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산의 산신령
정상 남동편에 자리한 굴바위에서 3대 독자의 부부가 백일기도를 올린 뒤 아들을 낳았다하여 씨앗산으로도 불린다는 종자산(種子山)을 오르내리며 제가 이산의 산신령께 하루 빨리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은,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이 산이 진정 씨앗을 잉태하는 종자산이라면 자식을 원하는 어미 애비는 물론 손자를 기다리는 할아비 할미의 간절한 소원도 들어줄 것이라 굳게 믿어서였습니다. 이 산의 산신령이 꼭 손자 녀석이 아니고 손자 딸이라 해도 감지덕지할 저의 간절함을 헤아린다면 설사 백일기도를 다 채우지 못해도 그동안 수많은 산들을 오르내린 저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소원을 꼭 들어줄 것 같았습니다.
자식을 낳아 종족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능이기에 생각하는 동물인 사람들이 자식을 원하고 나이 들어 손자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종족의 보존은 진화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진화란 “생물이 오랜 동안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보다 복잡하고 우수한 종류의 것으로 되어가는 일”로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Darwin)이 그의 역저 “종의 기원”을 통해 진화론을 주창한 이래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그 세를 얻어 이제는 정론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최근 저는 피터 J. 리처슨과 로버트 보이드가 함께 지은 “유전자만이 아니다(Not by genes alone:How culture transformed human evolution)”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주 내용은 인간의 진화경로를 바꾸게 한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고 문화도 한 몫 했다는 것입니다. 남부에 사는 미국인들이 왜 북부의 미국사람들보다 자존심을 상하게 한 상대방에 훨씬 더 공격적인가를 연구한 저자들은 그들이 살아온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담아서 부모에서 자식으로 전달하는 일을 유전자만이 아니고 문화도 같이 해낸다는 것입니다.
오전 9시24분 “해뜨는 마을” 앞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1시간 반 만에 해발643m의 종자산 정상에 올라섰습니다. 620m봉에서 오른쪽 능선을 타고 종자산으로 옮기는 중 후미를 보는 동년배의 한 분을 만나 내내 산행을 같이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제가 3년 간 교편을 잡았고 집사람을 만나 결혼한 광주가 이 분의 고향이어서 오래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희의 종자산 등정을 축하라도 하려는 듯 매 한 마리가 서서히 상공을 선회하며 사진모델이 되어주어 이 새의 여유로운 날개 짓을 사진 찍는데 성공했습니다. 정상석이 서 있는 종자산의 고스락에 올라 북쪽으로 보이는 여러 봉들을 둘러보며 잠시 쉬는 동안 뒤쳐진 부부 한 팀이 여기 정상을 올랐다가 먼저 출발해, 저희 둘이 맨 후미가 됐습니다. 정상에서 해발고도가 610m인 암봉에 이르기까지 동쪽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내려다보기에는 아찔했지만 암벽에 자리한 소나무와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비경이었습니다. 아찔한 능선 길에서 뒤돌아보자 병풍폭포에서 620m봉으로 올라온 바위길이 한 눈에 잡혔는데 저런 위험한 길을 어떻게 올랐나 싶을 정도로 가팔라보였습니다. 590m봉, 사기막고개, 헬기장이 들어선 안부사거리, 그리고 큰골지장계곡을 차례로 지나 중리저수지 위 주차장에 도착한 시각이 15시58분이었으니, 종자산 산행에 6시간 반이 걸린 셈입니다.
문화를 구성하는 콘텐츠에는 전설도 들어있습니다. 과학을 중시하고 합리를 추구하는 서양인들은 굴속에 들어가 손을 잇게 해달라고 100일 기도를 하는 우리나라사람들을 살아온 문화가 달라 쉽게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한반도에 조선을 연 단군의 건국신화를 어렸을 때부터 배워 알고 있는 저희에게는 종자산의 전설이 그다지 새로울 바 없는 아주 귀에 익은 것입니다. 이런 유(類)의 전설이 문화 속에 녹아 우리 몸속에 벌써부터 자리 잡아왔기에 제가 종자산을 오르며 손자를 빨리 보게 해달라고 산신령께 빌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620m봉을 오르기 직전부터 함께 산행한 한 분과 함께 풀어놓은 보따리 속의 이야기가 제법 다양했던 것은 저희 둘 모두가 격변의 이 땅에서 60년이 넘는 모진 세월을 함께 이겨낸 6학년생들로 나름대로 건강하게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했다는 이 분이 공무원시험에 수석 합격한 아들에 전해주는 가장 큰 가르침은 국가공무원으로서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깨끗하게 생활해 온 삶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유전자만이 아니다"라는 책에 실린 문화와 유전자의 공진화론이 맞는다면 전 총리분이 가까운 친척임에도 단 한 번도 인사 청탁을 하지 않은 이분의 삶속에 녹아 있는 가치와 신념이 머리 좋은 유전자와 함께 자식들에 전해졌고 뒤이을 후손들에도 전해질 것입니다. 100일 기도로 얻은 자식들이 커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 속옷까지 다 벗어버리고 발광을 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선뜻 기도를 들어준 종자산의 산신령이 오히려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이제 산신령께서도 정성들여 100일 기도를 올리는 부부에 자식들만 점지시켜 줄 것이 아니라 이렇게 태어난 자식들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건강하게 커나가도록 A/S도 함께 해주어야 영험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아슬아슬하고 아기자기한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기쁨에 5시간 넘게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추가해준 종자산을 조만간 다시 찾아 하루 빨리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다시 한 번 빌어볼 생각입니다.
이상은 2010년2월16일 경기 포천의 종주산을 오르고 남긴 종주산 산행기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그 후 다시는 종자산을 찾아가 손자를 보게 해달라고 빌지 못했는데, 고맙게도 2015년 고대했던 손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종자산의 산신령은 역시 영험했습니다.
2018. 5.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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