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5
*탐방일자: 2018. 10. 30-31일(화-수)
*탐방지 : 전남해남의 미황사(30일)
경남함양의 벽송사(31일)
전북남원의 실상사(31일)
*동행 : 서울사대 이상훈/원영한 동문
전남강진의 다산초당 탐방으로 시작한 2박3일의 남도여행은 전북남원의 실상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중간에 전남해남의 미황사와 경남함양의 벽송사를 탐방해 이번 남도여행길에 찾아 나선 사찰은 모두 세 곳입니다. 제가 카톨릭 신자임에도 고찰을 탐방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은 아직 독실한 신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카톨릭교와 불교는 다른 종교들이 부러워할 만큼 친교를 맺고 있다는 것도 한 이유이고, 그동안 숱하게 많은 산을 오르내리면서 수많은 절을 보아와 처음 가보는 절이 성당보다 더 익숙해진 것이 보다 큰 이유라 하겠습니다.
사찰(寺刹)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 도량(道場)이자, 불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傳法)의 도량을 이릅니다. 이처럼 신성한 일을 하는 사찰에서 속세의 번뇌를 씻고 마음을 깨끗이 하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것은 스님은 물론 불교신자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경내로 들어가서는 항상 몸가짐에 조심하는 것도 혹시라도 사찰의 엄숙한 분위기를 해칠까 걱정해서일 것입니다.
사찰은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절이라고 불리는 사찰은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살며 집회와 행사를 하는 곳이라 하여 가람(伽藍)이라고도 하고. 부처님이 상주하여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이라 하여 도량(道場)이라고도 하며, 깨끗한 집이라는 뜻에서 정사(精舍)라고도 합니다.
전각(殿閣), 문(門), 요사채(寮舍寨)와 탑(塔)이 모여 사찰을 이루는 것이 전통사찰의 구조입니다. 전각(殿閣)에는 대웅전, 대적광전, 극락전, 미륵전, 원통전, 약사전, 팔상전, 나한전, 대장전, 적멸보궁, 조사당, 삼성각, 범종각, 누각 등이 있으나 절의 규모나 특징에 따라 절 안의 전각 수가 들쭉날쭉합니다. 문(門)에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이 있습니다. 사찰 경내의 전각과 문을 제외한 건물로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통칭해 요사(寮舍) 또는 요사체라 부릅니다. 큰방, 선방, 강당, 사무실, 후원, 창고, 수각, 해우소 등이 모두 요사에 속합니다. 탑(塔)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나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는 곳으로 불자들의 숭배대상이기도 합니다. 탑과 조성의미가 비슷한 조형물로 금강계단, 석등, 부도 등이 있습니다. 조계종포교원에서 발간한 “불교입문”에 위에 적은 사찰 경내에서의 예의, 사찰의 명칭과 사찰의 구조에 대한 기본적인 것이 실려있어 여기에 인용했습니다.
1.미황사(美皇寺)
전남 해남의 달마산을 오르는 길에 미황사를 들렀습니다. 달마산이 한반도 최남단의 땅끝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이듯이, 이 산의 서쪽 골짜기에 자리 잡은 미황사 역시 한반도 최남단의 고찰입니다.
신라 경덕왕 8년인 749년 의조화상이 창건한 미황사(美黃寺)는 우리나라 불교가 바닷길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불교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가람으로 널리 알려진 고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같은 해 8월 의조는 사자포 앞 바다에 나타난 석선에 올라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들어있는 금함(金函)을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다 합니다.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우전국 국왕이라면서,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의조는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美皇寺)를 지었다는 것이 불교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이 절의 창건신화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궁금해 하는 제게는 미황사의 창건신화보다 달마산에 얽힌 전설이 더 솔깃하게 들립니다. 1264년 겨울에 중국남송의 배 한 척이 달마산 동쪽 바다에 도착했는데 한 고관이 "이 나라에 달마산이 있다고 하던데 이 산이 그 산인가?"하고 물어 한 주민이 그렇다고 답하자 달마산을 향해 예를 표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명성만 듣고 동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이리 보니 여기서 나고 자란 그대들이 부럽고 부럽도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리고 "이 산은 참으로 달마대사가 항상 머무를 만 하구료" 하면서 참배하고 화폭에 담아 갔다 합니다. 달마대사가 혜가대사를 만나 선법을 전해주고는 중국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후 그 어디에도 달마대사의 행적이나 지명을 가진 곳은 없다 합니다. 다만 그 때의 중국인들은 달마대사가 해동으로 건너가 안주한 곳이 여기 달마산이라며 찾아오고 부러워했던 모양이라고 미황사 홈피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찰 미황사가 언제 두륜산의 대흥사의 말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사치고는 그 규모가 꽤 큰 편입니다. 대흥사에는 비할 수 없이 좁은 절터에 여러 전각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저 험한 달마산이 중턱에 앞이 탁 트인 좁지 않은 땅을 이 절에 내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을 차례로 지나 뒤쪽 마당 건너로 주불전을 마주보고 있는 2층 누각의 자하루를 쳐다보자 이 절이 그저 그런 말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묵언’의 안내판이 세워진 자하루의 통로를지나서 주불전인 대웅보전 앞에 이르렀습니다. 이 절에서 가장(?) 