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강줄기 따라걷기/섬진강 따라걷기

섬진강 따라걷기11(가덕입구-신기철교-고달교)

시인마뇽 2020. 6. 4. 11:30

섬진강 따라걷기11

 

*종주구간:가덕입구-신기철교-고달교

*종주일자:2020. 5. 21()

*따라걷기:가덕입구-청계교-신기철교-요천대교-고달교

*종주시간:1157-173(5시간6)

*동행 :나 홀로

 

 

  11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에 나선 저는 남원역에서 하차해 대강면의 방동리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버스 안에는 바리바리 꾸린 짐을 가지고 올라 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로 자리가 나지 않아 30분여 서서 갔습니다. 앞자리 위 전광판에는 이 버스는 GPS의 도움으로 정해진 시각에서 전후 3분 이내에 정류장에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계속 흘렀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진 데다 기력이 쇠잔해 짐을 올리고 내리기가 쉽지 않아 자연 노인 분들이 차를 타고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찮을 것입니다. 정해진 운행시간의 준수가 노인 분들의 안전보다 중요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정해진 3분보다 더 늦게 버스가 도착한다 해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버스마다 튼튼한 안내원을 두어 할머니들의 짐을 들어주고 내려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자체에서 버스회사에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가능한 일이라서 쉽게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버스 안에서 할머니들을 뵙고 놀란 것은 어렸을 때 시골에서 자주 보아온 할머니들을 다시 뵙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허리가 굽은 것도 그렇고 살갗이 새까맣게 탄 것과 얼굴이 쪼글쪼글한 것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보다 소득은 몇 십 배 늘었는데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은 왜일까 궁금했습니다. 제가 찾아낸 답은 이분들의 연세였습니다. 요즈음은 80세를 한참 넘겨도 건강하시지만, 제가 어렸을 때는 환갑만 지나도 몸과 마음이 잘 듣지 않아 요즘의 80세 노인들보다 더 늙어 보인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73세의 제 얼굴은 30년 전 72세로 타계하신 어머니보다 훨씬 젊어 보이고 실제로 몇 배 더 건강합니다. 이는 어머니보다 제가 더 잘 먹고 잘 살아온 때문입니다. 이런 제가 90세에 이를 즈음이면 허리가 휘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져 돌아가실 때의 어머니 얼굴과 비슷해질 것입니다. 요약한다면 부모님 세대들이 열심히 일하신 덕분에 늘어난 소득으로 잘 먹고 몸을 잘 보살펴온 저희 세대가  적어도 20년은 더 젊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20년 후 자식들이 저희를 보았을 때 느낌이 오늘의 저와 다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저희 세대 또한 열심히 일 한 덕에 자식들이 보다 잘 먹고 잘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 가 싶어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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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7분 가덕입구 버스정류장을 출발했습니다. 대강면소재지인 사석에서 후딱 점심을 사든 후 몇 분가 기다렸다가 방산리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방동리를 지나 가덕입구에서 하차해 자전거길로 들어서는 것으로써 11번째 섬진강 따라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오른 쪽 아래 섬진강에 꽤 넓게 제월습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움푹 들어간 구배진 곳에서 물 흐름이 급격히 둔해진데다 유속이 줄어든 섬진강이 송대천에 쓸려 유입된 토사를 제 때 바다 쪽으로 내려 보내지 못해 사구가 만들어졌는데, 그 후 강물이 범람했다가 빠지기를 반복하면서 습지로 바뀐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과연 그러한지 참고문헌을 찾아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제가 걸은 길이 섬진강 북쪽의 제방 길이어서 강 건너 곡성의 함허정(涵虛亭)과 이곳에서 들어가는 제월섬을 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함허정은 조선시대 중종38년인 1543년에 문신 심광형이 곡성의 섬진강가에 지은 누정으로 현존하는 건물도 1800년대에 지어졌다하니 고옥임에 틀림없습니다. 제월섬은 섬진강의 하중도 중 가장 큰 섬으로 메타세콰이가 빡빡하게 들어선 녹지의 섬입니다. 둑 너머 논밭에 물을 대려고 강물을 길어 올리는 것은 전전후양수장를 지나며 처음 목도해, 그 현장을 사진 찍어왔습니다. 데크 다리로 송대천을 건너 730번 도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나 있는 자전거길을 따라 남진했습니다.

 

  135분 청계동교를 지났습니다. 제월습지를 지나 강폭이 좁아진 섬진강은 전북 남원의 고리봉과 전남 곡성의 동악산 사이로 흐르면서 중간에 동악산 청계계곡의 물을 받아 수량을 늘려갔습니다. 전북과 전남을 경계 짓는 섬진강은 남동쪽으로 일직선을 그리면서 흘러 꽤 큰 다리인 청계동교를 지났습니다. 석촌2교에 이르러 정동방향으로 물 흐름이 바뀐 섬진강은 청계계곡물을 받아들여 세를 불려서인지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고 전날 내린 비로 탁류로 변한 강물의 흐름도 훨씬 빨라보였습니다. 남중한 태양이 제 머리를 거침없이 내려쬐어 올 들어 처음으로 더위가 느껴졌지만, 아직은 지열이 나지 않아 걸을 만 했습니다. 상귀쉼터를 지나 청계동교와 금곡교 중간쯤에 자리한 신기철교를 다리 밑으로 지난 시각은 1430분이었습니다. 덜컹대며 신기철교를 건너는 기차를 사진을 찍다가 50여년 서울 소재 대학교를 다니려고 경의선을 타고 통학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차비를 아끼려 서울역에서 중간의 일산역까지만 표를 끊고 들키지 않고 금촌역까지 가서 캄캄한 밤에 몰래 개찰구 반대방향으로 역을 빠져나간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쩌다 들켜도 사정을 하면 그 때는 흔치 않은 대학생이어서인지 역무원이 눈감아주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연한 범죄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

