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94.백령도 탐방기

시인마뇽 2019. 3. 24. 09:00

                                               백령도 탐방기

 

                                              *탐방일자:2019. 2. 26-27(-)

                                              *탐방지 :인천시옹진군 백령도

                                              *동행 :나 홀로

 

 

 

 

   제가 백령도(白翎道) 탐방을 벌써부터 별러온 것은 이 섬이 흔히들 말하는 대로 환상의 섬이어서만은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탐방하고 싶었던 까닭은 백령도가 우리나라 서해의 섬 중 가장 북한 땅과 가까이 있는 안보상의 요충지라는 것과 또 효녀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印塘水)가 이 섬에서 멀지 않아 우리의 옛 소설 심청전과 관련된 유서 깊은 곳이라는 점 등입니다.

 

 

   백령도는 황해도의 옹진반도와 연결되었던 평원 위에 돌출된 지형이 빙하기에 해수면이 상승하여 낮은 지대가 물에 잠긴 결과 육지와 분리되어 만들어진 섬입니다. 우리나라 서해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 백령도는 동경 124°53, 북위 37°52를 좌표로 하고 있습니다. 행정구역상 인천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해 있는 이 섬이 인천과는 서북쪽으로 191.4Km 떨어져 있는데 비해, 북한 땅의 장산곶과는 19Km(?) 밖에 안 떨어져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깝습니다. 해안선 길이가 52.4인 이 섬은 그 면적이 46.314번째로 큰 섬이었으나. 2006년에 완결한 화동과 사곶 사이를 막는 간척지 매립공사로 약 100만평(?)이 불어나 여덟 번째로 큰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큰 섬이 북한의 장산곶 남쪽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 우리나라에게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군사적요충지가 되었지만, 북한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섬이 환상의 섬으로 불리는 데는 빼어난 자연 경관에 더해 섬 이름도 한 몫 했을 것 같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인즉, 옛날 황해도의 한 사또가 고을 선비와 장래를 약속한 딸을 선비와 떼어놓고자 외딴 섬으로 보냈습니다. 연인을 찾으려고 나선 선비는 백학이 물어다 준 흰 종이에 적힌 주소대로 장산곶에서 배를 타고 이 섬으로 건너와서 사또의 딸을 찾아 단란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섬은 백학도(白鶴島)로 불렸는데, 나중에 백령도(白翎道)로 바뀌었습니다. 이 설화의 특징은 조력자로 백학을 설정한 것입니다.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학()은 천년을 장수하는 고상한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학을 섬의 이름으로 차용한 것은 이 섬을 신선이 노니는 환상의 섬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226() 탐방

   새벽같이 서둘러 산본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5시였습니다. 구로역에서 환승해 다다른 동인천역에서 택시를 잡아타 인천연안여객터미널로 직행했습니다. 예약한 산악투어 여행사에서 일러준 대로 H해운을 찾아가 승차권을 받고 반시간 가량 기다렸다가 승선했습니다. 제가 탄 하모니플라워(Harmony Flower)호는 750분이 되자 곧바로 세 번 뱃고동을 울린 후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제게 배정된 좌석이 통로 안쪽의 구석진 자리여서 한 번 들어가 앉은 후로는 백령도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 동안 꼼짝 못해 바다 풍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때마침 북한의 김정은이 미국의 트럼프대통령과 회담하고자 기차를 타고 베트남의 하노이로 이동 중이었는데, 이 배는 운항시간 내내 김정은의 기차여행을 생중계하는 TV를 틀어주어, 내가 왜 저런 방송을 계속 들어야 하나 싶어 짜증이 났습니다.

 

   대청도와 소청도를 차례로 들러 1145분 백령도에 도착, 용기포항에서 하선했습니다. 용기포항여객터미널에서 산악투어와 제휴해 백령도관광을 안내해주는 현지의 여성가이드 한 분을 만났습니다.

