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걷기4
*종주일자: 2020. 2. 23일(일)
*종주구간: 사선문-신평-선거교
*따라걷기: 관촌버스터미널-사선문-신평리-진구사지석등
-학암리-선거교-섬진강강변-학암리
*종주시간: 10시16분-16시36분(6시간20분)
*동행 : 나홀로
전라북도 임실 땅이 낯설지 않은 것은 1990년대 중반 2년 넘게 모회사의 충호남영업부장으로 일하면서 이 땅을 숱하게 지나서입니다. 충청지역과 호남지역의 영업을 책임진 제게 부여된 주 임무는 대전, 광주, 그리고 전주영업소의 소장들과 함께 회사에서 할당한 영업목표를 달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영업실적의 70% 가까이가 대리점에서 이루어져 영업소장들과 함께 대리점을 방문해 지원하고 독려하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였기에 대리점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 걸은 임실 땅은 그 당시 전주를 거쳐 남원의 대리점으로 가는 길에 꽤 여러 번 들렀던 곳입니다.
임실하면 떠오르는 것은 의로운 개로 알려진 오수의견(獒樹義犬)입니다. 이 개는 천 년 전인 신라시대에 지금의 임실 땅인 거령현에 살았던 김개인(金蓋仁)이 기른 토종개였다고 합니다. 어느 봄날 주인 김개인이 인근 장터로 놀러갔다가 술이 취해 집으로 돌아가는 중 잔디밭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집니다. 때 마침 가까운 곳에서 들불이 일어나 김개인에 옮겨 붙게 되자 같이 간 개가 가까운 냇가로 달려가 온몸을 물로 적셔 불을 꺼 주인을 살려냅니다. 뒤늦게 깨어난 김개인은 자기를 살려내려다 지쳐 쓰러져 죽은 이 개를 보고, 그 충성심에 감탄하여 무덤을 만들고 지팡이를 꽂아둡니다. 지팡이는 싹이 나고 점점 자라 큰 나무로 성장합니다. 1992년 이 지역 면의 이름이 둔남면에서 오수면으로 바뀜에 따라 의로운 개 오수의견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앞으로도 계속 회자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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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16분 관촌버스터미널을 출발했습니다. 아침6시10분에 수원역을 출발한 무궁화호가 전주역을 지나 임실역에 도착한 시각은 9시30분이었습니다. 임실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관촌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섬진강 따라 걷기’ 4구간에 첫발을 들였습니다. 오수교를 건너 사선문에서 강변길로 내려가 10시33분에 섬진강 따라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섬진강 동쪽 강둑길을 따라 걷다가 17번 도로로 복귀해 4-5분을 걸어가자 왼쪽 길 건너로 이제는 손님이 없어 제 구실을 못하는 2층 건물의 관촌역이 보였습니다. 역전앞 사거리에서 제2오원교로 다가가 왼쪽으로 이어지는 강둑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거산 레미콘과 태양광발전단지의 넓은 밭을 차례로 지나 창인교에 다다랐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이어지는 강둑길을 걸으면서 따사로운 햇살이 안겨준 감미로운 봄기운을 감지했습니다. 제가 걷고 있는 임실 땅의 섬진강은 아직은 상류이어서인지 보를 막은 곳이 아니면 수량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인교에서 반시간을 조금 못 걸어 다리 건너 쪽으로 군부대가 들어선 대창교를 지나자 나지막한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소나무들이 길 양옆으로 도열하듯 서 있었습니다. 대창교를 지나 7-8분을 더 걷다가 오른 쪽의 55번/49번 도로로 다가가 이 차도를 따라 신평쪽으로 향했습니다.
두류교차로를 거쳐 다다른 호암교차로에서 왼쪽 호암교를 건너 다시 강둑길로 들어섰습니다.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게 낸 강둑길은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어 한갓졌습니다.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는 젊은 부부(?)가 부러워 보인 것은 그들은 물고기는 물론 서로 의지하며 험한 세상 살아가는 지혜도 함께 낚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강둑에서 바라보는 논 뜰이 유난히 넓게 보인 것은 아직은 농한기여서 텅 비어 있어서일 것입니다. 잠시 멈춰 쉬는 동안 샌드위치로 빈 속을 채우고 나자 그 아래 텅 빈 들이 꽤 넓게 보였는데, 이는 공복을 채우고 난 후의 여유로움 덕분일 것입니다. 강둑길을 따라 걸어 만난 다리를 건너 신평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시가지가 짧고 우중충해 활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면소재지 신평에서 노인 한 분께 여쭈어 이번 탐방의 끝점인 선거교로 가는 길에 용암리 석등을 볼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보건소를 지나 다시 강둑길로 돌아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북동쪽 멀리로 동서로 뻗은 꽤 높은 산줄기가 보였는데 제가 2008년에 종주한 금북호남정맥이 아닌가 싶었지만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강변에 세워진 종합안내판에 따르면 이번에 걷는 길은 관촌의 오원교에서 시작해 창인교-대창교-호암교-호원교-덕천교-덕암교에 이르는 ‘옥정호생태하천’ 둑길을 걷는 것으로, 중간에 설치된 호암보와 용암보가 물을 잡아 가둔 덕분에 넉넉해 보이는 짙푸른 강물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신평 보건소를 지나 접어든 강둑길을 10분가량 걷다가 둑길에서 벗어나 745번 도로를 따라 섬진강과 나란한 남쪽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신평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용암보에 이르러 사진을 찍은 후 이내 차도 왼쪽의 강둑길로 복귀했습니다. 덕암교로 향하는 중 파릇파릇 풀이 돋아난 논을 내려다보면서 저들은 용케도 중국코로나를 이겨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코로나 확진자가 급격히 늘어나 공포에 떨고 있을 대구의 산 친구들이 걱정됐습니다. ‘옥정호생태하천’의 끝점으로 안내된 덕암교에 이르러 강변에 세워진 월광정(月光亭)을 들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용암리석등에 이른 시각은 14시12분이었습니다. 덕암교에서 745번 도로를 따라 10분을 걸어 찾아간 용암리석등의 정확한 명칭은 ‘임실진구사지석등(任實珍丘寺址石燈)’입니다. 