 등이 있고,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으며, 초층 탑신에는 검은 대리석에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새겨놓은 것이 있다고 이 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전은 “현재 이 절은 비구니의 수도처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만, 몇 번을 와봤어도 여승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요즘은 더 이상 비구니의 수도처가 아닌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저 아래 임도사거리에서 이 절로 올라오면서 운무가 짙게 깔려 절의 분위기가 자못 그윽하리라 기대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자 눈 안에 들어온 전경은 기대했던 바와 달랐습니다. 비가 그치고 안개가 가신데다 비를 맞아 후줄근해 보이는 공사용 자재들이 너부러져 있어 주위가 어수선했습니다. 왼쪽으로 이동해 대웅전으로 올라가려는 중 돌탑 앞에서 소원을 비는 동아리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중 한 젊은 여인분이 러시아에서 열리는 월드컵축구경기에서 맞붙는 멕시코에게 제발 일본을 이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 갑남을녀에 깊숙이 뿌리박은 반일감정을 읽었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대웅전에 안치된 부처를 사진 찍은 후 왼쪽으로 이동해 나한전으로 가는 길에 석탑에 새겨진 부모은중경문을 읽었습니다. 나한전을 둘러본 후 대웅전 위 삼성각을 찾아 수리산을 지켜주는 산신령에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오른 쪽 아래 요사채(?)는 둘러보지 않고 곧바로 임도사거리로 되 내려갔습니다.
임도사거리에서 정자가 세워진 임도오거리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차도를 따라 반월호수 쪽으로 향한 것은 수리사 인근에서 발원해 반월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반월천을 따라 걷고 싶어서였습니다. 조금 내려가자 꾸며놓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소공원이 눈에 띄어 들렀습니다. 현대식으로 잘 지은 아담한 새 건물은 수리산도립공원사무소가 입주할 예정인데 마무리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인지 건물 안이 텅 비었습니다. 앞으로 도립공원 수리산을 찾아 올 사람들이 얼마나 늘지 모르지만 이제껏 이런 큰 건물의 도립공원 사무소가 없었어도 무슨 사고나 불편한 점 때문에 문제된 일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쓸데없는데 세금을 쓰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림 기도원을 조금 지나서부터 반월호수까지 20여분 동안은 다시 드세게 내리는 소낙비를 맞으며 걸었습니다. 우비로 몸이 젖는 것은 막았지만 구두 안으로 스며드는 빗물은 어찌하지 못해 양말이 몽땅 젖었습니다. 며칠 전 땡볕에 찾아와 한 바퀴 빙 돌았던 반월호수를 비 오는 날 다시 찾아보니 흥취가 또 달랐습니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수면에 내려앉으면서 운동에너지가 위치에너지로 전환된 것으로 끝났다 싶었는데 이내 다시 운동에너지로 바뀌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습니다. 모처럼 내리는 장대비로 전신 욕을 즐기는 반월호수를 카메라에 옮겨 담은 후 내친 김에 20분가량 더 걸어 도착한 대야미역에서 수리사 탐방나들이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이글을 쓰는 동안 계속 머릿속에 맴 돈 것은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기여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수리사를 중건하고 여생을 보냈다는데, 그 까닭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내판에 적힌 대로 불심이 돈독해 이절을 중건하고 여생을 보냈다고 믿기에는 몇 가지 납득할 수 없는 점이 있어 그러했습니다. 첫째,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19년을 더 살은 곽재우가 이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면 스님이 되지 않고 거사로 그 긴 여생을 절에서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중건했다고 하는 데 대웅전 외에도 36동의 건물이 더 있는 대사찰을 무슨 돈으로 중건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오랜 세월을 이 절에서 보냈다면 각종 사전에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을 만도 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익을 담당한 의병장들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하는 선조임금의 눈을 피해 이 곳으로 몸을 숨기려 왔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라도의 의병장 김덕령이 모함에 걸려 사형 당했다는 것을 들어 알았을 곽재우가 능히 취할 수 있는 대처방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 해도 한양에서 멀리 있는 경상도의 절들을 두고 굳이 한양에서 가까운 이 절로 피신해왔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한양 가까이의 절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얼마간 이 절에서 몸을 숨겼다가 귀향해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저 나름대로 추리하면서 수리사탐방기를 마칩니다.
*아래 사진은 6,28일에 찍은 사진이 컴퓨터에서 작업 중 날라가 8월29일에 똑같은 코스를 걸어 다시 찍은 것입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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