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고찰(南道古刹) 탐방기6
*탐방일자: 2019. 2. 23일(토)
*탐방지 : 전남순천의 선암사 및 송광사
*동행 :경동고 동문 김주홍 회장 등
전남 순천의 조계산이 품고 있는 이름 난 절은 송광사와 선암사입니다. 이 산의 최고봉인 해발896m의 장군봉을 지나는 호남정맥을 가운데 두고 서쪽 산기슭에 조계종의 승보사찰 송광사가, 동쪽의 산기슭에는 태고종의 총림(叢林)인 선암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송광사와 선암사를 탐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또 이 두 절에 절터를 내준 조계산도 그 정상을 이미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두 절을 다시 찾아 나선 것은 이전의 탐방은 조계산을 등산하는 길에 들른데 불과해 이렇다할만한 탐방기를 남기지 못해서입니다. 태고종의 총림 선암사나 조계종의 승보 송광사 모두 등산길에 그냥 들르는 정도로 끝내도 좋을만한 그저 그런 절이 아니어서 이번에 짬을 내어 다시 탐방했습니다.
경동고24회 명백회의 신임회장 김주홍동문의 결단으로 이번 명산100산 산행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해 탐방길에 올랐습니다. 아침 7시 양재역을 출발해 11시가 조금 못되어 전남순천의 선암사입구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선암사를 출발해 조계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을 오른 후 송광사로 하산하는 동문 20여명은 선암사를 일별한 후 장군봉을 향해 산행을 서둘렀고, 선암사를 탐방하고 장군봉 대신 그 남쪽 아래 나지막한 굴목재를 넘어 송광사로 내려가 찬찬히 둘러보기로 한 김주홍동문의 부인과 저는 천천히 남도고찰 탐방 길에 올랐습니다.
1.선암사(仙岩寺)
한국불교 태고종 태고총림인 선암사(仙岩寺)는 전남순천의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대찰입니다. 〈사적기〉에 따르면 이 절이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은 서력875년입니다.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된 것을 1660년에 중창한 이 절은 그 후 몇 번 화마를 겪고 중건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선암사는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고, 작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소중한 우리의 유적지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선암사로 향하는 저를 잠시 멈춰 세운 것은 석조 무지개다리인 승선교였습니다. 호암 약휴(護岩若休, 1664-1738) 선사가 놓은 이 돌다리는 바로 위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강선루는 물론 그 아래 계곡과도 잘 어울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진경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송광사와 내왕했던 옛날에는 태고종과 조계종이 갈리기 전이어서 여기 선암사와 고개 너머 송광사 두 절 간에 왕래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저 아래 속세로 부지런히 봄소식을 실어 나르는 다리 아래 계곡물 소리가 자연의 교향악이다 했는데, 일주문 바로 아래 연못인 삼인당(三印塘)의 한 가운데 자리한 앙증맞은 섬(?)에서 파릇파릇 돋아난 파란 풀잎들을 보고나자, 봄이 저만치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반듯하게 쓴 ‘조계산선암사(曺溪山仙岩寺)’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 선암사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마당 한 가운데에 낸 중앙로 양 옆으로 삼층석탑이 서 있었고, 그 뒤로 대웅전이 자리한 모습은 이 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찰 중심부에 자리한 대웅전의 현판은 조선조 말기의 대표적 세도가인 영안부원군 김조순(金祖淳, 1764-1831)이 쓴 것으로 보아 당대 선암사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됩니다. 간송미술관장을 역임한 최완수님은 현판에 글쓴이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국왕의 어필에서나 있음직한 일인데 외람되게도 김조순이 그런 무례를 저질렀다고 못마땅해 했습니다. 부처님 뒤의 후불탱은 영조45년인 1765년에 그려진 것으로 순조 23년인 1823년 대웅전 등 거의 전 사찰을 불태운 대화재에서 건져낸 것이어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동행한 친구부인은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부처님께 참배했고, 저는 불전 밖에서 간단히 목례만 올리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른 봄 매화꽃을 보려고 이 절을 찾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특별히 ‘순천선암사 선암매’로 명명된 이 절의 매화는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되었을 만큼 유명한데, 원통전과 각황전을 따라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 길에 50그루가 심어졌다 합니다. 막 피기 시작한 흰 매화꿏을 사진 찍으면서 아쉬웠던 것은 기대했던 홍매화가 철이 일러서인지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어서였습니다. 여기 선암사의 발상지로 알려진 각황전을 들른 후, 응진전 등 그 밖의 전각들과 가람 구석구석을 살펴본 후 대웅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참배 중인 친구 부인을 기다려 다음 탐방지인 송광사로 향했습니다.