 

 

  1454분 금곡교에 다다랐습니다. 신기철교를 지나 길가에 활짝 핀 진적색의 꽃양귀비의 요염한 자태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카메라에 옮겨 담았습니다. 상귀리 마을에 세운 정자 원진정에서 쵸코렛을 꺼내들며 십 수분을 쉬고 나자 다시 생기가 돌아 금곡교로 향했습니다. 시멘트로 포장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그늘도 없고 직선 길이어서 지겨우리만치 단조로웠습니다. 금곡교에 이르자 강 건너로 야구장과 그 너머 곡성시내가 보였습니다. 이번 따라 걷기의 끝점인 고달교도 얼마 안 남았다 싶어지자 왼쪽 어깨에 살짝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남원시의 금지면과 곡성군의 곡성읍을 이어주는 금곡교는 신/구 양 다리가 나란히 나 있고 이 둘보다 작은 다리도 놓여 있어 3개의 다리가 모여 있었습니다. 강둑 길을 걸으면서 젊어서 18년간 몸담았던 굴지의 그룹을 끌어간 모 시멘트회사의 하청을 받아 운영되었을 레미콘 공장의 대용량 사이로 벽면에 그려진 모 그룹의 CI(Corporation Identification)를 보았습니다. 형상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퇴색된 것을 보고 잘 나갈 때 그룹이지 망해서 해체되면 길거리의 상점만도 못 하구나 싶어, 기업이 이익을 창출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금곡교를 지나 섬진강이 제1지류인 요천의 물을 받아들이는 합수점에 만들어 놓은 습지가 장선습지입니다. 이 습지를 건너는 다리가 나 있지 않았고, 자전거길은 왼쪽으로 꺾이어 북쪽으로 엄청 길게 이어졌습니다. 요천대교를 건너 다시 습지로 돌아가 자그마한 데크 다리를 건넜는데 그 옆 정자에서 만난 노인 분이 그 다리부터 강북 쪽도 곡성 땅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173분 고달교 앞에서 11구간 따라 걷기를 마무리했습니다. 강선습지와 가까운 새전배수장을 지나 데크 다리를 건넜습니다. 곡성 땅에 발을 들여 첫 번째 정자에서 쉬어간 것은 대사리 할아버지 두 분이 반겨 맞아서였습니다. 이 정자에서 시원스레 불어오는 섬진강 강바람을 맞고 나자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습니다. 1지류 요천의 물을 더한 섬진강은 합수점에서 오른 쪽으로 확 꺾이어 정남쪽으로 흘러내려갔습니다. 제월습지를 지나면서 강남의 함허정을 들르지 못한 아쉬움은 강선습지에서 얼마 멀지 않은 횡탄정(橫灘亭)에서 쉬어가는 것으로 풀었습니다. 고달면 뇌달리 섬진강변에 세워진 횡탄정은 1606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권력을 차지한 대북파의 전단으로 국정이 혼란스러워지자, 김선, 이이순, 김집, 방원진 등 남원사대부가의 현사 14명이 과거를 포기하고 횡탄문회계를 결성, 향약을 만들어 마을을 꾸려가는데 힘썼다고 합니다. 4백여 년 전 14명의 현사(賢士)들이 힘을 합해 여기에 누정 횡탄정을 세우고 시문학을 즐긴 흔적은 이 정자에 걸린 편액을 자세히 읽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없어 그리하지 못하고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 횡탄정을 지나자 강둑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진황색의 금계국이 반갑게 저를 맞아 힘든 줄 모르고 걸었습니다. 고달교에 이르러 사진을 찍은 후 바로 옆 뇌연버스정류장으로 옮겨 택시를 불렀습니다. 고달교에서 곡성역으로 이동해 1923분에 수원행 열차에 오르는 것으로써 하루 여정을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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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잊고 지낸 어머니의 얼굴이 떠 오른 것은 버스 안에서 시골 할머니들을 뵙고 나서입니다. 1989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태어난 해는 독립운동이 일어난 기미년의 1919년입니다.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102세가 되시는데, 이 연세에 아직도 살아계시는 친구들의 부모님도 더러 계십니다. 어머니가 이제껏 살아계셨다면 제가 요즘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고소설을 같이 읽으셨을 것입니다.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께서 혼자서 한글을 깨치셨고, 딱지소설을 엄청 많이 읽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면소재지에 서는 장터로 매번 다녀오시는 것은 딱지소설을 빌려오기 위해서였습니다. 머릿짐을 이고 가서 판 돈 일부를 떼 내어 이야기책을 빌려 읽는 어머니의 엄청난 향학열은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저를 서울의 대학교로 유학을 보내는 데 긴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일요일 아침에 가끔씩 내다 팔 물건을 지게에 얹어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간 것도 어머니의 교육열에 감탄하고 감사해서였습니다. 그 때는 시골에 버스가 다니지 않아 십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암에 걸려 앙상해진 몸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께 기꺼운 마음으로 말씀 올리고자 하는 것은 이 아들이 어머니를 빼어 닮아 공부와 걷기를 계속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섬진강을 따라 걷느라 만난 뵌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내내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습니다.

 

 

 

<종주사진>