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시인마뇽의 명소탐방/국내명소 탐방기

95.서울명소 탐방기3(효창공원)

시인마뇽 2019. 4. 23. 13:47

                                         서울명소 탐방기3(효창공원)

 

                                      *탐방일자:2019. 4. 14()

                                      *탐방지   :서울용산소재 효창공원 및 백범기념관

                                      *동행      :나 홀로

 

 


  춘색이 확연한 도심속의 효창공원은 일요일인데도 생각보다 한산했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공원 안의 나뭇잎들이 파릇파릇 돋아난 것을 보고 과연 4월은 소생의 계절이다 했습니다. 4월이 효창공원에서 소생시킨 것은 나뭇잎들만이 아닙니다. 애국충정의 독립유공자를 기리는 저의 추념(追念)도 함께 소생되었습니다.

 

   효창공원(孝昌公園)은 서울의 용산에 자리한 근린공원입니다. 효창공원의 역사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선조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가 묻힌 이곳이 효성스럽고 번성하다하여 이름 붙여진 효창묘(孝昌墓)’에서 시작됐습니다. 고종7(1870)에 원()으로 승격, 성역화된 효창원(孝昌園)이 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의 일입니다. 1944년 문효세자의 묘가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옮겨감에 따라 새 이름을 얻은 효창공원은 이때 크기가 1/3수준으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해방 후 김구선생께서 이 공원에 독립유공자묘역을 조성했고, 1949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자신도 이 묘역에 묻힘으로써 효창공원이 다시 성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생각입니다.

 

   4호선 전철의 숙대역에서 하차해 지나가는 젊은 한 분에 물어 효창공원으로 가는 길을 확인했습니다. 숙대 앞을 지나 올라선 삼거리에서 길을 건너 왼쪽으로 내려가자 효창운동장 입구가 보였습니다. 1950년에 세워진 효창운동장을 제가 찾아 간 것은 대학1학년 때인 1968년으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삼선개헌을 막고자 열렸던 야당 주최 강연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운동장을 조금 지나 도착한 곳은 2002년에 개관된 백범기념관으로 이 기념관에서 효창공원탐방을 시작했습니다.

 

 

1.백범기념관(白凡金九記念館)

 

 

   2002년에 개관한 백범김구기념관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 발전시키고자 건립한 기념관입니다.

 

   기념관의 안내팜플렛은 선생이 태어나서 돌아가시기까지를 16개항으로 정리해 약술했습니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백범 김구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이 되어 해주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역사의 무대에 오릅니다. 19193.1운동 후 중국의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봉직해온 선생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국무령 직에 오른 것은 1926년입니다. 선생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해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1941년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릅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으나 건국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선생은 이승만대통령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반대, 남북한의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여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선생은 1949626일 친일파반동세력에 의해 서거하셨다고 안내팜플렛은 선생의 일생을 요약해 소개했습니다.

 

   외관이 몽땅 흰색으로 도색된 2층 건물의 백범기념관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유일하게 사진촬영이 허용된 중앙홀의 백범좌상으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는 선생의 모습이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워 보였습니다.

 

   9개의 테마로 구성된 1층 전시관은 중앙홀-백범좌상으로 시작해, 상징홀-연보, 영상실, 유년기, 동학 및 의병활동, 치하포의거, 어머니 곽낙원, 교육운동, 구국운동의 전시물을 차례로 돌아보는 것으로 끝내고,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갔습니다. 2층전시관 역시 9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하이시기, 백범일지, 한인애국단,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칭시기, 한국광복군, 자주통일국가수립, 서거와 추모의 순으로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백범기념관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김구선생이 손수 지은 백범일지와 손세일님의 역작 이승만과 김구7권 전부를 이미 읽은 터라 김구선생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으며, 선생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남들 못지않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이번 백범기념관의 탐방으로 제가 알고 있는 상당부분을 요약,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기념관을 나오면서 아쉽게 느껴진 것은 김구와 이승만 두 분의 관계를 보여줄 만한 전시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다른 두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온 두 분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국에서는 실력으로 대일항쟁에 힘썼고, 미국에서는 국제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외교전에 주력했습니다. 1946년 이승만 선생이 정읍에서 남한단독정부수립를 발언한 이후 두 분의 관계는 악화되었지만,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같이 일한 이래 서로 협조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함께 벌였던 두 분은 서로 경쟁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두 분의 관계를 보여줄 만한 전시물이 오로지 임정요인들의 합동사진 밖에 없다는 것이 두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 많이 아쉬웠습니다.

 

 

2.효창공원

 

 

   백범기념관을 나와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바로 옆 김구선생의 묘소였습니다. 계단을 올라 선생의 묘지에 다가서자 기념관에서 본 선생의 좌상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공원 위쪽 구릉 위에 자리해 남산이 마주 보이는 선생의 묘지는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전에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한 눈에 잡혔을 것이기에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터 잡은 것이 분명합니다. 선생의 유해가 안치된 봉분은 그 크기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는데도 바로 앞 비석에 새겨진 大韓民國臨時政府主席白凡金九之墓(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백볌김구지묘)”라는 비문의 무게에 눌려 초라해보였습니다.