송광사로 산을 넘어가는 길은 선암사의 명소(?)인 해우소(解憂所) 를 거쳐 삼인당까지 다 내려가서야 오른 쪽으로 넓게 나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몇 분 걸어 만난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계곡을 건너 오른 쪽으로 굽어지는 큰길은 오른 쪽 아래 선암사골을 따라 서남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깔끔해 보이는 목조다리를 건너 선암사굴목재로 오른 길은 단단하기로는 바위에 못지않아 보이는 희맑은 표피의 서어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꽤나 밝아보였습니다. 해발 620m의 선암사굴목재를 넘어 보리밥집으로 내려가는 길은 겨우 내내 얼어있었던 표토가 녹아 질펀해 길이 꽤나 미끄러웠습니다. 오후 2시를 넘긴 늦은 점심은 보리밥으로 때웠는데 생각보다 맛있어 양이그릇을 싹 비웠습니다.
2.송광사(松廣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는 전남순천의 조계산 서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대찰입니다. 이 절이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로 불리는 것은 그간 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해온 덕분이라 합니다. 신라 말기에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되어 길상사(吉祥寺)로 불린 이 절은 그 후 황폐해진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합니다. 선조34년인 1601년에 이르러서야 중건을 시작했고, 1609년 지리산에서 모셔온 부휴(浮休) 스님이 새로 짓고 보수한 뒤 600여 명의 송광사 승려들이 동안거(冬安居)를 성대히 보냄으로써 근세에 이르는 송광사의 명맥을 부활시켰습니다.
보리밥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올라선 해발 665m의 송광사굴목재에서 반대편의 송광사에서 올라온 몇 분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뉘었습니다. 푸르른 산죽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송광사굴목재에서 북서쪽으로 내려가 돌을 쌓아 벽을 친 아담한 대피소를 지났습니다. 얼마 후 만난 홍골 계곡을 따라 송광사로 내려가는 길 또한 경사가 급하지 않아 걸어 내려가기에 딱 좋았습니다. 동행한 친구부인이 장군봉을 올라간 남편 김주홍 회장을 만난 것은 송광사를 거의 다 내려가서입니다. 송광사 경내로 들어선 것은 저녁 5시를 막 넘긴 후였습니다. 오전에 선암사를 둘러볼 때처럼 시간이 넉넉지 않아 송광사 탐방을 서둘렀습니다.
어느 종교든 신격과 경전, 성직자의 삼대요소가 갖추어지면 교단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佛), 법(法), 승(僧)이라 하여 삼보(三寶)라고 부릅니다. 삼보는 교단형성의 기본 요소로, 이 삼보가 형성된 곳이 바로 절이라고 최완수님은 그의 저서 『명찰순례』에 적고 있습니다. 모든 절에서 삼보의 균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어느 한쪽의 비중이 극대화된 절도 있습니다. 이 점을 명예롭게 여기는 절도 있는 바 불보종찰을 자부하는 양산의 통도사, 법보종찰을 내세우는 합천 해인사와 승보종찰을 자랑하는 여기 송광사가 바로 그런 절들입니다. 송광사가 승보사찰로 자긍하는 데는 이 절이 16국사(國師)를 배출해서입니다. 이 절에서 배출한 불일 보조(佛日 普照, 1158-1210)국사는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주장하여 편견과 분열로 지리멸렬했던 고려불교의 승풍을 크게 떨쳐 일으켰습니다.