 

 

1)끝섬 전망대

 

 

   여성가이드분의 차를 타고 이 섬 동쪽 끝의 끝섬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해발136m의 용기원산 정상에 위치한 끝섬 전망대에 오르자 광활한 바다가 시원스레 조망되어 좋았습니다. 황사로 기대했던 옹진반도의 전경을 사진 찍지는 못했지만 망원경의 도움을 받아 장산곶과 옹진반도를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여기 백령도를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장산곶을 향해 날개 짓을 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백학도를 백령도로 고쳐 불렀다는 것을 전시실의 안내문에서 읽었는데, 그 새가 매가 아닌 학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퍼뜩 난 것은 이 섬의 생성설화를 이미 읽어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그 새는 이 섬이 고구려 땅이었을 때는 고니였고, 고려시대에는 따오기였다고 하니 앞으로 어느 날 학으로 바뀔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고 전망대를 나왔습니다

 

 

2)심청각(沈淸閣)

 

 

   끝섬 전망대에서 내려가 심청각으로 이동하는 도중 음식점 잔디가든을 들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80대 부부와 함께 다른 가이드분의 차로 바꿔 타 심청각으로 향했습니다. 심청각은 해발 100m의 구릉에 세워져 있어 인당수(印塘水)가 보일만도 한데 그 지점을 특정할 수 없어 설사 보았더라도 보지 못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가 두문진과 장산곶 중간에 있고 심청이 용궁에서 타고나온 연꽃이 떠 내려왔다는 연화리(蓮花里)와 그 연꽃이 걸려 있다는 연봉(蓮峯)이 이 섬에 있다는 것이 새삼 중요한 것은 여러 해전 전남곡성군에서 오산면에 소재한 관음사에 심청전의 원형이랄 수 있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면서 곡성군이 심청전의 주무대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백령도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맞서 1999년 인당수와 장산곶이 내려다보이는 여기 진촌리의 구릉에 심청각을 세워 심청의 효심을 기려왔습니다.

 

   정작 판소리계 소설 심청전은 그 첫 머리를 송나라 말년의 황주 도화동의 한 사람이 잇스되 셩은 심이요 명은 학규라로 시작합니다. 황주를 황해도의 한 군으로 본다면 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나라 땅이 됩니다.  글에 나와 있는 그대로 송나라의 황주 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면,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는 중국 땅에서 살았던 것이 됩니다.

 

   ‘자 모양의  2층 누각인 심청각 안으로 들어가 해설을 듣지 않고 혼자서 빙 둘러보아 별로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심청전 설명의 전시물 4개와 설명문을 이미지화한 그림 몇 점, 그리고 필사본 등의 전시물을 둘러본 후, 뜰로 나가 효녀심청상의 동상을 사진 찍은 후 북쪽 바다를 조망했습니다. 그새 황사가 많이 가셔 앞서 들른 바다 건너 옹진반도가 끝섬전망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게 조망되었습니다.

    

 

3)사자바위

 

 

   심청각에서 옮겨 간 곳은 서쪽의 바위섬 사자바위입니다. 고봉포구 바로 앞 바다에 자리한 바위의 모양이 사자와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사자바위는 바위색이 약하게나마 붉은 색조를 띄워 육지의 화강암 바위가 회백색을 띄는 것과 대조되었습니다.

 

  마치 사자가 누워 바다를 향해 포효하는듯하다고 안내책자는 적고 있습니다만, 제게는 앞발 내딛고 달려들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파도가 세차면 사자바위의 모습이 더욱 멋지다는데 물결이 잔잔해 그런 형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4)용트림바위

 

 

  이 섬 북쪽의 사자바위에서 남쪽의 용트림바위로 이동하는 길에 큰 호수를 지나면서 이런 섬에 저같이 넓은 호수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섬의 최고봉이 해발 184m에 불과하고, 육지와 달리 섬 안의 계곡은 그 길이가 짧아 저런 큰 호수가 만들어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확인한 이 호수의 이름은 담수호 또는 백령호였습니다.

