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섬진강 따라걷기

섬진강 따라걷기7(운암삼거리-가는정이-예덕삼거리)

시인마뇽 2020. 5. 3. 09:10

                                                       섬진강 따라걷기7

 

 

                                   *종주구간:운암삼거리-가는정이-예덕삼거리

                                   *종주일자:2020. 4. 25()

                                   *따라걷기:운암삼거리-가는정이-에코브리지-두월삼거리

                                                      -자연마을-원덕리-예덕삼거리

                                   *종주시간:1215-1722(5시간7)

                                   *동행     :나홀로

 

 

 

 

  활짝 핀 봄꽃과 연초록 나뭇잎들이 봄을 불러들인 4월 한낮에 옥정호의 호반 길을 걷던 중 새삼 제게 직립보행(直立步行)을 가능하게 해주신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두 발을 움직여 직립보행을 하는 것은 우리 인류만이 누려온 특혜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대개의 건강한 사람들은 직립보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저 또한 그리했습니다

 

 

   제가 직립보행을 진심으로 간구한 것은 허리를 다쳐 자유롭게 걷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나서였습니다. 1972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경기도의 한 시골 중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허리를 다쳐 디스크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술을 전후해 반년 가까이 등을 눕히고 베드레스팅bed resting)을 하면서 절감한 것은 일어서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자유롭게 걷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마운 일인 가였습니다. 직립보행이 불가능해지자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었고, 그래서 학교를 휴직해야 했습니다. 그 좋아하던 산을 오르지 못하고,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는 것도 참아내기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저를 힘들게 한 것은 제 몸 하나 간수를 못해 불효를 저지른 아들을 극진하게 돌봐주시는 어머니를 뵙는 일이었습니다. 농토라고는 열 마지기 남짓한 논과 몇 백 평의 밭이 전부인 빈한한 살림에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저를 대학에 보내 시골에서는 내로라할 만한 중학교선생을 만들어주신 분이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들이 고향의 군 소재지 중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웠던지 남보라는 듯이 어깨를 펴고 다니셨는데 일 년도 채 안 지나 덜렁 휴직을 하고 집으로 들어와 누워 있으니 엄청 낙담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색하나 안 하시고 돌봐주신 어머니 덕분에 수술한지 네다섯 달이 지나 직립보행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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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5분 운암삼거리에서 7구간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출발이 1시간가량 늦어진 것은 전주역에서 한옥마을로 가는 버스를 잘 못 타 20분 이상 늦어진데다, 평일에는 20분 간격으로 배차되는 하운암행 버스가 토요일이어서인지 1시간이 지나 한옥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였습니다. 한옥마을에서 40분 넘게 달려 완주군의 초당골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옆 운암삼거리로 옮겨 옥정호 서쪽의 강변도로인 749번 도로를 따라 남진했습니다. 잠시 뒤돌아서 운암대교와 그 뒤 세모꼴의 나래산을 사진 찍었습니다. 호수변에 자리한 앨드호수 아파트 끝자락의 붕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주인분에 물어 가는정이에서 남쪽으로 강변을 따라 낸 길이 따로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왼쪽으로 운암교를 건너 강진으로 이어지는 27번도로가 갈리는 운암교앞 삼거리에서 그대로 직진했습니다. 남진을 계속하다 잠시 멈춰 뒤돌아보자 옥정호를 가로지르는 운암교와 운암대교, 그리고 지난번에 올랐던 북쪽 먼발치의 오봉산과 국사봉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운암교삼거리에서 강변을 따라 남진하는 길을 따라 걷는 동안은 완연해진 봄을 카메라에 옮겨 담느라 바빴습니다. 미암초등학교에서 바람과 안개가 머물다 가는 곳이자 물안개가 피어나는카페 미스티(Cafe Misty)에 이르는 호반 길은 벚꽃들이 다져 화사하지는 않았지만, 왼쪽 아래로 조망되는 옥정호와 이 호수를 둘러싼 산들이 함께 빚어낸 호반의 풍광이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언제고 한 번 화이트 하우스의 카페 미스티(Cafe Misty)에 들러 아침 일찍 커피 한잔을 들면서 저 넓은 옥정호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완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1344분 가는정이삼거리에서 왼쪽 범어리 길로 들어섰습니다. 카페미스티에서 7분을 걸어 다다른 가는정이삼거리는 임실군과와 정읍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입니다. 이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749번 도로는 정읍시의 산외로 이어지고, 왼쪽으로 남진하는 호반도로는 임실군의 범어리로 가는 길입니다. 원래는 오른쪽 749번도로를 따라가다가 종산삼거리에서 왼쪽 715번도로를 따라 두월삼거리로 갈 계획이었는데, 식당주인분의 도움으로 옥정호를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범어리길을 택했습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서 조망한 호수는 이제껏 보아온 옥정호 중 가장 넓어 호수 동쪽 끝 모시울교가 꽤 멀리 보였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 자리한 섬은 점등섬으로 북쪽의 붕어섬보다 크기도 작고 형세도 밋밋했습니다. 산허리에 낸 차도를 따라 걸어 다다른 산내/범어리삼거리에서 산내로 이어지는 오른 쪽 위의 굽이진 산길로 올라가 고갯마루의 에코브리지에 이른 시각은 15시정각이었습니다. 해발고도가 240m가량 되는 고갯마루를 에코브리지 아래 터널로 통과해 내려선 윗마룰 앞까지 물이 찬 것은 저 아래에 높이64m, 길이 244m의 섬진강댐이 강물을 가득 담아 둔 덕분입니다. 윗마룰을 지나 715번 도로와 만나는 상두삼거리에 이르자, 2008년 여름 호남정맥을 종주하는 길에 오른쪽으로 20-30m 떨어진 나지막한 고개를 지난 일이 생각나 다가가 사진을 찍었습니다.

