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걷기8
*종주구간:예덕삼리-섬진강댐-강진교
*종주일자:2020. 5. 4일(월)
*따라걷기:예덕삼리-능교-장금터널-섬진강댐-강진교
*종주시간:8시29분-15시36분(7시간7분)
*동행 :나홀로
5월이 계절의 여왕으로 칭송받는 것은 신록 때문만은 아닙니다. 5월을 맞는 우리 산하의 여러 새들이 제 세상 만났다고 지저대지 않는다면 봄꽃이 만발하고 나뭇잎이 푸르른 것만으로는 온 누리가 생동하고 있음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겨울 산이 썰렁한 것은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도 그렇지만, 새들이 종적을 감추고 칩거해 산을 올라도 새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이번 섬진강 따라 걷기는 모처럼 아침 시간에 시작했습니다. 걸어야 할 코스가 길어 늦게 시작했다가는 해떨어지기 전에 목표지점까지 진출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이른 새벽에 산본 집을 나섰습니다. 광명역에서 KTX를 타고 가 정읍역에 도착한 것이 아침6시36분이었고, 이번 따라걷기의 출발점인 정읍시산내면의 예덕삼리에 다다른 시각은 8시28분이었습니다. 구름이 잔뜩 끼어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고, 햇살이 퍼지지 않아 밝기도 갠 날의 아침보다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예덕삼거리를 출발해 예덕리에 이르기까지 약 10분 동안 이름 모르는 새들이 길가의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며 펼치는 노래와 춤들을 듣고 보느라 즐거웠습니다. 비둘기의 반 정도 크기의 반듯하게 생긴 새들이 떼거리로 신록의 가로수를 무대삼아 노래와 춤 솜씨를 작심하고 뽐내고 있는데 관중이 저 한 명이어서 미안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대간9정맥을 종주할 때는 이른 아침을 능선 길을 걸으면서 새들이 숲속에 몸을 숨기고 부르는 노래 소리를 꽤 여러 번 들었습니다. 새들의 노래는 아침에 절정을 이룹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는 숲속에 몸을 숨겼던 새들이 비가 그치면 바로 나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산상음악회가 이런 것이다 싶었습니다. 작은 새들은 거의 쉬지 않고 재잘댑니다만, 큰 새들은 묵직한 톤으로 뜸을 들여 소리를 내는데 가끔은 그 소리를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산상음악회의 출연진 중 단골 멤버는 단연 작은 새들입니다만, 여름 한 철 초대멤버 중 가장 돋보이는 멤버는 매미입니다. 늦여름 매미가 극성을 부릴 때면 웬만한 새들의 지저귐은 매미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차도를 걸으면서 때까치만한 날렵한 새들이 사람이 접근하면 후다닥 날아 다른 가로수로 옮겨 앉아 쉬지 않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이 새들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인지하고는 노래를 멈추는 산 속의 새들과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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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8시29분 정읍시산내면의 예덕삼리 버스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정읍역을 아침7시12분에 출발하는 시내버스에 올라 칠보와 능교를 차례로 지난 후 예덕정류장에서 하차했습니다. 왠지 낯이 설어 자세히 살펴본 즉 지난번에 따라 걷기를 마무리한 예덕삼리정류장이 아니었습니다. 지도를 보고 남동쪽으로 15분을 걸어 예덕삼리정류장에 도착해 8구간 따라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예덕삼리에서 예덕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헛되지 않은 것은 실로 오래 만에 지근거리에서 나무를 옮겨 다니며 재잘거리는 여러 마리의 새들을 목도해서였습니다. 예덕에서 고개를 넘어 내려선 능교를 지나면서 ‘대장금의 고향입니다’라는 문구가 보여 사진을 찍자 노인 한 분이 다가와 여기는 면사무소로 관공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면서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면사무소를 찍은 것이 아니고 광고 문구를 찍은 것이라고 대답을 하고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엉뚱한 사람한테 시대착오적인 지적을 받았다 싶어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산내사거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내교를 건넌 것은 9시28분이었습니다. 30번 국도를 따라 동진하면서 내려다 본 옥정호가 그윽하다 싶은 것은 짙은 구름이 낮게 드리워서일 것입니다. 그림 같은 정경의 호반의 정자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갈 길이 멀어 꾹 참고 갓길을 따라 쉬지 않고 진행했습니다.