 

   남포리에 도착해 용트림바위를 보고 그 정교한 용트림 모습에 감탄했습니다. 여러 개의 암석층이 겹쳐진 큰 바위가 파도와 바람에 의해 많은 부분이 떨어져나가고 일부분만 남아 마치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용트림바위로 명명된 이 바위를 보노라면 당장이라도 온 몸을 비비 꼬며 하늘로 승천할 것 같은 약동감이 느껴집니다.

 

   이 바위 오른 쪽 절벽에 지층이 구부러지고 끊어진 곳이 있다면서, 이 곳이 대형습곡구조와 단층을 잘 보여주고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는 안내글을 보고 오른 쪽 절벽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데크 계단 길을 따라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 조망한 동쪽의 연봉바위도 볼만했습니다.

 

 

5)중화동교회

 

 

   용트림 바위의 탐방을 마치고 이동한 곳은 중화동의 교회입니다. 중화동교회는 1898년 당상관을 지낸 허득이 유배되어 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등과 함께 세운 자생교회입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이 교회는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백년기독교역사관이라는 부속 건물을 지어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교회의 외관이 하도 깔끔해 100년의 발자취가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이 교회가 설립되기 훨씬 전인 1816년 영국해군 머레이 맥스웰 일행에 의해 첫 복음이 떨어진 곳이 중화동이라고 합니다. 1865년 토마스 선교사가 두무진에 상륙해 1866년 여기 중화동으로 성경을 전달하러 오기도 했습니다. 백령도 진의 참사역으로 참사관을 지냈던 허득은 1893년 당상관으로 제수되고 그 다음 해 동학란 토평에 합류했습니다. 동학란이 평정되고 백령도로 돌아온 허득은 1898년에 이르러 여기 중화동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간 천주교성지를 몇 곳 가보았지만, 기독교의 성지(?)를 찾아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번 중화동교회 방문으로 백령도야말로 복음이 가장 충만한 곳 중의 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6)천암함 46용사 위령탑

 

 

   중화동교회에서 나와 이동한 곳은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천암함 46용사위령탑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포장도로를 따라 구릉을 향해 걸어 올라갔습니다. 몇 분 후 천암함 46용사위령탑에 이르자 오늘날의 우리사회가 이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일들을 너무 태연히 저지르고 있다 싶어 부끄러웠습니다.

 

   20103262122분 백령도 서남방 2.5Km에서 경비작전을 수행하던 우리 해군의 천암함이 북한의 어뢰공격을 받고 절단되어 58명은 구조되었으나 46명은 끝내 희생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려야 함에도 일부에서 여전히 북한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의 희생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령탑 앞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들의 희생정신은 이곳을 찾아와 참배하는 국민들 가슴 속에서 끝끝내 꺼지지 않고 불타고 있을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함선의 피격위치와 인양 위치, 또 인양작업의 구체적인 일지 등을 자세히 적어 넣은 여기 위령탑의 대리석 판이 부셔져 없어지지 않는 한, 이들의 이름은 입으로 입으로 계속 전해질 것입니다

 

   “서해바다를 지키다 장렬하게 전사한 46용사가 있었다로 시작되어. “오오, 나라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의 후예들이여, 우리들은 그대들의 고귀한 정신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이곳에 위령탑을 세운다고 새겨진 2011316일 해군총장명의의 비문을 보고 가슴이 뭉클한 것은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46명 전부의 이름은 욀 수 없겠지만 맏형인 준위 이장기와 막내인 일병 장철희의 이름만이라도 기억하고자 이 글에 숭고한 그들의 이름을 적어 넣습니다

 

         

7)두무진 해안

 

  

   북방한계선과 인접해 있어 아직까지 청정한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는 이 섬의 북동쪽에 두무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 두무진층은 선캄브리아대 퇴적층인 백령군층을 대표하는 지층으로 습곡과 단층의 영향을 적게 받아 거의 수평에 가까운데, 이런 지형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두무진의 탐방 길은 바다와 육지 모두에 나있습니다. 바닷길은 유람선을 타고 두무진 선착장을 출발해 장군봉까지 보고 돌아오는 길이고, 육지 길은 두무진 해안의 꼭대기에 낸 둘레길을 이릅니다.

