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평화누리길 및 강화나들길/평화누리길 탐방기

평화누리길 탐방기15(문혜사거리-화강-와수리터미널)

시인마뇽 2019. 11. 16. 21:34

                                      평화누리길 탐방기15

 

 

                   *탐방구간:문혜사거리-화강-와수리터미널(평화누리길15코스)

                    *탐방일자:2019. 11. 14()

                  *탐방코스:문혜사거리-지경리-남천교-화강-김화교 -와수리터미널

                  *탐방시간:9시8분-15시59분(6시간1분)                               

                  *동행     :문산중 황규직/황홍기 동문

 

 

 

 

 

  철원 땅을 걷는 동안 자연스레 떠오른 인물은 후고구려의 궁예(弓裔, 미상~918)입니다. 한 나라를 세워 17년간 통치한 궁예는 국호를 후고구려-마진-태봉으로 여러 번 고쳤고, 수도 또한 철원-송악-철원으로 여러 번 옮겼습니다.

 

   궁예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출생 때부터 시작됩니다. 신라 47대 헌안왕과 무명의 후궁 사이에 태어났다는 설 이외에도 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라는 설과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더 있습니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의 명령으로 내던져진 궁예를 유비(乳婢)가 몰래 받아 키웠는데, 이때 떨어지는 궁예가 유비의 손에 찔려 한 쪽 눈을 잃었다는 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궁예는 왕위다툼에 밀려난 신라의 왕자였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은 궁예의 일생을 아래와 같이 약술했습니다.

 

  “901년 후삼국 중의 한 나라였던 후고구려(후에 마진(摩震), 태봉(泰封)으로 개명)를 건국하였다.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여러 관부를 두어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한때 전국의 2/3 가량을 차지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말년에는 미륵신앙에 기반을 둔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9186월 이에 반발한 정변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 죽음을 당했다.

 

   

  궁예는 901년 스스로 왕이 되어 평양구도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한 뒤 국호를 고려(高麗)로 정합니다. 904동방의 큰 나라로 풀이될 수 있는 마하진단(摩訶震檀)을 줄여 마진(摩震)으로 국호를 다시 정한 궁예는 911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세계의 태봉(泰封)으로 또 한 번 바꿉니다. 후고구려는 훗날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고자 불러온 것이지 궁예가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로 정한 것은 아니라고 이기환 님은 그의 저서 『분단의 섬 민통선』에 적고 있습니다.

 

   국호만큼이나 자주 바뀐 것은 수도(首都)입니다. 후고구려가 개국되기 5년 전인 896년 철원의 동송에 자리 잡은 궁예는 송악에서 찾아온 왕건을 철원태수로 임명합니다. 898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궁예는 901년에 고려 개국을 선포하고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개명합니다. 905년에 철원의 풍천원으로 도읍을 다시 옮겼고, 911년에 국호를 태봉으로 또 다시 바꿉니다. 918년 궁예는 궁정쿠테타를 일으킨 왕건 일당에 밀려나 죽음을 맞이했고, 왕건은 고려(高麗)를 세우고 이듬해 수도를 다시 송악으로 옮기는 것으로 철원과 송악 사이의 수도 옮기기의 핑퐁게임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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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98분 문혜리 사거리를 출발했습니다. 650분에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한 와수리행 버스는 의정부터미널을 경유해 문혜리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10분가량 걸렸습니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데다 찬 바람이 불어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문혜사거리에서 동쪽으로 진행해 만난 사거리에서 직진하면 서면의 자등으로 향하는데, 저희는 왼쪽 갈현고개로 이어지는 43번 호국로를 따라 북진했습니다. 좁고 굴곡진 구 도로를 버리고 새로 낸 왕복 4차선의 넓은 길을 따라 올라 갈현고개를 넘었습니다. 갈현고개에서 구도로와 신도로를 번갈아가며 지경리로  내려가면서 아직도 꽃이 지지 않은 길섶의 들국화와 얼음이 얼은 논, 그리고 추수가 끝난 배추 밭 등 시골의 초겨울 풍경을 사진 찍었습니다.

 

   갈현고개에서 내려가 다다른 삼거리에서 43번 호국로를 벗어나 왼쪽 464번 지방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얼마 걷지 않아 농협 점포가 들어선 지경삼거리에 도착해 부대찌개를 맛있게 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경리에서 464번 도로를 따라 남대천으로 북진하는 길에 도로변의 철원갈말읍토성을 들러 그 위를 걸었습니다. 강원도기념물 제24호인 이 토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장수 마부대와 용골장수가 조선군의 공세에 대응하고자 수만명을 동원해 하룻밤에 쌓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둘레가 1,000m이고 높이가 10m정도로 추정되는 사각형의 토성이었는데,  대부분 농지로 전환되고 이제는 높이가 5~6m, 길이가 80m정도만 남아  초라해보였습니다.

 

   토성에서 내려가 이내 다다른 곳은 남대천교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꽤 넓은 남대천을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남대천교  천변에서 평화누리길 안내판 푯말를 보자 엄청 반가웠습니다. 남대천교를 건너 조금 북진하면 평화누리길15코스가 시작되는 도창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남천대교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남대천의 남쪽 천변 길을 따라 낸 평화누리길을 한참  걸은 후 알았습니다. 김화교를 막 지나  안내판에 <평화누리길, 15코스(화강길), 도창1- 남대천교-장수대교-화강쉬리공원-신수리, 21.2Km, 강원도/철원군>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나서야, 진작 알았다면 다리를 건너 도창리로 가서 평화누리길15코스를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남대천교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평화누리길은 남대천 남쪽 천변의 둑길로, 왼쪽 아래로 남대천이 흐르고 오른 쪽 아래로 김화 벌이 펼쳐져 보였습니다.