   김구선생께서 피살된 1949년은 대한민국이 건국된 다음 해여서 미쳐 국립묘지가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1956년에야 비로소 동작동 국립묘지에의 인장이 시작되었기에 선생께서 효창공원에 독립유공자묘역을 조성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조치였습니다.

 

   김구선생 묘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난 공원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근린공원이어서인지 산보를 하는 여성분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산책로로 조성된 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공원을 빙 돌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북한반공투사위령탑입니다. 남북통일이 되었다면 북한 땅 곳곳에 위령탑을 세워 북한반공투사의 충혼을 기리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지 못해 여기 효창공원에 위령탑을 세웠을 것입니다. 이 탑 하단에 새겨진 나라의 통일독립과 겨레의 자유발전을 위하여 그 생명을 바치시다라는 글이 새삼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이 위령탑이 오래 잊었던 반공의 가치가 다름 아닌 통일독립과 자유발전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어서입니다.

 

   모 신문에서 부적절한 시설물로 지적한 원효대사 동상도 카메라에 담아왔습니다. 독립유공자묘역으로 조성된 효창공원에 스님의 동상이 들어선 것이 부적절하다고 지적한 것이라면 이는 분명 단견입니다. 원효대사는 파계까지 감행하면서 대중교화에 힘쓴 분입니다. 은정희님은 신라의 대승기신론연구에서 원효를 “1,300년을 앞선 시기에 등장한 브라만을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 상정하는 형상학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현실고에 대한 해결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던 석가의 모습과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찬했습니다. 여기 묘역에 묻힌 독림유공자들도 중생의 교화에 힘쓴 원효대사님과 함께 하면서 영혼의 안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기에 원효대사동상을 부적절한 시설물로 매도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임정요인의 묘는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 사진만 찍어왔습니다. 이 곳에 묻힌 분은 이동녕 임정주석, 조성환 국무부장과 차리석 비서부장 등 세 분입니다. 중국에서 타계한 이동녕과 차리석 두 분은 김구선생께서 주선하여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되었고, 1945년에 귀국한 조성환 국무부장은 1948년에 사망해 이곳에 모셔졌습니다.

 

   효창공원의 정문은 창열문(彰烈門)입니다. 이 문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면 넓게 터 잡은 삼의사묘(三義士墓)’에 이르게 됩니다. 삼의사(三義士)란 일제강점기 때 대한 독립을 위하여 몸을 바친 이봉창, 윤봉길과 백정기 의사를 이릅니다. 이 세 의사의 공통점은 일본요인들을 암살하는 일을 맡아 실행했다는 것입니다. 이봉창의사는 1932년 일왕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해 그 자리에서 붙잡혀 투옥되었고, 그해 10월 순국했습니다. 윤봉길의사는 1932년 상해의 홍커우공원에서 사라카와 대장을 암살하는데 성공했으며, 일본 가나자와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백정기 의사는 1933년 홍커우에서 일본주중공사를 습격하려다 붙잡혀 일본에서 복역하다가 다음해 순국한 분입니다. 김구선생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일본요인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도록 지원했으며, 해방 후 삼의사의 유해를 봉환해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삼의사 묘 한 쪽에 자리한 봉분은 1910년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사의 가묘로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한 빈 무덤이라 합니다. 삼의사와 멀지 않은 곳에 안장된 김구선생의 영혼은 오늘도 삼의사묘를 찾아 우리나라 안위를 함께 걱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의열사(義烈祠)는 효창공원 안에 묘역이 있는 일곱 분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1990년에 준공된 의열사에 모신 분은 임정요인인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등 네 분과,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의사 세 분입니다. 2016년부터 상시로 개방한다는 안내문과 달리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 가보지 못하고 밖에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태극기조형물입니다. 다양한 색상의 태극기를 보면서 오늘의 태극기로 정착된 것은 언제일까 궁금했습니다.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된 1882년에 처음 사용된 태극기의 제작법 통일은 1949국기제작법고시의 확정 발표로 이루어졌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1년이 지나서야 태극기의 제작법을 통일한 것은 국가의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범기념관을 찾기 전에 먼저 들른 곳이 이봉창열사동상이라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이봉창의사의 동상과 묘가 함께 자리한 효창공원을 나와 숙대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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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대로 한 나라를 세워 유지해가는 데는 수많은 지도자들의 땀과 눈물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정말로 지난했다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희생된 독립유공자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건국만큼 지키는 것도 어려워 우리 나라는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했어도 일본에 강점된 조선의 영토를 대한민국이 모두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휴전선 이북의 남한보다 더 넓은 땅과 그 땅에서 살고 있는 북한사람들은 전제군주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누가 뭐라 해도 이승만대통령이 주도해 건국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입니다. 이승만과 김구 두 분은 오랜 세월 서로 협력하면서 독립운동을 해온 것이 무색하게 대한민국건국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명하게 갈려 두 분을 따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은 건국되었지만 두 분의 갈등은 계속되다가 1949년 김구선생의 서거로 끝이 났습니다. 4.19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대통령은 하와이로 건너가 1965년에 생을 마쳤습니다. 두 분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두 분 모두 우리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고 애국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념관이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한 분에 대한 국민적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