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명소탐방기4(남산 용장사지)
*탐방일자:2018. 12. 22일(토)
*탐방지 :경북경주시 남산소재 용장사지
*동행 :경동고24회 이규성동문 외 다수
경주의 남산은 신라시대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경주 민중의 안식처였습니다. 재야사학자 이이화선생이 그의 책 “이야기한국불교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불국사나 황룡사는 왕실귀족이 차지하고 있어서 백성들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미륵불이 모셔진 경주남산이 8세기부터 민중의 안식처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산에는 절도 많고 석불인 마애불이 여기 저기 널려 있는데다 충담사 같은 초라한 스님들이 오가면서 민중의 기원을 들어주었다 하니 답답한 민중들이 이 산을 자주 찾았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일 것입니다.
경주남산의 용장사(茸長寺)는 벌써 사라진 절로 터만 남아 있어 지금은 용장사지(茸長寺趾)로 불립니다. 용장사가 세상 사람들에 널리 알려진 것은 조선의 문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이 절에 머물면서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고 나서일 것입니다. 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배워온 금오신화는 한문체의 전기소설(傳奇小說)입니다.
절터만 남아 있는 남산의 용장사지는 국문학에 관심을 갖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분명 생소한 곳입니다. 저도 10년 전 남산을 처음 올랐을 때 이 산에 용장사가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후 방송대의 국문과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이 산의 용장사가 금오신화의 산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용장사지를 탐방하겠다고 별러왔습니다. 마침 고교동창들이 명산100산 탐방의 일환으로 이 산을 오른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곧바로 신청해 이렇게 탐방 길에 오른 것입니다.
용장사 마을입구에서 용장사지 탐방길에 올랐습니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오른 쪽으로 고위산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직진해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용장골로 향했습니다. 골짜기가 깊지 않아 계곡물이 많지 않은 용장골의 계곡은 그다지 길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멈춰 서서 안내판에 적힌 김시습의 한시 한 수를 감상했습니다.
茸長山洞窈 不見有人來
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小窓眠共鹿 枯椅坐同灰
不覺茅簷畔 庭花落又開
용장골에서
용장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돌 매화를 곱게 흔드네
작은 창가엔 사슴 함께 잠들었으라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여있네
깰 줄을 모르는구나 억새 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위 시의 제목은 ‘용장골에서’로 적혀 있지만 정확히는 ‘居茸長寺經室有懷’로 ‘용장사 경실에 거처하면서 갖는 감회’ 정도로 번역될 만하다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김시습이 호남지방 여행을 마치고 경주로 들어가 용장사경실에 거처하던 1463년 봄에 거처하면서 쓴 시입니다. 김시습은 용장사 경실부근에 매화와 장미를 심었고, 경실 북쪽에는 잣나무를, 남쪽에는 삼목을 심었으며, 또 죽순을 보호하고 뜰의 대를 씻어주었다고 심경호교수는 그의 저서 “김시습평전”에 적고 있습니다. 제2연인 함련(頷聯)의 번역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아 ‘가랑비는 시냇가 대숲으로 옮아가고 살랑 부는 바람은 들판 매화를 보호하지’라는 심경호교수의 번역을 같이 올립니다.
설잠교(雪岑橋)를 건너 비탈길을 올랐습니다. 짙푸른 대나무 숲이 우거진 삼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조금 오르자 널찍한 한 공터가 보였습니다. 이 공터가 바로 용장사지라는데 앞쪽이 탁 트여 조망이 일품이었습니다. 절이 들어서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이는 공터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금오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얼마 오르지 않아 용장사곡석조여래좌상(茸長寺谷石造如來坐像)을 만났습니다. 이 불상은 일장육척 높이의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이라 합니다. 보물187호로 지정된 이 석불의 특이한 점은 삼륜대좌 위에 석불이 모셔졌다는 것인데 머리가 잘려져 나가 부처님의 자비로운 용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이 석불좌상 가까이에서 빙 둘러 앉아 점심 식사를 함께 한 후 산 오름을 이어갔습니다. 이내 사진으로만 보아온 용장사곡삼층석탑(茸長寺谷三層石塔)의 실물이 보여 엄청 반가웠습니다. 해발400m의 높고 큰 바위산을 하층 기단으로 삼아 건축한 삼층석탑이라고 안내판에 적힌 대로 이 탑은 과연 기단이 따로 없는 것을 보고 이것만으로도 보물 제186호로 지정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높이는 5m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탑이지만 암반 자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은 것이기에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보면 어쩌면 이 탑이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기리는 가장 높은 탑일 수도 있겠다 싶어 전신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 고위산에서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넓은 길에 이르러 왼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선배 한 분과 함께 걸으면서 제가 놀란 것은 고등학교에서 배웠다면서 금오신화에 실린 5편의 소설이름을 모두 말씀한 것입니다.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몇 살 위의 선배가 암기하고 있다는 것은 김시습의 문학사적 위상이 아직도 대단함을 일러주는 것이다 했습니다. 김시습의 위상은 금오산에서도 확인했습니다. 중년의 한 아버지(?)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사내 녀석에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로 소설을 쓴 분으로 시험에 자주 나오니 외워라 하는 것을 보고 역시 김시습이다 했습니다.