계곡 위에 세워진 수상누각인 우화각을 건너고 종고루를 지나서 이 절 중심에 자리한 대웅보전 앞마당에 이르렀습니다. 대웅보전에 다가가자 단청의 색깔이 이 절이 과연 천년 고찰인가 릐심이 갈 정도로 별반 변색되지 않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참고자료를 찾아 읽다가 여전히 깔끔해보이는 까닭을 알았습니다. 1951년5월10일밤 공비의 방화로 소실된 대웅전 등 여러 전각들을 1983년에 이르러 주지스님 현호선사께서 본격적으로 중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역사가 의미 있었던 것은 전문가들이 동참하여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거리낌 없이 반영했다는 것입니다. 고건축전문가인 신영훈 선생이 건축분야를 총 지휘했고, 불보상을 비롯한 제반 조각상의 조성은 최완수 선생이 맡는 등 전문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우리 목조건물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살리고 결함을 배제해 108평의 순 목조 대웅보전 건물과 지장전, 성보각, 목우헌 등 여러 건물들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가 본 대웅보전이 현대감각에 맞아 아름답고 또 주어진 기능에 잘 어울리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천년고찰의 고색창연함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 닫힌 대웅보전을 빙 둘러본 후 역시 문을 열어 놓지 않은 왼쪽의 승보전과 오른 쪽의 지장전도 들렀습니다.
송광사의 가람배치도에 따르면 대웅보전을 비롯한 52개소의 이런 저런 건물들이 이 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건물들이 그리 넓지 않은 땅에 들어서다보니 대웅보전을 제외한 많은 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섰고 그도 모자라 가지런히 돌을 쌓아 만든 축대 위로 일군의 건물이 들어서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남원의 실상사에서 느꼈던 시원한 공간감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 홀로 서있는 목백일홍나무는 봄을 맞을 어떤 준비도 안 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매화나무는 꽃망울에서 붉은 꽃을 피울 날이 하루 이틀 밖에 안 남아 보였습니다. 대웅보전 측면에 그려진 벽화를 보던 중에 어렸을 때 자주 본 여물통을 연상케 하는 엄청 큰 통나무 그릇인 비사리구시를 보았습니다. 송광사 3대명물 중의 하나인 비사리구시는 느티나무로 만든 그릇으로, 그 용량이 2,600리터나 된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보았던 여물통에 비할 수 없이 커다란 이 그릇은 당연 절에서 대규모 행사를 할 때 밥짓는 곳에서 사용됐다 합니다.
절을 빠져 나와 다시 본 우화각(羽化閣)은 역시 송광사의 상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화각은 송광사를 남쪽으로 에도는 계곡 위에 아담한 무지개다리를 놓고 그 위에 세운 것이어서 그 아래 수중보(?)를 만들어 생긴 소(沼)와 참으로 잘 어울렸습니다. 돌계단으로 내려가 이날 하루 마지막 햇살이 조사되는 수중보와 회랑모양으로 길게 다리 위를 전면으로 덮어 천왕문으로 이어진 우화각, 그리고 선암사의 훙예교와는 다른 멋을 보여주는 무지개다리 증 그림 같은 풍광을 담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송광사는 명찰답게 국보 제56호인 국사전과 보물243호인 하상당 등 적지 않은 국보와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넉넉지 못해 건성건성 보고 왔습니다. 승보사찰 송광사에서 국보나 보물보다 더욱 정말 소중한 것은 이 절이 배출한 걸출한 스님들의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자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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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와 선암사의 심리적 거리가 조계종과 태고종의 간격만큼 멀어 보이는 것은 저만의 편견일지도 모릅니다. 해방 후 정부의 개입으로 스님이 결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여부로 갈린 조계종과 태고종은 같은 종파인 선종(禪宗)에서 유래된 것일 진데, 보조국사의 가르침인 홀연히 깨닫고 나서 그 깨달음의 경지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선정(禪定)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手)를 받든다면 두 절의 지리적 거리만큼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탐방사진>
1)선암사
2)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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