보물제267호로 지정된 ‘임실진구사지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높이가 5.18m에 달합니다. 7세기경 고구려의 적멸과 의융이 창건한 진구사의 빈 터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모습이 섬세한 모양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안내문은 적고 있는데, 제가 보아도 그러했습니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임실용암리 사지석조불비로자나불상“으로, 이 불상은 그 옆의 석등과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82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세 칸(?)짜리 한옥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그 규모도 작고 양 옆의 협시불이 없어 절을 잃은 불상의 초라한 모습이 어떠한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석등이 옆에 있어 진구사지가 마냥 버려진 폐사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용암리석등에서 학암리까지는 찻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진구사지 출발 5분 후 오른쪽으로 운암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이르러 왼쪽으로 이어지는 745번도로를 따라 진행하면서 놀란 것은 강 건너 강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옥정호마실길 입구를 지나 학암리버스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이제껏 걸어온 745번 도로는 동쪽 임운교를 건너 임실읍내로 이어져, 그만 이 길과 헤어져 학산마을을 동쪽으로 우회하는 강둑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 길에서 가슴팍으로 파고드는 강바람을 맞으면서 이 바람이 산 너머 남촌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려니 했습니다. 둑 아래 강물이 바람을 일으킬 만큼 강변을 가득 채운 것은 강둑길이 끝나는 선거교 바로 아래에서 섬진강이 옥정호의 품 안에 안겨서입니다. 선거교 뒤쪽으로 강변에 곧추선 절애의 암벽이 옥정호와 함께 빚어낸 풍광은 언뜻 보아도 보기 드문 절경이었습니다. 선거교를 건넌 후 차도를 따라 몇 분을 더 걸어 강가로 내려서자 넓은 강줄기는 북쪽으로 뻗어나갔는데 길이 전혀 나 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강을 따라 걷는 것을 멈추고 섬진강 강물에 손을 담그는 것으로써 4구간 따라 걷기를 마무리한 시각이 16시4분이었습니다.
온 길을 반시간 넘게 되돌아가 학암리 버스정류장에서 관촌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20분 남짓 걸려 도착한 관촌버스정류장에서 한참동안 기다려 임실행 버스에 오른 지 10분이 조금 지나 임실역 앞에서 하차, 18시10분발 수원행 열차에 승차하는 것으로 하루 여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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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개를 기르는 것은 어떤 동물보다 사람을 따라서일 것입니다. 제가 결혼한 1970년대만 해도 부부들 서로를 반려자로 불렀습니다. 이혼이 급증하고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부부를 서로 반려자라로 부르는 대신 개를 일러 반려견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개를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둘도 없는 반려로 여기는 것은 어느새 도시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옆 자리를 굳건히 지켜준 집사람이 제 인생의 반려자이듯이, 죽음으로써 주인의 생명을 구해준 오수의견이라면 의견이자 반려견으로 대접받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반려견으로 대접받아 마땅한 개는 주인의 목숨을 구해준 의로운 의견(義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산화한 충성스러운 충견(忠犬)도 있습니다. 강원도 양구의 제4땅굴 앞에 우리 군이 충견지묘(忠犬之墓)의 탑을 세워 기리는 충견 헌트(Hunt)가 있습니다. 1990년 3월 3일의 일입니다. 제1, 제2의 땅굴 수색작전에 투입된 장병들이 목숨을 잃자 우리 군은 제4 땅굴 수색작업에 독일산 세퍼드 종으로 4세인 군견 헌트를 투입합니다. 수색대원들보다 앞서 땅굴로 들어간 헌트의 주임무는 유독가스와 북한군이 설치한 무비트랩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군사분계선 330m를 앞에 두고 이상현상을 포착한 헌트의 움직임에 수색을 중지하나, 헌트는 망설이지 않고 땅굴 안쪽으로 들어가 부비트랩을 발견합니다. 대원들에 이 사실을 알리려 돌아가다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 목함지뢰를 밟고 그 자리에서 산화합니다. 우리 군은 제4 땅굴 수색작전 중 산화한 충견 헌트를 기리고, 죽어서도 나라를 수호하며 북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북쪽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충견지묘 탑을 건립했습니다.
내친 김에 충마(忠馬)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개 못지않게 사람들과 가까운 동물은 말(馬)일 것입니다. 마구간에서 불이 난 것을 보고 말의 생존여부를 묻지 않고 사람이 다치지 않았나를 물었다는 공자의 인간적인 이야기가 논어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과 같이 살아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이 개와 다른 점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세 전쟁에 활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기도 연천군의 고랑포구역사공원을 찾아가면, 그 앞뜰에 군마 레클리스를 기리는 조각물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군의 군마 레클리스(Staff Sgt. Reckless, 1948-1968)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0월6일자로 미해병대 제1사단, 5연대 대전차중대소속의 무반동화기소대에 입대합니다. 레클리스는 훈련을 받고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물자와 수송병을 수송합니다. 1953년 미 해병대와 중공군의 네바다전초 전투에서는 사람의 도움 없이 하루에 약 51차례 탄약을 실어 날랐으며, 이 공로로 무공훈장 등 5개의 훈장을 받습니다. 1959년 미군 최초로 말 하사관으로 진급했다고 하니 역사공원앞에 기념물을 세운다 해서 지나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걷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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