금오산에서 삼릉으로 내려가는 하산코스는 10년 전 거꾸로 오른 길입니다. 길가의 마애불과 석불이 모두 눈에 익어 반갑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서남산주차장에서 귀가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용장사지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김시습의 방랑은 1455년 단종의 양위소식을 듣고 과거시험에 대비해 공부하고 있던 북한산의 중흥사를 박차고 나서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세조의 정변과 찬탈은 유학사상의 핵심이라할 왕도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에 훗날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추대 받을 만큼 올곧은 김시습이 공부를 집어치고 방랑길에 나선 것은 충분히 이해될 만 합니다. 관서와 관동, 그리고 호남지방을 탕유(宕遊)한 김시습은 거창의 견인사와 합천의 해인사를 거쳐 경주로 발걸음을 옮겨 금오산의 중턱의 용장사 경실에 머물기에 이른 것입니다.
김시습은 경주의 여러 유적지를 소요하던 어느 해 정월에 눈길을 마다 않고 매화를 찾아 나섰습니다. 김시습의 아래 시를 읽노라면 매화에 자신을 비유한 김시습이 지향한 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저 매화처럼 품격을 갖추고 절개를 지키는 사대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花時高格透郡芳 꽃 필 때 품격은 뭇 꽃 중에서 빼어나고
結子調和鼎味香 열매 매실은 간 맞춰 음식 맛 향기롭네
直到始終存大節 시종 큰 절개를 보존하니
衆芳那敢窺其傍 다른 방초가 어이 짝하랴
김시습의 금오산 은둔은 1471년 봄에 한양으로 돌아감으로써 끝났습니다.
김시습은 이 은둔기간 중에 불후의 명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했습니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와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의 5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전기소설(傳奇小說)입니다. 금오신화는 비록 형태는 중국의 전기체 소설의 영향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자유분방한 애정 전개, 국내를 배경으로 한 공간의 친근성, 낭만적분위기 속의 한시의 적절한 제시 등에서 고려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국순전(麴醇傳)’, ‘죽부인전(竹夫人傳)’이나 ‘저생전(楮生傳)’ 등의 가전체소설(假傳體小說)과 명확히 구분되는 새로운 서사형태의 고소설이라는 것이 “고전소설강독”을 공저한 설성경 및 박태상 두 교수의 평가입니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과 ‘취유부벽정기’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애정을 그린 명혼계(冥婚系) 소설이라면, ‘남염부주지’와 ‘용궁부연록’은 고독한 자신의 의식을 통하여 세계를 개혁하려는 이상의 실현으로 나타나는 몽유계(夢遊系)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참에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김시습의 세계관입니다. 김시습의 세계관은 대체로 일기탁약론(一氣槖籥論), 원이무물론(圓而無物論)과 정기이산설(精氣已散說)로 요약됩니다. 일기탁약론이란 천지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기(氣)가 풀무질할 따름이라는 것으로 일원론적주기론의 다른 표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남염부주지’의 주인공 박생이 일리론(一理論)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김시습의 일기탁약론도 일리론을 거쳐 완성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원이무물론이란 하늘의 형태가 둥글되, 물체는 없다는 논리를 이르는 것이고, 정기이산설은 전통적인 무속의 혼백설과 마찬가지로 기의 흩어짐과 뭉침의 작용으로 생사가 결정된다는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고전소설강독”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김시습의 세계관이 “금오신화”에 어떻게 녹아 있는가는 앞으로 살펴볼 일입니다. 8년 전 방송대국문과의 한 스터디그룹에서 금오신화의 원문강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문 실력이 한참 못 미쳐 내내 고전만 했지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김시습의 세계관을 읽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의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한 번 원문해독에 도전한다면 그의 세계관이 각 작품 속에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 조금이나마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시습은 은둔을 끝내고 돌아간 한양에 끝내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1493년 지난 3월에 탐방한 충남부여의 무량사에서 입적하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탐방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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