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봉 마이산
어제(2008. 7. 16일)는 금남호남정맥을 종주하는 길에 전북진안의 마이산을 탐방했습니다. 전북 진안은 해발4백m가 넘는 고원으로 되어 있어 지대가 높습니다. 이 진안고원에 우뚝 솟은 마이산은 세계에서 유일한 부부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발685m의 수마이봉과 이보다 14m가 낮은 암마이봉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이 부부봉에 가까이 다가가면 벌집 같은 큰 구멍들이 꽤 많이 보입니다. 온 몸에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이 구멍들을 바라보노라면 이들 부부가 살아온 삶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마이산은 중생대 백악기말 진안분지의 퇴적암이 오랜 세월에 걸쳐 융기와 침강을 반복하면서 차별 침식을 받아 형성된 산으로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 등 계절에 따라 달리 불리기도 한답니다. 계절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그 이름이 달리 불렸으니 삼국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 조선조 초기에는 속금산으로 불렸다가 3대 임금인 태종 때부터 부부봉의 두 바위가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영남육괴와 옥천조산대사이에 생긴 단층선을 두고 2개의 지각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여 사다리꼴 형태로 지반이 꺼져 내린 후, 이곳에 만들어진 호수에 퇴적층이 두껍게 쌓여 형성된 것이 마이산의 일생이 시작된 진안분지입니다. 진안분지는 지하 깊은 곳에서 굳은 역암층이 약4천만년 동안 지각이 양쪽으로 물러났다가 밀려들어오는 침강과 융기를 8회이상 반복하면서 400m이상 솟아올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이산의 천연콘크리트 역암은 진안분지에 생성된 퇴적암층이 지각변동을 겪으며 융기하여 지표면에 노출된 것입니다. 마이산의 역암층을 구성하는 역(礫) 즉 자갈의 크기는 최대 1m나 된다 합니다. 역암이 지표에 노출되어 풍화와 침식을 받으면 역 주위의 점토나 모래가 풍화되어 역이 그 자리에서 빠져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차별침식으로 만들어진 풍화혈을 타포니(tafoni)라 하는데 마이산의 타포니는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지금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합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아픔을 감내하며 몇 천만년이나 말없이 제 자리를 지켜온 마이산의 일생은 가히 감동적입니다. 마이산의 일생에 저보다 훨씬 앞서 감동한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이 바로 부부봉에서 떨어져나간 돌들을 모두 모아 돌탑을 쌓아 올린 이갑용 처사님입니다. 이분은 1885년에 입산하여 도를 닦으시다 1957년 98세로 영면하시기까지 무려 30년간 120개의 돌탑을 쌓으셨다 합니다. 전국8도에서 가져온 몇 개의 돌들이 탑 쌓는데 들어간 천지탑을 빼고는 다른 모든 탑들이 모암에서 떨어져 나간 돌들을 주워 쌓아 놓은 것이기에 이 탑들은 암수 두 마이봉의 분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모암에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아주 멀리 사라진 것이 아니고 바로 아래 탑사 주위에 또는 풍화혈 안에 돌탑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이들 부부봉의 아픔도 많이 덜어졌을 것입니다. 이렇듯 훌륭한 처사님을 만나 영생을 누릴 부부봉이 한편 부럽기도 했습니다.
진안읍사무소를 출발한지 4시간 반가량 지나 탑사아래 넓은 공터로 내려서는 것으로 본격적인 마이산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탑사 대웅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갑용 처사께서 쌓아놓은 탑들은 몇 번을 보아도 신비로웠습니다. 이 분이 공들여 쌓은 수많은 탑을 보고 예술이란 자연에 손을 대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고 정성들인 손길을 자연에 더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다른 데서 반듯한 돌들을 가져와 탑을 쌓은 것이 아니고 마이산의 두 모암에서 떨어져 나온 돌들을 모아 쌓은 것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커다란 자갈이 떨어져 나가 움푹 파진 암마이봉의 타포니 안에 탑을 쌓은 이갑용처사의 역사(力事)는 부처님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깎아지른 암벽의 한참 위에 자리한 움푹 파진 곳을 무슨 수로 기어 올라가 탑을 쌓았겠느냐 싶어서입니다. 대웅전 뒤에 정교하게 쌓아놓은 천지탑이 이 처사의 예술적 생명을 무한대로 늘려놓으리라 생각하면서 숫마이봉의 은수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암마이봉의 탑사에 비하면 숫마이봉의 은수사는 뭔가 모르게 초라했습니다. 대적광전과 숫미이봉을 카메라에 담은 후 정맥으로 복귀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조선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이 절에 와 기도를 드리는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크게 자라 돌배가 줄줄이 열린 청실배나무를 지나 시꺼먼 비닐 거적을 덮어씌운 간이 창고 위 산속으로 들어섰습니다. 표지기를 따라올라 다다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묘지에 이르렀습니다. 떼거리로 덤벼드는 모기들의 공세를 견디지 못해 잠시 쉬어가겠다는 생각을 접고 사람들이 다닌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정맥 길을 이어갔습니다.
옥산동고개마루에서 정맥종주를 마치고 4-5분을 기다렸다가 저녁 7시에 출발하는 진안 행 군내버스에 올랐습니다. 진안터미널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부부봉 마이산에 작별 인사를 하면서, 당신들의 더 큰 고통은 살점이 떨어져나가 생긴 것이 아니고 아직도 화해하지 못하고 토라져 사는 데서 비롯되었기에 누구라도 빨리 손을 내밀고 화해해 서운함을 털어버리라는 제 고언도 함께 전했습니다.
*위글은 2008년7월16일 종주한 ‘450m봉 묘지-마이산-옥산동고개’ 구간의 금남호맥종주기에서 일부를 따와 2018년3월25일 가필정정을 한 것입니다. 이글 중 마이산에 관한 지리정보는 거의다가 이우평님이 지은 “한국지형산책”에서 따왔습니다.)
'XV.시인마뇽의 문학산책 > 시인마뇽의 산행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종자산의 산신령 (0) | 2018.05.16 |
---|---|
33.통고산의 바람 (0) | 2018.05.07 |
31. 이카루스의 날개 (0) | 2018.03.21 |
30.신뢰(信賴)의 성(城) - 산(山) (0) | 2018.02.27 |
29.백운산(白雲山)의 봄 (0) | 201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