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따라걷기9
*종주구간:강진교-김용택시인생가-구미교
*종주일자:2020. 5. 10일(일)
*따라걷기:강진교-월파정-김용택시인생가-구담마을
-요강바위-구미교
*종주시간:11시20분-18시4분(6시간44분)
*동행 :서울사대 이상훈동문
섬진강이 낳은 시인 김용택 선생의 생가를 들렀습니다.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주옥같은 섬진강 시의 창작교실이었을 생가와 마을을 둘러본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했습니다. 여기 진뫼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모교인 덕치초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온 선생의 섬진강 사랑은 수많은 시로 결실되었습니다.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 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선생의 시 「섬진강 1」은 섬진강과 속삭이다 웃고 울면서 강둑길을 따라 걸어 하구에 도착한 이들에 그렇게 걸어온 길이 바로 인생이라고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선생의 이 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한 시와 달리 난해하지 않고, 특정이념에 경도된 이념시처럼 전투적이지 않아 더욱 좋아합니다. 선생께서 서울로 올라가 뵙지 못했지만, 섬진강 따라 걷기를 모두 마치고 나서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면서 보았노라’고 외쳐볼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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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20분 강진교를 출발했습니다. 임실터미널에서 순창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 회문삼거리에서 하차하여 바로 옆 강진교로 이동했습니다. 강 서쪽 둑을 시멘트로 포장해 조성한 섬진강변 자전거전용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길을 따라 남진하면서 새 하얀 꽃을 활짝 피운 가로수가 이팝나무이고 길가 밭을 뒤덮은 다년생 풀이 작약이라는 것은 야생화와 나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동행한 이 교수가 확인해주었습니다. 강폭은 넓었지만 수로가 좁아서인지 물 흐름이 빨랐고 물소리도 제법 크게 들렸습니다. 1시간 쯤 걸어 도착한 물우교를 건너 월파정(月波亭)을 들렀습니다.
밀양박씨 종중에서 월회정을 지은 것은 1927년이고 월파정으로 개명한 것은 1966년입니다. 단청의 고색창연함은 천년고찰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치천이 합류되는 물우리의 굽도리에 인접한 솔밭에 세워져, 주변의 풍광이 참으로 빼어납니다. 달 밝은 밤에 누각에 올라 잔잔히 흐르는 섬진강 강물을 지켜보면서 한시 몇 수는 지었음 직한데, 정자에 걸려 있는 편액(扁額)들이 그런 시들을 담고 있는지는 누각으로 올라가는 문을 막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물우리의 학생들이 강 건너 덕치초교로 등교하기 위해 반드시 건넜을 물우교를 다시 건너면서 지켜본 섬진강물은 요 며칠 동안 비가 많이 내려서인지 매우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갔습니다. 섬진강 제1지류인 치천 위에 놓인 중원교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13시26분 섬진강을 노래해온 시인 김용택선생의 생가를 찾아갔습니다. 꽤 큰 느티나무가 서있는 진뫼마을 어귀에서 조금 떨어진 김용택 시인의 생가는 회문재(回文齋)로 명명된 서 너 칸의 깔끔한 한옥이었습니다. 이 한옥은 어깨 높이의 돌담에 둘러싸여 있지만 드나드는 곳에 아예 대문을 해달지 않아 누구라도 자유롭게 집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중원교를 건너 왼쪽으로 이어지는 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며 만난 자색의 화사한 꽃들이 갈퀴나물이라고 알려준 친구가 부러웠던 것은 길가의 저 꽃들이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를 저보다 더 반길 것 같아서였습니다.