 

   두무진에서 백령2호에 승선해 바닷길 탐방에 나선 시각은 오후 4시경이었습니다. 곧이어 만난 삿갓바위 앞의 격류는 인당수 다음으로 세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격하게 소용돌이쳤습니다. 격류를 뚫고 나가느라 수 분간 요동친 유람선에서 물결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려 두무진의 기암과 절벽을 완상했습니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전신이 새하얀 색으로 변색된 꽤 큰 바위와 병풍바위, 형제바위와 코끼리바위를 차례로 지나 물범이 서식한다는 넙적바위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매년 3월말에서 12월말까지만 이 섬에 머무른다는 약3백 마리의 물범을 단 한 마리도 보지 못한 것은 제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장군바위를 보고 돌아오는 가는 길에 카메라를 꺼내 들었으나 배가 흔들려 찍지 못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짙푸른 바다 위에 곧추서 도열해 있는 두무진의 기암과 절벽은 규암이 시루떡처럼 쌓여 만들어진 것으로 가히 선경(仙境)이라 부를 만했습니다. 두무진이 황해의 해금강으로도 불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섬이 환상의 섬으로 불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두무진 선착장에서 하산해 조선의 광해군 때인 1612년 이 섬으로 유배된 문신 이대기가 백령지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묘사한 선대바위를 조망하고자 둘레 길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통행이 금지된 오후 5시가 얼마 안 남았다면서 초병들이 길을 막아 포기하고 면사무소인근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현지 가이드분이 안내하는 대로 인근 지역 중급 팬션의 독실을 얻어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2.227() 탐방

   아침 일찍 일어나 여성가이드분의 차로 섬마을 음식점으로 이동해 아침을 들었습니다. 음식점에 걸린 액자의 글이 눈에 익어 가까이 다가가 보았는데. 그것은 1979년에 고 박정희대통령이 친히 써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내려준 總和維新 民族中興8글자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전날 타고 다닌 남성가이드분의 미니버스에 바꿔 타는 것으로 이틀 째 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사곶해변(사곶천연비행장)

 

 

  용기포를 지나 도착한 사곶해변입구에서 여행객을 실은 미니버스가 해변을 따라 2.8Km를 달렸습니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았지만, 마치 아스팔트길을 달린 것처럼 차바퀴가 푹 들어간 자국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만하면 비행기의 이착륙이 가능하겠다 싶어지자 그 까닭이 더욱 궁금해졌습니다. 3m의 폭으로 3.2Km의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사곶해변은 규암이 오랫동안 해수에 침식되어 만들어진 미세입자의 모래가 파도에너지가 약한 오목한 해안에 쌓여 형성된 것으로, 썰물보다 밀물이 더 강해 모래가 계속 운반되어 여기에 이렇게 쌓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곶해변이 간이비행장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큼 모래가 단단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음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고 이우평 님은 한국지형산책에 적고 있습니다. 분급이 양호한 세립질 모래가 오랜 세월 주기적인 조수의 영향을 받아 치밀하게 다져졌으며, 주변 해역의 해류가 너무 세서 점토질 같은 퇴적물은 쌓이지 못하고 먼 바다로 쓸려나갔고, 썰물 때 다져진 퇴적물 입자들 사이에 남아 있는 바닷물이 입자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서라는 것입니다.