 

 

   1548분 두월삼거리에서 왼쪽 두월리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상두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715번 도로를 따라 걸어 방성동 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버스시간표를 확인했습니다. 두월삼거리에서 715번 도로를 따라 바로 가면 산내에서 1740분 쯤 정읍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 수 있겠다 싶은 데도 그 길을 버리고 남쪽으로 빙 돌아가는 길을 택한 것은 이 길이 강변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두월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진행해 사교마을관광체험센터와 정자를 차례로 지나 고개를 오르면서 옥정호를 내려다보자 왼쪽 멀리로 한 시간 전에 지난 에코브리지가 보여 반가웠습니다. 자연동노휴재를 지나 고개를 넘어서자 왼쪽 아래 옥정호에 반듯한 모양의 바위가 보였는데, 이 바위가 공바위라는 것은 한 노인분이 일러줘 알았습니다. 마을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초록의 대나무와 파란 물결의 옥정호와 어울려 빚어내는 저녁나절의 강변 풍경은 한가로움을 뛰어넘어 참으로 고즈넉했습니다. 산내교회를 지나 원덕리로 이어지는 호반도로는 지나가는 차들이 거의 없어 적막한 느낌이 들어서인지 어둠이 더 빨리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177분 예덕삼리 정류장에서 7구간 따라걷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예정했던 산내까지 가지 못한 것은 그리하다가는 1921분에 정읍을 출발하는 수원행 열차를 탈 수 없어서였습니다. 이번에 못한 예덕삼리-산내 구간은 그 거리가 3Km정도여서 다음번에 목표한 구간의 15Km를 더 한다 해도 20Km가 채 안되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전주의 한옥마을 정류장에서 늦어지는 바람에 목표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런 예기치 못한 일로 진행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호남정맥을 종주할 때도 몇 번 있었던 일로 괘념할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사전에 정확하고도 충분한 정보를 확보해야 나이가 더해지면서 같이 늘어나는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기에 좀 더 신경을 쓰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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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립보행((直立步行)이 우리 고유의 말로 다름 아닌 나들이가 아닌가 하는 것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이어령선생의 최신작 너 어디서 왔니-한국인 이야기 탄생을 읽다가 무릎을 친 일이 있습니다. ‘일어나다가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아니고 일어서서 나가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간다는 것입니다. 드러눕다들어와 눕다를 줄인 말로 여기서 주목해야하는 행위는 집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일어나다드러눕다를 합하면 나가고 들어오는 나들이이라는 기막힌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직립보행을 한다고 해서 쉼 없이 줄곧 걸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드러눕는 것이 아니고 아예 몸져눕게 될 수밖에 없어 수시로 잠을 자고 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일어나기와 집으로 돌아와 쉬는 드러눕기는 직립보행의 필수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김매기를 마칠 즈음인 음력 칠월 한 달은 조금은 일손이 남아도는 농한기였습니다. 새하얀 옷으로 곱게 치장하고 삼사십리 떨어진 친정으로 나들이를 가셨던 어머니께서 돌아오실 때는 이것저것 싸가지고 오셔서 풀어놓곤 하셨습니다. 자식사랑과 일밖에 모르셨던 어머니께서도 저처럼 직립보행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친정나들이와 자식의 대학교졸업식장에 참석하러 나서는 서울나들이가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열일곱 집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고향마을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낸 최초의 어머니가 바로 제 어머니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의 대학졸업식장에 참석해 대통령의 축사를 직접 듣는다는 것은 동네의 다른 어머니들은 어느 누구도 꿈꿀 수 없는 나들이였을 것입니다. 그 때도 어머니는 하얀 치마저고리에다 코트를 거치셨습니다. 이번에는 섬진강 옥정호의 고즈넉한 호반 길을 저 혼자 걸은 것이 아닙니다. 벚꽃 보다 더 화사한 새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저 먼 곳에서 나들이를 오신 어머니와 함께 걸으면서 1989년 이 세상을 떠나신 후 31년간 밀린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이 모두가 강인한 유전인자를 전해주시고 직립보행이 가능하도록 애써 보살펴주셨던 어머니 덕분인 것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종주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