10시12분 수침동새너디 마을의 강변 정자를 들렀습니다. 산내교를 건너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왕복2차선의 30번국도는 생각보다 갓길이 넓어 걸을 만 했지만, 덤프트럭 여러 대가 한꺼번에 지나갈 때는 긴장되었습니다. 가로수가 꽃 피운 탐스러운 연분홍 꽃송이는 수국이 아닌가 싶은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스팔트길로 2시간이 가까이 걸어 다다른 수침동새너디에서 왼쪽 아래 강변에 조성된 깔끔한 소공원의 정자에 오르자 꽤 넓은 옥정호가 시원스레 펼쳐져 가히 절경이다 했습니다. 도로변에 자리한 슬레이트 지붕의 폐가를 사진 찍으면서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기억난 것은 시골집들의 초가지붕이 슬레이트지붕으로 교체된 것이 이 운동 덕분이어서입니다. 가던 길을 잠시 멈춰 강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기자 지난번에 걸은 원덕리 길과 파란 지붕의 산내교회가 선명하게 보여 반가웠습니다. 댐을 막기 전이라면 질러왔을 길을 능교 쪽으로 빙 돌아오느라 발품은 많이 했지만, 그 덕분에 깊숙한 내륙 지역의 들쑥날쑥한 꼬부랑 강변길을 따라 걸으면서 빼어난 풍광을 완상할 수 있었습니다. 장금교차로를 지척에 둔 버스정류장 바로 옆 정자에 앉아 점심을 들은 후 다시 섬진강 따라 걷기에 나섰습니다. 왼쪽으로 순창행 길이 갈리는 장금교차로에서 직진해 장금교를 거쳐 장금터널을 통과한 시각이 11시24분이었습니다. 짧은 길이의 장금터널을 빠져나와 이제껏 걸어온 30번 국도를 버리고 터널 위 장금산 쪽 대장금마실길로 들어선 것은 이 길이 강변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넘어 민가를 지나자 흙길은 이내 시멘트 길로 바뀌었습니다. 대장금마실길을 따라 서쪽으로 진행하면서 강 건너를 바라보자 앞서 본 산내교회가 더욱 선명하게 조망되었습니다.
대장금마실길은 『조선왕조실록』에 중종임금이 총애한 의녀(醫女)로 기록된 장금(長今)을 기리기 위해 정읍시에서 조성한 옥정호의 호반길입니다. 의녀 장금이 오늘에 회자된 것은 2003-2004년 중에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대장금(大長今)」 덕분입니다. 장금의 삶을 재구성한 픽션 「대장금」은 평균시청률 41.6%, 최고시청율 55.5%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바닥권에서 헤매는 시청률로 경영적자에 시달리는 오늘의 MBC는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의 성공요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잘 분석해 혁신을 해야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대장금이 자라나면서 숨 쉬고 느꼈던 장금산일원을 걸어보는 것도 역사를 알아보는 한 방법일 것이다”라면서 “산수가 수려한 장금산 일원은 그녀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의녀 장금은 정읍시 산내출신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대장금마실길은 그 길이에 따라 5개의 코스로 나뉘어져 있는데 모두가 황토마을과 정자 난국정을 지납니다. 이번에 제가걸은 대장금마실길은 30번국도(장금터널)-중곡마을-난국정-황토마을-30번국도(황토마을입구삼거리)로 1시간이 걸렸습니다.
12시3분 춘란추국(春蘭秋菊)의 정자 난국정(蘭菊亭)을 지났습니다. 강변의 그림 같은 팬션들은 섬진강댐의 담수가 끝난 후 지어졌고 난국정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는데, 이 정자가 거의 한 세기 전인 1928년에 세워진 것을 보면 이 일대 섬진강변 풍광이 담수 이전에도 빼어났던 것 같습니다. 저 아래 난국정이 현 위치로 옮겨 진 것은 섬진강 다목적댐이 준공되고 나서 1965년의 일입니다. 전북지역 유림 80여명이 모여 난국계를 조직하고 6칸 목조 기와지붕의 난국정을 축조해 춘추로 모여 담론을 나누고 친목을 도모했던 만큼 이 정자가 길이 보존될 이유는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사전 허가를 득해야 이용할 수 있다고 제한한 것은 길손들이 들러 잠시 쉬어가는 정자의 본래 용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황토마을을 지나면서 새삼 떠오른 인물은 탤런트 김영애님입니다. TV드라마 「월계수양복점」에 마지막으로 출연하고 3년 전에 타계한 김영애님은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잘나가는 황토팩 사업을 접어야 했고, 뒤이은 건강악화로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었습니다. 오보를 내어 막대한 피해를 입힌 언론사의 담당PD는 항소심에서 고의성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는가 싶어 저도 분노했었습니다.