 

   1983년까지 비행장으로 쓰인 사곶해변은 1991년에 시작된 화동과 사곶 사이의 간척지 개발로 백령둑과 백령대교가 건설되어 사곶 앞바다의 흐름이 변하면서 점토질 퇴적물이 이전처럼 바다로 쓸려나가지 못하고 사곶해변으로 몰려들어 점차 모래에 엉겨 붙어 모래 바닥이 현저히 물러져 간혹 자동차가 빠져 나오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이런 변화가 계속될지 그 추이를 면밀하게 지켜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해변이 천연비행장으로 쓰이는 곳은 지구상에 나폴리해안과 여기 사곶해변 등 딱 두 곳밖에 없는데 해변의 길이는 여기가 더 길다하니 자랑할 만 합니다.

 

 

2)콩돌해안

 

 

  사곶해변에서 남쪽으로 이동해 담수호를 막고 있는 백령교를 건넜습니다. 조금 더 남진하여 다다른 콩돌해안은 앞서 들른 사곶해변과는 걸을 때의 촉감이 전혀 달랐습니다. 사곶해변은 해변바닥이 단단해 차도를 걷는 느낌이었는데 콩돌해안은 자갈밭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발을 내딛을 때의 감촉이 부드러웠습니다. 이는 이 해안이 이름 그대로 콩알만한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흰색, 갈색, 보라색, 적갈색 등 형형색색의 콩알만한 자갈들이 약50m의 폭으로 약1.5km의 해안을 따라 전개된 것을 보고 잔잔한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콩알만한 앙증스런 자갈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앞서 인용한 이우평 님의 한국지형산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콩돌해안의 양쪽 끝에는 규암으로 이루어진 절벽들이 해풍과 파도에 깎여나가 돌출되어 있습니다. 콩돌은 이 돌출된 양쪽 해안의 절벽들 사이에 활 모양으로 굽어진 오목한 형태의 해안에 많이 쌓여 있습니다. 이 규암 퇴적층에 발갈한 단층과 절리면을 따라 침식과 풍화가 집중되어 절벽에서 바위조각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갔고, 이 규암조각들이 파도에 의해 해안으로 밀려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면서 마모되어 콩알 크기의 자갈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입니다.

 

  콩돌해안은 경사가 사곶해변보다 훨씬 심해, 마치 동해안에 와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3)사곶해변 우수조명소(Sagot sand beach observatory)

 

 

   고갯마루에서 하차해 오른 쪽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5-6분간 산길을 걸어 도착한 조명소에 올라서자 250m떨어진 사곶해변 뿐만 아니라 방조제 너머 담수호도 한 눈에 들어와 사진 찍기에 딱 좋았습니다. 한 분의 도움으로 제 모습을 사진 짝은 후 고갯마루로 돌아가 버스를 타고 백령대교를 건너 방조제에 세운 서해최북단백령도비석과 그 앞의 백령호를 카메라에 담아 왔습니다.

 

   눈앞의 백령호와 간척지는 농어촌공사가 1991년에 시작해 2006년에 마친 백령호 간척사업의 결실입니다. 사곶해변 남서쪽 갯벌의 입구를 길이 820m의 방조제로 막아 매립하는 간척사업으로 약 100만평(?)이 불어났습니다. 백령도에서 식량부족이 해결된 것은 간척지매립공사로 늘어난 농지와 타지 이주로 주민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한해 농사로 3년은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간척사업이 실패한 것이라고 환경단체들이 비판하는 것은 이 사업으로 사곶해변이 망가지고 담수호인 백령호의 수질이 악화일로에 있다고 판단해서일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먼발치로 내려다본 드넓은 간척지가 환경단체의 지적하는 대로 잘못 만들어졌는가는 그곳에 살지 않는 제가 판단할 일이 못됩니다. 어떤 사업이든 명과 암이 있을 진데 어느 한 면만 강조하여 극단적인 결론을 무리하게 이끌어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4)끝섬 전망대

 

 