고색창연해 보이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94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전소된 것을 1598년에 중건한 뒤 1754년과 1761년에도 중수했다하니 이 전각에 쌓인 세월은 3백년에 몇 십 년 못 미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고색창연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은 그 세월이 곡절 많은 간난의 연속이었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달마대사와의 인연을 적어놓은 안내문과 달마대사의 전신상을 보고나자, 달마대사가 정말 이 곳에 머문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이를 입증할 만한 기록은 어느 누구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절중에 하필 미황사를 달마대사가 머물었던 곳으로 점찍은 것은 유라시아 극동 쪽의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절이라는 것과 달마산의 모습이 우락부락한(?) 달마대사를 닮아서가 아닐까 추리해봅니다. 아침햇살이 절 뒤에 우뚝 솟은 달마산과 이 절이 빚어낸 절경을 잘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절 맨 위 전각인 응진당을 둘러보고 왼쪽 옆 삼성각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제가 명찰을 탐방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은 삼성각(三聖閣)입니다. 삼성각은 칠성, 독성과 함께 산신을 모시는 곳으로 우리나라 전통신앙이 사찰에 녹아든 대표적인 사찰당우입니다. 천주교가 불교의 이런 지혜를 진작 배웠다면 무고한 신자들이 떼죽음을 당하는 박해는 없었을 것입니다. 삼성각은 비록 절 맨 위 모퉁이에 자그마하게 지은 당우이지만 갈등 극복의 지혜를 배울 만한 곳이라는 생각입니다. 산신을 가장 가까이 만나볼 수 있도록 배려해 절 맨 위 모퉁이에 터를 잡아주었다고 생각하면, 삼성각이 그런 곳에 있다고 투정부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미황사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 동이나 있었던 큰 절이었다 합니다. 그 후 비록 규모는 줄어들었어도 이 절을 찾는 탐방객이 여전히 많아 고찰로서의 명성 또한 여전한 것 같습니다. 이 절의 병풍이 되어준 달마산의 산신도 미황사의 여전함을 보게 되면 참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2.벽송사(碧松寺)
전날 험로의 달마산을 오르내리는데 에너지를 많이 써 전북고창의 선운산을 오르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라는데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탐방지를 남원의 실상사로 바꾸고 나서 실상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벽송사라는 고찰이 있는데 둘러볼 만해서 이 절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경남 함양에 자리한 벽송사(碧松寺)는 해인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를 알 수 없지만,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 고려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이 절이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조 중종15년인 1520년 벽송(碧松)선사가 중창했다하여 벽송사라는 이름을 얻은 이 절은 한국전쟁 때 지리산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이다가 국군의 폭격을 받고 전소된 것을 중건한 것이어서 지금은 어디에서도 천년고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침 일찍 고창 숙소를 출발해 함양 땅의 벽송사로 향했습니다. 남원의 실상사 입구와 마천읍내를 차례로 지난 다음 산속으로 고바위길을 한참 올라가서 해발580m대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벽송사에 이른 시각이 10시 58분이었습니다. 이 절은 전날 탐방한 미황사와 달리 터를 넓게 잡았는데도 들어선 전각이 많지 않아 시원한 느낌이 절로 들었습니다. 주차장에서 하차해 몇 걸음 올라가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일주문이나 담벽이 보이지 않는데다 들어선 전각도 많지 않아 썰렁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꽤 넓은 터에 보광전(普光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자리하고 있으며, 앞쪽으로 산문(山門)과 종루를 배치하였고, 뒤쪽으로 산신각을 세워놓은 정도여서 공터가 더욱 돋보였습니다. 이 공터를 3백 년 동안 지켜온 적송 두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그중 한 그루는 많이 지쳤던지 버팀목의 부축을 받고 있어 나무들도 세월을 피해갈 수 없구나 싶었습니다. 옛 절터에 다소곳이 서 있는 벽송사3층 석탑이 이 절의 유일한 문화재이지만, 이 절이 배출한 고승은 서산대사 등 여러 분이 있습니다. 절 전체가 깔끔해 수려한 산세와 잘 어울렸습니다.
경내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다 만난 지리산의 둘레 길을따라 20분 가까이 걸었습니다. 공기가 삽상하고 절정에 이른 단풍으로 온 산이 울긋불긋해 만산홍엽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이다 했습니다.
벽송사와 관련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설화가 흥미롭습니다. 이 절에 머물렀던 서룡은
1890년(고종 27)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할 것을 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이 바쁘다며 연기를 요청해와 나흘을 미루었다가 제자들에 물어 ‘지무생사(知無生死)’, ‘증무생사(證無生死)’와 ‘용무생사(用無生死)”의 세 마디를 남기고 입적했다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몰라 노심초사하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서룡을 부러워하는 것은 죽을 날을 미리 알고 또 필요하면 연기할 수 있는 초능력일 것입니다.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고(知無生死),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고(證無生死),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았기에(用無生死) 생사를 해탈하는 초능력을 보유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3.실상사(實相寺)
제가 전남의 남원 땅에 자리한 실상사의 절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지리산을 처음으로 종주한 1970년입니다. 50년 가까이 이름만 들어온 실상사를 직접 가서볼 수 있도록 주선하고 동행해준 두 동문에 감사하는 뜻에서 이 탐방기를 씁니다.
