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고산의 바람
어제(2012년12월2일)는 낙동정맥의 ‘애미랑재-통고산-답운치’ 구간을 종주했습니다. 전날 눈이 펑펑 내렸는데도 봉화로 내려가 강추위를 무릅쓰고 산행을 강행한 것은 하얀 눈이 쌓인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살짝 길을 덮은 정도의 눈길을 걸었고 계곡의 눈을 능선에 옮겨놓은 골바람 덕분에 발목이 빠질 만큼 소북이 쌓인 눈 위도 걸었습니다. 엄청 크게 굉음을 내는 삭풍을 안고 걷느라 귀가 다 멍했습니다. 산행날짜 한 번 기가 막히게 잘 잡아 모처럼 눈과 귀, 그리고 살갗 등의 감각기관은 정신없이 작동했지만, ‘맛 따라 길 따라’나들이가 아니어서 혀와 코만은 뒷자리로 밀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오감에도 그 중요도에 순위가 있다는 것은 최근 한 책을 읽고 나서 알았습니다. 감각을 연구하는 영국의 사학자 마크 스미스 교수가 지은 ‘감각의 역사(Sensory History)’가 바로 그 책인데, 예상했던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시각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이 책은 적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이 한마디를 금언으로 새기고 사는 한, 감히 귀가 눈에 한 판 붙자고 덤벼들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만합니다. 초기 중세에는 대부분의 계약이 구매자와 판매자가 손바닥을 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사례가 많았다고 이 책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글이 실질적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소리와 청각의 문화가 지배력을 가졌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문자가 널리 보급되면서 중요한 계약은 문서를 작성해 교환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청각의 문화지배는 끝나가고 시각의 문화지배로 전환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청각이 시각보다 천대받는 것보다 더 심하게 비하된 것은 후각입니다. 땀에 지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가까이하지 않으려하고 그들을 계급적 관점에서 낮게 보려는 경향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다 합니다.
애미랑재를 출발한지 4시간이 다 되어 하얀 눈이 살짝 덮인 해발1,067m의 통고산에 올라섰습니다. 통고산에서 답운치로 하산하면서 마루금에서 벗어난 바로 아래 통고산자연휴양림을 들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인문학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평가받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제6권 ‘인생도처유상수’에 따르면 저자 유홍준님은 문화재청장 재직 중인 2004년 11월11일 조연환 산림청장과 업무협약서를 작성했다 합니다. 그 내용인즉 150년 후 산림청에서 여기 통고산 휴양림의 150만평에 이르는 솔밭을 문화재청에 넘긴다는 것으로, 2155년에 개봉하기로 하고 타입캡슐 넣어 묻어두었다 하니 저자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다 했습니다. 통고산 휴양림의 소나무는 가지가 짧게 뻗고 위로 치솟아 올라 목재로서 아주 적합한 금강송으로 궁궐을 짓는데 사용되는 최고의 소나무입니다. 고성, 울진, 삼척, 봉화의 산에서 주로 자라는 금강송이 춘양목으로도 불리는 것은 이 나무들이 여기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출하되었기 때문이라 하니 억지를 부려 춘양역을 유치한 ‘억지춘양’의 억지도 가끔은 부려볼 만한가봅니다.
이번 산행에서 산 사진은 여러 장 찍었으면서도 통고산의 바람 소리는 녹음해오지 못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청각은 그 쓸모를 찾지 못한 채 내버려두고 익숙한 시각만 적극 활용한 것입니다. 특기할 것은 우리 선조들이 과분할 정도로 청각을 대접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의태어만큼 다양하게 발전한 것이 다름 아닌 의성어입니다. 의태어란 눈으로 본 짓거리를 시늉 낸 말이라면, 의성어는 귀로 들은 소리를 흉내 낸 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말이 다른 나라 말보다 의성어가 비할 수 없이 다양하다는 것은 청각 또한 시각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드센 북풍을 맞으며 눈길을 걷는 동안 생각난 시는 김수영님의 “풀”이었습니다. 바람이란 공기의 이동을 일컫는 것이기에 바람의 실체는 무색, 무미, 무취한 공기입니다. 다시 말해 바람 앞에서는 오감의 시각, 미각과 취각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는 것은 바람이 지나갈 때 촉감을 느껴 누운 것이 아니고, 오로지 청각으로 저만치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듣고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풀이 동원한 감각은 오직 청각뿐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수영님은 역시 청각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시인이었습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저도 시각 못지않게 청각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어 갈 길만 바쁘지 않았다면 바람보다 먼저 누워 쉬어가고 싶었습니다.
바람소리를 들어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는 “풀”들의 애처로운 몸짓이 눈에 그려지는 듯합니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위 글은 2012년12월1일 작성한 '낙동정맥 종주기29(애미랑재-통고산-답운치)'에서 일부를 따와 2018년 수정, 가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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