   여행가이드 분이 바뀌어 전날에 왔던 끝섬 전망대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날씨가 훨씬 쾌청해 전날과는 달리 바다 건너 옹진반도와 장산곶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전시실로 들어가 백령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성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자 다시 오기를 잘 했다 싶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북한군의 도발이 잦아 백령도 주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려 했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반발로 이주계획을 취소하고 해병대 2만명을 상주시켜 주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했고 외지인들의 관광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이라고 설명했니다. 해설사 분은 백령도 섬주민의 식량난이 해결된 것은 간척지 사업이 마무리되고 나서라면서, 그전에 쌀이 부족해 쌀밥 대신 먹은 냉면과 칼국수가 오늘의 명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장산곶에서 해주에 이르는 연백평야가 남한 땅으로 편입되었다면 북한의 식량난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 해설사 분의 설명입니다. 휴전 협상에서 연백평야를 지킨 것이 북한에 엄청난 득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자세히 듣고서야 옹진반도와 연백평야의 지리적 위치와 그 위상이 비로소 가늠되었습니다

 

 

  점심식사로 백령도의 진미인 냉면을 들었습니다

. 1240분에 용기항을 출발해 1640분경 인천항에 안착하는 것으로 이틀간의 백령도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3. 여행을 마치며

    제가 돌아본 백령도는 볼거리가 꽤 많은 빼어난 경승지였습니다. 이 섬의 묘지들이 육지에 못지 않게 넓게 자리한 것을 보고 과연 큰 섬이다 했는데, 큰 병원이 보여 이 정도면 이 섬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백령도 주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혹시라도 미국과 북한의 핵폐기 협상이 실패해 관광객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혹시 미국이 무성의하게 핵협상을 끝내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완전한 비핵화요구를 북한이 받아들이지 않아 하노이회담이 아무런 합의 없이 결렬됨으로써 제 걱정은 기우가 됐지만. 백령도 주민들은 관광객이 줄어들지 않을 까 걱정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백령도 주민들은 19Km밖에 안 떨어진 장산곶에서 장사포의 포성 대신 민요 장산곶 타령」이  들려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점은 저 또한 다르지 않아 인당수로 나아가「장산곶 타령을 목청 높여 부르고 싶습니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드니

      금일도 상봉에 임 만나 보겠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임 만나 보겠네

 

      갈 길은 멀구요 행선은 더디니

      늦바람 불라고 성황님 조른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성황님 조른다

 

      바람새 좋다구 돛 달지 말구요

      몽금이 포구에 들렀다 가소래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들렀다 가소래

 

      달은 밝구요 바람은 찬데요

      순풍에 돛달고 돌아를 옵네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돌아를 옵네다

 

 

                                                     

                                                     <탐방사진>

 

 

1.2019. 2. 26일(화)

1)인천항

 

 

 

 

2)백령도 용기포항

 

 

 

 

 

 

 

3)끝섬 전망대

 

 

 

 

 

 

 

 

 

 

 

 

 

 

 

 

 

 

4)심청각

 

 

 

 

 

 

 

 

 

 

 

 

 

 

 

 

 

 

 

 

 

 

 

 

 

 

 

5)사자바위

 

 

 

 

 

 

 

 

 

 

 

 

 

6)용트림바위 

 

 

 

 

 

 

 

 

 

 

 

 

 

 

 

 

 

 

 

7)중화동교회

 

 

 

 

 

 

 

 

 

 

 

 

 

 

 

8)천암함46용사위령탑

 

 

 

 

 

 

 

 

 

 

 

 

 

 

 

 

 

9)두문진해안 

 

 

 

 

 

 

 

 

 

 

 

 

 

 

 

 

 

 

 

 

 

  

2.2019. 2. 27일(수)

1)아침식사 

 

 

 

 

 

 

2)사곶해변

 

 

 

 

 

 

 

 

 

 

 

 

3)콩돌해안

 

 

 

 

 

 

 

 

 

 

 

 3)사곶해변 우수조명소(Sagot sand beach observatory)

 

 

 

 

 

 

 

 

 

 

 

 

 

 

 

 

 

 

 

 

 

 

 

 

 

 

 

4)끝섬전망대

 

 

 

 

 

5)인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