이번에 찾아간 실상사는 이제껏 제가 머릿속에 그려온 산속의 아담한 절이 아니었습니다. 실상사가 너른 들판의 논 한가운데 넓게 터 잡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은 실상사라는 절 이름이 규모는 작지만 옹골차리라 기대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본질이 실(實)보다는 허(虛)에 가까울 진데, 절 이름에 열매를 의미하는 실(實)자가 들어 있어 이 절이야 말로 그 규모나 가람의 배치가 참으로 알차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실상사 탐방은 절에서 200m 떨어진 60번 도로의 실상사매표소에서 시작됐습니다. 만수천 위 해탈교를 건너 실상사에 이른 시각은 11시53분이었습니다. 이런 큰 절에 일주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좀 색다르다 하면서 천왕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교수의 지인인 환경운동가 한 분이 안내에 곁들여 사근사근 해설을 잘 해주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실상사(實相寺)가 어떤 절인가는 “실상사일원”이라는 안내판에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지리산 천황봉을 마주하고 자리한 이 절은 통일신라 흥덕왕3년 (828)에 홍척스님이 처음 세웠다. 신라말기 교학보다 참선을 중시한 선종의 여러 종파가 전국명산에 절을 세웠는데, 실상사가 그 중의 하나이다. 정유재란(1597) 때 모두 불타 숙종(1674-1720)때 건물36동을 다시 지었으나, 고종 때 화재를 당해 현재의 소규모로 복구하였다. 실상사는 훌륭한 스님들을 많이 배출하여 한국선불교의 위상을 드높였다. 경내에서는 국보인 백장암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어 이절의 역사적 의의를 의의와 품격을 더해 준다.”
차에서 내려 천왕문에 이르기까지도 길이 훤하게 나 있어 이 절이 참으로 넓게 터 잡았다 했는데, 천왕문에서 보광전 사이의 마당 또한 엄청 넓어 전각과 요사채 건물 등이 빽빽하게 들어선 미황사와 극명하게 대비됐습니다. 가운데 석등과 좌우로 삼층석탑을 앞마당에 세운 보광전은 천왕문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절의 주법당입니다. 이 법당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이지만 좌우의 협시불인 관음과 세지 두 보살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같이 봉안되었던 것을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온 것이라 합니다.
이 절의 전각으로 주불전인 보광전 외에도 오른 편 가까이에 앞뒤로 명부전과 약사전이, 왼 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극락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해주는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이고, 명부전은 갖가지 지옥의 장면을 그린 시왕(十王)의 그림이나 조각을 모시는 전각으로 주존은 지장보살입니다. 앞쪽의 명부전이 그 크기가 정면 3칸, 측면3칸으로 뒤쪽 약사전의 정면3칸, 측면2칸보다 큰 것은 병든 환자보다 죽어 지옥행을 대기하는 사자(死者)가 더 많아서가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왼쪽 저만치에 자리한 극락전은 그 크기가 약사전과 같은 수준인데, 원래 부도전으로 지은 것을 150년쯤 지나 극락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합니다.
이 절의 특징으로 탑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가람배치도에 따르면 실상사 경내에 세워진 탑은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 증각흥척국사응료탑, 수철화상능가보월탑, 판운화상승탑, 용담대화상탑, 실상사승탑, 화명당대선사승탑 등 8개입니다. 현존하는 8개의 탑 이외에도 지금은 터만 남은 9층석탑이 있었다 하니 옛날 실상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나는 이로써 가늠됩니다. 과연 실상사는 통일신라 9대선문의 하나였습니다.
이 절의 넓은 앞마당 한가운데가 지리산 천왕봉의 최고 전망처라는 것은 그 자리에 서서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대부분의 산은 아무리 높아도 작은 산에 가려 먼발치서 정상을 조망하기가 쉽지 않은데 상당한 거리의 지리산 정상이 막힘없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호국불교로 자리매김한이 절의 스님들에 요구되었을지도 모르는 호연지기를 기르는데 도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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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역사학자 이이화님은 그의 저서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를 통해 우리나라 불교의 과제로 기복 불교의 청산 및 신도와 비구니의 지위향상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둘러본 사찰은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 도량이자 불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傳法)의 도량으로서 맡은 바 역할을 해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이화님이 불교계에 고언을 아끼지 않는 것은 작금의 불교계가 아직도 해내지 못한 과제들이 얼마간 남아 있어서가 아닌가 합니다. 세속의 번다한 일들에 너무 깊숙히 빠져들지 않고 사찰을 수행도량 및 전법도량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도 오늘 날의 불교계가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탐방사진>
1.미황사
2.벽송사
3.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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