황토교회를 지나 30번국도에 다시 합류해 섬진강 댐쪽으로 진행했습니다. ‘옥정호상수원수질보존지킴이’용 콘테이너가 들어선 안성대(?) 소공원의 정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좀처럼 자리를 비키지 않는 고양이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제 고향 마을에서는 가축의 일원으로 키운 개는 방안에 들이지 않았지만 쥐를 잡는 고양이는 방에서 재웠던 애완동물이었습니다. 세대가 바뀌면서 신세가 역전된 고양이들에 쨍하고 볕들 날은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습니다.
13시31분 섬진강댐에 이르렀습니다. 고양이와 헤어져 섬진강댐 쪽으로 향하는 중 ‘독립운동 호남의병유적지’인 종성마을을 지났습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시고 무성서원에서 호남의병을 창의(倡義)한 의병대장 임병찬(林炳瓚, 1851-1916)은 8백여명을 이끌고 순창전투에 참전했으나 체포되어 면암선생과 함께 대마도에서 2년간 감금되기도 했습니다. 1914년 고종의 밀칙을 받아 의병활동을 하다 다시 체포되어 거제도에서 구금생활을 하던 중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임병찬 의병대장이 동학혁명의 김개남장군과 친구였으나, 숨겨달라고 찾아온 김개남장군을 밀고를 한 것은 충효사상으로 무장된 사대부 임병찬이 이유야 어떻든 간에 반란을 일으킨 불충한 김개남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서였을 것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 본 섬진강댐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외관은 무척 견고해 보였습니다. 1928년 건설된 섬진강댐을 하류 쪽으로 2Km 옮겨 다목적댐으로 다시 축조한 것은 1965년의 일입니다. 높이가 64m이고 폭이 344m인 이 댐의 저수용량은 약 466백만톤으로 소양강의
2,900백만톤의 16% 수준에 불과한데도, 산을 뚫고 유로를 새로 내어 저수량의 일부를 동진강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댐에 막혀 물의 양이 갑자기 줄어든 댐 아래 섬진강은 철썩 철썩 소리를 내며 급하게 흘러내려갔습니다. 섬진강과 나란히 나있는 33번국도를 따라 내려가 백운마을 입구를 지났습니다. 잠시 차도에서 벗어나 그 아래 섬진강을 시멘트다리로 건너갔다가 돌아오면서 고무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듯한 부부(?)를 배경으로 섬진강 강줄기를 사진 찍었습니다.
15시36분 회문삼거리 옆 강진교에서 8구간 따라걷기를 마쳤습니다. 다리에서 반시간을 걸어 도착한 곳은 설보(雪洑)였습니다. 인조12년인 1634년에 쌓기 시작해 5년 만에 준공을 본 설보는 운학(雲壑) 조평(趙平, 1569-1647)의 역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평은 꿈속에서 노인을 만나 “지금 갈천에 나가면 눈이 내린 흔적이 있을 것이니 그 눈길을 따라 보를 쌓으면 뜻을 이룰 것이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눈이 녹아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눈길을 따라 말뚝을 꽂아 정표를 해둔 다음 그 정표대로 보를 쌓고 수로를 파내어 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보위에서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는 어느 한 분의 여유로움도, 그리고 33번 도로 옆으로 낸 수로에 물이 콸콸 흘러내려가는 것 모두가 운학 조평이 간난을 무릅쓰고 설보를 쌓은 덕분입니다. 설보에서 40분간 걸어 도착한 회문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강진교를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 GS 주유소 앞에서 강진택시를 불러 강진버스터미널로 이동해, 임실가는 버스로 갈아탔습니다. 반시간 정도 걸려 도착한 임실버스터미널에서 다시 관촌가는 버스를 타고가다 임실역 앞에서 하차하여 18시15분에 임실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수원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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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우는 소리는 송(song)과 콜(call)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즐거워서 재잘대며 노래하는 소리는 쏭이고, 자기들 영역에 무언가가 들어와 동료들에 경계를 발하는 소리는 콜(call)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아침에 들은 새소리는 콜(call)이 아니고 송(song)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새소리를 들은 제가 다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제껏 들어본 바로는 작은 새들이 우는 소리는 거의 다가 송(song)으로 들렸습니다. 까마귀나 부엉이가 우는 소리를 송으로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의 침울함과 둔탁함 때문이겠지만 이 새들은 참새나 박새, 꾀꼬리보다 훨씬 커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산새들의 노래 소리가 모두 음악이 아니듯이 사람들이 발하는 말소리도 전부가 화음은 아닙니다. 산 속 깊은 곳에서 까마귀 소리를 혼자 들으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 때가 있듯이 사람들의 말소리도 귀에 거슬릴 때가 많습니다. 기왕이면 자기 말소리가 남에게 콜(call)이 아닌 송(song)으로 들리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러려면 아침에 만난 새들처럼 제 자신이 기쁜 마음으로 충만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주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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