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명소 탐방기5(다산초당)
*탐방일자 : 2018년10월29일(월)
*탐방지 : 전남강진소재 다산초당/백련사
*동행 : 서울사대 원영한, 이상훈 동문
한반도 남녘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한 전남의 강진 땅을 20여년 만에 다시 찾은 것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을 탐방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대학동문인 이상훈교수가 자기 차로 며칠간 바람 좀 쐬러가자고 해서 마련된 남도여행의 첫 방문지는 전남강진의 다산초당입니다. 오전 10시20경 산본을 출발해 이상훈/원영한 두 친구가 번갈아가며 6시간 가까이 운전해준 덕분에 제 시간에 도착해 해떨어지기 전에 다산초당 탐방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산초당 탐방은 오후 4시경부터 시작됐습니다. 텅 빈 주차장에서 하차하자 길 건너로 다산박물관이 가까이 보였지만,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는 날이어서 들르지 않고 곧바로 다산초당으로 향했습니다. 담장 안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주홍 감들을 보노라면 이 가을이 이 마을의 돌담길에 주저앉은 사연을 알 것 같았습니다. 다산계 전통찻집을 지나 다다른 아담하고 단아해 보이는 한옥 몇 채를 사진 찍은 후 ‘뿌리의 길’로 올라섰습니다. 이 길이 시인 정호승님을 만난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는 그의 시 “뿌리의 길”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에 정호승 시인은 지상에 드러난 소나무 뿌리를 밟고 나서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곳에 유배된 다산 선생을 '지하의 뿌리'에 비유하기도 한 시인은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가 뻗는다“고 노래했습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 감지되어 발걸음을 빨리했습니다. 길가의 윤종진 묘와 안내문을 살펴보고 나서 다산선생이 해배되어 귀향하게 되자 18인의 제자와 함께 다산계를 만들고 평생 차(茶)를 보낸 사람이 바로 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시간 가까이 걸어 다다른 다산 초당은 생각했던 대로 수수했습니다. 지붕에 올린 기와가 초당에 어울리지 않아 조금 눈에 거슬렸지만, 다음에는 지붕을 볏짚을 엮어 만든 이엉으로 바꿔 이을 계획이라 합니다. 만덕산 산자락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암과 서암이 일렬로 세워졌고, 천일각은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었습니다. 신유박해(1801) 때에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 선생은 이곳 다산초당으로 옮기기까지 8년 동안 편치 못한 몇 곳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1808년 외가인 해남윤씨 가문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 초당에 정착해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면서 황영상과 이청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고, 또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권을 저술했습니다. 다산 선생께서 유배되지 않고 조정에서 중용되었다면 위 명저에 더해 ”흠흠신서“와 이방강역고”, “대동수경” 같은 명저들이 저술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배기간이 선생께서는 간난의 세월이었겠지만, 후예들에는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결실의 시간이었기에 오늘 우리가 이곳을 찾아온 것입니다.
다산초당과 동암, 그리고 서암이 창작과 교육의 공간이라면, 서쪽 끄트머리의 천일각은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쉼터였습니다. 천일각에 올라 강진과 장흥을 가름하는 강진만의 바다, 그리고 바다 건너 천관산을 바라보노라면, 그리고 한 여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노라면 누구라도 산과 바다로부터 정기를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습니다. 선생을 억지로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시켜 무고하게 유배를 보냈지만, 유배기간 중에 여기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고 책을 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유배생활이 오늘날의 감옥생활보다 한결 여유로웠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8백여M의 길은 “오솔길”로 명명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산책코스로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길입니다. 산허리를 완만하게 에도는 산길로 중간에 앞이 탁 트여 강진만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어 그렇습니다. 이에 동백 숲과 야생차 군락이 더해져 더욱 그렇습니다. 천일각 출발 반시간 가까이 북진해 백련사에 다다랐습니다. 다산 선생이 이 절을 찾아간 주 목적이 주지스님인 혜장선사를 만나 지적갈증을 풀기 위해서라지만, 이 절을 오가며 자칫 피로가 쌓였을지도 모르는 심신을 보듬고자 함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 오솔길이 길이 제대로 나있지 않은 그 때에는 왕복 1시간가량 소요되는 최적의 산책코스였겠다 싶어서입니다. 혜장은 인근 대둔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으로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다하니, 다산 선생에게는 이 스님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해발 412M의 만덕산 산자락에 자리한 백련사의 옛 이름은 만덕사입니다. 신라 문성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한 만덕사 터에 고려 희종7년(1211년) 원묘국사 요새가 가람 80칸을 중창했다 합니다. 처음 이 절을 보았을 때는 제 머릿속에 그려왔던 것보다 훨씬 커 과연 다산 선생께서 마음 편히 드나들 수 있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 알고 보니 이 절은 본래 대찰이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변난을 겪으면서 남은 것은 대웅보전, 명부전, 응진전 등입니다. 잎이 다 떨어진 배롱나무를 보면서 빨갛게 피어 있을 꽃송이를 볼 수 있는 봄철에 다시 와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은 이 절은 강진만 바다의 최고 전망처라 불러도 좋겠다 싶을 만큼 절 앞이 탁 트여 강진만과 그 건너 해남 땅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혜장선사를 만나본 후 다산초당으로 돌아가는 다산은 지적갈증을 풀어 가슴 뿌듯했을 것입니다. 먼 곳에서 벗이 찾아와도 기쁘고 가까운 곳의 말벗을 찾아가는 것도 역시 기쁜 일이니 이래저래 벗은 기쁨을 주고 뱓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다산이 지기를 만나고 다산초당으로 돌아간 “오솔길”을 50년 지기의 대학친구들과 함께 걸었으니, 이 길 또한 배움의 탐방 길이기에 우리는 영원한 학우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녁 6시경 주차장으로 되돌아와 다산초당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몇 달 전에 정민 교수가 지은 저서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다산 선생의 제자 황상에 대한 전정어린 사랑과 제자 황상의 변함없는 다산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었습니다. 조선의 정조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다산선생이 정조의 승하로 유배 길을 떠난 것은 예상됐던 수순이었지만,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멀고 먼 강진 땅에서 보낸다는 것은 다산 자신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힘든 기간 중에 다산은 이곳 다산초당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 냈습니다. 그 수많은 제자 중에 끝까지 다산 선생을 따른 제자는 황상과 한 두명으로 대다수의 제자들이 다산을 등졌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유배 중인 강진에서는 물론이고 양주 마재 본가에서 다산이 수많은 저술을 남길 수 있도록 적극 조력한 이청마저 늙어가는 다산선생 밑에서는 출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스승을 저버린 것입니다. 다산 선생이 “대동수경”에서 이청을 거의 공저자 수준으로 대접해 “이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하고 밝힌 것이 새삼 생각났습니다. 나이 70에 과거시험을 치렀다가 실패하고 우물에 빠져 죽은 이청과 달리 백적산으로 옮겨가 은자생활을 생활을 하면서도 스승 다산선생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아간 황상의 우직함을 배운 것만으로도 이 책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상은 다산의 사후에도 자신의 시를 보고 단번에 높이 평가한 추사 김정희 및 다산의 자제인 정학연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 한때 수제자였던 이청이 김정희의 식객으로 머무른 것과는 대비되었습니다. 해배 후 다산선생을 괴롭힌 것은 제자들의 배신이었습니다. 이 점이 바로 지식인 다산과 성인 공자와 대비되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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