 

   남대천이란 북한의 강원도 김화군 수리봉(642m)에서 발원하여 남한의 철원군 일대를 흘러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전장 43.6의 한탄강제1지류입니다. 부여 일대를 흐르는 금강을 특별히 백마강으로 부르듯이 철원의 김화벌을 흐르는 남대천을 화강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은 5만분의1 지형도에는 분명하게 남대천으로 나와  있는데 천변 둑길에는 지방하천 화강 강원도라는 푯말이 여러 곳에서 보여서입니다. 여기 화강은 쉬리생태공원에서 지난 813회 철원화강다슬기축제가 열렸을 만큼 있는 청정하천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남천대교에서 장수대교에 이르기까지는 물이 흐르는 하천 폭이 좁아 보여 마치 몇 개의 실개천이 갈대밭 사이를 흐르면서 갈라졌다 합쳤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하천에 내려 앉아 시간을 낚는 흰두루미와 재두루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자 차가운 날씨인데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장수대교에 이르러 보()에 가득 찬 새파란 물위에서 청둥오리(?)가 떼 지어 유영하고 있는 것을 보자, 자연 상태의 실개천(?)을 볼 때와 달리 넉넉함이 느껴졌습니다. 천변의 평화누리길 곳곳에 쉼터가 조성되어 가던 길을 멈추고 사진 찍기에 딱 좋았습니다. 이 지역은 북한의 각종 지뢰가 유실되어 흘러내려 왔을 우려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는 관련당국의 경고판이 없었다면 청둥오리가 연출하는 평화로움에 빠져 여기 화강이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강임을 새까맣게 잊을 뻔 했습니다.. 철원을 널리 알리는 키워드가 청정비경(淸淨秘境)이라면 이는 철원이 휴전선에 접해 있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화강의 천변 길에서 널리 애송되는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평화누리길을 걷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별한 기쁨이다 싶어 잠시 멈춰 서서 <화강 시가 있는 산책길>의 나무판에 적어놓은 떠나가는 배시 한편을 묵독했습니다. “나두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나두야 가련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나두야 간다로 끝을 맺습니다. 이 시를 지은 박용철(朴龍喆, 1904-1938)1938년에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뜹니다.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은 함께 금강산을 오르고 정지용시집을 출간해준 절대적 문학동지이자 휘문고 1년 후배인 박용철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박용철의 죽음과 일제의 언론탄압으로 황폐해진 자신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고자 그해 여름 휘문고 1년 선배인 김영랑(金永郞, 1903-1950)과 함께 한라산을 오르고, 그 이듬해 시 백록담을 발표합니다.

 

   김화교 아래 돌다리로 화강을 건넜습니다. 이 돌다리의 조형미가 빼어나 보인 것은 곡선으로 다리를 놓은 데다 한 가운데는 원형으로 이어놓아서입니다. 기능으로 말한다면 당연히 직선으로 놓아야 하지만, 그 기능은 바로 옆 김화교가 대신하고 있기에 조형미에 신경 써서 돌다리를 곡선으로 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화교를 다리 밑으로 지나 다시 화강을 건넜습니다. 천변의 데크 길을 따라 동진하다 와수천이 남대천에 합류되는 지점에서 남대천 위 학포교와 그 오른 쪽의 한북정맥 상의 적근산과 대성산을 바라보면서를 잠시 쉬었습니다.

 

 

 

  다리를 건너 나지막한 산 아래를 돌아 다시 와수천을 건너자 15코스의 종점인 신수리까지 9.7Km 남았음을 알리는 푯말이 보였습니다. 남은 9.7Km는 다음번에 걷기로 하고 와수리 시외버스터널로 이동해 1610분발 동서울터미널행 버스에 오르는 것으로 열다섯 번째 평화누리길 탐방을 모두 마쳤습니다.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패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국운이 좌우될 수 있는 국가의 대사입니다. 천도에 소요되는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었겠지만, 국론의 분열도 대단했으리라는 것은 수도를 서울시에서 세종시로 옮기겠다는 계획이 정부부처를 옮기는 선에서 마무리되기까지 겪었던 내홍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인종 때 평양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은 건원칭제의 난을 일으켜 고려를 힘들게 했습니다. 수도를 옮기는 데는 기존의 수도에 뿌리내린 기득권층과 천도로 이익을 보는 신흥세력간의 충돌이 불가피해 천도의 옳고 그름을 떠나 내홍은 피할 수 없는데, 궁예는 철원에서 송악으로, 다시 철원으로 천도를 했으니 국력이 소진되고 국내정세가 불안정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궁예가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지 않고 철원을 고수했다면 천도에 따른 국력낭비도 없었을 테고, 송악의 호족인 왕건 일당이 세를 불리기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에 철원 땅을 걸으면서 궁예가 철원에서 송악으로 수도를 옮기는 결정적 패착을 두어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족을 달았습니다.  

 

 

 

                                                                      

                                                                       <탐방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