섬진강 강변 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며 다닥다닥 열린 초록색의 매실을 보고 열음의 계절 여름이 바짝 다가와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강 건너 굽이진 고갯길이 보이자 그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동한 것은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지팡이를 짚고 넘었을 꼬부랑 고갯길이 저 길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강변사리캠핑장, 천담교와 천담마을을 차례로 지나 길 가에 세워진 ‘구담마을 닥나무 삶던 솥’에 관한 안내문을 읽었습니다. 옛날부터 임실군덕치면은 질 좋은 한지를 생산하는 가내수공업이 발전한 곳이라 합니다. 여기 안담울 앞강의 너벙바위에 삶은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 걸쳐놓고 이물질이 빠져나갈 때까지 방망이로 두들기고 물에 헹구어 원색의 종이 원료를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닥나무를 삶는데 쓰인 120년 된 가마솥이 강가에 아직도 남아 있다는 글을 읽고 조선 후기 인근 전주에서 출간된 방각본을 특별히 완판본(完板本)이라 하여 서울에서 출판된 경판본(京板本)과 구별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15시48분 구담마을에 다다랐습니다. 진뫼 출발 두 시간이 다 되어 도착한 구담마을은 강가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조망이 빼어났습니다. 이 구간은 몇 년 전 진뫼마을에서 구담마을까지 왕복한 이교수가 길을 안내했습니다. 1998년에 상영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촬영지로도 널리 알려진 구담마을의 옛이름은 안담울입니다. 뿌리 채 드러난 거목의 당산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언덕 위의 정자이름을 구담정과 안담울정으로 병기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당산나무 언덕에 올라 조망한 풍광이 가히 일품인 것은 강 건너 화룡마을을 시계반대방향으로 크게 반원을 그리며 에돌아 천천히 흐르는 섬진강의 자태가 고즈넉하면서도 여유롭다 싶어서였습니다. 폐가와 양옥이 자리를 같이한 구담마을에서 아래로 내려가 시멘트 다리를 건넜습니다. 강 건너 화룡마을을 빙 돌아 강가 정자에서 빵으로 요기를 한 후 부지런히 걸어 장군목의 요강바위에 도착한 시각은 16시53분이었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물이 불어 요강바위에 접근하지 못해 사진만 찍어 왔습니다. 2007년 겨울 회사 동료와 같이 왔을 때는 물이 말라 요강바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움푹 파진 바위 안쪽이 제법 넓어 장정 네 명이 들어가 서있을 만한 요강바위가 도굴범들에 의해 서울로 몰래 옮겨진 것은 일본으로 밀반출하기 위해서였다는데, 다행히도 김포공향 근처에 숨겨둔 것을 찾아내어 1년6개월 만에 제 자리에 앉혀놓았다는 이야기는 그때 들었습니다.
18시4분 순창 땅 구미교에서 섬진강따라걷기 9구간 종주를 마무리했습니다. 2010년에 완성된 요강바위 위 현수교를 건너 장군목을 출발했습니다. 꽤 오래 걸었는데도 왼쪽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한갓진 자전거 전용 길을 따라 걸어 오가는 차량에 신경을 쓰지 않은데다, 이교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걸어서였을 것입니다. 징검다리가 아름다운 섬진강마실휴양숙박단지를 지나 나지막한 휴드림 고개를 넘었습니다. 구미교에 도착해 걷기를 마치고 택시를 불러 동계로 이동했습니다. 10분 남짓 기다렸다가 올라 탄 버스로 40분 가까이 달려 임실군의 오수터미널에 도착해 동계행 버스시간표를 확인한 후 의로운 오수의 견공을 기리는 오수의견 공원을 둘러보았습니다. 시내에서 8백m가량 떨어져 있는 오수역으로 이동해 19시52분에 수원행 열차에 오르는 것으로 하루 여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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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부러진 길은 강 건너 보이는 고갯길만이 아니었습니다. 굽이져 흐르는 강물을 따라 낸 강 길도 구부러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 걸은 강진교-김용택시인생가-구미교 구간에도 월파정 앞 합수점 등 여섯 곳에서 강물이 굽도리를 만들며 에돌아 흘러내려갔습니다. 이런 구부러진 길을 보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바로 이어령교수가 그의 최근작 『너 어디에서 왔니 (한국인 이야기-탄생)』을 통해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준관 시인의 창작시 「구부러진 길」입니다.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시인과 중학교동창인 이교수의 전언에 따르면 그의 동시 몇 편이 교과서에 실렸다 하니, 역량 있는 작가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분이 친구의 친구인 만큼 구부러진 길을 돌아 섬진강을 따라 걷는 일이 힘들게 느껴질 때면,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 /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위 시를 읊으며 기운을 차릴 뜻입니다.
<걷기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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