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36.고절한 순백미의 겨울 꽃 서릿발

시인마뇽 2018. 9. 10. 11:37


                                                  고절한 순백미의 겨울 꽃 서릿발


 



  얼음을 빼놓고 겨울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것은 눈망울을 제쳐두고 여인의 미색을 얘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겨울이 다른 계절과 대별되는 근본적인 차이가 기온이 물이 어는 빙점이하로 떨어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껏 입동이 언제냐 관계없이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얼음을 처음 만나보는 날을 그 해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로 삼아왔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맞는 첫 겨울은 해마다 날자가 달랐습니다. 기상변화가 어떠했고 언제 고산을 올랐느냐에 따라 그 날자가 같지 않았는데 11월 초에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 높은 산을 오른 해에는 입동 날보다 더 빨리 겨울을 맞았고, 이상고온의 날씨가 얼마고 계속되었던 어느 해에는 소설을 한참 지나 11월 말쯤에야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첫 얼음을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자연의 얼음은 크게 보아 상공에서 결빙하는 눈과 지상에서 어는 얼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상공의 눈과 지상의 얼음은 빙정환경이 크게 달라 하늘을 나는 눈과 강물의 빙판처럼 그 형상도 크기도 전혀 다릅니다. 눈만 해도 결정의 크기에 따라 진눈깨비, 싸락눈, 가루눈과 함박눈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에스키모사람들이 분류한 눈은 그 종류가 무려 스무 가지가 넘는다 합니다. 겨울하늘을 난무하며 무질서도가 최고조에 이르는 역동적인 함박눈이 나뭇가지에 내려 앉아 질서의 세계로 편입되고 나면 한겨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설화를 꽃피우게 됩니다. 지상에서 어는 얼음도 지표수가 얼어붙어 생기는 얼음, 공기 중의 수증기가 얼어 지표면에 내려앉는 서리, 땅 속의 수분이 얼어 지표면을 뚫고 삐져나오는 서릿발 등 그 모양이 다양합니다. 초겨울 나뭇가지에 맺힌 상고대는 서리가 빚는 최고의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한 겨울이면 제 고향 파주의 자유로를 지나며 임진강가 흙을 뚫고 나와 도열하듯 날을 세워 곳곳하게 서있는 서릿발의 모습을 지켜보며 참 도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공의 눈만은 못해도 지상의 얼음도 이렇듯 그 모습이 다양하기에 마냥 겨울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겨울초입에 만나는 얼음은 그 종류가 무엇이든 야무지지 못하고 어딘가 좀 엉성해 보입니다. 첫눈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슴 설레며 맞는 많은 사람들의 감동에는 아랑곳 않고 지표면에 닿자마자 이내 녹아버립니다. 지표수도 위만 살짝 얼어 얼음의 결정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산을 오른다 해도 상고대를 만나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게는 첫 겨울 산행이 얼음다운 얼음은 만나보지 못하고 덜덜 떨다가 내려온 그저 그런 산행이었습니다.


  어제(2007년11월18일)는 고교동문들과 함께 광덕고개-국망봉 구간의 한북정맥을 종주했습니다. 아침 9시 포천의 광덕고개를 출발해 국망봉을 향해 능선 길을 오르내리는 중 더할 수 없이 고절해보이는 순백미의 겨울 꽃 서릿발을 보았습니다.  사계정리를 위해 나무와 풀들을 베어내고 낸 한북정맥의 능선 길에서 피어난 서릿발은 이제껏 400산을 넘게 올랐어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얼음 꽃이었습니다. 서릿발의 절제된 순백의 아름다움은 연꽃을 뛰어넘어 고절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흔히들 서릿발은 좀처럼 견뎌내기 어려운 혹독한 환경을 표현할 때 쓰이곤 합니다. 국화를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 하는 것은 서릿발이 심한 추위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홀로 꼿꼿해서 이르는 말입니다. 추위를 무릅쓰고 꽃을 피운 것은 국화만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은 땅속에서 피어난 얼음 꽃의 서릿발을 발견하고나서입니다. 한 해 중 이 맘때면 땅 속에서 삐죽삐죽 솟아난 서릿발은 여러번 보았지만 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꽃 모양의 서릿발을 보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빙정을 이루어 부족한 제 글 솜씨로는 이  토록 신비로운 얼음 꽃의 아름다움을 다 묘사할 수 없어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풀들을 베어내지 않았다면 풀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것이고 한 겨울이라면 눈 속에 파묻혀버렸을 것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첫 겨울날 난생 처음으로 이런 겨울 꽃을 만나볼 수 있었던 것은 국망봉의 산신령이 추위를 무릅쓰고 한북정맥을 종주하는 저희 일행을 가긍히 여겨 베풀어준 은덕 덕분이다 싶어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이번에 만난 본 서릿발도 고절한 순백미를 마냥 이어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잠시 추위가 풀리면 소리 없이 녹아 없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며칠만이라도 저 고결한 서릿발의 순백미가 이어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기를 기원하면서 남은 길을 마저 걸었습니다.


*위 글은 2007년11월18일 종주한 광덕고개-백운산-국망봉구간의 한북정맥종주기 일부를 발췌해 2018년9월10일 가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